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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이사야(16)/징조
제목 : ‘마헬살랄하스바스’에서 ‘임마누엘’로
성경 : 사 8:1-8
찬송 : 390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20406 낙양교회 수요예배
사 8: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큰 서판을 가지고 그 위에 통용 문자로 마헬살랄하스바스라 쓰라
사 8:2 내가 진실한 증인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를 불러 증언하게 하리라 하시더니
사 8:3 내가 내 아내를 가까이 하매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하라
사 8:4 이는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부를 줄 알기 전에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 왕 앞에 옮겨질 것임이라 하시니라
사 8:5 여호와께서 다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사 8:6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느니라
사 8:7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을 뒤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골짜기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사 8:8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가득하여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가 펴는 날개가 네 땅에 가득하리라 하셨느니라
7장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하스에게 전하는 역할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8장에서 이사야는 그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아하스는 아람과 이스라엘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을 때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며 징조를 구하라는 메시지를 받았지만 믿음이 좋은 것처럼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심판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선지자 이사야와 신실한 남은 자들에게 다가올 위험을 알리시면서 믿음의 권면과 함께 구원의 약속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다가올 위협 곧 앗수르의 침공을 예고하십니다(1~8절). 앗수르의 침략은 아하스의 바람과 달리 두 원수의 나라 아람과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더 야욕을 부려 남 유다까지 쳐들어올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아하스가 돈을 보내 도움을 요청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앗수르의 세력이 ‘유다의 목까지 찬다.’는 것은 남 유다가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지만 절박한 상황에 이르기까지 위협을 당하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이 예언이 언제 성취되었을까요? 아하스의 아들인 히스기야야 왕 때 앗수르 왕 산헤립이 18만 5천 명의 군대를 동원해서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위협하는 상황에서 성취되었습니다(36~37장). 결국 아하스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위기를 벗어나려고 한 것이 오히려 나라를 위태롭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천히 흐르는 물같이 고요하게 역사하시지만, 크고 무서운 하수와 같은 앗수르의 세력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현실에 급급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굳게 신뢰해야 합니다.
서판에 쓴 마헬살랄하스바스
사 8: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큰 서판을 가지고 그 위에 통용 문자로 마헬살랄하스바스라 쓰라
여호와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큰 서판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적으라.’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요즘 도시에 가보면 대형 전광판에 뉴스 속보가 나오는 것처럼 큰 서판에 누구나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메시지를 알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투명해야 하며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쉬운 언어로 전해야 합니다. ‘통용문자’는 문자적으로는 ‘사람의 철필’이라는 뜻으로, 사람들이 보통 사용하는 필기구를 말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라는 것이고, 큰 서판에 쓰게 하신 것은 많은 사람이 분명히 읽을 수 있게 하시려는 뜻입니다.
합 2: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선지자가 큰 서판에 새길 단어는 네 개입니다. “마헬-살랄-하스-바스” 여기에서 “마헬”은 “빠르다”, “살랄”은 “약탈물/전리품”, “하스”는 “신속함”, “바스”는 “노획물”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네 단어는 같은 아이디어를 두 차례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임박한 전쟁 혹은 재빠른 침략군이 쳐들어올 것을 암시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앞으로 하실 일을 미리 나타내시려고 이사야에게 이것을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전 섹션에서 약속하신 것처럼 이번에 유다를 침략해 온 아람과 이스라엘을 벌하기 위해 앗수르를 동원하실 텐데, 그들을 정복하기 위해서 오는 앗수르 군대는 이 두 나라의 군대와 싸우는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노획물 확보에만 집중할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만큼 침략군은 무시무시한 실력을 소유하였으며, 이스라엘과 아람은 절대 그들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또 이사야가 이것을 기록했음을 공증하는 두 증인을 세우십니다.
사 8:2 내가 진실한 증인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를 불러 증언하게 하리라 하시더니
제사장 우리야와 스가랴입니다. 우리야는 아하스 왕 때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를 진실한 증인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는 사실 신앙적으로는 진실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아하스가 다메섹에 앗수르 왕을 만나러 가서 앗수르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제단의 모습을 보고 그림을 그려 대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냈는데, 우리야가 그 설계대로 제단을 만들고 오래전부터 있던 놋 제단을 치워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진실하다는 것은 그의 신앙이 진실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직책상 공증의 효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하스가 “임마누엘 징표”에 억지로 증인 역을 맡은 것같이 이 우리야 제사장 역시 지금 억지로 증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등을 돌렸던 여호와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는 수치를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증인으로 세워지는 것은 그들에게 이 일이 언제 일어날 것인지를 계시해 주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일이 진행되어 가는 것을 보며 처음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셨던 대로 이루어짐을 확인만 하면 됩니다.
또 한 사람의 증인이 나오는데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입니다. 스가랴는 히스기야의 외조부 곧 아하스의 장인으로 추정됩니다.
왕하 18:2 그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구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비요 스가리야의 딸이더라
두 명의 증인은 합법적인 증언을 위해 필요한 최소의 인원입니다. 하나님은 유력한 두 증인을 통해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계시한 것을 증언하게 하심으로써, 계시하신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과 행사에 의한 것임을 알도록 하셨습니다.
이사야의 아들 마헬살랄하스바스
이사야가 큰 서판에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쓰고 두 사람의 공증까지 받았지만 유다 왕이나 백성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유다 왕과 백성이 가졌던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이론에 불과하고, 실제로 이 세상에서 필요하고 유용한 것은 인간의 힘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기보다는 자신의 힘으로 원수를 이기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사야에게 새로 태어난 아기 이름을 통해서였습니다.
사 8:3 내가 내 아내를 가까이 하매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하라
사 8:3 그런 다음에 나는 예언자인 나의 아내를 가까이하였다. 그러자 그 예언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때에 주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하여라.(표준새번역)
이사야가 예언자였던 아내와 동침을 하여 임신하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지었습니다. 이사야의 아이들의 이름은 죄다 이상합니다. 형의 이름은 ‘스알야숩’(남은 자가 돌아온다)입니다. 이제 그 동생은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지었습니다. “노략은 빠르고 약탈은 급하다”라는 뜻입니다.
사 8:4 이는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부를 줄 알기 전에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 왕 앞에 옮겨질 것임이라 하시니라
사 8:4 이 아이가 '아빠, 엄마'라고 부를 줄 알기도 전에, 앗시리아 왕이 다마스쿠스에서 빼앗은 재물과 사마리아에서 빼앗은 전리품을 가져 갈 것이다."(표준 새번역)
이 아이를 통해서 볼 수 있는 미래의 사건은 무엇입니까?
이 아이가 ‘아빠, 엄마’라고 부르기 전에 다메섹과 사마리아에서 빼앗은 노략물을 가져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이가 돌이 되기 전 엄마 아빠라는 말을 배우기 전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다메섹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 왕 앞에 옮겨진다는 것은 아람과 이스라엘이 머지않아 앗수르에 멸망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헬살랄하스바스’라는 이름에 담겨진 의미입니다. 이제 막 태어난 아이가 자라서 아빠, 엄마라고 말하기 전에 앗수르는 아람을 정복하고 북 이스라엘을 무너뜨릴 것입니다. 이들의 침략은 계속되어 주전 734년에 디글랏이 이스라엘 해안 쪽을 강타하며 팔레스타인을 휩쓸고 이집트까지 진군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이스라엘이 그동안 이집트로부터 받아 왔던 동맹적 원조가 완전히 끊겼으며, 이스라엘은 갈릴리, 요단 강 저편, 므깃도와 다른 여러 도시들을 잃었습니다.
왕하 15:29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 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점령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
이스라엘 왕 호세아가 급히 앗수르 군대를 달램으로써 나라가 완전히 패망하는 위기는 모면했습니다. 그러나 아람의 수도 다메섹은 앗수르에 의하여 주전 732년에 멸망당하고, 북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멸망당합니다.
따라서 이 아들의 출생과 그 의미는 임마누엘 징조와 유사합니다. 그래서 마헬살랄하스바스를 임마누엘의 1차적인 성취로 보는 해석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습니다. 이 성취는 장차 메시아의 도래를 통해 온전하게 완성됩니다. 하나님은 앗수르가 아람과 북 이스라엘 연합군 뿐 아니라 유다까지 노략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반복해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같은 예언의 내용을 다양한 방법으로 거듭 전하셨습니다. 말씀이 성취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유다 백성이 깨닫고, 황폐한 땅에서도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간절히 사모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유다 백성이 버린 샘물
하나님께서는 지금 유다 백성이 선택하는 것에 따라서 그들의 미래는 엄청나게 달라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 8:5 여호와께서 다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사 8:6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유다 왕 아하스와 백성들이 지금 걸어가는 길이 어떤 길이며 그 결과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다가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렸다고 지적하십니다. 실로아 물은 고지대에 위치한 예루살렘의 식수원으로서 볼품은 없지만 백성에게는 생명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이 물은 하나님의 보호와 공급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는 왜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을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싫어했다.”라고 표현했을까요? 실로아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여러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 실로아는 다윗 왕조를 상징했습니다.
실로아의 근원인 기혼에서 다윗이 자신의 왕권을 아들에게 물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왕상 1:33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의 신하들을 데리고 내 아들 솔로몬을 내 노새에 태우고 기혼으로 인도하여 내려가고
왕상 1:34 거기서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은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고 너희는 뿔나팔을 불며 솔로몬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고
왕상 1:45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이 기혼에서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고 무리가 그 곳에서 올라오며 즐거워하므로 성읍이 진동하였나니 당신들에게 들린 소리가 이것이라
둘째, 실로아는 예루살렘이 믿음의 도시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지형을 고려할 때 예루살렘은 치명적인 약점을 지녔습니다. 성내에 마땅한 샘이 없어서 식수가 성 밖으로부터 공급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 7:3 그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실로아는 성 밖에 위치한 기혼 샘의 물을 터널을 통해 성안으로 끌어들여 주민들에게 식수를 공급했습니다(히스기야 때-히스기야 터널을 만듦). 이 위태로운 물 공급 수단을 감안할 때, 예루살렘 거주는 하나님이 이 도성을 꼭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전제 했습니다.
사 22:9 너희가 다윗 성의 무너진 곳이 많은 것도 보며 너희가 아랫못의 물도 모으며
사 22:10 또 예루살렘의 가옥을 계수하며 그 가옥을 헐어 성벽을 견고하게도 하며
사 22:11 너희가 또 옛 못의 물을 위하여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이를 행하신 이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이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의 물’은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실로아로부터 흘러 들어온 물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평온함과 생수를 주었지만 보기에는 매우 볼품없는 작은 개울물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앗수르의 세력을 나타내는 유프라테스의 강물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거대합니까?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세상의 힘과 권세가 하나님의 능력보다 훨씬 더 커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실로아의 물’이 세상을 흔드는 듯한 “유프라테스 강물”보다 더 능력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했습니다. 이들은 유다에 쳐들어온 아람과 북 이스라엘의 두 왕입니다. 유다 사회에는 앗수르와의 연합을 지지한 자들도 있었고, 연합군과 동맹하기를 바란 자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은 앞서 앗수르를 의지한 자들을 질책하시고, 여기서는 연합군을 의지한 자들을 책망하신 듯합니다.
사 8:7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을 뒤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골짜기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사 8:8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가득하여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가 펴는 날개가 네 땅에 가득하리라 하셨느니라
유다가 아람과 이스라엘 동맹에 가담한다 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앗수르를 불러서 두 나라를 멸망시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앗수르 왕과 그의 군대 세력을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에 빗댑니다. 이는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과 대조가 됩니다. 앗수르가 유프라테스 강을 끼고 있기 때문에 이 비유는 더욱 적절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세력일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움직이십니다. 하나님은 앗수르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아람과 북 이스라엘, 두 나라를 패망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이 강물이 ‘목에까지만’ 찰 것이라고 말합니다. 비록 심판의 심각성이 그대로 드러나지만 이 물이 ‘목에까지만’ 차고 완전히 머리를 잠기게 하지는 못합니다. 임마누엘의 땅이 위협을 받지만, 하나님이 보호하실 것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다를 보호하기 위하여 날개를 펴시는데, ‘날개’는 넘쳐흐르는 강물로도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앗수르가 온 땅을 덮치려고 자세를 취하고 있는 독수리나 매로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맹수가 공중을 날고 있지만 양은 물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임마누엘! 그러나 둠(Duhm)은 ‘보호하는 새의 날개’로 해석합니다. 임마누엘이 바로 이 새라는 것입니다. 암탉이 날개 아래 병아리들을 모아 보호하듯이 이 새의 날개가 임마누엘의 땅을 완전히 덮어 보호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새가 날아와서 유다 백성을 건지는데, 그 날개가 온 유다를 다 덮는 것입니다. 결국 앗수르의 물은 유다를 삼키지 못하고 물러가게 됩니다.
여기에서 유다 백성이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절대로 하나님의 샘물을 자신들의 뜻대로 좌지우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대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시시하다고 이것을 세상 것과 섞어 버리면 그때는 세상 물이 너무 많이 흘러 들어와 물에 빠져 죽고 맙니다. 또한 세상 물은 흙탕물이기 때문에 깨끗이 씻을 수도 없고 마실 수도 없어서 결국 목말라 죽게 됩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이 깨닫지 못한 것은 바로 임마누엘의 큰 날개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만 믿고 의지할 때 임마누엘의 날개는 모든 적으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실로아는 꾸준하고 변함이 없습니다. 잔잔히 부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거센 것보다 부드러운 것이 강합니다. 진리를 타협하지 않는 범위에서 부드럽고 유연한 사역을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거세고 억세면 부러지게 됩니다.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첫댓글 은혜로운 말씀에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이삼규 목사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