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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의 메인 숲 -헨리 데이비드 소로-
「미국을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문인. 1817년 미국 메사추세츠 주 콩코드에서 태어났다. 1837년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잠시 교편을 잡았으나 학생을 처벌해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2주 만에 그만 두었다. 형인 존 소로 주니어와 함께 진보적인 학교를 열어 성공을 거두나 형의 건강이 악화되어 오래 운영하지는 못했다. 이후 일정한 직업에 정착하지 않고 가업인 연필제조업을 돕거나 가정교사, 측량사로 일하는 틈틈이 강연과 글쓰기를 이어나갔다. 초월주의 사상가인 랠프 월도 에머슨과 깊은 교류를 나누었고 노예제도에도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특히 노예제도와 멕시코 전쟁에 반대하기 위해 인두세 납두를 거부, 투옥되기도 했으며 이를 바탕을 쓴 <시민 불복종>이 훗날 간디, 마틴 루터 킹 등 비폭력주의 저항 운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평생 물욕과 상업주의, 국가에 의한 불의를 비판했으며 정의와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 자연과 함께 어우러지는 삶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홀로 지냈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월든>은 오늘날 꼭 읽어야 하는 미국 문학의 고전으로 손꼽힌다. 월든 호숫가를 떠난 이후에도 <에인 숲>이나 <케이프코드>등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깊은 사색이 담긴 여행기를 남겼다. 1862년 45세의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첫 번째 여정 -크타든(Mt. Katahdin) 1846년 8월 31일, 나는 메사추세츠 주 콩코드를 떠나 기차와 증기선을 타고 뱅거를 거쳐 메인 주의 깊은 숲으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했다.
다음날 오전, 그러니까 9월 1일 화요일, 나는 일행과 함께 사륜마차를 타고 뱅거를 떠나 상류로 출발했다.
이곳에서는 사계절 내내 통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서 서로 세계 마찰된다. 따라서 한때 푸르렀던 나무도 지금은 하얗게 벗겨진지 오래로 바람에 날려 쌓인 눈과 같다고 수시과는 대신 그냥 강물에 떠밀려온 통나무 같다고 표현하면 충분할 정도이다. 이 통나무들이 한낱 목재가 된다. 우리가 사용하는 1인치, 2인치, 3인치ㅉ@ㅏ리 널빤지가 여기에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톱장이가 간격을 나누면 무수한 쓰러진 나무들의 운명이 결정된다.
채선국 호숫가에 있는 스트로브 잣나무의 모습을 생각해 보라.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가지가 살랑거리고 뾰족한 잎 하나하나가 남김없이 햇빛을 받으며 떨리던 모습을.
올드타운에서 우리는 배토 제조소에 들렀다. 페놉스콧 강에서 쓰는 배이므로 배토 제조는 이곳에서 꽤 번성하는 사업이다.
내가 읽은 바에 의하면 1837년 기준 뱅거 북쪽의 페놉스콧 강과 그 지류에는 제재소가 250개 있는데, 상당수가 이 근방에 있고 연간 2억 피트의 널빤지를 생산한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비버가 서식하는 외로운 습지와 산비탈에서 바삐 움직이는 수많은 악마들처럼 되도록 빨리 숲 전체를 없애는 것이 사명인 듯했다.
우리는 재고 있는 배를 몇 대 살펴보았다. 베토는 가볍고 균형 잡힌 배로 물살이 빠르고 암초가 많은 환경을 고려해 만들어졌다. 사람이 어깨에 짊어지고 육로로 장거리 이동하는 것도 가능하다. 길이가 20에서 30피트이고 폭은 4에서 4.5피트밖에 안 된다. 카누처럼 양 끝이 뾰족하지만 배 바닥은 앞쪽이 가장 넓고, 암초 위를 최대한 부드럽게 미끄러질 수 있게끔 물 위로 7에서 8피트 올라와 있다.
우리가 탄 나룻배는 인디언들이 사는 섬을 지나갔다. 강변을 지나는데 세탁부처럼 보이는 키가 작고 누더기를 걸친 인디언이 눈에 띄었다. 이들은 대개 돌이킬 수 없는 과거 때문에 괴로워하는 소녀처럼 슬픔에 잠긴 얼굴을 하고 있다. 그는 강 상류에서 내려와 올드타운 쪽 식료품 가게 근처에 카누를 댄 다음, 한 손에는 ㅈ미승 가죽 한 묶음을, 다른 손에는 반 배럴짜리 빈 술통을 들고 둑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인디언의 역사 ~~~1837년 기준으로 이 부족에는 단 362명만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집이 몇 채 있어 이 부족에게 아직도 삶을 이어나갈 뜻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대부분 집들이 낡고 쓸쓸해서 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인 탓에 변소나 헛간처럼 보일 뿐, 주택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하다못해 인디언식 주택이라고도 볼 수 없었다. 기껏해야 집을 대신할 곳, 야외 숙소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된 것은 인디언들의 삶이 도미 아우트 밀리티아 - 집 아니면 전쟁, 아니 지금은 오히려 베나투스, 즉 집 아니면 사냥이며, 대개 후자에 치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당만이 유일하게 잘 손질된 건물이었다.
배에서 내리자 열 살이나 열두 살쯤 된 인디언 소녀가 햇볕이 내리쬐는 가운데 물에 잠긴 바위에 앉아 노래를 흥얼거리며 빨래를 하고 있었다. 콧노래인지 신음소리인지 알 수 없는 노래는 원주민 고유의 가락이었다.
점심 무렵 마타왐키그에 도착했다. 우리가 온 길로 따지면 뱅거에서 부터 56마일 떨어진 곳이었다. 우리는 손님이 많이 드나드는 집에서 묵기로 했다.
상록수가 우거진 숲에서 아주 달콤하고 상쾌한 향기가 풍겨왔다. 공기가 일종의 영양제 같았다.
버터는 심히 풍부해서 소금을 치기 전에는 부츠에 바르는 기름 대용으로 쓰였다.
아침 메뉴는 차와 건빵, 돼지고기, 구운 연어였다. 이곳에서 자라는 오리나무 가지를 깔끔하게 깍아 포크를 만들었고, 자작나무 껍질을 벗겨 접시로 삼았다.
맥코슬린은 여기에서 송어를 많이 잡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일부러 야영을 준비하는 사이 나머지는 낚시를 하기 시작했다. 인디언 무리나 백인 사냥꾼들이 깃륵에 두고 간 자작나무 막대를 이용했고, 낚싯바늘에는 돼지고기를 끼웠다. 송어가 잡히고부터는 곧바로 송어도 미끼로 삼았다.
원시의 강에서 잡힌 생선은 아직 살아 있어서 색깔이 선명할 때 가장 아름다운 꽃처럼 반짝거린다.
이날은 9월 7일이었다. 일행들이 야영할 만한 곳을 찾고 있을 때 나는 해질 때까지의 시간을 이용해 홀로 산을 올랐다. 우리는 구름을 향해 올라가는 깊고 좁은 골짜기에 있었다. 산(크타든 산)은 느슨하게 놓인 바위들의 거대한 집합체인 듯했다. 언젠가 하늘에서 바위 비가 내려서 떨어진 그 자리에 그냥 있는 것처럼 안정감 있는 바위는 어디에도 없고, 불안정한 흔들바위들이 서로 기대어 있을 뿐이었다.
드디어 나는 구름의 끝자락 안으로 들어갔다. 구름은 영원히 정상 위를 부유하며 결코 사라지지 않는 듯했다. 흘러가는 듯해도 그 흐름과 같은 속도로 순수한 공기 속에서 구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4분의 1마일 더 가자. 산등성이의 정상에 도달했다.
더 맑은 날 이곳을 본 사람의 말에 의하면 , 길이가 약 5마일이고 1천 에이커의 고원이 있다고 하는 데, 나는 적개심 넘치는 구름 속에 파묻혀 있었던 탓에 뭐 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실상 구름 공장이었다. - 구름은 이 공장에서 생산한 세공품이고, 완성된 구름은 바람이 차가운 바위에서 다른 곳으로 밀어낸다. 이따금씩 바람기둥이 내게 부딪쳐올 때면 오른쪽 또는 왼쪽에 어둡고 축축한 바위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바위산과 나 사이를 안개가 지치지도 않고 파고들었다. 그 모습을 보니 아틀라스, 불카누스, 키클롭스, 프로메데우스 등을 다룬 옛 서사시와 비극 시인이 떠올랐다.
프로메데우스가 묶여 있던 코카서스의 바위산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아이스킬로스도 분명 이런 풍경을 접한 적이 있을 것이다. 광활한 티탄족의 영토, 사람이 절대 살지 않는 곳, 이 장관을 지켜보는 이는 산을 오르는 사이 갈비뼈 사이 느슨한 틈으로 자신의 일부를 심지어는 아주 중요한 일부를 잃어버린다.
그는 상상보다 더 고독하다. 원래 살던 곳에서와 달리 이곳에서 그는 충분히 생각을 할 수도, 깊이 이해할 수도 없다. 이성은 흩어지고 흐려져 공기처럼 희박해진다. 티탄 족과 같이 거대하고 잔혹한 자연은 그의 약점을 파고들어 홀로 사로잡고 그의 신성한 능력을 조금씩 앗아간다. 자연은 평지에서처럼 그에게 미소를 지어주지를 않는다. 대신 준엄하게 말하는 듯하다.
그대는 어찌하여 정해진 시간보다 앞서 이곳에 왔는가? 이곳은 그대를 위해 준비한 땅이 아니거늘, 골짜기에서 내 미소 짓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단 말인가? 이 흙은 그대가 발을 디디라고 만든 것이 아니며, 이 공기는 그대가 숨 쉬라고 만든 것이 아니고, 이 바위는 그대가 이웃으로 삼으라고 만든 것이 아니다. 이곳에서 나는 그대를 동정할 수도 응석을 받아줄 수도 없다. 영원토록 그대를 무자비하게 몰아낼 수박에 없다. 내가 친절한 곳으로, 어째서 내 그대를 부른 적 없는 곳으로 찾아와 내가 계모와 같다고 불평하는가? 그대가 여기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몸을 떨며 죽어간들, 이곳에는 ㅅ어지도 없고 제단도 없으며 내 귀에 그 소식이 들릴 수도 없다. “혼돈과 태고의 밤이여, 내 엿보러 오지 않았으니 조사할 의도도, 어지럽힐 의도도 없다 그대 왕국의 비밀을, 그러나 [....] [....] 내 가는 길이 그대들 너른 제국에 걸쳐있음이니, 나는 빛을 찾아 가노라.“-밀턴의 실낙원-
지질조사관으로서 능력을 발휘해 정확히 고도를 잴 수 있었던 잭슨의 말에 의하면 크타든의 고도는 5,300피트, 다시 말해 해발 1마일이 조금 넘는다. 그러므로 이곳은 분명 메인 주에서 가장 높은 곳이며,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가장 가파른 화강암 산이다. 과거, 맥코슬린이 벌목에 참여한 적이 있다는 채선쿡 호수와 알라가시 강에서 등을 돌려야 하는 것은 유감이었다.
페놉스콧 강은 전체 길이가 275마일인데, 우리가 간 곳에서 수원까지는 아직도 100마일 정도 남아 있었다.
★같은 날 오후 4시경, 우리는 다시 배에 올랐다. 이번에는 돌아가는 여정이었다.
내려가는 길에 가끔씩 바람이 불어와 눈앞에 장관을 펼쳐주었다. 동쪽으로 끝없는 숲과 호수가 펼쳐있고, 햇빛에 반짝이는 개천들이 있어 일부는 동쪽 지류로 흘러 들어갔다. 같은 방향으로 새로운 산들도 보였다. 가끔 앞에서 참새 일족에 속하는 작은 새가 날아다녔는데, 바람에 날리는 회색 돌멩이처럼 스스로 갈 길을 정하지 못하고 바람에 휩쓸렸다.
포크워코무스 폭포를 우회하고 노를 저어 나가자 금세 카텝스코니건 폭포, 그러니까 오크홀 운반로에 도착했다. 우리는 베토를 두고 절반쯤 가서 야영을 한 뒤, 다음날 아침 어깨의 피로가 풀리면 그때 배를 옮기기로 했다.
우리는 서쪽과 남쪽 지역을 100마일 너머까지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그곳에 메인 주가 있었다.
한없이 펼쳐지는 숲이 햇빛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여섯시, 나는 메사추세츠로 돌아가는 기선에 올랐다.
호수도 헤아릴 수 없었다. 남서쪽에는 길이 40마일, 폭 10마일의 무스헤드 호수가 있어서 식탁 가장자리에 놓은 은 접시 같았다.
새들이 날아오는 직선거리로 따지면 뱅거에서 약 80마일, 우리가 마차를 타고, 걸어서, 노를 저어가며 온 대로라면 150마일 떨어진 곳, 우리는 이곳에서 보는 풍경이 정상에서 보는 풍경만큼 좋으리라, 그만큼 멀리 보이리라, 구름과 안개가 없는 산이 산이겠는가, 생각하며 자신을 위로했다.
우리는 식량이 거의 바닥난 상태였고, 배에 문제가 생길 경우에 대비도 형편없었다.
과거, 멕코슬린이 벌목에 참여한 적이 있다는 채선쿡 호수와 알라가시 강에서 등을 돌려야 하는 것은 유감이었다.
페놉스콧 강은 전체 길이가 275마일인데, 우리가 간 곳에서 수원까지는 아직도 10마일 정도 남아 있었다.
주 소속 지질조사관보 ‘호지’는 1837년에 이 강을 거슬러 올랐고, 1과 4분의 3마일 떨어진 운반로를 통과해 알라가시 강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다시 알라가시 강을 따라 내려가 세인트존 강으로 접어든 다음, 마다와스카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랜드 운반로로 이동, 세인트로렌스 강 까지 이르렀다. 그의 기록이 내가 아는 한 , 이 방향으로 캐나다까지 간 유일한 탐사 기록이다. 작은 것을 큰 것에 비교하는 것이 되지만, 그가 세인트로렌스 강을 처음 보았을 때, 받은 인상은 발보아(스페인 탐험가) 가 다리엔 지협(파나마 동부 지방의 지협)의 산맥에서 태평양을 처음 보았을 때와 비슷하다.
같은 날 오후 4시경, 우리는 다시 배에 올랐다. 이번에는 돌아가는 여정이었다. 장대가 필요할 만한 일은 극히 적을 듯싶었다. 쏜살같이 흐르는 급류 속에서 사공들이 장대 대신 크고 넓은 노를 이용해 배의 방향을 잡았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미끄러지듯 물살을 타고서, 올라갈 때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했던 곳을 순조롭게 내려가긴 했으나, 실상은 내려가는 여정이 훨씬 더 위험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천 개의 바위 중 하나에만 제대로 부딪쳐도 배가 즉각 뒤집혀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쏜살같이 급류를 따라 내려갔다. 우리 생각대로라면 시속 15마일은 되었을 것이다.
아침이 되자, 우리는 바람이 불기 전에 서둘러 배를 옮겨와 물길로 들어갔다. 사공들은 피사마가멧 폭포로 내려갔고, 암베지지스 폭포도 금방 동과했다.
그리고 암베지지스 호수의 상류에서 남은 돼지고기로 서둘러 아침을 먹은 뒤, 곧 잔잔한 수면 위로 노를 저어나갔다. 북동쪽의 맑은 하늘 저편으로 구름이 걷힌 크타든 산이 보였다.
긴 이야기를 짧게 정리하자면, 우리는 그날 밤 마차를 타고 올드 타운의 아직 반밖에 완성되지 않은 다리위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음날 여섯 시, 나는 매사추세츠로 돌아가는 기선에 올랐다.
메인 주의 황야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숲이었다. 빈 간격이나 빈터가 상상보다 훨씬 드물었다. 극히 드문 불탄 땅 몇 군데와 강이 지나는 좁은 구간, 높은 산의 벌거벗은 정상, 호수와 개천, 이것들을 제외하면 숲은 끝없이 이어진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냉혹하고 거칠며, 축축하고, 복잡한 황야. 봄이 되면 이곳은 어느 한 군데 빠짐없이 흠뻑 젖어 진흙 수렁처럼 변한다. 어디에서 봐도 가혹하고 잔인한 곳이다.
멀리 언덕에서 바라보는 숲과 호수의 풍경만이 예외로 평온하고 다소 세련돼 보인다. 호수는 생각지도 못했던 모습이다. 너무 높은 곳에서 전면으로 빛을 받고 있다 보니 숲이 줄어들어 호수 가장자리를 장식한 솔처럼 보였고, 군데군데 파란 산은 마치 최고급 보석 주위에 박은 자수정 같았다. 이 보석은 주위에서 발생할 모든 변화보다도 훨씬 두드러지고 우월할 것이며, 지금도 더할 나위 없이 유아(幽雅)하고, 세련되고, 아름답다.
Ⅱ. 두 번째 여정. 채선쿡
채선쿡
1853년 9월 13일 오후 5시, 나는 보스톤을 출발해 기선을 타고 바다로 나가 뱅거로 향했다. 따뜻하고 교요한 밤이었다.
우리는 정오 무렵, 호수 상류에 도착했다. 산 정상은 아직 구름에 덮혀 있었지만 그 사이 날씨가 개였다. 이곳에서 보면 키네오 산은 다른 두 산과 함께 북동쪽으로 뻗어 있었다. 세 산이 한 가족처럼 똑같이 닮아 있는 모습이 한 거푸집에서 찍어낸 것처럼 보였다.
호숫가는 지대가 낮고 판판한 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들메나무, 측백나무 따위가 무성했지만, 한 눈에 보기에도 나무들은 기적 소리 따위에 아랑곳 하지 않는 듯 했다.
다음으로 할 일은 카누와 소지품을 케네벡 강 상류에 있는 이 호수에서부터 페놉스콧(페놉스코트)강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일행은 자고새를 잡으려고 앞서 나갔고, 나는 그 뒤를 따르며 온갖 식물들을 구경하면서 걸었다.
길 양 옆에는 가문비나무와 전나무가 빽빽하게 서서 우리를 반겨주었고, 잎이 갈색으로 물들어가는 측백나무가 서두르라고 우리를 재촉했다.
운반인은 여기가 뱅거에서 강으로는 140마일, 바다로는 200마일 떨어져 있으며 캐나다로 가는 길에 있는 힐튼 농장에서부터는 55마일 남쪽이라고 했다.
우리가 인디언을 고용한 주된 이유는 내가 인디언의 방식을 연구할 기회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 작업을 하는 동안 그는 단 한 번 가볍게 욕설을 내뱉었다. 칼이 괭이처럼 무디다는 불평이었다. 욕은 그가 백인들과 교류하면서 배운 것이었다.
한ㄴ자이 다되어 우리는 페놉스콧 강을 출발했다. 우리가 탄 카누는 길이가 19.5피트고, 가장 넓은 부분의 폭이 2.5피트였다. 양쪽 끝의 깊이는 각 14인치 정도로 비슷했고 초록색으로 칠했다.
카누에 우리 셋이 타고 짐까지 실었으니, 무게는 전부 다 해서 550에서 600파운드 사이였다.
조는 우리가 앉을 수 있게 바닥에 자작나무 껍질을 깔아주었고, 가로대에 엷은 향나무 널빤지를 대어 등을 보호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고물의 가로대 위에 앉았다.
우리는 교대로 뱃머리에서 노를 저었는데, 다리를 뻗은 채로 앉아도보고, 무릎을 꿇은 채로 앉아도 보고, 무릎을 땅에 대고 몸을 세우기도 했지만 어떻게 해도 견디기가 힘들었다.
강기슭은 7에서 8피트 높이였으며, 흰가문비나무와 검정가문비나무로 빽빽하게 뒤덮여 있었다. 이 둘이 그 근방에서 가장 흔한 나무였다고 확신한다.
그밖에 전나무, 측백나무, 흰자작나무, 노랑박달나무, 검정자작나무, 사탕단풍나무, 미국산 겨릅, 꽃단풍 몇 그루, 너도밤나무, 들메나무, 마가목이 있었고 잎이 들쭉날쭉한 사시나무, 이제 갈색으로 물들어 공손해 보이는 느릅나무가 강을 따라 드물게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솔송나무도 몇 차례 눈에 띄었다.
멀리 가지 않아 놀랍게도 인디언 야영지처럼 보이는 곳이 나타났다. 강기슭에 붉은 깃발이 덮여 있었다. 나는 캠프다! 라고 소리쳐서 동료들에게 나의 발견을 알렸다. 하지만 그것이 깃발이 아니라 서리 때문에 색이 변한 꽃단풍이란 사실은 더디게 알아차렸다.
물이 옅은 곳과 기슭에서는 새로 생긴 무스 발자국이 다수 발견되었다. 스련 줄기에도 무스가 뜯어 먹은 새로운 흔적이 역력했다.
이제는 정면에서 무스헤드 호수의 북동쪽에 있는 스펜서 산이 확실히 보였다.
앞으로는 물총새가 날고, 노랑텃멕새 우는 소리가 들렸으며, 동고비와 박새도 근처에 있었다. 조는 인디언말로 박새는 케쿠니레수라고 가르쳐주었다.
우리는 누른도요새 옆을 아주 가깝게 지나갔다. 이 새는 아픈 것처럼 강가에서 깃털을 부풀리고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우리는 섬의 위쪽에서 야영을 하기로 했다. 아래쪽에는 한 달 혹은 그보다 전에 살해당한 무스의 시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야영 준비만 해놓은 다음 짐을 두고 무스 사냥을 가기로 했다.
우리는 오리를 잡고 털을 뽑아 아침거리를 마련해두었다.
멀리 강 아래에서 어렴풋하게 나무꾼이 두 번 도끼질을 한 것 같은 소리가 음산한 황야를 뚫고 둔탁하게 메아리치며 들려왔다. 우리는 숲 속 먼 곳에서 들려오는 많은 소리를 도끼질 소리로 착각하곤 한다. 이런 환경에서는 어떤 소리든 다 비슷하게 들리기도 하고, 보통 도끼질 소리가 제일 자주 들리는 소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조에게 이 소리에 대해 말하자 그는 이렇게 외쳤다. “맹세코 장담하는데, 그건 무스 소립니다! 무스가 그런 소리를 낸다고요.”
별빛 속에서 물길을 따라 3마일, 무스혼 강까지 이어지는 고인 물을 따라 내려갔다.
고요해서 사냥을 하기 딱 좋은 밤이었다. 혹 바람이라도 세게 불었으면 무스가 사람 냄새를 맡았을 테니 말이다. 조는 무스를 몇 마리 잡을 거라고 단단히 믿고 있었다.
우리는 소소한 산들바람을 거스르며, 오른쪽에 드리워진 그림자 속에서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갔다.
섬에서 약 1마일 내려가 매순간 고독이 점점 더 완연해지던 그때, 기슭에서 돌연 불빛이 나타났고 모닥불 타는 소리가 들렸다. 목재 조사원 두 사람이 야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가 나팔을 불어 무스의 울음소리를 흉내 냈다.
경험 많은 조사원들은 일당으로 3에서 4달러 정도를 받는다. 고독하고 모험적인 삶이다.
언제나 총과 도끼를 들고 다니며, 수염도 자라든 말든 내버려두고, 이웃도 없이, 넓은 평원이 아닌 머나먼 황야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다.
조가 다시 나팔을 불어서 무스 소리가 나는지 우리 모두 귀를 기울이고 잇을 때였다. 이끼 투성이 숲길을 뚫고 급히 움직이는 소리가 둔탁하면서 건조하게 메아리처럼, 또는 먼 곳에서 살며시 새어나오는 것처럼 희미하게 들려왔다. 확실한 존재감이 있는 소리였지만, 나무가 울창하고 균류처럼 빽빽하게 들어선 숲에 가로막혀 반쯤 억눌린 소리처럼 들렸다.
우리는 조에게 이게 무슨 소리냐고 속삭였다. 그가 대답했다 -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요.”
10시경 야영지로 돌아와 불을 피우고 침대로 들어갔다. 각자 담요를 한 장씩 덮고, 전나무 가지 위에 누워 모닥불 쪽으로 발끝을 뻗었다. 머리맡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야외의 공기를 마시며 누워 있자니, 아주 쾌적하고 독립적인 기분이 들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인디언들과 캐나다를 여행했을 때, 지진만 아니라면 천지창조 이후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는 침대에 눕는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깨어 있는 채로 누워서 잠시 전나무 사이로 피어오르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다음날 (9월 17일 토요일) 아침에 일어나 보니, 서리가 꽤 많이 내려서 나뭇잎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두 번째 총알은 어린 무스를 겨누었다. 우리는 이 무스가 물속으로 쓰러지는 모습을 보게 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이 녀석 역시 잠시 머뭇거리더니 물 밖으로 나와 언덕 위로 달려갔다.
개천 중간에서 암컷 무스가 죽은 채로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래도 아직 몸이 꽤 따뜻했다.
무스는 총에 맞은 지 1시간이 지난 뒤였고, 물 때문에 부풀어 있었다.
이날 오후의 경험은 사람을 황야로 불러들이는 동기가 얼마나 비도덕적이고 야비한지를 시사했다.
인디언들과 사냥꾼들은 얼마나 이 자연을 거칠고 불완전하게 이용하는가!
무스를 살해한 나를 자연이 준엄하게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스 고기로 아침을 먹은 뒤, 우리는 파인 개천으로 내려가 채선쿡 호수로 향했다. 호수까지는 약 5마일 거리였다.
채선쿡 호수는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뻗어 있다. 폭은 3마일, 길이는 18마일로 섬 하나 없다고 한다. 우리는 이 호수의 북서쪽 구석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일찍 우리는 페놉스콧 강으로 올라가 돌아가는 여정을 시작하기로 했다.
집주인은 우리가 잘라서 가져온 4분의 1 만큼의 무스 고기를 기쁘게 받으며 숙박비를 조금 깍아 주었다.
그들은 2개월 사이에 무스를 스물두 마리나 잡았다. 하지만 고기는 극히 조금만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시체를 땅 위에 그냥 내버려 두었다. 이 모든 것은 내가 본 장면 중 가장 야만적인 광경이었기에 나는 300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어둠이 내린 직후 작은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조는 밤마다 특정 시간대에 지저귀는 새라고 말했다. 꼭 10시에 운다고 믿고 있었다. 십자청개구리와 청개구리가 우는 소리, 4분의 1마일 떨어진 캠프에서 벌목꾼들이 노래하는 소리도 들렸다.
그는 무스 가죽을 다루는 투기꾼인 모양으로 일행이 잡은 무스의 생가죽을 2달러 25센트에 샀다. 조는 올드타운에서라면 2달러 50센트는 받았을 거라고 했지만 말이다.
나는 인디언들에게 오래된 책에서 이런 나무틀에 사람 고기를 말리는 그림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모호크 족의 식인 전통과 그들이 특히 좋아한 부위 등에 관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비버 가죽은 값이 떨어져서 사냥해봤자 수익이 나지 않는다고도 했다.
나는 우리가 잡은 무스의 귀를 보존하고 싶어서 불 위에서 건조시키고 있는 무스 고기 옆에 올렸다. 귀 하나의 길이가 10인치씩이었다. 하지만 사바티스는 반드시 가죽을 벗겨서 보존 처리를 하지 않으면 털이 모두 빠진다고 했다. 그리고 말하기를, 무스의 귀에서 벗긴 가죽 두 장을 안쪽끼리 맞닿게 해서 담배 주머니로 만든다고 했다.
채선쿡은 많은 강이 흘러들어오는 곳을 의미한다며 그 강들의 이름을 열거했다. 페놉스콧, 움바죽스쿠스, 쿠사베섹스, 레드브록 등이었다.
마타왐키그는 두 강이 만나는 곳을 뜻했다. 또 페놉스콧은 바위투성이 강이라는 의미였다.
나는 운반로를 홀로 걸어가 호수의 상류 쪽에서 증기선을 기다렸다. 수리 같기도 하고, 다른 종류 같기도 한 큰 새 한 마리가 다가오는 나를 보더니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앉아 있던 물가의 가지에서 날아올랐다.
우리는 그날 밤 먼슨에 도착했고, 다음날에는 마차를 타고 뱅거로 갔다.
다음날 오전, 우리는 올드타운으로 갔다.
나는 물가에서 인디언 여인이 빨래하는 것을 보았다. 바위 위에 서서 개천에 옷가지를 담갔다 꺼낸 다음 짧은 방망이로 두드렸다.
우리는 일행과 아는 사이였던 추장 넵륜의 집에 방문했다.
그는 내게 자기는 여든 아홉 살이라고 밝히며 지난 가을과 마찬가지로 이번 가을에도 무스 사냥에 갈 예정이라고 했다.
황야는 단순하고 거의 불모지에 가깝다. 어느 문학의 큰 덩어리를 만들어낼 시인의 운율에 영감을 선사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영감을 줄 것은 일부가 개발된 지역이다.
평범한 감각으로 자신의 개념과 연상을 담아 숲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문명인은 가공하지 않고, 용해되지 않은 토탄을 수염뿌리로 꽉 움켜쥐고 있는 경작지의 식물처럼 결국에는 숲을 애타게 그리워해야만 한다. 최북단의 뱃사공들은 일자리를 얻으려면 춤을 추고 연극을 해야 한다.
보통 시인의 길은 벌목꾼의 길이 아니라 숲에서 사는 사람의 길이다. 벌목꾼과 개척자는 세례자 요한처럼 시인을 앞질러 간다. 요한처럼 야생의 꿀과 메뚜기를 먹으며 죽은 나무와 그 나무를 먹고 살던 푹신한 이끼를 없애고 난로를 만들어 자연을 인간적인 곳으로 바꾼다. 시인을 위해. 하지만 소박하다고 해서 무미건조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조금 더 개방적인 정신의 소유자들도 존재한다. 숲에는 위엄 넘치는 소나무만이 아니라 연약한 꽃도 있다. 정제하지 않는 토탄 덩어리에서 영양소를 추출하지 못할 정도로 지나치게 섬세한 나머지 재배를 할 수 없다고 흔히 알려져 있는 난초 같은 꽃들 말이다. 이런 것들을 보면 힘은 물론 미(美)를 위해서도 시인은 때때로 벌목꾼의 길을, 인디언의 길을 따라 여행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머나먼 황야로 깊숙이 들어가 새롭고 더 상쾌한 뮤즈(Muse. 시인과 예술가들에게 영감과 재능을 불어넣는 예술의 여신)들의 샘물을 마시려면 말이다.
악당들처럼 우리 국경 안의 땅에 자라는 모든 것을 움켜쥐고 뽑아버려야 할 것인가?
Ⅲ. 세 번째 여정. 알라가시 강과 동쪽 지류
1857년 7월 20일 월요일. 나는 일행 한 명과 메인 숲을 향한 세 번째 여정을 시작해 다음날 정오 무렵 뱅거에 도착했다.
다음날 아침 페놉스콧 인디언들을 잘 알고, 나와 지난 두 차례 메인 숲 여행을 같이했던 친척이 나를 마차에 태워 올드 타운으로 데려가 주었다.
섬에 들어가서 제일 처음 만난 인디언은 조지프 폴리스였다. 내 친척은 어릴 때부터 그와 아는 사이였으므로 친근하게 ‘조’라고 불렀다. 그는 자기 집 마당에서 사슴 가죽을 손질하고 있었다.
1년인가, 2년 전에 그의 동생도 내 친척과 함께 숲으로 간 적이 있었다.
처음 폴리스는 하루 2달러를 요구했지만, 결국 1달러 50센트에 합의했다. 그리고 그의 카누를 사용하는 대가로 일주일에 50센트씩 받기로 했다. 그는 카누를 가지고 그날 저녁 7시 기차를 타고 뱅거까지 오기로 했다.
우리는 ~~~무스헤드를 경유해 북쪽으로 올라가서 페놉스콧 강을 따라 돌아오기로 한 것이다.
다음날 아침 일찍(7월 23일) ~~~인디언의 경우, 짐이라고는 도끼와 총을 제외하면 손에 들고 있는 담요 한 장이 다였다.
다음날(7월 24일) 아침 4시경, 꽤 흐린 날씨였지만 우리는 여관 주인과 함께 여명을 헤치고 호숫가로 향했다. 그리고 바위 위의 카누를 내려 무스헤드 호수의 수면에 띄웠다. 4년 전 이곳에 왔을 때, 나와 일행들은 셋이 타기에 다소 작은 카누를 탔다. 그래서 이번에는 더 큰 카누를 구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카누는 저번 것보다 훨씬 더 작았다.
무스헤드 호수는 제일 넓은 곳의 폭이 12마일이었고 직선거리가 30마일이었다.
나는 그에게 인디언 섬에서 한동안 머무르며 인디언 말을 배우는 학교에 가고 싶은데 가능하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오, 물론. 그런 사람 아주 많소”라고 대답했다. 얼마나 걸릴지 물어보자, 일주일이라고 했다. 나는 이번 여행 동안 내가 아는 걸 그에게 가르쳐줄 테니, 그가 아는 걸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혼쾌히 동의했다.
7월 25일 토요일
토요일 아침, 아침식사 자리에서 인디언은 다음날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여정을 계속할 것인지 무척 궁금해 했다. 그리고 내게 고향에서는 일요일을 어떻게 보내느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보통 오전에는 방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하고 오후에는 산책을 나간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 그건 아주 나쁘오.“ “당신은 어떻습니까?” 이렇게 묻자 그는 일을 하지 않고, 집에 있을 때는 올드타운의 교회에 나간다고 했다. 즉 백인들에게 배운 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프로테스탄트라고 칭하며 나도 그런지 물었다. 처음에는 뭐라고 대답할지 몰랐지만, 생각 끝에 진심으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텐트를 치고, 보통 큰 나무 밑에서 자라는 무스나무를 칼로 잘라 핀을 열댓 개 만든다. 그리고 전나무 가지 아니면 측백나무, 가문비나무, 솔송나무 등 뭐든 가까이 있는 나무의 가지를 한 아름 혹은 두 아름 모아 와서 침대를 만든다.
우리는 큰 자작나무 껍질을 식탁 삼아 그 주위에 둘러앉는다.
이 강에는 어떤 물고기가 사는지 알고 싶었기에, 우리는 물가의 젖은 덤불을 밟고 서서 낚싯줄을 던졌다.
그 사이, 인디언이 총을 쏘는 소리가 두 번 들렸다.
고요한 숲속 길에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이 크고 무서운 소리는 내게 자연에 대한 모욕처럼, 아무리 못해도 무례처럼 느껴졌다. 공회당이나 신전에서 총을 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7월 26일 일요일
흰목참새의 활기차다 못해 거의 금속이 맞부딪치는 듯 한 소리가 아침을 깨웠다. 이 소리로 온 숲이 다 울렸다.
나는 인디언에게 오늘 아침(일요일) 예배는 약 15마일 떨어진 채선쿡에서 드릴 거라고 했다.
인디언은 부지런히 노를 저으며 우리가 꼭 가야 한다면 자기도 고용인으로서 함께 가야만 한다고 했다. 그가 생각하기로는 일요일에 한 dfl에 대해 돈을 받지 않으면 아무 문제가 없고, 돈을 받으면 죄를 짓는 것이었다. 나는 백인보다 더 ㅇ머격하다고 그를 칭찬했다. 그런데도 마지막에 보수를 계산할 때 그는 일요일 분도 잊지않고 챙겼다.
그는 아주 독실한 사람인 것 같았다. 아침저녁으로 텐트 앞에 꿇어앉아 인디언 말로 우렁찬 기도를 올렸다.
우리는 곧 내가 4년 전 야영을 했던 섬을 지나갔고, 나는 그때 머물렀던 바로 그 지점을 알아보았다.
나는 그가 보스턴, 뉴욕, 필라델피아 등등에 가보고 싶다거나, 거기서 살아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는 곧 그곳에서 자신이 얼마나 가엾은 처지가 될지 깨닫고 조금 마음이 가라앉은 듯 이렇게 말했다. “내가 뉴욕 살면 제일 가난한 사냥꾼이 될 거요.”
그는 백인들과 비교해 자신이 우월한 부분과 열등한 부분을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폴리스에게 검정 가문비나무 뿌리를 채집해서 실 만드는 과정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는 머리 위의 나무는 올려다보지도 않고 지면을 살펴보다가, 곧바로 검정가문비나무 뿌리를 알아보고는 가는 뿌리를 골라 3에서 4피트 길이로 잘랐다. 파이프 몸통 정도의 크기였다. 그는 이 뿌리의 한쪽 끝에 칼로 흠을 낸 뒤, 절반씩 엄지와 검지로 잡고 순식간에 뿌리 전체를 둘로 쪼갰다. 뿌리는 원통을 반으로 자른 듯한 똑같은 모양의 두 조각으로 나뉘었다. 그는 한 조각을 내게 주며 “당신도 해보시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내 손에서는 뿌리의 한쪽이 먼저 떨어져 나가, 아주 작은 조각이 생겼을 뿐이다.
그 다음 폴리스는 각각의 절반에서 껍질을 벗기고, 작은 향나무 껍질 조각을 양손으로 잡아 볼록한 쪽에 대고 누르며 뿌리를 이에 대고 위쪽으로 끌어당겼다.
인디언은 치아가 튼튼하다. 폴리스도 백인이라면 손을 사용할 만 곳에 치아를 상용하는 때가 있었다. 그들의 치아는 세 번째 손 역할을 하기 충분했다. 이렇게 해서 폴리스는 순식간에 아주 깨끗하고 질기며 유연한 실을 얻어냈다.
폴리스는 이렇게 준비한 가문비나무 뿌리를 카누 한 대에 가득 채우면 50센트를 받는다고 했다.
나는 <카누> 수리에 필요한 피치를 어디서 구할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재료를 말해주지 않고, 그저 완성된 것을 보여주기만 했다. 둥글게 뭉친 콩 만 한 것으로 검은 피치와 비슷해보였다. 그는 남자에게는 아내에게도 말해주지 않는 것이 있는 법이라며 끝내 재료를 알려주지 않았다.
밤이 되기 직전, 우리는 무스쿼시(그는 사향쥐를 이렇게 불렀다)를 보았다. 이번 여행에서 본 유일한 사향쥐였는데, 강 반대편에서 유유히 헤엄쳐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인디언은 한 마리 잡아서 먹고 싶다며 우리에게 소리를 내지 말라고 했다. “기다리시오 내가 불러 보겠소” 그는 기슭에 납작하게 엎드리더니, 입술 사이로 찍찍거리는 가늘고 기이한 소리를 내며 상당히 노력을 기울였다. 나는 크게 놀랐다. 내가 드디어 황야로 들어왔다는 것, 그가 정말로 야만인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사향쥐에게 말을 걸다니! 사향쥐와 폴리스 둘 중 누가 더 낯선 존재인지 알 수 없었다. 돌연 그가 ㅇ니간성을 버리고 사향쥐 쪽으로 가버린 듯했다. 하지만 내가 본 사향쥐는 조금 망설이기는 했지만 돌아서지는 않았다. 인디언은 쥐가 모닥불을 봤기 때문이라고 했다.
7월 28일 화요일
우리는 이제 알라가시 강에 상당히 들어와 있었다.
7월 29일 수요일
이날 우리가 카누를 탄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7월 30일 목요일
나는 일행을 찾으러 가기 위해 아침 일찍 인디언을 깨웠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다. 인디언이 갑자기 외쳤다. “무스! 무스!”
인디언은 서둘러 총알을 장전해 두 차례 무스 쪽으로 발사했다. 무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는 무스가 서 있던 곳으로 다가갔다. 그때 인디언이 “죽었소!”라고 외쳤다.
나는 줄자로 무스의 크기를 쟀다. 발굽 끝에서 어깨까지 6피트였고, 누워 있는 상태에서 길이는 8피트였다. 밤이 되기전 인디언은 가까운 숲속을 돌아보고 왔다. 그리고 돌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굉장한 보물 발견했소---5,60달러는 할거요.” “그게 뭡니까?” “철제 덫이요, 통나무 밑에 삼사십 개 잇었소, 세진 않았소. 인디언이 만든 것 같소--개당 3달러는 할 거요.”
8월 1일
나는 아침 일찍, 야영지와 12피트가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큼직하고 붉은 류시스커스를 두세 마리 잡았다. 이 물고기들과, 밤새 주전자 속에서 끓게 내버려 둔 무스의 혀와 나머지 식량까지 합치니 호화로운 아침식사가 되었다.
우리는 맛있기로 유명한 입술은 어떻게 할 거냐고 한두 번 물어보았다. 인디언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올드타운에 가져가서 마누라한테 줄 거요. 항상 구할 수 있는게 아니니까.”
8월 2일 일요일
우리 야영지는 마타왐키그에서 약 9마일 떨어져 있었다.
8월 3일 월요일
우리는 이날 40마일을 이동해 오후 4시경 인디언의 집 맞은편에 상륙했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조 폴리스와 작별했고, 이후 그를 보지 못했다. 우리는 마지막 기차에 몸을 실을 채, 그날 밤 뱅거에 도착했다.■ [Review]
책을 읽다가 컴퓨터 화면에 구글 지도를 열고 미국 동부 메인주를 찾아갔다. 지도의 하단 부 대서양 가까이에 뱅고어(Bangor) 라는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도로망 표시를 보면 이곳이 메인주에서 중심도시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곳에서 북쪽으로 길게 뻗은 페놉스코트(Penobscot) 강줄기와 그 상류에 메인주의 최고봉인 카타든(Mt. Katahdin)산이 있다. 산 아래로 거대한 채선쿡(Chesuncook) 호수가 있다. 그곳보다 더 상류, 캐나다 국경 근처에 알라가시(Allagash)호수와 강줄기가 보인다.
‘소로’는 그의 나이 30대 시절 3차에 걸쳐 고향인 매사추세츠 콩코드에서 이곳 메인주를 여행했다. 코스는 모두 벵고어에서 페놉스코트 강을 거슬러 오르는 길이었지만 목적지는 달랐다. 1차(1846년)는 카타든(Mt. Katahdin)에 오르는 길이었고, 2차(1853년) 여행은 채선쿡 호수, 그리고 3차(1857년)는 알라가시강과 동쪽 지류였다. 이 책에는 여행길에서 그가 보고 느낀 자연에 대한 느낌을 특색 있게 담았다.
미국을 대표하는 사상가로 칭송받는 ‘소로’는 평생 물욕과 상업주의에 항거한 진정한 자유인이었다. 특히 자연에 대한 깊은 사색을 통해 인간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지는 자연주의적인 삶을 추구했다. 그런 그가 20대 시절에 월든 호숫가에 통나무집을 짓고 2년간 생활한 경험을 바탕으로 펴낸 책 <월든>은 전 세계인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여행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자 하는 열망 때문에 떠난다. 그것은 우리의 눈이 습관화된 곳에서는 새로운 것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목적지는 조금 달랐지만 같은 지역을 세 차례씩이나 여행한 그는 자신의 여행을 “인간과 동떨어진 거대한 숲에서 영감을 얻기 위해 떠났다”고 했다. 그에게 영감은 “시인이 갈망하는 운율이며 문학의 한 덩어리”였다. 그는 그것을 “상쾌한 뮤즈(Muse)의 샘물”이라고 표현했다.
거대한 원시의 숲과 늪지대, 급류의 강을 손바닥만 한 베토(카누의 일종)에 의지한 채 거슬러 오르는 모습을 이렇게 적었다. “조는 우리가 앉을 수 있게 바닥에 자작나무 껍질을 깔아주었고, 가로대에 엷은 향나무 널빤지를 대어 등을 보호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고물의 가로대 위에 앉았다. 그리고 우리는 교대로 노를 저었다. 다리를 뻗은 채로 앉아도 보고, 무릎을 꿇은 채로 앉아도 보고, 무릎을 땅에 대고 몸을 세우기도 했지만 어떻게 해도 견디기가 힘들었다.”
강둑은 7~8피트 높이였고, 기슭에는 흰색 또는 검정색 가문비나무와 수많은 종류의 나무들이 빽빽이 늘어서 있었다. 간혹 보이는 느릅나무는 이제 막 갈색으로 물들어 공손해 보이기까지 했다. 새들이 날고, 누더기를 입은 인디오 소녀가 슬픔에 잠긴 얼굴로 강가에 빨래를 쌓아놓고 힘겹게 방망이질을 하는 모습도 보였다. 누른 도요새 옆을 아주 가깝게 지날 때, 새는 아픈 것처럼 강가에서 깃털을 부풀리고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1차 여행에서 소로는 숲과 자연의 아름다운 풍광, 그리고 그곳에서 생활하는 벌목꾼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벌목꾼들은 생계를 위한 도구로 숲을 보며, 시인은 영혼의 갈급함을 찾아 그곳에 간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뗄 수 없는 관계로 벌목꾼들이 길을 만들어준 길로 시인은 간다고 표현했다. “벌목꾼과 개척자는 세례자 요한처럼 시인을 앞질러 간다.”
해발 5300피트, 크타든(Mt. Katahdin)에 올랐을 때 안개가 가려 사방은 보이지 않았다. 안개는 적개심을 품고 신에 반항하는 그에게 준엄한 꾸짖음으로 대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하산하는 길에 구름이 걷히고 눈앞에 펼쳐진 장관을 보고서야 정상을 허락하지 않았던 산에 대해 조금은 섭섭했던 마음을 이렇게 위로했다.
“우리는 이곳에서 보는 풍경이 정상에서 보는 풍경만큼 좋으리라, 그만큼 멀리 보이리라, 구름과 안개가 없는 산이 산이겠는가, 생각하며 자신을 위로했다.”
2차 여행 ‘채선쿡 호수’로 가는 길에는 무스 사냥에서 그가 받음 강한 인상이 담겨 있다. 그들이 고용한 인디언 안내자 ‘조’는 베토를 몰면서도 틈만 나면 무스를 유혹하는 나팔을 불었다. 결국 그는 무스를 발견하고 거침없이 총을 쏘았다. 그리고 죽은 무스를 순식간에 분해하여 가죽을 벗기고 고기는 먹을 만큼만 챙겼다. 그는 가죽을 소중히 다듬어 돌아오는 길에 2달러 25센트를 받고 팔았다.
소로는 자신도 무스의 죽음을 보기 전까지는 그들과 함께 사냥에 열을 올렸지만, 무스의 죽음을 본 후로는 인디언이 거칠고 야비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함께 사냥에 동조한 자신을 책망했다. 무스를 살해한 장면을 자연이 준엄하게 지켜보았을 것으로 생각했다.
3차 여행은 2차 여행 후 4년 만이었다. 1, 2차 여행보다 더 북 쪽 알라가시 호수와 그 강줄기들이었다. 안내를 맡은 인디언 조. 폴리스는 민첩하고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다. 6000달러의 재산이 있고 올드타운(Old Town)에서는 제법 좋은 주택을 소유한 부자 축에 드는 사람이었다. 일찍이 기독교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아 진정한 프로테스탄트임을 자부하는 사내였다. 그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그는 여행 중 아침마다 텐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우렁찬 기도를 드렸다.
소로는 이 여행에서 인디오들의 자연과 더불어 사는 지혜를 눈여겨보기 위해 조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
“나는 이번 여행 동안 내가 아는 걸 그에게 가르쳐줄 테니, 그가 아는 걸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흔쾌히 동의했다.”
‘소로’는 ‘조’에게서 인디언 말을 배우고 지명과 연관된 의미를 알아냈다. 조는 끊임없이 무스에 정신을 쏟으면서도 맡은 의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그의 품삯은 하루 1달러 50센트였다. 이번 여행에서도 인디언 ‘조’는 무스를 한 마리 잡았다. 게다가 숲으로 들어갔다가 다른 인디언이 숨겨놓은 철제 덫을 발견하는 바람에 큰 횡재도 했다. 덫은 한 개에 3달러 가치가 있으며 그가 발견한 덫은 스무 개쯤 되었다. 똑똑한 인디언은 이번 여행에서 노동의 대가로 받은 돈보다 더 많은 부수입을 올린 것이다. 그는 나중에 무스의 고기를 좀 더 챙겨오지 못한 일을 후회했으며, 고기는 일행과 나누어 먹었지만 가장 맛있는 부위 주둥이는 마누라에게 주려고 별도로 챙겼다. 아마도 무스 가죽도 지난번 여행길에서 인디언 안내자가 받았던 금액보다 더 많이 받고 팔게 될 것 같다.
비슷한 곳을 여행을 글이라서 비슷한 내용에 약간의 지루함도 느끼지만 ‘소로’ 특유의 풍경 묘사에 독자는 빠져든다. 책 한 권 읽는 것만으로도 원시의 숲을 다녀온 것만큼, 아니 더 큰 평온함이 느껴진다. 답답한 일상에 쫒길 때 이 책을 읽을 수 있다면 행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