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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 교육판 스크랩 기타과목 소서노,비류,온조의 백제건국비사
two days 추천 0 조회 522 10.07.21 11:0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 백제의 건국시조

현재 우리의 역사교육에서는 온조가 백제의 건국시조라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다. 하지만 백제의 건국설화는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상당히 복잡하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건국설화를 두 가지로 기록하고 있다. 온조를 시조로 하는 온조백제와 온조의 형 비류를 시조로 하는 비류백제설화가 그것이다.

『삼국사기』「백제본기」본문에 실려 있는 백제 건국설화를 살펴보자.

백제의 시조를 온조왕인데, 그의 부친은 추모, 또는 주몽이라고 한다. 주몽이 북부여로부터 박해를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당시 졸본부여왕에게는 딸만 셋이 있을 뿐 아들이 없어 걱정스러워하던 차에 주몽의 인물됨이 비범함을 보고 둘째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했다.

그후 얼마 되지 않아 부여왕이 죽었고, 주몽이 그의 뒤를 이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였고 둘째아들은 온조였다<혹은 주몽이 졸본에 도착해 월군(越君)이란 마을의 여자에게 장가를가서 두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그런데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았던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었다. 그러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결국 오간(烏干), 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떠나니 많은 백성들이 그를 따랐다.

그들은 마침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기 좋은 터를 살폈다. 비류가 바닷가에 터를 잡자고 주장하자 열 명의 신하가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

"고려해보건대 이 하남(河南)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가 띠를 둘렀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악에 의거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판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습니다. 이러한 천연적인 지리의 이점을 가진 곳은 얻기 어려우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비류는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을 나누어 가지고 미추홀(彌鄒忽)로 가서 터를 잡고 살았다.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의 보필을 받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때가 전한 성제 홍가 3년이었다.

(## 참고로, 중국에도 하남성 이란 지명이 있어, 백제가 중국에
있었다는 주장(민족사학계 입장)이 등장합니다. 보수적 기존역사학자는 미추홀은 인천 근처, 한수는 한강으로, 하남위례성은 서울잠실부근 으로 해석하
여, 국정교과서에 그 내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비류가 터를 잡은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하게 살 수 없는 곳이었다. 비류가 위례성을 방문해 보니 그곳 도읍이 잘 정비되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고 있었다.

비류는 이것을 보고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뉘우치다가 죽으니 그를 따르던 백성들이 모두 위례성으로 모여들었다.

그 뒤부터 나날이 백성들이 즐겁게 따르므로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그의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온 까닭에 부여(夫餘)로 성씨를 삼았다.

2. 온조건국설화

『삼국사기』에서 인용한 이 부분이 온조를 중심으로 한 백제의 건국설화다. 『삼국사기』의 이 기록을 요약하면, 온조는 고구려 건국시조인 주몽과 졸본부여왕의 둘째왕녀 사이에 태어난 차남이다.

온조는 아버지 주몽의 첫부인에게서 난 아들 유리가 주몽을 찾아와 고구려의 태자가 되자 형 비류와 함께 남하하여 비류는 미추홀에 정착하고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여 십제라는 나라를 건국했다.

그 얼마 뒤 형인 비류는 미추홀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살해 버렸으며 온조는 형을 따르던 무리까지 모아서 몸집을 부풀려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

온조가 백제를 건국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고구려 왕위계승 싸움에서의 패배이다. 온조의 아버지인 주몽 역시 정적인 북부여왕자 대소의 박해를 피해 졸본부여로 탈출했다.

주몽은 뛰어난 정치력으로 처가의 권력을 등에 업고 졸본부여의 실세가 된 다음, 장인이 죽자 아예 나라를 통째로 차지해 고구려를 건국했다.

비류와 온조는 다음 왕위는 당연히 자신들 중 한 명이 차지한다고 믿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난데없이 북부여에서 유리라는 이복형이 나타난다. 이때부터 고구려에서는 치열한 권력투쟁이 전개된다.

승자의 선택은 주몽이 쥐고 있는데, 결국 첫째부인에게서 난 유리의 손을 들어준다. 백제의 건국신화는 이렇게 해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주몽은 왜 유리를 후계자로 선택했을까? 『삼국사기』「고구려본기」대로라면 첫부인 예씨에 대한 애틋한 감정과 약속 때문인 듯하다.

사실 주몽은 대소의 박해를 피해 야밤 도주했고, 당시 그의 아내는 임신중이었다. 주몽은 북부여에서 탈출하면서 아내에게 "그대가 남자를 낳거든 그 아이에게 이르되 내가 유물을 칠릉석(七稜石 : 일곱 모가 난 돌) 위 소나무 밑에 감추어 두었으니 능히 이것을 찾는 자가 나의 아들이라고 전해 주오"라고 약속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뒤 과연 유리와 첫부인이 징표를 들고 타나났고, 주몽은 유리를 태자로 삼는다. 그러나 약속 또는 정 때문에 후계자를 유리로 결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인의 나라를 받아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은 아마도 재위기간 내내 토착세력들의 도전을 받았을 것이다. 부여라는 나라는 각기 독자적인 부족세력의 정치연합니다.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등의 부족장들이 모여 왕을 세운다.

처가쪽 부족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은 20년 동안 이들 부족들과 때로는 타협하며 때로는 회유와 강압의 수단으로 통치기반을 닦았을 것이다.

이제 그 기반을 자신의 독자세력으로 대체할 시기가 되었을 때쯤 북부여에서 유리가 왔다. 아니면 주몽이 은밀히 유리를 끌어들였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주몽의 입장에서 보면 토착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원래 부족을 끌어들이는 것이 여러 모로 유리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시조 동명성왕 19년(기원전 19년)조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4월에 왕자 유리가 부여에서 그 어머니와 더불어 도망하여 왔으므로 왕은 기뻐하여 유리를 태자로 세웠다.

그러나 유리가 태자로 책봉되자 비류와 온조는 두려워하여 고구려를 떠난다. 비류와 온조는 왜 두려워했을까? 『삼국사기』「백제본기」는 비류와 온조가 "태자인 유리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자신들을 따르는 무리를 데리고 북만주에서 한반도로의 기나긴 고난의 길을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류와 온조측으로서는 유리의 태자책봉을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태자 자리를 놓고 고구려 지배층은 유리세력과 비류·온조 지지세력으로 양분되어 유·무형의 충돌을 했을 것이다.

결국 최고권력자인 주몽이 유리세력 편에 가세함으로써 비류와 온조세력은 패배했고, 유리세력의 보복이 두려워 고구려를 떠나 새로운 근거지를 찾아 남하했을 것이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는 유리가 태자로 책봉되고 나서 5개월 뒤엔 그해 9월에 주몽이 40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의 건국시조 박혁거세가 75세, 백제의 건국시조 온조가 65세로 사망한 것이 비해 주몽의 40세는 너무 짧다. 더구나 태자 자리를 놓고 양측이 치열하게 권력투쟁을 벌인 상황에서 왕의 사망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이후에도 왕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외부세력에게 권력을 빼앗긴 토착세력의 반발은 격렬했을 것이다.

토책세력인 비류 및 온조세력과 외부세력인 유리 및 그를 옹호하는 주몽세력간에 다툼이 일어나고 그것이 무력충돌로 발전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 와중에서 주몽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고, 또한 유리측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되어 비류와 온조세력이 탈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을 가능성도 추측할 수 있다.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의 근처가 아니라 아예 머나먼 한반도 중부지역까지 내려온다.

만일 주몽에서 유리 에게로의 권력이양이 순탄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면 비류와 온조의 머나먼 남하는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 때문일 것이고, 권력투쟁에서의 패배의 결과로 본다면 그만큼 유리의 공격이 두려웠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어쨌든 상대 나라의 왕을 서로 죽고 죽이는 백제와 고구려의 원한은 이때부터 싹텄는지도 모른다.



회한을 품고 고구려를 떠난 비류와 온조일행운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서울이 있는 한강 유역에 도착한다. 일행은 한산의 부아악이라는 곳에 올라 주변 지리를 살피며 어느 곳에 정착할지를 논의한다.


형인 비류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해변에 있는 미추홀이라는 곳에 터를 잡는다. 형 비류와는 달리 온조는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라고 한다. 시간이 얼마 흐른 뒤, 미추홀에 살던 비류는 동생이 도읍한 위례성을 방문한다.

동생 온조가 세운 십제라는 국가가 번성하고 있는 모습을 본 비류는 자신의 선택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러자 비류를 따랐던 백성들이 모두 미추홀을 떠나 위례성으로 모여든다. 위례성은 비류세력이 합세하자 더욱 번창하였고, 온조는 이를 기쁘게 생각하여 국호를 비로서 백제라고 고친다. 이때부터 온조는 백제의 건국시조로 역사에 등장한다.


3. 비류건국설화

비류중신의 건국설화는 『삼국사기』「백제본기」온조왕조 본문 말미에 할주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는 이런 말도 있다. 시조는 비류왕이다. 그 아버지는 우태로,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庶孫)이다. 그의 어머니는 소서노로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이다.

그녀는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을 가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가 비류이고 둘째가 온조였다. 우태가 죽자 그녀는 졸본으로 돌아와 홀로 살았다. 뒤에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여 전한 건소 2년(기원전 37년) 봄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고구려라 하였다. 이어 주몽은 소서노를 아내로 맞아 왕비로 삼았다.

그가 나라를 세울 때 자못 내조가 있었으므로 주몽은 그녀를 특별히 사랑하여 후하게 대했으며, 비류 등도 친자식처럼 여겼다. 그런데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에게서 난 아들 유류(=유리孺留)가 찾아오자 그를 태자로 삼아 왕위를 잇게 하였다.

이에 비류가 아우인 온조에게 이르기를 "처음에 대왕이 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도망하여 이곳에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털어서 나라를 세우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런데 대왕이 세상을 뜨신 후 나라가 유리에게 돌아가고 말았다.

우리들은 여기 헛되이 있으면서 몸에 붙은 혹처럼 우울해 하느니보다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찾아 따로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말했다. 드디어 비류는 아우 온조와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그곳에 살게 되었다.



『북사』와 『수서』에 이르기를 "동명의 후예에 구태(仇台 : 구이로도 읽음)가 있었는데 매우 어질고 신실하였다. 그가 처음에 대방의 옛 땅에 나라를 세우니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가 자신의 딸을 그의 아내로 주었다. 그 나라가 드디어 동이의 강국으로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이 건국실화를 간단하게 분석해 보자.

우선 비류와 온조가 주몽의 친자식이 아니고 북부여의 왕자인 우태의 자식이라고 했다. 이 사실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온조시조설에서는 백제의 역사적 정통성이 부여 → 고구려 → 백제로 이어진다.


그러나 비류와 온조가 주몽의 친자식이 아니라 부여왕자의 친자식이라고 할 때의 백제건국의 역사적 정통성은 부여에서 곧바고 백제로 이어진다. 즉 백제와 고구려는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동등한 위치에 서는 것이다.



사실 백제와 고구려는서로의 정통성을 놓고 치열하게 다퉜다. 고구려의 주몽이 동명성왕을 지칭한 것이나, 백제의 온조왕이 나라를 세우자마자 동명왕 사당을 건립하고 그곳에 참배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의 맥을 잇기 위해 서로 싸웠다. 이것이 건국설화에 투영되고 있는 비류시조설의 진상이다.



다음으로 이 설화에서는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이 은근히 배은망덕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이 이미지는 소서노라는 여인을 통해 나타난다.

소서노는 자기 재산을 털어가면서 주몽을 도왔다. 주몽은 소서노라는 여인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도 졸본부여의 권력핵심으로 진입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 사실은 주몽 자신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친자식이 아닌 비류와 온조를 친자식처럼 돌봤을 것이다. 그러니 일단 권력을 거머쥐자 주몽의 마음을 변했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친자식인 유리가 북부여에서 자신을 찾아와 고구려로 오자 그를 태자로 삼고 나라를 물려줬다.

왕권을 차지한 유리와 첫째부인 예씨는 노골적으로 소서노와 비류, 온조 형제를 탄압했을 것이다. 소서노 입장에서 보면 은혜를 원수로 갚은 주몽은 배은망덕한 인간이었다. 그래서 소서노는 두 아들을 데리고 고구려를 떠나는 것이다.



또한 이 건국설화에서는 비류일행이 남하한 경로가 구체적으로 나타나있다. 즉 비류일행은 패수와 대수라는 강을 건너 미추홀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당시 패수와 대수가 지금의 어느 강인가는 학자에 따라 다르다.

패수(浿水)는 글자 그대로 조개껍질이 물가에 많이 모여 있는 강이고, 대수(帶水)는 강물이 마치 허리띠처럼 생긴 강이다. 패수란 강의 위치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무제에 의해 고조선이 멸망할 당시의 경계가 바로 패수였기 땜문이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조선열전」에 보면, 한나라 육군은 패수를 건너 왕검성으로 쳐들어온다. 이때가 기원전 108년인데 50년 뒤에 신라가 건국되고 다시 20년의 시차를 두고 고구려와 백제가 건국된다.

아직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패수란 강 이름이 엉뚱한 것으로 바뀌었을 확률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면 패수란 강의 위치가 오늘의 어디인가에 따라 비류일행의 이동경로가 밝혀진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패수는 중국 요서에 있는 대릉하라는 설부터 한반도 황해도에 있는 예성강이라는 설까지 다양하게 주장된다. 여기서는 일단 패수는 청천강, 대수를 대동강이라 추정한다. 그렇다면 비류일행은 동가강을 따라 압록강 하류를 나와서 서해안을 끼고 지금의 평안도와 황해도 해변을 따라 최종적으로는 미추홀에 정착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온조시조설이 그냥 남하했다고 하여 육로이동을 암시한 것가는 차이가 있아. 온조시조설에 따르면 온조일행은 동가강 지류를 타고 압록강에 도착하여경계를 지나 함흥을 거쳐 추가령지구대를 통과하여 소양강 상류에 도착했고, 다시 북간강 수계를 따라 한강 유역에 도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4. 비류·온조 건국설화 혼용의 의미



백제는 이런 두 개의 건국설화 때문에 과연 온조와 비류 중 누구를 백제의 건국시조로 볼 것이냐는 항시 논란거리가 되어 왔다. 백제의 건국은 아주 먼 선조시절 이야기라 우리는 어느것이 맞다고 단정할 수 없다.

다만 두 설화를 종합하여 백제의 건국과정을추측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가야 건국설화에서 알 수 있듯이 시조형제설화는 상징성이 강하다. 이런 설화에 나타나는 형제는 피를 나눈 형제가 아니라 일정한 세력집단의 긴밀한 결합을 상징한다.

설화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백제는 부여족계통으로서 고구려를 구성하고 있던 두 부족세력이 남하하여 건국하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즉 고구려 건국초기 왕권을 둘러싼 일련의 권력투쟁이 있었고, 그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부족이 한반도를 남하하여 한강 유욕에 새로운 나라를 세운 것이 백제의 모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에서 남하한 부족이 하나가 아니라 비류로 대표되는 미추홀세력과 온조로 대표되는 하남위례성 세력이었기 때문에 건국설화 자체도 두 가지로 전승되었다.

사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비류로 대표되는 미추홀 세력은 한반도 압록강을 거쳐 서해를 타고 한강 하류에 정착했고, 온조로 대표되는 세력은 압록강을 건너 함흥지방으로 나와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다가 추가령지구대와 철원을 거쳐 임진강 수계와 한탄강 수계를 이용하여 각각 한강 하류와 중량천 부근인 한강 중류에 도착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구려에서 남하해 온 비류집단과 온조집단은 각기 한강 하류(미추홀)와 한강 중류(하남위례성)에 터전을 잡고 세력을 확대하다가 어느 시기에 두 세력이 합쳐져서 부족연맹체를 결성하고, 그 뒤 온조세력이 비류세력을 제압하면서 그 부족연맹체를 백제로 바꿨다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다.



고구려에서 두 세력이 한반도로 남하한 시기도 각각 달리 본다. 그 이유는 건국설화에서 비류측이 형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일설에 의하면 비류와 온조는 친형제가 아니라 이부동모제(異父同母弟)라고 한다.

즉, 연타발의 딸 소서노는 우태와의 사이에서 비류를 낳았고, 주몽에게 개가하여 온조를 낳았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주몽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비류와 유리와 온조가 권력투쟁을 했을 것이다. 이 투쟁에서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던 비류세력이 소서노의 인솔하에 먼저 남하를 했고, 이어서 최종적으로 패배한 온조세력이 고구려를 떠났을 것이다.



온조세력이 비류세력을 제압한 시기는 온조와 비류가 남하한 한참 뒤의 일로 추측된다. 미추홀에 정착한 비류세력은 초기에는 왕성한 해상무역활동으로 온조세력을 압도했다.

그러나 비옥한 한강 유역의 경제적 생산문에 힘입어 온조세력은 어느 시기에 비류세력을 제압했다. 『삼국사기』의 비류가 위례성을 방문하고 부끄러워 자살했다는 기사는 이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비류세력과 온조세력은 평화적으로 통합하였을까, 아니면 무력충돌을 거쳐 통합하였을까? 이 의문에 대한 답도 엇갈린다. 『삼국사기』온조시조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두 세력의 통합이 평화적이었다고 본다.

그 이유는 해상세력인 비류와 농경세력인 온조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상호보완적이고, 두 세력이 통합하는 것이 북쪽에 있던 낙랑세력과 남쪽에 있던 마한세력의 압력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경제적 이해와 정치·군사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비류와 온조가 합쳤다는 것이다.


일단 백제의 주도권을 장악한 온조세력은 당연히 자신들의 건국시조로서 온조를 세웠는데, 이것은 대체로 고이왕 때의 일로 본다.

고이왕 이전까지는 해상무역으로 세력확장이 빨랐던 비류계가 백제의 지배권을 잡았고, 그 뒤 풍부한 한강 중류의 생산력으로 주변부족을 정복하며 세력을 확장한 온조계가 백제의 지배권을 잡았을 것이다.

이때부터 백제의 건국시조는 온조로 정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적 통합에는 의문이 있다. 고구려는 기본적으로 정복국가이다. 당연히 고구려에서 떨어져 나온 세력집단도 정복국가의 성격을 띤다.

주몽은 건국하자마자 비류국과 행인국 등 주변소국을 정복하여 복속시킨다. 『삼국사기』「백제본기」'시조조'에도 두 세력이 평화적으로 통합되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전반의 온조시조설화에서 비류는 온조가 세운 위례성이 번창한 것을 보고, '그만 부끄럽고 후회사다가 죽은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후반의 비류시조설화에서 소서노와 비류일행은 '미추홀에 도착하여 거기에 거주하였다'고만 했지 나라를 세웠다는 표현은 없다.

기록대로라면, 온조는 처음에 십제라는 국가를 세웠다. 온조보다 먼저 미추홀에 정착한 비류집단도 나라를 세웠을 것이다. 후반 비류시조설화에서는 국명이 없지만 아마도 백제였을 것이다. 건국설화는 그것이 씌어지기까지의 오랜 기간 동안 원형이 윤색·가공된다.

이 설화에서 핵심은 '미추홀에 살던 비류가 어느 날 위례성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죽었다'는 대목이다. 설화에서는 비류가 동생이 잘된 것을 보고 부끄러워 뉘우치다가 죽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설득력이 별로 없다. 죽지 않고 동생과 힘을 합해 나라를 더욱 튼튼히 했다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바로 비류가 위례성에서 죽었다는 표현 때문에 두 세력이 통합이 평화적이지 못했을 것이란 의구심이 든다. 비류측이 날로 번창하며 세력을 넓히고 있던 온조측을 공격했다가 몽땅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을 가능성이다.

비류측을 제압한 온조측은 미추홀에 남아 있던 비류의 잔여세력을 끌어들이고, 해상활동으로 주변 여러 나라에게 널리 알려진 비류의 백제란 국호로 자기 나라 이름을 고쳤을 것이다.



이상이 백제 건국시조설화의 대체적인 해석이다. 물론 『삼국사기』의 온조왕 기록 중 몇 부분은 후대에 백제가 고대국가로 성장하면서 일어난 일을 온조왕대로 소급해 기록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를테면 『삼국사기』는 온조왕 시기에 마한 전체를 통일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훨씬 뒤인 근초고왕 때의 일이고, 백제를 구성하고 있던 연맹체의 주도권이 미추홀 세력에서 위례성 세력으로 넘어간 것도 고이왕 때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삼국사기』온조왕조는 역사적인 기록이라기보다 백제의 성립경로를 설화화한 이야기로 보아야 한다. 사학계에서도 『삼국사기』「백제본기」초기 기록의 신방성에 대해 의견이 대립하고 있는 실정이다.



설화의 해석이야 어쨌든, 백제의 뿌리는 부여와 고구려다. 백제와 고구려, 부여는 모두 동일한 시조인 동명을 숭배했다. 온조의 아버지가 동명이었다는 설화도 건국의 신성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비류와 온조가 친형제라는 설화 역시 백제를 구성했던 부족연맹체의 친밀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두 설화 모두 비류가 온조의 형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초기 백제에서 온조집단보다는 비류집단의 세력이 우월했음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 내용출처 : [기타] 임병주 - 한권으로 읽는 삼국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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