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하원칙인생론
당신은 삶의 육하원칙을 가졌는가?
인생이 불투명하고 무의해 보일 때 한번쯤 자기 삶의 육하원칙을 물어보는 건 어떨까? 그럼 안개처럼 뿌옇던 것들이 점차 명료해지면서 지금 여기서 나의 의지로 무엇을 또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육하원칙인생론이라 부르고 싶다.
우선 육하원칙은 이렇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이 육하원칙은 결국 ‘했나’라는 구체적인 동사인 행위로 모아진다. 물론 그 행위(doing)를 인생에 적용하면 삶(living)이다.
당신이 아름다운 삶, 행복한 삶, 혹은 위대한 삶을 살고 싶다면 명확한 육하원칙의 나침판을 가져보는 것은 어떤가? 삶에는 파도도 있고 폭풍도 있다. 길을 잃기도 한다. 하지만 가야할 곳을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결국 그곳에 도달하게 된다. 뛰어난 항해사처럼.
우선 육하원칙의 여섯은 둘로 나눠진다.
‘누가, 언제, 어디서’가 하나요. ‘무엇을, 어떻게, 왜’가 둘이다.
앞의 셋은 자기정체성, 성격과 관계된 질문이고, 뒤의 셋은 의지와 꿈, 실현방법에 대한 질문이다. 구체적인 삶을 위해서는 뒤의 셋이 직접적인 질문이 되지만, ‘나’의 정체성과 관계된 세 가지 질문에 대한 확인도 중요하다. 그래서 우선 순서대로 물어보자.
우선 첫 번째 질문을 자신에게 하자!
'누가(who)'사는가?
너무 쉬운 질문인가? 하지만 자신에게 거듭 물어보자. 지금 나는 내가 살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누가 살고 있는가? 정말 내 삶은 내가 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내 속의 우는 어린 아이가 주인이 되어 살고 있는 건 아니가? 아니면 엄마나 아빠의 소망과 근심이 주인이 되어 사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내 삶의 주인인 ‘나’라고 부를 만한 것이 아직 확실하지 않은가? 지금 나는 소심한 내향의 아이인가? 허영심 가득한 세속주의자인가? 남 하는 대로 따라만 하며 사는 흉내쟁이인가? 나는 부정적인 사람인가? 긍정적인 사람인가? 한계가 많은가? 아니면 없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기존의 지식과 고정관념으로 꽉 찬 사람인가? 모든 것을 열린 마음으로 기꺼이 경험하는 사람인가? 판단하는 사람인가 공감하는 사람인가? 이 모든 것들을 뒤로 하고 지금 나는 기꺼이 인생을 맞이하고 펼칠 수 있는가?
사람은 수없이 많은 가면얼굴을 가지고 산다. 어머니, 아들, 선생님, 학생, 친구, 한국인, 서울사람, 21세기인, 운전자, 납세자, 행인 등 가면얼굴은 다양한 관계로 구성된 사회에서 역할과 기능에 맞는 행위를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그것이 참된 나는 아니다. 참된 나는 이 모든 것들을 포함하고 또 뛰어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선 ‘나’를 가면얼굴에 빼앗기거나 가면얼굴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한다. 내가 원치 않지만 강제로 써야 하는 가면과 버리지 못한 채 창고에 처박아 둔 잡동사니와 쓰레기 같은 과거의 가면들은 한번쯤 싹 비우자.
과거의 내가 아무리 어둡고 부정적이어도, 지금 ‘나’는 만유자연과 공존하는 모든 것의 일부이고, 모든 경험과 새로운 가능성을 내포한 사람이다. 거의 무제한적인 ‘나’는 이제 삶이라는 무대에 새롭게 놓였고 어떤 의미 있는 역할을 맞아 즐겁게 해나갈 수 있다.
‘언제(where)'? 물론 지금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오늘을 살아도 어제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불안한 미래에 대한 공포 때문에 현재를 잃어버린 채 유보된 삶을 사는 사람도 많다. 죽은 교육을 십년이 넘게 견디며 사는 이유도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 아닌가? 그래서 오히려 참된 공부의 맛을 모른 채 학창시절을 마감한다. 유년의 나쁜 기억과 부모님의 근심 때문에 현재에 펼쳐지는 수없이 많은 경험들을 포기하기도 한다. 그것은 과거에 붙잡혀 사는 것이니 현재를 산다고 볼 수 없다. 우리가 참으로 ‘지금(now)’을 살기 위해서는 아무런 전제조건이 필요 없다. 그저 기꺼이 맞이하고 살아내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결단이다. 그럼 행복은 거기 부록처럼 저절로 딸려온다. 혹시 과거의 그늘과 미래의 불안으로 현재를 유보하거나 축소해 살고 있다면, 그래서 현재의 생생한 즐거움과 길이 불투명하다면, 우선 과거와 미래를 지우고 지금만을 사랑하고 지금만을 살겠다고 다짐해보자.
'어디서(where)'? 물론 '여기(here)'다. 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삶의 현장인 ‘여기’는 다 다르다. 어떤 이는 약육강식의 지옥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무의미의 연옥이라고도 한다. 어떤 이는 삶의 실험실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영혼의 학교라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사랑 가득한 천국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당신이 바라보는 세계상이다. 비록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현실이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세상이라도 나는 그 안에서 그것에 복종해 살지 않고 마음이 지시하는 나의 세계를 만들면서 살 수 있다. 주어진 세계가 있고 만들어나가는 세계가 있다. 주어진 세계를 주어진 대로 사는 삶이 있고, 주어진 세계가 마음에 안 들어 나에 맞는 세계를 찾아가거나, 그것이 없다면 만들어나가기도 한다. 어쨌든 여기서는 두 가지 현실에 대한 진단이 필요하다. 우선 나는 지금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가? 그리고 내가 속하고 싶은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두 세계가 일치하지 않는다면 상반되는 두 세계의 이중구속에 갇혀 내면엔 고통이 따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정을 내린다. 하나의 세계를 부정하고 하나의 세계 실현을 위해 매진하게 된다. 대개는 밖에서 주어진 세계 논리를 따르지만, 몇몇은 내 안에서 피어난 세계를 택하기도 한다. 냉철한 이성으로 현실 세계를 직관하고, 뜨거운 마음으로 새 세계를 그려보는 것이 필요하다.
‘무엇을(what)'? 이것은 삶의 목표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흔히 행복을 삶의 목표라고 한다. 특수하게 민족 통일이나, 인류 평화 등을 말하기도 한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목표 안의 목표라고 말할 수도 있다. 어떤 이는 물질적 가치에 더 치중해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삶의 목표로 두기도 한다. 경제적으로 안정되면 삶이 행복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돈보다, 이상의 실현이나, 도전과 모험의 성취, 내지 업적에서 찾기도 한다. 사랑 받는 것이 삶의 목표인 사람도 있고, 사랑을 주는 것을 삶의 목표로 정한 사람도 있다. 이것은 가치, 의미를 묻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살사회를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자살의 동기 중 하나는 목표 상실과 삶의 무의미이기도 하다.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유명해지고 권력을 가졌어도 삶을 무의미하게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가치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가치전도 속에 살고 있다.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고 돈이 최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더 중요한 내면의 가치를 잃어버렸다. 하지만 가치란 대단히 주관적이고 내적인 것이다. 내게 의미가 없으면 무가치한 것이고, 의미가 있으면 가치 있는 것이다. 내가 돈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했으므로 돈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이 되었지, 원래 돈이 의미 있고 가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인생이라는 항해를 한다면, 당연히 참된 보물이 있는 항구를 향할 것이다. 참된 의미와 참된 가치가 있어야 한다. 분별력이 필요하다. 그것이야말로 살아도 죽은 삶을 살지 않고, 죽어도 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호명하고 그것이 내게 참으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인지 거듭 물어보자.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치 있다고 해도 내가 아니면 과감히 버리는 연습도 하자. 참된 가치와 의미를 자꾸 물어보면 점차 거짓된 가치는 사라지고, 사금처럼 참된 가치만 빛날 것이다. 그러면 좀 더 인간의 존엄성과 사랑과 영혼과 자유에 대해 눈을 뜨게 될 것이다.
‘어떻게(how)'? 바른 목표를 갖지 않으면 방법을 제대로 갖기도 어렵다. 목표가 바르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를 성취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바른 목표는 바른 방법을 부른다. 사람들은 흔히 필요악을 이야기 한다. 평화를 위해 경찰이나 군대가 필요하다고 말하거나, 부자가 되어 남을 돕기 위해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생각 속엔 사람에 대한 불신과 돈에 대한 맹신이 들어 있고, 바로 이것이 참된 평화와 선행을 더 어렵게 만든다. 바른 목표를 가지고 있으면 직접적으로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제일 낫다. 평화를 위해서는 우선 내가 무기를 버리고 상대방이 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다가가야 한다. 물론 방법은 개인에 따라 여러 가지다. 하지만 필요악과는 타협을 해서는 안 된다. 좀 다른 예로 만약 당신이 훌륭한 음악가가 되고 싶다고 하자. 그렇다면 참으로 훌륭한 음악가는 어떤 사람인가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명문 음대를 나오고 명장의 악기를 가지고 콩쿨에서 우승하고 큰 무대에서 공연하는 것일까? 거리에서 혹은 병실에서 혹은 아이들과 손쉽게 즐길 수 있는 음악을 하는 것일까?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택할 것이다.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방법을. 하지만 나는 부탁하고 싶다. 혹시 당신이 당신의 꿈을 성취할 때 필요악이라는 것과 타협하지 않기를. 남의 불행을 통해 내 행복이 성취되지 않기를.
‘왜(why)'? 삶의 동기지만 동시에 목표와 연결이 된다. 당신이 어떤 것에 의미와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지, 그것이 명확하다면 당신은 뚜렷한 동기를 가진 셈이다. 이 질문은 살면서 거듭거듭 물어야 한다. 자기 확신의 근거이며 목표 확인 작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거기서 자기만의 삶의 원리가 나온다. 한편 이성적 판단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직관과 사랑의 원리를 따르는 사람이 있다. 두 가지가 조화로우면 좋겠지만 현대인의 대부분은 이성적 판단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성은 새로운 경험과 가치엔 익숙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자기가치를 표현하는 중심어를 가지고 있다면 삶의 방향을 잡을 때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죽도록 열심히 살고도 헛살았다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자꾸 물어야 한다. 그것이 뛰어난 삶의 항해사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육하원칙을 가지고 하는(doing) 삶(living)은 자기가 삶의 주인으로서 자유를 행사하고 책임지는 삶이기도 하다.
당신 삶의 육하원칙은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