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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8-16
무리한 명령같아 보이지만 / 지태일 목사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아 누리며 산 성도들의 모습들이 아주 많이 나옵니다. 그야말로 날마다 이적을 체험하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뜨겁게 느끼는 그런 복된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구약에서 대표적인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 올라가 번제를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상당히 부당한 명령이요 순종하기가 쉬운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낳은 아들입니까? 하나님이 그래 늦깍이 아들을 주시고 그것도 독자를 대를 이어갈 어린 아들 하나 주시고 그 아들을 번제로 각을 떠서 불로 태워 드리라는 것,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무리한 명령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명령에 순종함으로 “여호와 이레“를 경험합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습니다. 아식이 번제로 죽거나 후손이 없어지지도 아니했습니다. 그 후손들이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와 같이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와 홍해를 건널 때에도 무리한 명령같아 보였습니다. 홍해를 건너게 하려면 배를 띄워 주시든지, 다리를 놓든지 하시지 모세에게 지팡이를 내밀라는 말씀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명령입니다. 그러나 순종하여 내밀 때 큰 바람을 일으키시어 바다에 길을 내신 하나님이십니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의 첫 견고성인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기적을 생각할 때도 참으로 무리한 명령이요 그렇게 성을 제사장들을 앞장 세우고 하루에 한 바퀴씩 돌고 마지막 일곱 번 쨋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면서 오칠 때 그 견고한 여리고성이 무너졌다는 것, 그렇게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때 성이 무너지는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말씀 앞에 순종을 무엇보다 우리에게도 강도있게 요구하십니다.
성경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오직 순종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요구하십니다. 그저 가라면 가고, 말하라면 말하고, 행하라하시면 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에 내 의견을 첨가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가 묻는 것도 원치도 않으십니다. 그저 믿고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100% 확신하거나 100% 납득할 수 있는 일이나 말씀에만 순종해야 하는 것은 아님을 보여 줍니다. 어떤 때는 무리한 명령같아 보여도 순종할 때 열매와 기적이 나타납니다.
본문에 나오는 엘리야나 사르밧 과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북이스라엘 왕국의 매우 사악한 통치자 아합으로 인한 우상숭배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합니다. 그는 아버지 왕이었던 오므리가 정략적으로 시돈 왕의 딸인 이세벨과 결혼시켜 나라를 든든히 만들려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 이세벨이 섬기는 바알이라는 우상을 끌어들여 나라를 어지럽힌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천지에 바알 신당을 세워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슬퍼하시고, 못마땅해 하셨겠습니까? 그 약속의 땅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이방 우상을 섬기었으니 그 마음이 오죽하시겠습니까?
당시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열왕기서를 보면 아합왕을 평가하는 말씀이 나오는데, 왕상21:25을 보면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자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세벨은 이방 여인으로 바알이라는 우상을 끌어들입니다. 아주 교활하고 선동적인 여인으로 남편 아합왕을 부추키고 충동질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우상숭배라는 사악한 짓을 골라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떠나게 되고 진리에 대하 눈감아 버리고 온갖 악을 기탄없이 행합니다. 결혼을 잘해야 합니다.
집안에 여자를 잘 들려야 복을 받지 잘못하면 이렇게 가정이고 나라고 다 어지럽게 만들어 버립니다. 부인을 잘 맞아 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 그런 여인을 맞아야 합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역에 가뭄이 시작되어 3년 6개월동안 비가 일체 내리지 않았습니다. 산천초목이 말라죽고, 모든 생명있는 짐승들이 죽어갔고, 사람도 살 수 없었습니다. 그 때 기도하면서 믿음으로 사는 엘리야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음성을 듣습니다. 2절을 보면 엘리야가 말합니다. “내 말이 없으면 즉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수 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회개와 개혁이 없으면 그 땅의 심판이 계속될 것을 말씀합니다.
9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은 엘리야를 사르밧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거기서 과부를 통해 공궤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그대로 갑니다. 그리고 그 과부에게 물을 달라 합니다. 떡을 달라 합니다. 무리한 요구도 마다하지 않고 명합니다. 왜 그렇게 말하고 행합니까? 하나님이 하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어찌 보면 미친 사람같고 어찌 보면 대단한 사람 같습니다. 엘리야에게 행한 하나님의 명령을 구체적으로 보면,
1. 먼저 시돈의 그릿 시냇가로 피하라는 명령입니다.(9절)
3-4절을 보면 간교한 이세벨에게 쫓기던 엘리야는 아합의 칼을 피하여 시돈의 그릿 시냇가로 피하라는 명령을 받고 거기 그릿 시내가에서 숨어 지냈습니다. 그 거리는 가뭄 중에도 100㎞가 넘는 길입니다. 그 먼 길을 걸어서 가라는 것은 무리한 명령입니다. 그리고 이 시냇물을 마시라 하면 마십니다.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고기와 떡을 먹으며 지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 명하시는대로 그대로 합니다. 한마디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어디가 숨기도 좋고 먹기도 좋은데 거기가 더 좋지 않습니까?" 혹시 지금 가물어 사람들의 관심이 시냇가인데 물이 있는 곳은 위험할 수 도 있습니다. 거기가 안전하겠숩니까? 토를 달지 않습니다. 그냥 무조건 순종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까마귀를 동원하셔서 떡과 고기를 엘리야에게 공급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을 사람의 기대와 상상을 초월하여 도우심이 있음을 보여주심니다. 왜 하나님은 엘리야를 도우실 때 까마귀 같은 동물을 통해 일하실까요? 까마귀가 우리나라에는 아주 기분 나쁜 새인데 이스라엘도 레위기 11장에 보면 가증스런 동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까마귀는 특히 먹기를 탐하는 새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한번 입에 물은 음식은 절대로 포기하는 법이 없는 동물입니다. 그것도 곤충과 썩은 고기를 먹소 삽니다. 먹어도 개걸스럽게 먹는 그런 짐승입니다. 물고와 봤자 그 까마귀가 얼마나 입에 물고 왔겠습니까?
그런데 어쨌든 어디서 누가 주었는지, 물고 왔는지 하나님은 그 까마귀를 통해 엘리야에게 떡과 고기를 공급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도우시는데 아주 비상한 방법으로, 심지어 하나님은 동물의 본능을 제어하시면서라도 하나님의 사람을 돕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동물의 욕구, 본능, 충동을 얼마든지 통제하시고 그것을 사용하심을 성경이 여러군데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니엘의 사자굴 속의 굶주린 사자들 다니엘에게 손 하나 대지 못하게 역사하셨습니다. 뜻을 정하고 기도하는 사람을 보호해 주십니다. 요나의 물고기, 웬만하면 사람하나 다 소화시켜 버릴 그런 고기입니다. 사흘동안 소화시킬 수 없어 그만 토하여 내칩니다. 그래서 요나가 다시 하나님의 명령에 회개하고 순종하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우리를 도우실 때 우리가 상상치 못하는 방법을 동원하시어 돕고 있습니다. 돕고자 하시면 얼마든지 돕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확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가난한 사르밧 과부의 집으로 가라는 것이다.(9절)
9절을 보면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너는 시돈 땅 사르밧에 가서 머물라. 그 곳 과부에게 너를 공궤하라 명했느니라". 이제 그릿 시냇가의 물도 말랐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로 간 곳이 시돈땅 사르밧이었습니다.
여기서도 계속 도우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는 결코 마르지 아니합니다.
특별히 시돈은 이스라엘 지경 밖으로 엘리야를 핍박하는 이세벨의 고향입니다. 시돈으로 가라는 말은 적진 한복판으로 들어가라는 말이요 거기서 죽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말씀을 엘리야에게 명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엘리야더러 시돈으로 가라고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은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선언적 의미를 보여줍니다. 비록 이방 지역이지만 거기서도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일으키심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거기서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보여 주십니다. 가믄 땅에서도 복되게 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이방에서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비록 시돈이 불신앙과 우상의 본거지 이세벨의 고향이지만 거기서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짐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특별히 사르밧, 사렙다라는 뜻은 ‘용광로, 도가니, 연단’ 등입니다. 용광로를 통과한 강한 엘리야를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뜻도 숨겨진 곳입니다.
더구나 사르밧에 있는 과부의 집으로 가라는 말씀속에는 남성인 엘리야선지에게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으로 그 명령을 받아들이기가 좀 어렵습니다. 그래도 그곳으로 가라면 가는 것입니다. 또한 그 과부의 집은 가난한 집입니다.
오늘 본문의 가믐의 상황이 그 처절한 모습을 보여 주듯 먹을 것도 없는, 그저 밀가루 조금과 그것을 구워 먹을 기름 조금밖에 없는 가난한 집이었습니다. 넉넉한 부잣집에 가라고 하면 부담이 덜할 터인데 찢어지게 가난한 과부의 집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무리한 요구 속에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약하고 미련한 것들을 크게 사용하시며 존귀케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부당한 일이나 명령이나 장소로 가라는 것 같아도 거기에는 분명 하나님의 뜻이 숨겨진 줄 믿고 행하시기 바람니다. 순종하며 사기기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엘리야가 이제 사르밧으로 들어가자 성문 어귀에서 나무가지를 줍는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생을 거의 포기하다시피한 과부로서 이제 남은 밀가루와 기름 조금 가지고 떡을 구울 불을 지피기 위해 나뭇가지를 주우러 나온 것입니다. 환란 날에도 원망 불평하지 아니하고 그래도 나와 일하는 사람들, 들어 사용하시고 섭리하십니다. 엘리야가 이 여인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습니다.
10절에 "물 좀 주어 나로 마시우게 하라"(Please bring me a drink of water).
나그네가 물 좀 달라는 것은 이스라엘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이방시돈 여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상종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또 지금 극심한 기근이여서 물을 구하기도 힘든 그러한 때입니다. 그런데도 엘리야는 그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였고 여인은 거절하지 않고 물을 떠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힘든데, 내 일이 급하다고 외면하거나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3년의 기근시 물 한 모금은 정말 돈보다 귀한 것입니다. 중동지대에서 냉수 한 그릇은 대단히 가치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을 달라하니 하던 일을 멈추고 가지러 갑니다. 참으로 친절한 과부입니다. 낮선 사람이지만 수고를 결코 마다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소자에게 대접한 냉수 한그릇도 상을 잃지 않습니다. 물을 준비하려 가는 여인을 향하여 엘리야가 다시 말합니다.
11절을 보면 "떡도 좀 구워 오시오"(please bring me some bread, too). 말합니다.
얼마나 뻔번스럽고, 염치없는 사람입니까? 물도 가져와라, 떡도 가져와라. 그 여인의 이야기를 들으면 더욱 그러합니다. "나에겐 조금의 밀가루와 조금의 기름밖엔 없습니다". 조금 남은 한 웅큼의 밀가루와 약간의 기름을 사용하여 떡을 구워 아들에게 먹게 하고 죽으려고 지금 나뭇가지를 줍고 있는 참이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요청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기에 정말로 너무나 지나친 요구 같아 보입니다.
그래도 이 여인은 극심한 기근에서 이제 최후의 가루한줌으로 아들과 함께 먹고는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러한 처지에서도 엘리야의 말대로 순종하여 주운 나무가지로 떡을 만들어 생면부지의 사람 엘리야를 먼저 공궤 하였습니다.
자기들도 먹고 살기가 너무 어려운데, 이것 먹고난후 굶어 죽어야 하는데도 먼저 엘리야를 공궤 한다는것은 정말 참 믿음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를 공궤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요 어려워도 우선 순위가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드리는 일임을 알고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14절에 엘리야가 말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1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 때 사르밧 과부는 15절에 보면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날 먹었으나 16.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어려워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엘리야를 먼저라고 하였을 때 그는 생활속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
니다. 사람이 들을 때에는 부당하게 들리는 명령같지만 어려워도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할 때 큰 축복이 임하였습니다. 사르밧과부가 받은 축복은 어떤 축복입니까?
1) 결단에서 온 축복입니다.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의 말씀을 들었을 때, 즉각적으로 믿고 따랐습니다. 본문 15절에 보면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she went and did according to the saying of Elijah) 기적은 결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바닥에 깔린 밀가루를 떡으로 빚는 모습, 병에서 한두 방울 흘러내리는 기름을 취하여 선지자를 위하여 떡을 굽는 행위는 결단의 결과입니다. 결단은 순종을 낳고 순종은 축복을 낳고, 축복은 기적을 가져옵니다. 결단이야말로 축복을 향한 방향설정입니다.
어떤 때는 살림의 마지막 밑천인데도 그걸 '내게 가져오라'는 음성이 들려올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마지막 남은 한 웅큼도 '내게 바치라'고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을 것입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 25년만에 얻은 약속의 아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둘만 있어도 하나 바칠 수 있을텐데, 그것도 사실은 어렵지만, 하나 주시고 다시 바치라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진한 감동이 아니면 결단할 수 없습니다. 결단하기 어려운 순간에 결단하나 않나를 주님이 지켜 보십니다. 하나님이냐, 아들이냐? 하나님이냐, 세상이냐는 두 개의 극단 사이에서 결단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그 때 여호와 이레의 축복이 임했습니다.
룻은 모압 여인입니다. 시아버지와 남편을 잃고 보니 모든 걸 잃은 불행한 여인입니다. 그런데다가 시어미니 나오미가 패가망신하고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고자 결단합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 오르바와 룻를 불렀습니다. "너희들 갈 곳으로 가라". 할 때 오르바는 세상으로 갔지만 룻을 어머니를 따라 나섰습니다.
룻1:7절을 보면 "죽는 일 외에는 어머니를 버리지 않겠습니다"(if anything but death separates you and me.룻1:17)
. 대단한 결단입니다. 불행과 절망과 슬픔의 땅을 찾아가는 나오미를 따라 룻은 생소한 땅 베들레헴으로 따라 나섰습니다. 룻의 결단의 건너편에 하나님은 유력하고 복스런 사람 보아스를 예비하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할렐루야!
창24장을 읽으면 우리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이 노종 엘리에셀을 머나먼 고향 땅 메소보다미아에 보내어 자부감을 구해 오게 합니다. 우물가에서 리브가라는 어여쁜 처녀를 만나 라반의 집으로 인도를 받고 주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이 온 목적을 다 알렸습니다. 리브가를 데려가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라반이 딸 리브가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이 사람과 함께 하려느냐?"(Will you go with this man?). 그러자 리브가가 대답합니다. "가겠나이다"(I will go).(창42:58) 처녀치곤 대담합니다.
미혼여성 250명에게 '결혼하고 싶은 남성'을 물었는데 박찬호선수가 1위였다고 합니다. 이유는 1000만불을 받는 경제대가인데다가 외모가 뛰어나 호감이 간다는 것입니다. 매스콤을 통해 보고나서들 호감이 가니 결혼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리브가는 신랑될 사람 이삭을 한번 보지도 못하고 낮선 늙은 종을 따라 모험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결단은 신앙의 족장인 이삭의 아내가 되는 영광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어려운 결단을 해야 합니다. 탕자와 같이 죽음의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그런 결단도 필요합니다. 몹쓸 병이나, 심한 실패에서 회복되었거든 옛 생활로 돌아가지 않기를 결단해야 합니다.
흉부외과 전문의 폴 아스킨스 박사가 폐암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그가 사망하기 전 남긴 유언이 있습니다. "내가 20년 전에 담배끊지 못한 일에 대하여 후회한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담배 끊으라, 그래야 산다"고 가르치면서 자기는 담배를 끊지 못하고 계속 피우다가 폐암에 죽어가며 남긴 말입니다. 결단하십시오.
2) 축복은 내게 있는 것에서 옵니다.
사르밧 과부의 전 재산은 밀가루 한 움큼과 기름병의 약간의 기름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작은 것을 기적의 소재로 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자국민을 구원하시는 지도자로 쓰실 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지팡이 뿐입니다"라고 대답하자, "그것을 들고 바로에게 나가라"고 하셨습니다. 마른 지팡이, 그저 양이나 치는데 쓰이는 그런 지팡이지만 바로를 꺾는 능력의 지팡이가 되었고, 바위를 가르고, 홍해를 가르며 물을 내는 기적을 만들어 내는 능력의 도구로 사용하셨고, 마침내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베드로의 성격이 얼마나 불인지 뭐든지 참지 못하고 말하고 칼을 들고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사건마다 끼여들고, 물속에도 달려들고 바다위도 걸어 가고 무덤속도 요한은 열린 것만 보고도 주님이 부활하셨음을 생각하지만 베드로는 열린 무덤을 들여다 보고 가야지 식성이 풀리는 그런 급한 성격을 가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주 실수를 했습니다. 그는 못된 성격을 고치려고 무던히도 기도했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성질을 평생 안 고쳐 주셨습니다. 그 성질 그대로 갖고 있게 하시고, 순종하여 순교자로 만드셨습니다.
바울도 육체의 가시를 고치려고 몇 번이 간절히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안 고쳐주셨습니다(고후12장). 약함 속에 오히려 하나님 더 의지하여 강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게 만드셨습니다. 신령한 은혜 위해 말로 다 할 수 없는 3층천의 경험도 갖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약점 때문에 괴로워 하지 말고, 약점에 연연하지 말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강점을, 은사들을 극대화하십시오. 우리 안에 이미 축복과 기적은 와 있습니다. 그것을 극대화 시키시고 드러내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다 축복의 씨앗이요, 축복의 뿌리들입니다.
3) 축복은 하나님 손에서 옵니다.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마지막 한 방울의 기름으로 떡을 구워 하나님의 종의 손에 올려드렸을 때 거기서부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가믐이 끝나는 날까지 가루와 기름이 다하지 아니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가 한 소년의 손을 떠나 주님의 손에 들려졌을 때 수 천명을 먹이고 부스러기가 12바구니를 거두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주님 손에 드릴 때, 하나님의 손에 잡힐 때 기적이 납니다. 본문 14절에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에게 힘주어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6절은 기적의 결과를 알려 주시는 구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桶)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이게 기적이 아니고 축복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기적과 축복을 은혜를 크게 몰고 다니는 주인공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시기와 분쟁과 다툼과 쓸데없는 자랑, 문제나 어려움을 몰고 다니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몰고 다니시기 바랍니다. 더러운 말은 입밖에도 내지말고 선한 말을 많이 하여 듣는 사람을 구원시킵시다.
인색한 마음으로, 아니면 자기들이 급하다고 먼저 다 먹어 버렸다면 기적은 없었고 그 양식이 끝나자 마자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었더니 날마다 기름과 가루가 통에서 떨어지지 않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벼랑 끝에 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어떻게 엘리야를 먼저 갖다 드린다고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을까?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순종하여 털어 드릴 때 기적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르밧 여인이 그 흉년에 엘리야를 매일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이 여인을 살리는 것입니다. 어렵다고 십일조나 선교헌금, 감사헌금 드릴 때 인색하게 드리지 않아야 합니다. 시간을 드리거나 은사와 직분을 통하여 드릴 때에도 조금 아끼고 안내고 하면 생활이 더 필 것 같지만 더 어렵습니다. 어렵다고 인색하면 하나님께서 더 어렵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어렵다고 씨까지 먹으면 안됩니다. 그 다음 해에 농사지을 씨는 남겨두어야, 즉 하나님께 드릴 것은 드릴 때 그 다음해에 심어서 30, 60, 100배의 축복을 받습니다.
2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하여 아들의 생명까지 살려주시는 축복을 베푸셨습니다. 그 집 아들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 여인의 아들을 안고 간절히 기도함으로 아들의 혼이 다시 돌아오는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물질의 축복만 아니라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 돌아오는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4) 축복은 엘리야 선지자를 여호와의 사람으로 알 때 일어났습니다.
축복의 결과 18절에 보면 엘리야를 향하여 여인은 “하나님의 사람이여”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야의 말을 보통사람의 말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알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순종할 때 귀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지나가는 이상한 노인으로 쯤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의 집에 모셔들이고 그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순종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축복 받는 사람은 정해져 있습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엘리야도 우리와 같은 성정의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를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이었고 그가 하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길 때 말씀에 순종할 때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믿고 순종함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눈이 열려져야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려울수록 우리는 엘리야처럼, 사르밧 과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은혜와 축복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받을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엘리야와 같이, 사르밧 여인이과 같이 무리하게 보이는 명령이라할지라도 순종할 때 가믐속에서도, 궁핍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크게 받아 누릴줄 믿습니다. 사르밧 여인은 믿음으로 순종하였고 그녀의 믿음은 그 극심한 기근에서도 살아남는 축복과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비가오지 않는 그 극심한 가믐속에서도 살아남는 축복과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 여러분! 믿음이 이기게 하십니다.
어려울 때에도 부당한 명령이 나에게 주어진다해도 순종할 때 고난도, 어려움도 아픔도, 슬픔도, 죽음도 질병도 이길만한 능력을 주시는줄 믿습니다. 주님 뜻하신 곳이라면 순종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찬양/
♬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멈춰 서리다.
내가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날 이끄소서.
뜻하신 그곳에 나있기 원합니다.
이끄시는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연약한 내 영혼 통하여 일하소서.
주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하여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요즘같이 사업을 하고 직장생활하고 공부하면서 일찍 출근하며 늦게 퇴근하는 피곤한 사람에게 새벽 기도를 드리라고 말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 주실 때 그 상황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어려운 상황에서 기도의 능력으로 환란에서 벗어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어렵고 힘들고 불가능하고 안될 것 같은데도 순종하면 열매와 기적을 맛보게 됩니다.
여러분! 신앙은 지식의 문제가 아닌 수준의 문제입니다. 자기 판단과 자신의 상황에 얽매어 행하다 보면 결코 궁지에서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100% 믿고, 100% 순종의 발걸음을 내디디면 상상하지 못할 열매와 축복과 은혜를 거두게 됩니다. 인생 신앙의 축복 비결은 내 견해, 내 생각이 아닌, 무리한 명령같아 보여도 순종하면 나갈 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