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139:1-12 여호와여 주께서 : 칼빈
본 시편에서 다윗은 대부분 인간들이 뒤집어 쓰고 지내기를 즐겨하는 기만적인 가면을 일축하고 또 자신에게서 위선을 제거하고자 하는 뜻에서 이 세상에 그 어느 것도 하나님 눈길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모태에 있을 때부터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 각 지체에게 특수한 직분과 기능을 부여하신 분께서 우리 행동에 대해서 모르고 계실 리 없다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 인간의 근본적인 창조에 입각해서 설명하는 원리입니다.
이러한 점을 묵상하다가 하나님을 제대로 경외하게 된 가운데 그는 자신이 불경건하고 속된 자들과 조금도 동조하지 않는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가 기도하는 자기 마음의 정직을 신뢰하는 나머지 이 세상에서 자신을 버리지 말아 주실 것을 간청하고 있습니다.
1. 본문 1-3절은 "①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②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③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입니다.
1) 다윗은 맨 처음에 위선자들이 죄받을 짓을 실컷 저지르면서 은밀한 술책을 이용하듯이 자신이 시치미를 떼면서 무슨 일이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다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하다는 점을 확신하는 자의 입장에서 자발적으로 자신의 가장 깊숙한 마음까지 살펴보도록 노출시키고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숨은 생각을 낱낱이 알고 계시며 이 세상에서 주의 시선을 피할 것이 아무 것도 없나이다' 라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세부적으로 들어가 자기 온 삶은 이미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는 그대로요, 주께서는 자기 모든 행동을 아시되 중심의 지향성까지 아신다고 말합니다.
곧 그가 자거나 일어나거나 걸어다님을 모조리 살펴보고 계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생각'으로 번역되는 (레아)에서는 '친구'나 '동요'의 뜻도 있는데 이런 까닭에 "주께서는 내게 가장 가까운 것이라도 멀리서 아시나이다"하는 식으로 번역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실례를 제시할 수 만 있다면 이것은 다른 번역에 비해 훨씬 의미가 통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제아무리 멀리 있는 대상이라도 하나님께서는 가까이 있는 것으로 여기신다는 사실과 일맥상통하는 말이 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멀리"를 "이전에"로 읽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예는 다른 히브리 문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 의미는 '오 주여 제가 마음속에서 품는 생각 하나 하나가 이미 이전에 주께 알려져 있나이다' 하는 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칼빈께서는 다른 의미 곧 '하나님께서는 에피큐로스 학파들 생각처럼 하늘에 갇혀 있어서 편히 누워 있거나 인간사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제아무리 멀리 떨어져 계신다 하더라도 그는 결코 우리에게서 멀지 않다'는 의미를 택합니다.
2) (자라)에는 '에워싼다'는 뜻 외에도 '키질한다'는 뜻이 있으므로 3절을 '주께서는 나의 길들을 키질하고 계십니다' 하는 식으로 번역하면 아주 적합할 것입니다.
이것은 아직 알려지지 않는 것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칼빈이 택한 번역도 마찬가지로 적절한 것이므로 신자는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의 맨 마지막 소절에 대해서도 주석가들은 의견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싸칸)이 히필 변화로 쓰일 때는 여기서처럼 '효력이 나게 한다'는 뜻이 있는데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다윗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행동에 성공이라는 왕관을 씌워 주시기 때문에 그것을 감사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 문맥에서 이야기하는 시편 기자의 의도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감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제가 저의 길에 익숙하게 만들어 주셨나이다' 하는 식의 해석 역시 부자연스럽습니다.
그건 마치 그가 하나님께 지혜와 총명이 있는 것을 두고 감사드린다는 얘기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므로 칼빈께서는 동사가 비록 히필형으로 되어 있기는 하지만 서슴없이 여기에 중성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곧 '주여 주께서는 나의 길들을 익히 알고 계시며 따라서 그 길들은 당신께 친근합니다' 하는 식으로 봅니다.
3) 그러므로 이 구절들은 하나님의 전지의 상세하심을 말합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의 언행(言行) 심사(心思) 동정(動靜)의 일체를 다 아신다고 합니다 이 점에 대한 이 시의 묘사(2-4)를 본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 언행의 중대한 것들만을 아시는 것이 아니고 그 경미(輕微)한 것들까지 익히 아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 혼자만 지금 나 자신의 사 언행을 의식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속음입니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2절)
이것은 우리로 스스로 속지 않게 하려는 경계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가 멀다고 해서 그가 우리를 아심에 있어서 각근하지 못하시거나 멀어진 것은 아닙니다.
2. 본문 4-5절은 "④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입니다.
1) 특히 4절 초에 기록된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혀로 무슨 말을 하기 이전부터 우리가 하려는 말을 알고 계신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으로 생각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비록 우리들이 아무 말을 하지 않으며 침묵을 통해서 우리의 은밀한 의도를 숨기려 할지라도 우리는 그의 주목을 벗어날 수 없다는 뜻으로 생각합니다.
둘 다 똑같은 이야기요, 어느 것을 택하든 상관없습니다.
여기서 전달하려는 의미는 혀는 사람에게 있어서 생각의 부록과 같고 의사 소통의 큰 매체가 되지만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말에 의존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지시 불변사, '보라!' 가 사용됨으로써 우리 영혼의 제아무리 은밀하거나 후미진 곳도 항상 하나님 앞에는 투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2) 본문 5절은 "주께서 저를 만드신 전후에" 하는 식으로 읽는 사람도 있지만 (추르)에는 '봉쇄한다' 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시선으로 빙 둘러싸여 있어서 어느 구석으로도 피할 수 없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틀림없습니다.
앞으로 가려는데 길이 막힐 경우에는 뒤로 돌아서서 갈 수도 있지만 다윗은 자신이 앞뒤로 갇혀 있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의 다른 소절에도 똑같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 구절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시면서 마치 석공이 자기 작품에 손을 대듯이 우리에게 손을 대신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은 문맥과 통하지 않는 말입니다.
그보다는 하나님께서 손을 들어 인간들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꼭 붙잡고 있듯이 그들을 엄밀히 감찰하고 계시며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 모르게 머리칼 하나의 거리 만큼이라도 움직일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3) 그러기에 칠십인역은 '주께서 나를 지으셨나이다' 하는 식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런 견해를 택하는 자들은 이 동사의 어근을 마치 (야차르)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Phillips는 '그러나 의 어근이 (고통을 주다, 누르다, 포위하다)라는 사실은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의미는 '주께서는 나를 앞뒤로 어찌나 압박하던지 내가 주에게서 도망할 곳을 전혀 찾을 수 없습니다. 곧 주께서 내게 손을 얹고 계시니 나는 주의 손아귀 아래서 꼼짝달싹할 수 없습니다' 하는 식이 될 것입니다.
이 문맥 자체는 하나의 비유로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지식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앞뒤로 다그치고 있습니다" 곧 주께서는 마치 주께서 나를 사방으로 에워싸고 있는 것 마냥 나의 모든 행동을 완벽하게 알고 계십니다.
4) 다시 종합하면 이 구절들은 하나님의 지식이 전적으로 주밀하신 것만큼 인간은 하나님의 감시를 피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시인은 여기서 몇 가지로 하나님의 전지하신 사실을 보여줍니다.
(1) 그가 나를 포위하신 고로 나는 그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2) 그의 손이 항상 나를 붙드신 고로(안수) 나는 그의 관하(管下)에서 이탈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
3. 본문 6절은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입니다.
(미메니)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내 위에'로 보거나 '나와 관련해서'로 읽으면서 옛말에 작은 세계로 불리기까지 하던 인간이라는 피조물을 창조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지식이 경이적인 것으로 드러났다는 의미에서 다윗이 이렇게 말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인간의 신체구조의 정교함과 인간 영혼의 탁월한 재능을 생각할 때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맥은 다른 해석을 요구하고 있는데 우리는 다윗이 앞에서 이미 이야기한 관념을 사용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지식을 우리 자신의 지식으로 재려는 어리석음을 두고 절규하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이야기를 들을 때 그를 자신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처럼 망측한 생각도 없습니다. 대부분 우리는 하나님의 지식이 사물에 대한 지식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추측해 버립니다.
다윗은 그 반대로 그것이 자신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으로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눈에 환하게 드러나는 만물의 모습을 도무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으며 이 지식은 밑도 끝도 없기 때문에 자신의 무지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다는 점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서 말한 것과 같은 하나님의 전지에 대하여 이 시인은 감탄을 발합니다.
곧 하나님의 전지적 활동은 인간으로서 헤아릴 수 없는 신묘막측(神妙莫測)한 놀라운 사실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이 시인이 그 실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전지적 활동을 경험하고 한 말입니다. 체험적 신앙을 가진 성도는 누구나 여기에 동감일 것입니다.
4. 본문 7-10절은 "⑦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⑧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게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⑨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⑩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인간이 무슨 술책을 쓰든 하나님의 눈길을 피할 수 없다는 동일한 견해를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은 다른 곳에서처럼 그의 능력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와 지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영이 지성의 중심부이듯이 여기서도 하나님과 관련해서 그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의 앞'이 지식이나 관찰을 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다윗의 의도는 자신이 말한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하나님의 눈길이 따라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이 대목을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본질에 대한 증거로 제시하려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은 잘못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영광이 하늘과 땅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진리이지만 시편 기자가 생각하고 있던 것은 이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길이 하늘과 지옥을 꿰뚫어보기 때문에 자신이 이 세상의 어떤 으슥한 곳으로 숨는다 하더라도 자신이 그에게 발각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하늘로 날아가거나 저 밑바닥 심연에 웅크리고 앉아 있거나 위아래 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 환하게 들여다보인다는 점을 우리에게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아침 또는 금성의 날개" 는 아주 아름다운 비유입니다.
태양이 지평선에 오르기 시작하면 온 세상 구석구석이 갑자기 환하게 비치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비유는 말라기 4장 2절에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우리가 빛의 속도로 날아간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벗어날 곳은 아무데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손"은 능력을 뜻하며 그 취지는 인간이 하나님의 관찰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지만 그것보다는 차라리 도망병을 붙잡아 끌어당기는 편이 훨씬 더 쉬울 것이라는 말입니다.
5. 본문 11-12절은 "⑪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⑫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 이니이다" 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당황한 상황에서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치면서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해 보는 사람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망하려고 꿈꾸어 봤자 헛일이라는 점을 시인하면서 다른 방법을 생각하는 것으로 얘기하는데 만약에 우리 속도가 제아무리 빨라도 하나님의 시계(視界)를 벗어날 수 없다면 빛이 제거되고 흑암이 우리를 덮는다면 우리가 잠깐 동안이라도 숨을 돌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하나님께서는 칠흙 같은 흑암 가운데서도 대낮처럼 똑같이 잘 보실 수 있기 때문에 덧없는 일이라는 점을 그는 밝히고 있습니다.
이 구절의 두 소절을 따로 떼어서 '내가 흑암이 나를 덮을 것으로 말하더라도 밤마저도 나에게 빛과 같이 될 것이다' 하는 식으로 읽는 사람도 있는데 그 의미는 흑암이 빛으로 바뀔 것이요 따라서 비록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안보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자기가 환히 비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두 소절에서 그가 간절히 바라는 내용을 표현하면서 만약에 어떤 술책이나 가면이고 사용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걸 면허증으로 사용하겠다는 뜻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만약에 최소한 흑암이 나를 덮고 밤이 내게 빛이 될 것으로 말할 수만 있다면' 하는 의미가 담겨 있는데 이것은 도둑들이나 숲 속의 짐승들이 어둠을 틈타고 마음대로 쏘다니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이것이 (감)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올바른 문장 구성입니다.
여기서 빛과 어둠이 하나님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를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인간들이 떳떳하고 거림낌없이 하나님 앞에 나오게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하는 점을 그에게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 모두는 말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고 하면서도 우리가 예사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에 있어서는 아무 거리낌이 없으며 우리 동료 피조물에게 베푸는 존경마저도 하나님께는 드리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우리의 비행을 알고 보는 것은 수치로 여기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우리입니다.
이러한 얼빠진 상태를 심각하게 꾸짖지 않고 그냥 둔다면 우리는 빛을 어둠으로 당장 바꿔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우리 거짓된 생각을 반박하는 뜻에서 이 주제를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 시인은 여기서 하나님의 전지 하신 감시를 피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곧 그는 하늘 위에나 땅 아래나 바다나 그 어디서나 그의 간섭을 피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공간적 격리로 막힌 듯이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자기와 같은 유한(有限)한 실존(實存)으로 보려는 부패한 신관(神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안이하게 지내고 싶은 생각이 든다고 하면 이 견책을 자신에게 적용해서 각성하는 우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시139:13-18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시다는 사실을 참으로 인식하면서 사는 성도라면 언제라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의 허망한 상황도 인식하기 때문에 그분의 대적들을 비웃게 될 것입니다.
1) 다윗은 여호와의 전지(全知) 하심에 대하여 확신하는 의미에서 주께서 아신다고 여러 차례 말합니다(1-6).
그가 하나님을 "주께서"(히브리어 원어에서는 "당신님께서")라고 이인칭(二人稱)으로 말하여 자기 대화(對話)의 상대가 되어주신 것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대하는 관계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만 특별히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와 같이 자세히 알아 주시는 관계에서는 안심과 평안이 우리에게 있을 뿐입니다.
2) 이 시인은 설혹 범죄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을 피할 길이 아주 없는 것을 확언합니다(7-12). 하나님을 이와 같이 아는 심리로써는 실상 범죄하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범죄하는 원인은 자기들이 하나님 불꽃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까닭입니다
3) 이 시인은 자기의 신체 구조가 하나님의 지혜로 된 것을 매우 기이하게 여깁니다(13-18). 그는 이 점에 있어서 특별히 자기의 가장 깊은 부분까지도 하나님께서 아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아는 신자들은 그의 가장 깊은 내용에서부터 순수하게 하나님만 경외해야 됩니다.
1. 본문 13-14절은 "⑬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⑭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 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 이 잘 아나이다" 입니다.
그는 동일한 주제를 계속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지으신 분인 만큼 그분이 우리의 제아무리 깊은 생각이라도 다 알고 계시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하나님을 인간의 심장 한 가운데를 재판정으로 삼고 앉아 계시는 분으로 묘사하면서 우리 마음의 꼬불꼬불한 데와 후미진 곳이 우리가 아직 어머니의 뱃속에 갇혀 있을 때 우리의 모습을 마치 우리가 대낮의 빛을 받고 서 있는 것처럼, 환하고 완전하게 보신 그분께 알려진다 해서 조금도 놀랄 필요가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다윗이 계속해서 인간의 본래 형성과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의도를 알게 됩니다.
그의 의도는 다음 구절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거기서 사용된 용어는 약간 애매한 데가 있지만 다윗 자신이 경이적으로 지음을 받고 공포와 경탄을 불러일으키도록 계산되었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이 충분히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갑자기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육적인 안일에 빠지는 한가지 큰 이유는 우리들이 처음에 신령한 조물주에게 얼마나 독특한 방법으로 지음 받았는가 하는 점을 곰곰이 생각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이러한 특수한 예를 통해서 다윗은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하나님의 모든 일을 전반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참되고 올바르게 평가하다 보면 결국 경탄으로 그치기 마련입니다.
'자신의 영혼이'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이 모든 경이를 '잘 알고 있다'는 취지의 발언에는 다름이 아니라 자신이 겸손하고 온건한 마음을 가짐으로써 하나님의 경이적인 일들을 이해하도록 전심전력을 다 기울인 나머지 결국 그의 헤아릴 수 없는 영광을 칭송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그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나 철학자들이 마치 하나님의 모든 신비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식으로 위장하는 그러한 지식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일에 대한 종교적인 관심, 곧 결국 감사를 드려야겠다는 의무감을 불러일으키는 관심을 뜻합니다.
2. 본문 15절은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움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 입니다.
그 어느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숨겨 있지 않다는 사실을 다윗은 인간이 맨 처음 지음 받은 방법을 통해서 입증하기 시작하면서 일반적인 제작자들은 자기들의 작품을 눈앞에 두고서 만들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우리를 만드셨다는 점을 들어 하나님의 우월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내 힘'으로 읽거나 '내 뼈'로 읽거나 상관없지만 본인은 후자를 택합니다.
다음으로 그는 어머니 뱃속을 "땅의 깊은 곳"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어떤 직공이 컴컴한 굴속에서 일을 시작하려는데 아무 불빛도 없다면 어떻게 일에 손을 댈 수 있겠으며 무슨 방법으로 일을 진행하며 무슨 작품을 만들어 내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둠 속에서도 가장 완벽한 일을 만드시니 곧 인간을 어머니 뱃속에 두고도 지으시는 분이십니다.
'함께 엮는다'는 뜻의 (라캄)이라는 동사가 여기서 사용됨으로써 시편 기자가 곧 말한 내용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다윗의 틀림없는 의도는 인간의 몸의 형성에서 엿볼 수 있는 상상할 수 없는 기술을 표현하는데 있습니다.
인간의 몸을 살필 경우 심지어 우리 손가락의 손톱만 보더라도 그 어느 것도 위치를 바꾸거나 뒤틀리게 해놓고 불편을 느끼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하물며 낱낱의 부분을 곰곰이 생각하기로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 어느 수예가가 제아무리 꼼꼼하게 신기한 머리를 발휘한다 하더라도 이 정교하고 다양한 구조의 백 분의 일의 실력이라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뱃속에서도 인간을 그처럼 완벽하게 지으신 하나님께서 그가 이 세상에 나온 다음에 그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계시다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못됩니다.
3. 본문 16절은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입니다.
처음 자궁 속에서 잉태된 태아(embryo)에게는 아직 아무런 형태가 없는데 다윗은 자신이 아직 형체가 없는 덩어리( )였을 적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알고 계셨던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엠브뤄온) 이라는 단어는 잉태 시기부터 출산까지의 태아를 가리켜 사용하는 명칭입니다.
이것은 보다 큰 것에서부터 보다 작은 것을 추론하는 논법입니다.
그가 일정한 형태를 갖추기도 전에 하나님께 알려진 바 되었다면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눈을 피하기 힘들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어서 그는 '모든 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었습니다' 하는 내용을 덧붙이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형성에 대한 모든 방법이 하나님께 익히 알려져 있었다는 말입니다.
"책"이란 책이나 주해서를 수단으로 자신들의 기억을 되살리는 사람들에게서 흔한 습관에서 따온 비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는 것이 모조리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그에게는 무엇을 기억하기 위한 도움이 따로 필요 없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습니다.
두 번째 소절에 대해서는 주석가들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야밈)을 주격으로 곧 '날들이 만들어졌을 때' 로 읽습니다.
그 의미는 내 모든 뼈가 '오 하나님이여 날들이 처음 주에게 지음 받았지만 아직 아무것도 없던 창세시대부터 주의 책에 기록되었나이다' 하는 식입니다.
그보다는 '인간 신체의 다른 부분이 계속 지어졌습니다.
곧 처음 씨만 있을 때는 신체의 부분이 조절되거나 균형을 잡지 않았지만 그것이 발전해 가면서 점차적으로 특수한 형태를 띠었다' 는 식의 의미가 더 낫습니다.
주석가들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 대목이 또 하나 있습니다.
(토)라는 단어의 경우 (알렙)이 종종 (와우)와 바꿔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로 ; 그에게)로 읽는 사람도 있고 (로: 아니다)로 읽는 사람도 있습니다.
첫 번 독법을 따르면 그 의미는 신체가 점차적으로 형성되었지만 그것은 언제고 하나님의 책에 있어서는 동일한 하나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작품을 마치는데 있어서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 분이라는 식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부정사의 의미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두어야 보다 충분한 의미가 드러납니다.
다시 말해서 비록 지체들이 날짜의 흐름에 따라서, 곧 점차적으로 형태를 갖추었지만 그 가운데 어느 것도 이전에 존재한 것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맨 처음에는 각 부분의 순서나 특이성이 전혀 없었고 다만 형태가 없는 본질뿐이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아닌 덩어리에 모양과 아름다움을 점차적으로 부여하신 섭리를 두고 경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덧붙일 것은 인간의 수명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을 말합니다.
우리의 수명이 얼마나 길겠는지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명의 장단(長短)에 대하여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함은 비유니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에 들었다는 의미입니다.
4. 본문 17-18절은 "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 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는 (레아)로서 제 2절에서 사용된 것과 똑같습니다.
여기에는 "생각"이라는 의미가 있는데 갈대아어 역자를 따라 '동료나 친구' 라는 의미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이것은 시편 기자가 이미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문맥을 살펴볼 경우 그는 아직도 하나님의 섭리의 비길 데 없는 탁월함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앞에서 이미 말한 내용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렇게 하는 까닭은 우리들이 인간 창조에서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오묘한 지혜에 대한 독특한 증거와 인간 생활의 자만적인 통치와 지도를 엄연히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을 '주의 생각이 얼마나 희귀한지요' 하는 식으로 번역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렇게 되면 의미만 흐려질 뿐입니다. 물론 이런 단어가 엘리 시대에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했다는 뜻에서 사용된 것을 인정합니다(삼상3:1).
그러나 여기에는 '귀중하다' 는 의미도 있으므로 애매 모호하지 않은 의미를 택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생각이 인간의 판단의 범위 안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뜻에서 이 단어를 하나님의 생각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취지에서 그는 하나님의 생각의 '총화'가 위대하고 막강한 것으로 곧 인간의 마음을 압도하기에 충분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의 이 절규에는 만일 인간들이 그처럼 이해가 더디거나 무감각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하나님의 신비한 방법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요 주제넘게 하나님의 법정을 빠져 나갈 것으로 생각하기보다는 겸손하고 떠는 마음으로 그의 법정 앞에 스스로 엎드릴 것이라는 내용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다음 구절에도 동일한 내용이 전개되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숨은 심판이나 계획을 헤아려 보려 할 경우 그 숫자가 얼마나 많던지 '바다의 모래'보다도 더 많다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수준으로는 그 가운데 지극히 미소한 것마저도 파악할 수 없습니다.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 하는 구절에 대해서는 주석가들마다 말을 다르게 번역하고 있지만 우리가 보기에 단순한 의미는 다윗이 잠에서 깨어날 적마다 하나님의 오묘한 지혜를 곰곰이 생각하는 계기를 새롭게 맞이하곤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어난다는 말은 단 하루를 두고 하는 이야기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는 앞에서 자신의 생각이 신령한 지혜의 신비스러운 위대성을 곰곰이 살피는데 몰두해 있는 것으로 말했기 때문에 거기에 맞추어 여기서는 자신이 "깰 때"마다 새로운 경탄거리가 나타나곤 했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윗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의 이 세상에 대한 섭리가 어지나 심오하던지 그 어느 것도 우리의 가장 은밀한 생각까지도 그의 눈길을 피할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결코 하나님께 들통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미친 듯이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이 숨을 곳을 찾아보았자 헛일이 되고 말 것은 그곳에서 강제로 끌려 나와 모두에게 환하게 발각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곰곰이 생각해야 마땅한 진리로서 사실 우리 가운데 우리의 손발을 보거나 우리의 몸매의 아름다움을 가끔 살펴보면서도 그것을 만드신 조물주를 생각하는 사람은 백에 하나도 없습니다.
간혹 자신들의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는 사람도 있지만 눈과 귀, 그리고 이해하는 마음을 만드신 그분께서 손수 듣고 보고 만사를 알고 계신다는 위대한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제 본문 말미에서 결론으로 나아가 보십시다.
특별히 17-18절 이 구절들은 인간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전지적 활동에 대한 진술의 결론입니다.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이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를 그렇게 전지적으로 주목해 주시는 일을 귀중시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버려 둔 폐물이 아니고 순간이라도 잊지 아니하시는 중보(重寶)이십니다.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이것은 그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수다하다는 의미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성도는 즐겁기 한이 없습니다.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
이 구절에 대하여는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여기 "깰 때"란 말이
(1) 육신으로 별세함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2) 또 혹은 이것이 자다가 깨는 때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 둘째 해석을 취하면 이 구절의 의미는 그가 자다가 깨어 본즉 하나님께서 그를 수호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는 의미입니다.
곧 그가 정상 의식을 가지는 때에는 그에게 대한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역사(役使)를 인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첫째 해석을 취한다면, 이 땅 위에서 우리의 인식이 영원에까지 복된 방식으로 잇대어져 있다는 사실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얼마만큼 감사를 드리면서 살아야 되겠습니까?
시139:19-24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제 다윗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원수들을 향하여 적용합니다.
이 시인은 자기가 이와 같이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으니 만큼 어디까지나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원수를 미워하는 처지를 취합니다(19-24).
사람이 자기 개인적 원수는 사랑할 것이로되 하나님의 원수는 미워해야 됩니다.
1. 본문 19절은 "하나님이여 주께서 정녕히 악인을 죽이시리이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아 나를 떠날지어다" 입니다.
이 구절을 앞 절과 연관시키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 부자연스럽습니다.
또한 여기에 '바라옵건대' 또는 '오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쳐 죽여 주소서' 하는 식의 소원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타당치 않습니다.
그리고 악인들이 끊어져 나가는 것을 두고 다윗이 자축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의 견해 역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그는 악한 자들에게 재앙이 너무 자주 덮치기 때문에 신령한 심판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경건에 정진하고 그의 이름을 두려워하겠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본보기로 사용하시는 것은 그의 선택받은 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처벌받는 것을 보고 그들과 어울리는 일이 없도록 하는 데에 그 의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윗 본인으로 말하면 하나님 경외와 예배에 철저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그에게도 다른 성도들처럼 일정한 계약이 필요했습니다.
이사야의 말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심판을 널리 알리실 때 이 땅 거민들은 의를 배우기'(사26:9) 마련입니다.
곧 하나님을 계속 두려워하기 마련입니다.
그와 동시에 시편 기자는 자기 정직에 대한 증인되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왔지 그의 이름을 악하게 멸시하는 자들이나 그들의 패거리 가운데 하나의 위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얘기나 다름없습니다.
2. 본문 20절은 "저희가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며 주의 원수들이 헛되이 주의 이름을 칭하나이다" 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살려주며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고 참아주실 때 그들이 얼마나 뻔뻔스럽게 나가는가 하는 점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죄를 저질러도 아무 벌을 받지 않고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할 뿐 아니라 자신들의 심판관을 공공연하게 모독합니다.
그들이 "악하게 말하며" 라는 말에는 그들이 어느 정도 수치심이 남아있어서 말을 삼가는 사람들처럼 자신들의 죄악을 그럴듯한 구실로 감추려 들기는커녕 보라는 듯이 하나님에 대한 멸시를 드러내고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짓되게 사용한다는 구절을 그들의 위증죄와 관련시켜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너무 협소한 생각입니다.
악인들이 하나님을 자신들의 망상에 따라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자들의 견해가 더 타당합니다.
우리가 체험을 통해서 알고 있듯이 대부분의 인간들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모르고 산 하나님이 아니라 죽은 하나님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말로는 그분이 이 세상의 심판주라고 시인하지만 하나님에게서 심판 직분을 빼앗고 마는 그들인 만큼 그 시인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게서 심판직을 빼앗아 버리는 것이 그의 이름을 망령되이 취급하는 것이요, 그 이름의 영광을 퇴색시키고 어떤 면에서 일그러지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름"이라는 단어가 본문에 나와 있지 않고 (나사) 에는 '들어 올리다' 또는 '높은 곳에' 하는 식의 의미가 담겨 있는 만큼 우리는 이 구절을 그들이 오만하고 허황 된 교만으로 넋을 잃고 있었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가장 올바른 해석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영혼의 우쭐거림이나 오만은 앞에서 언급된 성냄과 거의 언제고 단짝을 이룹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상대로 그처럼 독선을 퍼붓는 것은 그들의 교만과 자신들의 인간으로서의 무가치함에 대한 망각과 그리고 하나님께 속하는 능력에 대한 망각이 그 원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이유에서 그는 그들을 하나님의 '적수' 로 부르고 있습니다.
자기 본연의 위치를 벗어나 스스로 우쭐거리는 자들은 하늘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던 거인들의 역할을 담당하는 셈입니다.
3. 본문 21절은 "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지 아니하오며 주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한하지 아니하나이까" 입니다.
그는 이어서 하나님을 묵상함으로써 얼마나 큰 혜택을 입었는가 하는 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 있다는 점을 깨닫고 모든 깊은 곳을 살피는 분의 눈길을 도저히 피할 수 없다는 점을 살핀 나머지 이제부터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을 이끌어 나가야겠다는 결심을 여기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에 대한 자신의 증오를 밝힘으로써 자신의 정직을, 곧 자신이 전혀 죄를 범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경건에 몰두하고 있어서 거기에 배치되는 것은 모조리 마음으로 기피하고 있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여기서 말하고 있듯이 우리가 경건에 몰두한다면서 죄를 혐오하지 않는다면 그 경건에 대한 집착은 속으로 멍들어 있다는 사실에 틀림없습니다.
그가 다른 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여호와의 집에 대한 열정이(시 69:9)우리 마음속에서 불타고 있다면서 그의 의로운 법이 침해되고 아니 그의 거룩한 이름이 악인들에게 짓밟혀지고 있는데도 말없이 보고만 지나치는 것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무관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구절의 맨 마지막 단어 (쿠트)에는 '논박하다 다투다' 라는 뜻이 있으며 여기서는 그 의미는 힛파엘 변화의 의미와 동일한 것으로 볼 수 도 있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 다윗은 특별히 자신이 그들과 다틀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는 뜻에서 이렇게 말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그가 온 세상의 증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방어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으며 불의의 모든 일군들을 상대로 전쟁을 치렀다는 점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4. 본문 22절은 "내가 저희를 심히 미워하니 저희는 나의 원수니이다" 입니다.
직역하면 '내가 완벽한 증오로 그들을 증오합니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존경심이 어찌나 크던지 그를 멸시하는 자들과는 전혀 상종하지 않겠다는 말에 대한 반복입니다.
여기에는 자신이 흑암의 일을 도무지 인정하지 않겠다는 일반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사실 죄를 보고도 못 본 체하며 침묵을 통해 그걸 격려하는 자는 의의 수호를 우리의 손에 맡겨 주신 하나님의 지시를 어기는 자나 다름없습니다.
다윗의 본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예와 관련되는 문제가 제기될 경우에는 단호하고 고결한 마음으로 악인들의 적대감을 딛고 올라서며 스스로 하늘의 불쾌를 자초하기 위해서라면 제멋대로 구는 자들의 호의를 사려고 알랑거리기보다는 모든 지상의 우정 관계를 포기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우리 자신의 이익과 영예, 편의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을 가진 나머지 어느 누가 우리를 해치는 날이면 서슴지 않고 결투에 뛰어들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지키는 데는 비실거리며 비겁하게 나오는 우리라는 점을 생각할 때 이 점은 특별히 우리의 관심을 필요로 합니다.
이처럼 각자가 자신의 이익과 혜택을 중요시하는 나머지 우리가 개인적으로 손해 될 것 같으면 발끈 일어나서 결투와 전투를 서슴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위엄이 침해받을 때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우리입니다.
반면에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열렬한 정렬이 있다는 증거는 악인들과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의 비위를 맞추다가 하나님의 은총을 잃어버리기보다는 그들을 상대로 한 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는 전쟁을 선포하는 데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다윗이 말하는 증오는 악인들 그 자체가 아니라 죄악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모든 사람들과 화평하게 지내기를 힘써야 하며 모두의 선을 추구해야 하며 가능하다면 친절하고 선한 활동을 통해서 모두를 우리 편으로 끌어당겨야 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원수일 경우에만 그들의 분개함을 상대로 하는 싸움에 전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5. 본문 23절은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 멸시자들을 반대하는 이유가 다른 데 있지 않고 자신이 하나님을 순수하게 예배하는 자요 남들도 똑같은 입장을 취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담대하게 하나님의 심판에 굴복하는 것은 여간 자신만만한 태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앙에 대한 성실성을 충분히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처럼 자신만만하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자신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자신에게 모든 죄가 없다는 식의 내용이 담겨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데 그는 자기 범죄의 짐에 눌려 끙끙거리며 탄식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자신들이 정직한 것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거저 베풀어지는 은혜를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약점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경건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는 그들인 만큼 아무 거리낌없이 자신들과 악인들이 구별된 것으로 말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마음이 두 갈래, 곧 불성실하다는 점은 부정하지만 자신에게 아무 죄가 없는 것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자신이 악에 몰두해 있지 않다는 점을 고백할 뿐입니다.
(오쳅)에는 일반적인 죄의 의미가 있지 않고 '슬픔, 고통' 또는 '부패'의 의미가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우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다윗은 여기서 자신이 미신 뿐 아니라 불의에서 자유로운 것으로 주장하고 있는 만큼 이 의미 가운데 마지막 의미는 여기에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런 사람들의 길에는 그들이 모든 것을 폭력과 악으로 처리하기 때문에 "황폐와 파멸"이 있다는 구절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그대로입니다(사59:7).
이것이 내적인 고통으로 악인들을 짓누르는 악한 양심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이것은 억지 해석입니다.
이 단어를 어떻게 보든 다윗의 단순한 의미는 자신이 비록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자신이 그것을 실천하는 데 전심전력을 다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6. 본문 24절은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입니다.
이 구절을 다윗이 처벌받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물론 '모든 땅의 길'이 모두가 당하는 죽음을 의미하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여기서 '인도한다'는 동사는 나쁜 의미보다는 좋은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리고 '이 생명의 길'이 죽음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분명히 이 구절은 인간의 완전한 수명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 행로의 마지막 순간까지 인도해 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영생과 관련시키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알고 있으며 다윗이 여기서 말하는 인간의 완전한 수명에 내세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 역시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친절을 보여준 그의 종을 중도에 버리지 않고 끝까지 지켜 보호하실 것이라는 단순한 의미로 보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악도의 가는 길로 가지 않고 그 악도를 미워하는 다윗은 영원토록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인도를 받을 줄 알고 기도합니다.
"영원한 길" 이란 말은 파멸치 않는 하나님의 인도를 말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