바울곁에 있었던 사람들은 대단히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가장 인상깊은 사람이 있습니다. 오네시모입니다. 오네시모는 노예요 절도범이었습니다. 빌레몬의 종이었습니다. 빌레몬은 소아시아 골로새에 살고 있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오네시모라는 노예가 있었습니다. 당시 그 주변에는 6천만명 가량의 노예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재산을 훔쳐 가지고 로마로 달아나 버렸습니다. 오네시모는 다시 체포되어 감옥에 갔습니다. 마침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가 붙잡혀 갇힌 감옥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를 복음의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찾아 다니며 전도하는 바울에게 집어 넣어준 오네시모는 전도의 특별한 대상이었습니다. 바울은 나이가 많이 들었어도 늘 전도가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사랑을 위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몬 9)
바울은 감옥이라는 악조건의 자리에서도 언제나 전도였습니다.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몬 10)
감옥에서 오네시모는 전적으로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넓고도 좁았습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이 잘 알고 있는 동역자 빌레몬(몬1)의 노예였습니다. 그래서 빌레몬에게 편지를 쓴 것이 바로 빌레몬서입니다. 바울은 너무 좋아서 친필로 썼습니다(몬19)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가 복음으로 전혀 딴 사람이 되었음을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1.무익하던 사람이 유익한 사람으로 바울은 이렇게 오네시모를 평하고 있습니다.
<나와 네게 유익하니라>(11)
오네시모는 복음적인 사람이 되고 나서는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네시모라는 뜻은 <유익한 사람><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름 그대로 오네시모는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아니지만 외경중에 도마복음이 있습니다. 도마복음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회개란 무엇이냐? 그것은 동쪽이 서쪽이 되고, 동쪽이 서쪽이 되는 것이며, 남쪽이 북쪽이 되고 북쪽이 남쪽이 되는 것이다> 이미 언급한대로 오네시모라는 뜻은 <유익한 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의 부모가 오네시모에게 기대감을 가지고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서 이름을 지어 주었겠습니까? 나도 두 자녀의 이름을 지을 때 라미라는 이름을 찾기 위하여 성경을 한번 다 읽었습니다. 그리고 라오미와 같은 여인이 되라고 라미라고 붙였습니다. 희일이는 언제나 하나의 기쁨이 되라고 그렇게 붙였습니다. 언제나 자녀의 이름에는 부모의 기대가 들어 있습니다. 오네시모를 낳고 부모는 남에게 유익되게 살라고 그렇게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남에게 무익되게 살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드디어 부모의 기대대로 유익한 사람이 되었다고 남이 그렇게 인정하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들을 향한 기대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부모는 여러분에게 어떤 기대를 가지고 여러분의 이름을 지어 주었을 가요?
2. 도망자가 귀가자로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이었습니다. 종노릇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어서 피해를 주고 도망간 오네시모를 회개시켜서 다시 빌레몬에게 돌려 보내게 되었습니다.
<네게 저를 돌려 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12)
오네시모가 가겠다고 하니까 돌려 보낸다고 한 것입니다. 당시 기록을 보니까 그 때에는 그 지역에 6천만명의 노예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예에 대한 법이 엄격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노예를 부리기 좋게 하기 위하여 영혼이 없는 동물이라고 불렀습니다. 살아있는 도구라고 말했습니다. 두 발 가진 편리한 동물이라고 여겼습니다. 노예는 주인의 사유재산이기에 마음대로 죽일 수가 있었습니다. 도망간 노예가 잡히면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사지를 짤라서 죽이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운이 좋은 노예는 라틴어 Fugitivus 즉 도망자라는 머릿글자인 F 자를 이마에 찍어 일생 핍박당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오네시모는 그래도 회개하고 자기 주인에게로 돌아가 다시 섬기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보통 결심이 아니라 생명을 건 결단이었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아니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아니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결단이었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돌아가야 원칙이고,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용서하여야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반대였습니다. 빌레몬은 오네시모에게 분을 품고 있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응어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용서하라고 강요할 수 없고, 오네시모에게 돌아가라고 강요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중간에 바울이 역할을 지혜롭게 하였습니다. 바울의 간절한 호소를 들을 수 있습니다.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이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너는 이 외에 네 자신으로 내게 빚진 것을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14-21)
이 본문에서 바울의 가슴 울리는 말을 들어 볼 수 있습니다.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오 형제여!..>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모두가 가슴을 울리는 언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같은 심정을 가지고 이 일을 잘 처리하였습니다. 오네시모를 멋진 사람으로 개조시켰습니다.
3. 배반자가 심복으로 복음으로 변화된 오네시모는 바울의 심복이 되었습니다. 동역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심부름꾼이 된 것도 아닙니다. 심복이 되었습니다. 심복은 원어로 스플랑크나라고 되어 있는 데 이는 내장이나 간장을 의미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만일 내장이 없다면 살 수가 없습니다. 간장이 없다면 당장 죽을 것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없이는 살 수 없을 정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적어도 당시 바울은 최고의 동역자를 오네시모로 여기고 있음이 틀림이 없습니다. 주의 종이 <난 그 사람없이는 일을 할 수가 없다>라고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이 얼마나 오네시모를 사랑하고 있는 지 눈물이 날 정도입니다.
11절 저는 내게 유익하다. 12절 저는 내 심복이라. 13절 저를 내게 머믈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7절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 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8절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오네시모는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가장 큰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바울의 편지로 인하여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받아 드렸을 것입니다. 빌레몬의 뜻은 <사랑을 간직한 자>라는 의미입니다.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이였기에 어쩌면 바울의 편지를 받고 오네시모를 노예에서 해방시켰을 지도 모릅니다. 오네시모는 잡혀 죽을가 두려워하던 암흑의 생활에서 깨어나 이제는 떳떳하게 광명속에서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사랑과 빌레몬의 용서는 오네시모를 전적으로 다른 사람이 되게 하였을 것입니다.
전설 후에 오메시모는 에베소의 감독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가장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안디옥의 감독 이그나티우스가 시리아로 호송되고 있었습니다. 순교의 길을 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 때 에베소의 감독 오메시모에게 감사하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성경이 아니기에 믿을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참고할 수 있습니다. 동일 인물일지 아니면 동명이인일지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오메시모는 바울의 인간성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오메시모 때문에 바울의 인간성이 잘 들어났습니다. 만일 오메시모가 없었으면 이런 중간 역할을 잘 하는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