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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회 36차 산행, 팔공산 「원효 구도의 길」과 「오도암(悟道庵)」 한시(漢詩)>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이번 달 산행은 연일 계속되는 한여름 폭염 속에서, 5~6시간 동안의 해발 1000m 등산은 무리라고 생각한 선배들의 판단에 따라, 시원한 계곡과 더불어 간단한 산행을 할 수 있는 대구 근교 ‘군위군 부계면 동산리‘의 동산계곡과, 인근 오도암(悟道庵)과 원효굴 탐방으로 중지를 모았다. 산행은 ’동산 탐방지원센터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오도암과 원효굴을 보고 돌아오는 코스다. 그러나 오도암에서 원효굴까지 500m는 가파른 데크 계단길이라, 고난의 등산이 예정되었다.
*[산행 코스] 동산 탐방지원센터주차장(오도암 제1주차장) ⇨1.5km 오도암 ⇨500m(계단) 원효굴 ⇨500m(계단) 오도암 ⇨1.5km 오도암 제1주차장. 왕복 총 4km 정도이며, 쉬엄쉬엄 3시간 정도 걸린다.
간단한 이 코스는 원효대사가 6년간 수행한 원효굴이 백미이며, 오도암에서 원효굴로 가는 714계단에서 보는 팔공산경치가 압권이다. 그리고 최고의 명당에 자리 잡은 오도암과 그 뒷편 청운대를 감도는 하늘의 기운과 더불어 하늘정원과 비로봉이 천하의 명당을 감싸고 있어 과히 천하의 절경이라 할만하다. 참고로 동산탐방지원센터 주차장에서 오도암까지는 편도 1.5km인데 휴식 시간을 고려해 약 1시간 50분 소요 예정이다.
다른 회원분들은 모두 여기 오도암 산행이 초행길이 아니지만, 나는 이곳은 처음이라 그런지, 낯선 자연이 주는 경외감과 짜릿한 해방감에 이어 신선한 행복을 안겨주었다. 휴일이라 등산객의 발길이 드문드문 이어지긴 했으나, 「원효 구도의 길」은 흔들림 없이 평온하였다.
○ [제36차 청동회 산행] 2026년 8월2일, 대구시 수성구 대구스타디움에서 오전 8시까지 1차로 회원 4명이 모인 후, 다시 대구시 북구 도남길 힐스테이 아파트 정문에서 2차로 1명이 합류하여 총 5명의 회원이 한 차량을 타고 출발했다. 경북 칠곡군 동명면 구덕리 ’동명저수지‘를 거쳐 목적지인 군위군 부계면 원효길 ’동산 탐방지원센터 주차장(오도암 제1주차장)‘에 오전 9시 정각에 도착했다.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계곡 입구부터 오은사까지 약 3km의 도로와 주차장은 이미 만원을 이루어 차를 댈 곳이 없을 정도였다. 다행히 제일 위쪽에 위치한 ’동산 탐방지원센터 주차장‘은 아직도 주차할 공간이 넉넉히 남아 있어 편히 주차할 수 있었다. 주차장 입구에서 위쪽으로 5m 즈음의 우측 산길이, 「원효 구도의 길」인데 이 산길을 따라 9시 5분부터 등산을 시작했다. 세족정과 나무다리, 오도암 얼음골을 거쳐 정자(亭子)에서 1차로 휴식과 간식 타임을 가졌고 이후 오도암 인근에서 2차 휴식 타임을 가지면서 세월 따라 구름 따라 쉬엄쉬엄 발걸음을 옮겼다. 1시간 50분만에 오도암에 도착하여 암자(庵子)를 탐방하고 암자의 관계자와 인사를 나눈 후에 다시 원효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지는 자연 동굴인 ’원효암‘으로 향했다. 암자 입구에서부터 데크길이 이어졌는데 약160 계단을 오르락 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니 다시 산길이 약 50m 더 이어져 있었다. 이어 오도암에서 하늘정원까지 연결된 지옥의 714계단이 하늘을 우러러 턱 하니 버티고 있었다. 여기서 약 630 계단(450m)을 오르면 원효굴 입구에 도착한다. 회원 모두 연거푸 토해내는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한 계단씩 오르기 시작했다.[오늘 대구시 기온 39도] 300계단부터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근육이 풀려 포기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계단에서 앉았다가 이내 또 누웠다가, 생수를 들이키면서 천천히 한걸음씩 오르다보니 마침내 원효굴 입구 계단까지 올랐고, 드디어 그 옆길의 천길 벼랑의 잔도 계단을 따라 약50m를 더 가서 원효굴에 도착했다. 여기서 다시 3차 휴식과 간식 타임을 가진 후에 하산을 시작했다.
하산은 비교적 쉽고 빨랐다. 다만 계단으로 오르는 등반 때 소요된 에너지 때문인지, 다리가 연신 후들거려 여러 차례 주저앉을 뻔했다. 오도암에서 내려오다 보면 등산길 곁에 화장실이 있고 또 여기서 계속 내려오다 보면, 여기저기 돌탑들이 쌓여 있고, 또 등산길 곁 계곡에서 처음으로 샘물이 용솟음쳐 계곡물이 시작되는 곳이 있다. 이 물은 산속 계곡의 작고 큰 여러 바위들 속을 거쳐 나왔기에 정말로 차갑고 시원했다. 과연 ‘오도암 얼음골’이라 부를만 했다.(오늘부터) 여기에 여성분들이 모여 피서를 즐기고 있기에 지나가면서 “여긴 선녀탕이니 옷이라도 벗어 바위에 올려놓아야 선녀라 부르지 않겠냐?”고 농을 던지면서 하산을 계속했다. 여기 얼음골에서 작은 언덕을 하나 넘으면 자그마한 계곡이 시작되고 여기에도 졸졸 물이 흐르는데 그곳 이름을 ‘세족탕’이라 부르고 있었다.[난 오도암 얼음골이 훨씬 더 시원하고 수량도 많고 경치도 좋았는데 여기만 안내판이 서 있었다]
하산길은 정말로 빨랐다. 동산 탐방지원센터주차장(오도암 제1주차장)에 도착하니 오후 12시 25분이었다. 총 4km에 3시간 20분이 소요되었다. 예전 산행에 비해 시간이 넉넉해 회원들 간에 식사할 곳을 의논했는데 이 근처 동산계곡에서는 예약없이 식사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가격도 서너 배나 된다하여, 30km를 달려가 1년 전에 식사를 했던 경북 칠곡군 가산면 호국로 ‘듬티 별미식당’에 가서 닭백숙과 음료와 주류 약간씩을 마음껏 시켜먹고 난 후, 운곡 선생의 나와바리 대구시 북구 국우동 카페에서 ‘시원한 팥빙수’를 먹고 헤어져 귀가했다.
○ [풋내나는 추억의 좌담] 오늘 36차 산행은 5명의 청동회 회원들이 좌담을 할 때마다 구수한 옛날 추억을 늘어놓아 좌중을 폭소케 만들었다. 만촌 선배가 이런저런 얘기 끝에, 나는 어느 지인을 만날 때마다 그가 자꾸 남 이야기만 하도 하기에, “니 꺼나 꺼내 봐라”고 되받아 쳤다면서 통쾌해했다. 남 이야기 그만하고 “자네 얘기나 해 주게”라는 경상도 사투리다. 한 마디로 “니나 잘 하세요”가 핵심 주제다. 그런데 듣기에 따라 변태 같다. 명심하건대, 늙어가매 이러한 남 얘기만 한다는 것은, 자신의 품위를 지킬 수도 없고 또한 자신의 열등감과, 주체성 없는 행동을 보일 뿐이다. 유념해야 한다.
그리고 오늘은 어느 두 분의 회원님께서, 만 40년 전에 일어난 어떤 남녀 관계를 회상하며, 그 당시 실제 일어난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들려주니, 우리 모두를 머무는 동안 내내 파안대소를 터뜨리게 만들었다. 자칭 ‘젊은 시절 3각 관계의 아름다운 추억’이었다. 먼저 술값도 내고 묘령(妙齡)의 여인을 양보한 어느 한 분과, 졸업앨범값으로 술값을 소비하며 묘령(妙齡)의 여인의 육체를 결국 탐하고만, 어느 한 분 사이에서 치정에 얽힌 반목과 갈등이 주제였다. [이만 생략하겠음 ㅎㅎ] 젊은 시절의 추억은 언제 들어도 풋풋하고 상큼하며 싱그럽고 아름다웠다. 결국 풋내 나는 왕성한 혈기만 가득했던 시절에 패기뿐인 서툰 청춘이었던 것 같다.^^
○ 「오도암(悟道庵)」 팔공산 제일의 명당으로, 비로봉의 청운대 절벽 아래 해발 900m지점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절은 신라 654년 (태종무열왕 원년)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오도(悟道)’ ‘진리를 깨달은’ 곳이라 하여 오도암(悟道庵)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1963년 폐사 이래 유허(遺墟)만 남아 있으며, 또 빼어난 상호(相好)의 불상(佛像)과 고탱화는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절 뒤의 청운대(淸雲臺)에는 원효대사가 득도한 원효굴과 젊은 시절 김유신 장군이 기거하여 그 물을 먹으면서 나라의 앞일을 생각했다는 장군수(將軍水)가 있다. 또 이곳 토담집에 붙여놓은 불인선원(佛印禪院)이란 편액글씨는 현대의 선지식 일타스님(1929~1999)이 써주신 것이라 한다. 불인선원(佛印禪院)이란 ‘부처로부터 직접 인가를 받은 곳’이란 뜻이다.
○ [팔공산 「오도암(悟道庵)」 대웅전 주련] 이 주련은 "세상 만물은 본래 하나이며 실체가 없으니, 거룩함과 더러움 같은 인간의 분별 집착을 모두 던져버려라. 그 자리가 바로 매일이 축제 같고 사바세계가 그대로 극락이 되는 절대 자유(해탈)의 경지이다"라는 강력한 깨달음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또한 깨달음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의 참모습과 걸림 없는 절대 자유의 경지를 노래한 측기식 오도송(悟道頌)이다.
**「오도암(悟道庵) 대웅전 주련」** / 금모불산스님 오도송(悟道頌)
靑白歌舞常祝日(청백가무상축일) 청산 백운이 춤추고 노래하니 항상 축제날이고
天地同根絶是非(천지동근절시비) 하늘 땅은 한 뿌리라 시비곡절이 끊어졌다네.
形色頭物本來空(형색두물본래공) 형형색색 두두물물은 본래 없는 빈자리라,
玉佛放尿裟解脫(옥불방뇨사해탈) 옥돌 부처가 방뇨하니 사바세계가 해탈일세.
*[해설] [1구]에선, 깨달음을 얻고 나면 평범한 자연 풍경(청산과 백운)이 그대로 대자연의 거대한 축제로 보인다. 내면의 번뇌가 사라져 매일 매일이 축제처럼 평화롭고 기쁜 상태를 뜻한다. [2구]에선, 우주 만물이 결국 나와 하나의 뿌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진리다. 너와 나의 구분이 사라지니 옳고 그름을 따지는 분별심과 갈등이 완전히 소멸된 경지다. [3구]에선, 불교의 핵심 사상인 '공(空)'을 말한다. 눈앞의 현상(형색)과 삼라만상(두두물물)은 인연에 따라 잠시 나타난 것일 뿐,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꿰뚫어 본 것이다. [4구]에선, 격식과 집착을 깨부수는 선가(禪家)의 파격적인 표현이다. 신성한 '옥불'이 오줌을 눈다는 것은 거룩함과 더러움, 부처와 중생이라는 이분법적 관념을 완전히 초월했음을 뜻한다. 그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 우리가 사는 이 고통스러운 사바세계가 곧바로 깨달음의 세계(해탈)로 바뀐다.
○ [팔공산 원효굴(元曉窟)] 원효굴(서당굴)은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617~686)가 머물며 수도하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지는 자연 동굴이다. 팔공산 절벽 높은 곳에 숨겨진 이곳은 불교의 대중화를 이끈 원효대사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불교 성지다. 위치는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동산리 방향의 팔공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해발 1,000m가 넘는 거대한 바위 절벽인 청운대 정상 부근 깎아지른 듯한 벼랑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동굴 입구 높이는 약 80cm, 길이는 약 280cm로 성인 한 명이 겨우 들어갈 만한 아담한 크기다. 정남향을 바라보고 있어 묘하게도 여름에는 햇빛이 들지 않아 시원하고, 겨울에는 굴 깊숙이 볕이 들어 따뜻한 구조다. 또한 신기하게도 동굴 내부 바닥에는 항상 맑은 물이 솟아나 고여 있으며, 천장에서도 물방울이 똑똑 떨어진다.
역사와 설화를 살펴보면, 원효대사가 654년에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암자인 오도암 바로 뒷산 절벽에 굴이 있다. 원효대사는 오도암에 머무는 6년 동안 이 굴을 오가며 치열한 구도행을 이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원효대사의 어릴 적 이름(아명)인 '서당'을 따서 ‘서당굴(誓幢窟)’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참고로 팔공산 경산시 와촌면 방면의 불굴사에도 또 다른 원효굴이 존재하여, 팔공산 전체가 원효대사의 깊은 수행처였음을 알 수 있다.
과거에는 밧줄을 타고 가야 할 정도로 험난한 청운대 절벽에 자리 잡은 서당굴은 원효가 6년간 수도해 깨달음을 얻은 수도석굴이다. 접근조차 쉽지 않은 천인절벽에 어떻게 굴을 만들었는지 쉽게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최근에는 원효 구도의 길 등산로와 데크 계단이 잘 정비되어 일반 등산객도 방문할 수 있다. 인근의 팔공산 하늘정원이나 비로봉 코스와 연계하여 트래킹하기가 좋다. 단, 여전히 절벽 구간이므로 날씨가 나쁘거나 겨울철 빙판길에는 안전에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 「원효(元曉)대사)」 원효대사는 신라시대 고승으로, 속성은 설(薛), 아명은 서당(誓幢)·신당(新幢), 이름은 사례(思禮), 원효라는 이름은 출가한 뒤 지은 이름으로, 첫새벽(始旦)을 뜻한다. 신라 진평왕 39년 압량군 불지촌(경북 경산시)에서 태어났으며 설총(薛聰)의 아버지다. 젊은 시절 의상과 함께 당나라에 가서 수학하고자 요동까지 갔지만 고구려군에게 첩자로 몰려 갇혀있다가 겨우 풀려나 신라로 돌아왔다. 십년 후, 두 번째로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가기 위해 백제국 항구로 가던 도중에 하룻밤을 지내게 된 토굴에서 갈증이 나 토굴 속에 고여 있는 물을 마셨는데 물맛이 매우 달고 시원하였다. 그러나 아침에 깨어보니 토굴이 아니고 오래된 공동묘지였고 물을 마셨던 그릇은 바로 해골이었다. 이를 계기로 대오(大悟)한 원효대사는 발길을 되돌려 신라로 돌아갔다. 신라로 돌아온 원효대사는 미친 사람이나 거지 행세를 하면서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민중포교에 들어갔다. 이후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어 설총을 낳았고 그후 파계(破戒)하였다. 파계한 후 속복(俗服)으로 갈아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고 하면서 천촌만락(千村萬落)을 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였다. 이로 인하여 가난한 사람, 어린아이들까지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염불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원효대사가 교화한 사상으로는 인간의 원래 본성인 일심(一心)으로 돌아가자는 ‘일심사상(一心思想)’, 모두가 실제의 모습으로 돌아가면 하나로 만난다는 ‘화쟁사상(和諍思想)’,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무애사상(無碍思想)’이 대표적이다. 말년에는 왕궁에서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을 강의하였고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화엄경소(華嚴經疏)≫을 저술하였다. 원효대사는 신라 신문왕6년 70세의 나이로 혈사(穴寺)에 입적하셨다. 입적 후, 아들 설총이 원효대사의 유해로 소상(塑像)을 조성하여 분황사에 봉안하였다.
● 다음은 오도암 한시 「등오도암(登悟道庵)」, 「자막암도오도암(自幕巖到悟道菴)」, 「자오도암유중악 남도염불암(自悟道菴踰重岳 南到念佛菴)」이다. 차례대로 소개한다.
1) 다음 ‘覃’ 운목의 칠언율시 「등오도암(登悟道庵)」 ‘오도암을 오르며‘는 구한말 유학자 경산(耕山) 최시술(崔蓍述 1839~1923)의 작품으로, 그의 문집 《경산문집(耕山文集)》에 수록되어 있다. 저자가 험준하고 신비로운 절벽 위 암자 팔공산 오도암을 오르며 느낀 바를 기술한 한시다. 기암괴석과 푸른 산안개가 어우러진 대자연의 절경과 더불아 오도암의 아름다운 풍경을 찬탄하며 유학자로서의 자기반성으로 마무리했다.
○ 내용인즉, 현 대구 군위군 팔공산에 위치한 오도암(悟道庵)을 반나절을 걸어가다 길 끊어진 바위틈에서 암자를 발견한다. 이 암자는 원효대사가 깨달음을 얻은 곳으로 유명하며, 기암괴석이 절경을 이루는 험준한 곳이다. [1~2구]에선, 깊은 산속, 길이 끊어진 듯한 절벽 사이에 겨우 자리 잡은 오도암의 험준하고도 신비로운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3~4구]에선, 중국 우왕의 신비한 도끼(大禹神斧)로 깎아지른 듯한 자연의 위대함을 찬탄하며, 그 험한 바위 틈에서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킨 불상을 우러러본다. [5~6구]에선, 암자 주변의 지형을 '금반(평평한 바위)'과 '옥순(뾰족한 바위 봉우리)'에 비유하여 시각적 아름다움을 극대화했다. [7~8구]에선, 유학자(선비)인 저자는 말세에 유학의 도리(吾道)가 땅에 떨어지고 침체된 현실을 한탄한다. 반면, 험난한 곳에서 묵묵히 진리를 수호해 온 불교(禪家)를 보며 지식인으로서 깊은 부끄러움과 반성을 느낀다. 종교의 벽을 넘어 진리 탐구에 대한 선비의 엄격한 자기 성찰이 돋보이는 명시다.
**「등오도암(登悟道庵)」** /경산(耕山) 최시술(崔蓍述 1839~1923)
半日登山始見庵 반나절이나 산을 오르고서야 비로소 암자가 보이는데
巖藏路斷起楹三 바위에 숨어 길 끊어진 곳에 세 칸 기둥이 우뚝 서 있네.
幾經大禹傳神斧 대우(大禹)의 신비한 도끼질을 몇 번이나 거쳤기에 이리 기이한가,
長使如來守古龕 여래로 하여금 오랫동안 이 오래된 감실을 지키게 하였구나.
平似金盤甘滴露 평평하기는 금반(金盤) 같아 달콤한 이슬이 방울져 떨어지고
尖如玉筍碧流嵐 뾰족하기는 옥빛 죽순 같아 푸른 산안개가 감돌아 흐르네.
方今吾道寥寥久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도(儒學)는 쇠퇴한 지 오래되어 가고
愧爾禪家早指南 불가(佛家)가 일찍이 가야할 방향을 알려줬으니 부끄러울 뿐.
[주1] 대우신부(大禹神斧) : 대우는 중국(中國) 고대(古代)의 성왕(聖王)인 ‘우왕(禹王)’을 높여 이르는 말이고, 신부(神斧)는 신령스러운 도끼를 뜻함.
[주2] 금반(金盤) : 금(金)으로 만든 쟁반(錚盤). 아름다운 쟁반(錚盤).
[주3] 벽류람(碧流嵐) : 바위 봉우리 사이로 푸른빛을 띤 산안개가 신비롭게 흘러가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묘사한 어휘임.
2) 다음 ‘微’ 운목(韻目)의 칠언율시 「자막암도오도암(自幕巖到悟道菴)」 ‘막암에서 출발하여 오도암에 도착하다.’는 근대 주자학자이자 문사인 이산(梨山) 박세환(朴世煥 1874~1966)의 작품으로, 그의 문집 《이산문집(梨山文集)》 권1(卷之一)에 수록되어 있다. 그는 경북 의성군(義城) 금성면 대리(大里)리에 거주하며 제자를 양성하고 정주자학(程朱子學)에 전력한 문사(文士)였다. 이 시는 선경(仙境) 같은 깊은 산속의 사찰을 찾아갔으나, 아쉽게도 스님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는 여정과 아쉬움을 담은 한시다.
**「자막암도오도암(自幕巖到悟道菴)」** ‘막암에서 출발하여 오도암에 도착하다.’ / 박세환(朴世煥 1874~1966)
有客求仙更拂衣 어느 나그네가 신선 찾으려 다시 옷자락 떨치고 일어나,
攢松隨柳過柴扉 빽빽한 소나무와 버드나무 따라 사리문(사찰 문)을 지나네.
眞的深源流水活 참으로 깊은 근원에서 솟은 물줄기는 활기차게 흐르고
淸閒半日俗心稀 반나절의 맑고 한가함 속에 세속의 욕심은 드물어지누나.
弊屐頻跎程斷續 닳아진 나막신으로 자주 비틀거리니 갈 길은 끊겼다 이어지고
群山如畫草芳菲 무리 지은 산들은 그림 같고 풀들은 향기롭게 우거졌네.
攀扶纔至西林下 나무를 붙잡고 겨우 서림(西林 사찰) 아래에 도착했건만,
惟恨知僧出未歸 오직 잘 아는 스님이 외출하고 돌아오지 않은 것이 한스러워라.
○ 내용인즉, [수련(1~2구)]에선, 세속을 벗어나 신선(또는 고승)을 만나기 위해 옷을 털고 일어나, 소나무와 버드나무가 우거진 호젓한 산문(사리문)으로 들어서는 설레는 시작을 묘사했다. [함련(3~4구)]에선, 산속의 맑고 생명력 넘치는 활수(活水)를 바라보며, 복잡한 세상사를 잊고 마음이 정화되는 무아의 경지를 표현했다. [경련(5~6구)]에선, 서림사로 향하는 길이 험난하여 나막신이 닳고 발걸음이 비틀거리지만, 눈앞에 펼쳐진 산과 들풀의 풍경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워 고단함을 잊게 한다. [미련(7~8구)]에선, 고생 끝에 목적지인 사찰(서림)에 겨우 도착했으나, 만나고자 했던 스님이 부재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시인의 깊은 아쉬움으로 시를 마무리했다.
3) 다음 ‘青’과 ‘庚’자를 통운한 칠언율시 「자오도암유중악 남도염불암(自悟道菴踰重岳 南到念佛菴)」 ‘오도암(悟道菴)으로부터 겹겹이 쌓인 큰 산마루를 넘어, 남쪽으로 염불암(念佛菴)에 이르다.’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산(梨山) 박세환(朴世煥 1803~1876) 선생의 작품으로 그의 문집 《이산문집(梨山文集)》권1(卷之一)에 수록된 평기식 한시다. 팔공산 오도암에서 출발해 팔공산 정상의 험준한 산마루를 넘어 염불암에 이르는 여정 속에서 느낀 종교적 장엄함과, 유학자(선비)로서 자신의 본분을 되새기며 성리학의 핵심 논쟁인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다짐을 노래한 깊이 있는 작품이다.
**「자오도암유중악, 남도염불암(自悟道菴踰重岳 南到念佛菴)」** ‘오도암(悟道菴)으로부터 겹겹이 쌓인 큰 산마루를 넘어, 남쪽으로 염불암(念佛菴)에 이르다.’ / 박세환(朴世煥 1874~1966)
踰山沿壑過松亭 산을 넘고 골짜기 따라 소나무 정자를 지나니
纔到沙門暮磬聲 겨우 사찰 문(沙門)에 도착하자 저녁 경쇠소리 울려 퍼지네.
一人往跡留雲白 한 스님(원효대사)이 다녀간 자리에 흰 구름만 머물러 있고
二客逢筵拭眼青 두 명의 객이 만남의 자리에서 반가이 눈 비벼며 서로를 바라보네.
層巖畫佛眞心靜 층층이 쌓인 바위에 새겨진 부처를 보니 참된 마음이 고요해지고
流水殘溪世慮醒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세상의 모든 시름이 깨끗이 깨어나네.
雖然此地非吾分 비록 그러하나 이곳(불가)은 나의 본분이 아니니
莫若歸論四七情 고향 집으로 돌아가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논하는 것만 못하리라.
○ 내용인즉, [수련(1~2구)]에선, 오도암에서 염불암으로 향하는 깊은 산세와 험난한 여정을 묘사했다. 해 저물 무렵 겨우 절 문턱에 들어서자마자 장엄하게 울리는 저녁 종소리(暮磬聲)가 여정의 피로를 씻어준다. [함련(3~4구)]에선, 염불암에 얽힌 고승의 역사적 자취와 현재의 만남을 대조했다. '일인(一人)'은 과거 오도암이나 염불암에서 수행했던 원효대사 등의 옛 자취를 뜻하며, '이객(二客)'은 현재 이곳에서 마주친 시인 일행을 뜻한다. '식안청(拭眼青)'은 한대(漢代) 완적의 고사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마음에 드는 사람을 반갑게 대하는 '청안(青眼)'을 뜻한다. 즉, 산중에서 좋은 도반을 만나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반가워하는 모습이다. [경련(5~6구)]에선, 대구 팔공산 염불암의 유명한 문화재인 '마애여래좌상(바위에 새겨진 불상)'을 바라보며 느낀 감흥이다. 거대한 바위 절벽에 새겨진 부처의 미소 속에서 마음의 고요를 얻고, 흘러가는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속세의 번뇌와 잡념(世慮)이 맑게 깨어남을 시각과 청각으로 수려하게 대조했다. [미련(7~8구)]에선, 이 시의 핵심적인 반전이자 유학자로서의 정체성이 드러내는 결구다. 산사(山寺)의 경치가 아무리 훌륭하고 불가의 가르침이 정화감을 준다 한들,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인 나에게는 '내 분수(吾分)'가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그러므로 속세를 완전히 등지는 대신, 다시 인간 세상(고향)으로 돌아가 성리학의 본질인 사단칠정(四端七情, 인간의 도덕적 본성과 감정)을 탐구하고 논하는 것이 선비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이자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며 담담하게 스스로를 경책하며 마무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