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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king back, I realize I jumped into the credentialized version of bestowing my “knowledge” on others long before I understood where the complete path was headed. I was on a fast track to climb the ropes and become important. I’m embarrassed to admit that after years of suffering in confusion, I was looking for a win, not enlightenment. That could take eons! I didn’t really understand nonexistence and egolessness, even though I could talk about them. Now, thanks to the ups and downs of the path of practice, I see that these truths are at the core of Buddhism.
돌아보니 나는 완전한 수행의 길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 지 알지도 못한채 마치 나의 ‘알음알이’를 다른 사람에게 전수하는 자격이라도 부여받은 것 인양 설쳐댄 것을 깨달았다. 나는 줄을 잡고 기어오르는 빨리 가는 길에 올라, 중요한 인물(VIP)이 되고자 했다. 혼란 속에서 몇 년 동안 고통을 겪고 나서야 창피하지만 그 사실을 받아드리게 되었다. 나는 성공하기를 바랐지, 깨달음을 바란 게 아니었다. 이런 (사실을 깨닫는)데는 영겁의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내가 비록 존재의 무자성과 무아를 이야기할 수는 있을지 언정 그걸 진짜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이제, 수행의 길에 오르락내리락 한 덕분에 이런 진리가 불교의 핵심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But I wasn’t conscious of that at the time. I was self-conscious. I was doing everything I had always done to preserve my self. Ego is not a habit that can be easily broken at a month-long, all-inclusive meditation/yoga/ayahuasca retreat. Ego is the addictive game we’ve all played since childhood, maybe since the beginning of time. We so want to exist. We so want to be something. Something that works for us. Something that gets us attention and guarantees the safety of an identity in this crazy, complicated, overwhelming world. We want to be solid, not empty. We want to be in control. That’s the truth of suffering.
그러나 그 때는 이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나는 자의식에 싸여 있었던 것이다. 나의 에고를 보존하려는 의도에서 모든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고는 한 달 동안의 일괄형 명상/요가/아야화스카(아래 참고) 모임으로도 쉽게 부서지지 않는다. 에고는 어린아이 때부터, 아니 시간이 시작된 이래로부터 우리가 항상 벌이고 있는 중독성 게임이다. 우리는 그렇게 존재하길 원한다. 우리는 무언가가 되고 싶은 거다. 그 무언가가 우리에게 힘을 발휘한다. 이 미친 것 같으면서 복잡하며 우리를 압도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주의력을 잃어버리지 않고 또 자신의 정체성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그 무언가를 말이다. 우리는 텅 비워지려는 게 아니고, 견고하고 단단해지길 원한다. 자신을 자기 통제 하에 두기를 원한다. 그것이 바로 고통에 대한 진리(고성제)이다.
*일괄형 명상코스: 명상과 요가, 채식과 수면, 환경까지 완전 세트로 꾸며진 명상 프로그램.
아야화스카: 브라질, 페루, 에콰도르, 칠레 등 남미에서 나는 어떤 식물의 덩쿨과 잎을 채취하여 끓여 그 즙을 마시면 환각효과가 나면서 자연과 합일 되는 경험이나 심층의식을 탐험하게 된다는 보고가 있다. 이걸 서양인들이 돈을 주고 현지에 가서든지 아니면 LA나 캘리포니아 주, 콜로라도 주 등의 동호인 모임에 참석하여 환각경험을 한다.
Trungpa’s Cutting Through Spiritual Materialism is the driver’s manual for what I experienced at this stage in my practice. “When we have learned all the tricks and answers of the spiritual game,” he wrote, “we automatically try to imitate spirituality, since real involvement would require the complete elimination of ego, and actually the last thing we want to do is to give up the ego completely.”
트룽빠의 “영적인 물질주의를 절단하기”는 내가 수행의 단계마다 경험하게 되는 운전자 교범이다. “우리가 영적인 게임에서 일어나는 모든 속임수와 답을 안다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영성을 모방하려고 애쓰게 된다. 진정한 참여란 에고의 완전한 제거를 요구하는데, 그건 사실 에고가 제일 하기 싫어하는 것으로 에고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Our ego, the same ego we’ve lugged around all our lifetimes, embraces the spiritual path as its new breeding ground, and we mistake that for progress. As Trungpa observed, “Ego is able to convert everything to its own use, even spirituality.” The irony is that meditation is a gentle practice that opens us up to the realization that our very identity is a sham, and that’s a bit of a whammy. It’s natural to want to run away.
수행의 길에 들어서도 우리는 일생동안 끌고 다니던 그 에고를 발판 삼아 새로운 방식으로 똑 같은 그 에고를 키운다. 그리고 우리는 그걸 진보한다고 착각한다. 트룽빠가 말했듯이 “에고는 모든 걸 자기 식으로 써먹는다, 심지어 정신적 수행까지도” 역설적으로 수행이란 우리의 정체성이 가짜라는 걸 깨닫도록 부드럽게 마음을 여는 것이다. 그건 일종의 재수없는 짓이다. 자연히 도망가고 싶을 것이다.
I have grown to see this as a very tender point of transition. When you begin to get a real taste of the teachings, glimpse egolessness, and can finally look up from your own suffering to see the suffering of others, it’s time to talk about compassion.
나는 전환의 바로 그 취약한 시점에서 이걸 볼 만큼 성장했다. 당신이 가르침의 진정한 맛을 보기 시작하고 에고-없음(무아)을 흘낏 본다면 자신의 고통을 봄으로써 타인의 고통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때가 바로 자비심을 이야기할 시점이다.
Egolessness and compassion have to be deeply experienced and understood. That takes a lot of practice and study. People on a fast track who convince themselves they’ve “got it” before they do inevitably end up crumpled on the road, victims of their own game. That’s not necessarily a bad thing. I’ve been there more than once. Having my tail between my legs is sad, painful, and a relief. Right there, that moment, with the ego shattered on the ground, is the prime time to see the mind as it really is: utterly empty and filled with compassion.
에고-없음과 자비는 깊이 체험되어야 하고 이해되어야 할 문제이다. 그건 많은 실천과 공부가 필요하다. 나는 ‘그걸 얻었어!’라 확신하며 빨리 가려는 사람들은 길에서 반드시 쓰러질 것이며, 자기가 벌인 게임에 나가떨어지는 건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게 반드시 나쁜 일이라 할 수는 없다. 나도 한 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그랬으니까. 가랑이 사이로 꼬리를 감추는 건 슬프고 아팠으나, 다행이기도 했다. 바로 거기 그 순간, 에고가 바닥에서부터 부서진다. 그때가 있는 그대로의 마음-완전히 텅 비었으며 동시에 자비로 가득 찬 마음-을 보게 되는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Thank heaven and earth there are genuine teachers who have mapped this process. Without them I would have quit a long time ago. Tenacity, driven by a certain desperation, may be my only spiritual virtue. I’ve often felt my sense of progress oscillating, but now, after many years of returning to my breath, I can honestly say I feel less at the mercy of a whole range of emotions that once had control over my actions, reactions, and interactions.
오, 하늘이여, 땅이여, 이 과정을 로드맵으로 보여주는 진정한 스승이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가! 그들이 없다면 아마 나는 오래전에 그만 두었을 것이다. 어떤 절실함에서 나온 끈기가 나의 유일한 정신적 덕목일지도 모른다. 가끔 내가 진보한다는 느낌이 왔다 갔다 한다고 느꼈다. 그러나 이제, 나의 호흡으로 돌아온 지 여러 해가 지난 지금, 전에는 나의 행동과 반응과 인간관계를 지배했던 폭 넓은 감정의 편차에 의해 훨씬 덜 좌우됨을 느낀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다.
So no, mindfulness did not make me a bitch: I’ve been one all along! I just wrapped my habitual bitchiness up in new clothes. Mindfulness helps me by highlighting my ego when it arises and reminding me to add a little kindness to the mix.
그래서 아니, 마음챙김은 나를 미친년으로 만들지 않았다. 나는 늘 하나인 그대로이다! 나는 내 습관적인 미친년 같은 성질을 다만 새 옷으로 감쌌을 뿐이었다. 마음챙김은 에고가 발동할 때 그걸 주목하게 하여, 복잡한 성격에 대해 조금 친절하게 대해야 된다는 걸 상기시켜 준다.
How fast one moves along the path is very personal, but the traditionally suggested rate is the walk of an elephant. I have taken that to heart. I’ve seen too many people ruin their meditation by becoming experts, teachers, or self-proclaimed leaders. I may be a beginner all my life, and that’s a good place to be. If I come across as aloof, well, it’s because I’m still learning how to hone that sharpness with compassion.
수행의 진도가 얼마나 빨리 나아가는 지는 개인적인 것이긴 하지만, 전통적으로 제시되는 속도는 코끼리의 걸음걸이다. 나는 이걸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다. 나는 전문가, 선생, 혹은 자칭 지도자가 됨으로써 자신의 수행을 망쳐버리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나는 내 삶에서 초보자일지 모르지만, 그게 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인 걸 안다. 내가 쌀쌀맞다고 한다면, 흠, 그건 그 부분을 자비심으로 연마하는 걸 배우는 중이라고 하겠다.
In the meantime my mantra is: Sit, sit, sit. 당분간 나의 만트라는 ‘앉아라, 앉아라, 앉아라’이다.
Laurie Fisher Huck is the author of three books about Buddhism: Meditation for Kids, Life is Weird, and Magic Happens. She is an artist and has been a student of the Karma Kagyü lineage since 1986. She lives in Oaxaca, Mexico.
<로리 피셔 헉>은 불교에 관한 세 권의 책을 쓴 저자이다. <아이들을 위한 명상>, <인생은 이상하다>, <마법은 일어난다>. 그녀는 예술가이며 1986년 이래 까귀파(티베트 불교의 한 종파)의 수행자이다. 멕시코 옥사나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