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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自轉的) 자전(自傳)
rotational autobiography
문학발전에 훌륭한 업적을 쌓으신 모든 분을 존경합니다. 그에 비하여 초라한 제가 훌륭하신 분들께 인사드리는 것은 큰 영광이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합니다.
저는 예천에서 나고 점촌, 봉화, 영주에서 자랐습니다. 6, 25 때 부모님과 6남매가 대구 팔공산까지 피난길을 가며 오며 전쟁의 비극을 생생하게 겪었던 일과 여러 번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일과 제재 업을 하시던 부모님의 사업실패로 일곱 살 때 봉화군 춘양면 애당 마을에서 태백산 깊은 곳까지 나무하러 다니다가 안개 자욱한 날 제 키보다 훨씬 큰 흑 구렁이에 먹힐 뻔했고, 어둑한 날 오래 묵은 큰 늑대로 추정되는 짐승에 먹힐 뻔했으나 빈집에 뛰어들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그 후 도시로 나와 부모님과 외삼촌께 동시를 배우고, 봉화 춘양 애당 마을에서 아이들과 자라던 이야기를 중2 때 ‘산골 소년’이란 동화를 썼고, 동화로 만화 한 권을 그려서 신동이란 극찬을 받았습니다. 이웃에 머슴살이하다가 이사 온 아이를 그림과 글씨를 연마하게 했으며, 소의 흥정을 붙여 주고 보수를 받아서 술로 살아가는 그 아버지에게 그 아이를 중학 보내는 조건으로 3년 동안 쌀을 대 주었습니다.
졸업하던 해에 큰 홍수가 나서 공병대가 강줄기를 돌리고 다리 공사를 할 때 그 아이와 함께 자갈과 모래를 져 올려서 번 돈을 가지고 서울에 가서 안 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서로 시계를 전당포에 잡혀서 도우며 야간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아이를 먼저 도왔습니다. 태양 전기(엘지의 모체), 이천전기 본사에 준 사원으로 입사하였는데, 필체와 수완이 뛰어나서 정사원과 계장이 되었고, 효성 중공업에 과장으로 스카우트, 현대 엔지니어링에 스카우트, 차장으로 근무하다가 뚝섬에 공장을 차려 7형제를 모두 성공시켰습니다.
저는 한국 최초 여자비행사 권기옥 님의 도움으로 신대방동 공군사관학교와 공군대학 중앙도서관(그 당시 책이 가장 많았음)에 근무하며, 그때 책을 많이 읽은 것이 작가가 된 밑거름이 되었나 봅니다. 그 후 신필름에서 현장시나리오를 담당했는데, 제작부장님께서 제가 밤을 새워 쓴 시나리오(역사 탐정물)를 보시고 아주 많이 극찬을 했습니다.
월남전에 참전 중 소년 한국에 단편소설 ‘병사의 일기’가 당선되었으며, 벙커에서 쓴 ‘남십자성’을 인편으로 보냈으나 전해지지 않아 친구를 통하여 연락했더니 비행기를 타고 부대로 오셔서 함께 군사기록영화를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제대 후 대구 칠성동에서 자동차 부속상을 운영했는데, 고가의 외제 유압용 대형 완충장치가 마모되어 들어오니 미안해서 해체할 수도 없게 된 것을 연구하여 분해하고, 여러 개에서 정밀한 부품을 모으고, 특수 유압유를 대량으로 구매, 비포장도로에 맞도록 고안, 완충장치 내부를 보호하게 하고, 특수 리테이너 링(고무)을 고안 제작하여 주었더니 외제 신제품보다 좋다고 하여 특허를 내어서 공장을 운영했습니다.
그 특허의 방법과 연출기법을 문학 구성방법에 응용, 문학의 여러 장르와 시나리오, 드라마에 당선(유현목 감독과 방송국 피디들이 극찬), 제 작품에 매료된 후배들의 부탁을 뿌리치지 못해 같은 방법으로 많이 당선시켰으며, 심지어 제가 집필하던 연속극의 계약 기간을 어겨서 손해배상을 당할 뻔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전국 순회 낭송회를 개최하였으며, 자연스럽게 멘토링 하여 출판사를 설립하고 베스트셀러 단행본을 많이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고엽제 후유증이 악화하여 경북대병원, 서울대병원, 아산병원 등을 전전하며 가산을 탕진하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반 의사가 되어 꾸준한 자가 연구로 호전되어 50회분 연속극도 준비 중이며, 늦었지만 오직 문학학교를 위하여 국내외 문학상에도 도전할 예정입니다.
경남 통영의 '남매바위'와 경북 봉화 금정광업소에 대한 ‘전설의 고향’도 수년 동안 취재하고 동화형식으로 집필하였고 뛰어난 연출과 배우들의 연기까지 지도하여 명연기로 촬영, 방송했으며, 방송 다음 날 아침에 초등학교에 나가면 아이들이 지난밤에 본 동화형식의 전설을 보고 신이 나서 떠들어대었습니다.
봉화 청량산성 김생굴(宋志英 같은 분도 ‘그 山河 그 人傑’을 통해서 전국을 다 뒤져서도 김생의 자취를 찾지 못했다고 적었습니다)에 대한 역사도 전국을 뒤져서 찾아내어 동화형식으로 집필, 문학관을 능가한다는 극찬을 받은 바 있고, 그곳에서 소년 김생이 붓글씨를 연마하여 신필(神筆)이 되었다는 것이 고증을 통해서 사실임을 신문에 기고도 했습니다.
영주문학도 예종숙 시인이 성악을 하던 부인과 함께 똑같은 톤으로 라디오 드라마로 방송할 원고를 읽고는 ‘이렇게 글을 잘 쓰시는 분은 처음 본다’며 방송도 안 한 원고를 싣자고 하여서 할 수 없이 졸작이지만 몇 편의 詩를 낸 것이 창간호였는데, 절필하고 휴양차 위로받으려 내려갔을 때 오히려 마음의 상처만 받고, 수술하느라 연락을 못 했는데, 제명했더라고요.
그래도 신인들 지도하는 회원들 소주라도 사서 드시라고 짝사랑의 후원금을 보냈으며, 1975년 봉화 나환자촌을 작가들과 함께 취재하여 ‘축복’이란 다큐멘터리 소설을 썼고, 그 작품에 애정이 있어서 ‘경북 문단’에서 경북 출신 작가 특집에 김동리, 이은성 등과 함께 ‘축복’이란 그 작품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경북뿐만 아니라 전국의 골짜기마다 막걸리를 싸 들고 찾아다니며 취재하여 구미 등의 신문 잡지에 연재도 했고, 우리 민간전설 총서 영주 봉화 편(한국문화사 刊)도 출간했고, 전국 편(한국문화사 刊)도 1, 2권 출간했습니다. 원래는 중앙일보에서 사장의 승인까지 났으나 팀장님이 영주시청에 들려서 올라가는 길에 영주 봉화 편이 인기가 좋더라며 중앙일보의 CD 한 질을 맡아달라고 하였으나 거절하였더니 얼마 후 원고가 반송되었습니다. 한국문화사에서는 많이 팔았으나 저자는 주는 대로 받았습니다.
영주문학에 재가입하며 더 늦기 전에 2014년에 경북 문단에도 정식으로 가입했으나 선생님들께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지 못하여 대단히 죄송합니다.
40여 년 동안 연구를 거듭하여 현재는 과학적인 글쓰기 프로젝트를 개발, 무료 문학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작가실을 운영하며 기금도 많이 모았고, 그동안의 교재와 자료를 모아 책으로 만들어서 많은 분과 공유하려고 합니다.
저의 과학적 글쓰기 프로젝트는 방법론입니다. 현대는 방법론이란 것은 잘 아실 줄 믿습니다. 방법론은 과학입니다. 방법론은 문학뿐만 아니라 삶에도 적용하면 대성할 수 있음을 그동안의 경험을 통하여 입증하였습니다.
구성방법을 익혀야 비로소 지혜의 봇물이 열리게 되고 마침내 튼실한 작물의 눈을 틔울 수 있습니다. 실력과 인격을 동시에 향상하게 하고 이미 향상된 분에게 구성법을 익히게 하면 좋은 글이 저절로 형상화됩니다. 그러므로 구성이란 필수적이긴 하지만 자칫 테크닉으로 오해받을까 봐 섣불리 밝히기가 심히 두려운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문학학교도 온라인은 하고 있고 오프라인도 곧 설립하려고 합니다. 온․오프 문학학교 임원으로 유능한 분들을 임용하려고 하오니 많이 응모하시고 추천을 바랍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 말씀은 1996년에서 1999년 사이에 경북문단 특집으로 경북 출신 작가와 작품을 실어주었는데, 경주 출신 김동리 선생님과 ‘인간설화’ 작가와 예천 ‘동의보감(허준)’의 작가(이은성)와 함께 표지에 제 이름(권기훈)과 단편소설 ‘축복’이 실린 것을 봤습니다. 이은성 작가님은 제가 KBS에서 장형일 PD와 영화 조감독 때부터 친하여서 제가 하려던 ‘행복의 문’이란 연속극 시놉시스를 장형일 PD의 권유로 이은성 작가가 같은 예천 출신이므로 주어서 연속극으로 집필하게 하였다는 것을 여담으로 들려드립니다.
전국 순회 강의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그 전에 여러 선생님들의 고견을 듣고 함께 하고 싶습니다. 실제로 봉급을 드리고, 저는 후원만 하려고 합니다. 제 얘기만 해서 죄송합니다. 아직 몸이 정상이 아니어서 두서없습니다. 용서 바랍니다. 문학을 사랑합니다.
끝으로 제가 글을 쓰게 된 동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경북 봉화군 춘양면 애당 마을에서 어머니는 여동생을 낳으셨고, 아버지는 병환에 계시고, 삼 형제가 미역을 사기 위해 생소나무 장작을 지고 30리길 춘양 장에 가서 팔려고 했으나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옷까지 헐벗은 저는 그때 얼어 죽기 몇 초 전이었습니다.
마침 얼굴이 하얀 20, 30대의 이불가게 아주머니께서 이불로 폭 감싸 안아주시고 국밥을 먹여주시고, 미역까지 사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갚을 길 없어 이듬해 봄 미처 덜 익은 자주감자 한 자루를 지고 달려갔으나, 저를 살리신 아주머니께선 하늘로 가셨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눈물이 나지 않는 병을 앓았습니다. 자살 충동을 받았으나 다시 생각했습니다. 추위를 타는 꼬맹이들에게 아주머니의 이불을 나눠주기로 했습니다.
남모르게 많은 분을 도왔습니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저는 기억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젊을 때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순간순간 그 일을 잊고 억울한 일을 당하다 참지 못하면 큰 사건은 법정에 나가 반드시 이겼습니다. 상대방의 변호사가 얼굴이 붉어지고 말을 못 했습니다. 저는 무엇이든 과학적인 구성방법대로 임했습니다. 한 번은 형님의 사건에 증인으로 나갔는데, 판사가 그 자료를 증거로 채택하겠다고 했으나 상대방의 거대한 회사에서 실력 행사하였는지 판사를 바꾸어버렸습니다. 도와주면 대법까지 가더라도 반드시 이길 수 있지만 욕심이 많아 너무 많이 청구하여 그렇게 되었으므로 포기하게 했습니다.
심지어 예총을 담당하는 부서의 최고위 분이 저의 어린이와 청소년 책 원고를 보시고 좋은 책이 되도록 추천해 주겠다고 했고, 자금이 필요하면 돕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부서든 원하면 근무하도록 돕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감사의 인사만 드렸습니다. 그 후 權奇文이란 文자가 너무 직설적이고 강직한 것 같아 薰(향 풀 훈 : 향 풀香草, 향내 나다, 향기, 좋은 향기)자로 바꾸었습니다.
내년쯤 국내외의 더 좋은 문학상에 도전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제가 한평생 연구한 과학적 글쓰기 프로젝트를 실현하기 위한 늦은 도전입니다. 과학적 문학학교를 설립하여 추위를 타는 분들에게 아주머니의 이불을 나눠주어서 문학발전에 작은 보탬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부지런히 치료하고 운동하여 연속극도 집필하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운영기금을 계속 지원하려고 합니다. 저는 다만 정상적인 운영이 될 때까지 지원만 할 것입니다. 짧은 생각을 바로잡아 주시고, 하시고자 하는 일 모두 이루시기 바랍니다. 남은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은혜에 보답하며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7년 10월 5일
權奇薰(본명 : 權奇文) 올림
과학과 영(靈)의 만남
어릴 때 태백산 속에서 흑 구렁이와 오래 묵은 늑대로 추정되는 짐승에 먹힐 뻔했고, 하늘 밑 첫 동네 구마동에서 토담집 광창 관솔 불빛에 어슬렁거리는 호랑이를 똑똑히 보며 자랐다. 도시로 나와 부모님과 외삼촌께 동시를 배웠으며, 중2 때 태백산 아이들과 자라던 얘기를 동화로 썼다. 다시 그 동화를 만화로 그려서 신동이란 극찬을 받았다. 그 후 서울 공군사관학교와 공군대학 중앙도서관에서 많은 책을 접했고, 영화사에 근무하며, 잉크가 마르지 않은 유명 작가의 시나리오를 가장 먼저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시나리오를 써서 극찬을 받았다. 그리고 월남전에 참전하여 생생하게 살아있는 소설을 써서 당선되었으며, 시조 작가와 시조를 주고받으면서 신문에서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제대 후 발명 특허를 연구하며, 발명 특허의 방법을 문학 구성방법에 응용하여 여러 장르에 당선되었다. 나의 작품에 매료되어 찾아오는 후배들에게 같은 방법으로 시인과 작가로 당선시켰다. 그렇게 과학적인 글을 써오던 중 월남전에서 얻은 그 당시에는 병명도 알 수 없었던 고엽제 후유증으로 대학병원을 전전하며 온몸이 마비되어 잠결에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릴 때 아내가 사력을 다해서 주물러 주어서 살아나곤 했다. 그런 몸으로도 사력을 다해 중동에 나가 달러를 벌어들이기도 했고, 건설현장에서 터 파기부터 마감까지 일꾼들 보다 앞장서서 일했다. 그렇게 삶의 그림과 글을 썼으나 지병의 악화로 고향에 내려가 전화도 여러 번 바꾸고, 담배와 술도 끊고, 친구도 끊었다. 아무 생각하지 않고 요가를 하던 몇 년 후 눈을 감고 있는데, 문득 온 세상이 훤히 보였다. 아, 이것이 불가에서 말하는 도를 통한다는 것이구나! 속으로만 생각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도 나의 그림을 본 사람들은 국전에 들어온 작품들을 어느 작품이 잘 되었느냐고 먼저 물었다. 예술이란 목적이 없어야 순수한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거나 그 순간의 삶을 표현했을 뿐이다. 세상을 모르는 못난이였다. 그러므로 모든 분의 생각을 존경하고 모든 표현을 존중한다. 모든 분을 스승으로 생각하고 은혜에 보답하며 살고 싶다. 다시 마음을 공부하며 심장병을 치유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