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베르트의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Winterreise), D.911> 중 제5곡인 '보리수(Der Lindenbaum)'는 실연의 아픔을 안고 한겨울에 방랑의 길을 떠난 청년의 쓸쓸한 마음을 담은 곡입니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바리톤)와 제럴드 무어(피아노)의 콤비는 이 곡이 가진 깊은 상실감과 아련한 추억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해 낸 역사적인 명반으로 꼽힙니다. 빌헬름 뮐러(Wilhelm Müller)의 시를 바탕으로 한 '보리수'의 내용과 극적인 흐름을 정리해 드릴게요.
🌳 '보리수'의 주요 내용과 이야기 흐름 '보리수'는 단순히 나무를 관찰하는 노래가 아니라, 과거의 따뜻했던 추억과 현재의 혹독한 현실 사이의 대비, 그리고 죽음(영원한 안식)에 대한 유혹을 담고 있습니다.
1연: 아름답고 따뜻했던 과거의 추억 성문 앞 우물가에 서 있는 보리수 한 그루를 떠올립니다. 방랑자는 과거에 그 그늘 아래서 달콤한 꿈을 꾸었고, 나뭇결에 사랑의 말들을 새겼습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그 나무를 찾았던 따뜻하고 평화로운 시절의 회상입니다.
2연: 춥고 어두운 현재의 방랑 시간은 흘러 지금은 춥고 어두운 깊은 겨울밤입니다. 방랑자는 그 보리수 곁을 지나가고 있지만, 차마 그 나무를 쳐다보지 못하고 두 눈을 꼭 감아버립니다.
3연: 안식(죽음)의 유혹 바람에 흔들리는 보리수 잔가지들이 마치 방랑자에게 말을 건네는 듯합니다. "내 곁으로 오라, 친구여. 여기서 안식을 찾으라." 이 '안식'은 고단한 몸을 뉘일 휴식처를 뜻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고통스러운 생을 끝내고 영원히 쉬라는 '죽음의 유혹'을 은유합니다.
4연: 유혹을 뿌리친 방랑, 귓가에 맴도는 환청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어와 방랑자의 모자를 날려버리지만, 그는 나무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재촉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지금도, 그의 귓가에는 계속해서 나뭇가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환청처럼 맴돕니다. "여기서 안식을 찾으라..."
🎹 피셔-디스카우와 제럴드 무어 연주의 감상 포인트 이 두 거장의 연주로 이 곡을 들으실 때 다음 부분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피아노 전주와 반주 (제럴드 무어): 곡의 시작 부분 피아노 반주는 보리수 잎이 부드럽게 흔들리는 소리를 묘사합니다. 하지만 3연과 4연으로 넘어가면서 이 반주는 거친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매서운 소리로 돌변합니다. 무어는 이 미세한 자연의 소리와 주인공의 심리 변화를 피아노 터치 하나로 완벽하게 묘사해 냅니다.
목소리의 색채 변화 (피셔-디스카우): 1연에서 과거를 회상할 때는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장조)로 노래하다가, 2연에서 현실로 돌아올 때는 차갑고 쓸쓸한 목소리(단조)로 급변합니다. 특히 보리수가 *"안식을 찾으라"*고 유혹할 때 속삭이듯 부르는 그의 표현력은 압권입니다.
가장 대중적이고 아름다운 선율을 가졌지만, 그 이면에는 지독한 고독과 죽음에 대한 유혹이 깔려 있는 아주 서늘한 명곡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