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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대 박물관 종 전시
관련 기록 남아 있지만
전문가 의견 엇갈려
명확한 ‘고증’ 한 목소리
(기획) 105년 전 진주의 3월을 기억하다 - 2
1919년 3월 18일 경남 진주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시작을 알린 건 진주교회 종소리였다. 이날 정오 종소리에 맞춰 읍내 5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된 시위는 3월 한달 간 2만 8천여명이 참여하며, 이후 지역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진주 3.18만세운동의 상징과 같은 진주교회 종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간 지역사회에서는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박물관(천안)에 전시된 종이 만세운동 당시의 진주교회 종이라는 입장이 거듭된 바 있다. 최근 들어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를 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명확한 고증이 필요한 셈이다.
진주교회 앞 마당에 2012년 설치된 모형 종 /사진 =김순종 기자
고신대에 진주교회 종 전시
관련 기록 남아 있지만...
‘진주교회 연혁사’는 진주교회 종이 어떠한 과정을 밟아 고신대 신학대학원 박물관에 가게 됐는지 설명한다. 만세운동 3년 뒤인 1922년 10월 진주교회가 새 종을 구입해 달고, 기존 종을 산청 단계교회로 보냈다는 것이다. 단계교회에 있던 종은 다시금 천안 고신대 박물관으로 보내졌다.
단계교회에 근무하던 전용복 목사는 2019년 서경방송 <시사기획S>에 출연해 그 경위를 밝힌 바 있다. 그는 “진주와 관련된 역사이니 (진주지역에 종을) 돌려주는 것도 좋지만, 고신대에 두면 더 의미가 있고 사람들이 알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교회종을 고신대 박물관으로 보냈다”고 말했다.
대신 진주교회는 2012년 교회 앞마당에 진주 만세운동 당시 사용된 교회종을 본뜬 모형종을 전시했다. 모형 종 아래에는 ‘진주 기미독립만세의거 기념종탑’이라는 팻말과 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1919년 3월 18일 진주 읍내 5곳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됐음을 기록하는 문구도 남겼다.
산청 단계교회 모습./ 사진=차지훈 기자
전문가 견해 엇갈려
“고증 필요” 한 목소리
문제는 고신대 박물관에 있는 종이 진주 만세운동 때 사용된 종이라는 견해와 당시 사용된 종은 일제의 침략전쟁 당시 공출됐을 것이라는 주장 등이 엇갈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고신대 박물관에 있는 종이 당시 사용된 종이 맞는지 고증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과거 고신대 박물관에 있는 종을 한 차례 고증한 바 있는 최인선 순천대 교수(사학과)는 “종의 양식이 일제강점기 만들어진 종과 비슷하다”며 겉에 문양이 없고, 몸통이 밑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점 등을 들었다. 다만 “확정적으로 그 당시 종이라 말할 수는 없다”며 명확한 고증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충북 진천군 종박물관을 통해 연결된 원천수 성종사(범종 제작사) 이사는 “정확한 종 제작시기는 알기 힘들다”면서도 1950년대 만들어진 종일 수 있다는 견해를 전했다. 종 표면에 대구에서 제작됐다는 문구가 남은 점에 기초해, 대구에 있던 천우주물공업에서 이러한 종을 많이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고신대 신학대학원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종 /사진 = 차지훈 기자
지역 만세운동에 큰 역할
고증 후 지역사회 환원 ‘검토’
조헌국 진주교회 장로(전 진주 교육장)는 “만세운동 당시 진주교회 종이 시위 시작을 알리는 신호로 활용됐음은 분명하다”며 종의 역사적 가치가 크다고 강조했다. 다만 고신대 박물관에 있는 종이 그 종이 맞는지는 불분명하다며 “아니다, 맞다 둘 중 어느 의견이 맞다고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만세운동 100주년인 지난 2019년부터 해당 종을 연구해온 강호광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고신대 박물관에 있는 종이 당시의 종이 아니라는 데 무게를 실었다. “관련 논문을 보면 일제 침략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이전에 교회 종 대다수가 공출됐다는 기록이 있다”면서다.
그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엇갈리고, 일부 관련 기록은 신뢰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며 고증이 필요함을 재차 역설했다. 그러면서 “진주시나 관련단체에서 고증 작업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고증 결과 당시 사용된 종이 맞다고 밝혀지면, 우리 지역으로 종을 가져올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고신대 신학대학원 박물관 앞 종 복원 모습./ 사진=차지훈 기자
만세운동 신호는 나팔소리 설에
조헌국 “신호는 명백히 종소리”
일부 기록에서는 진주 만세운동이 나팔소리로 시작했다는 설도 내려온다. 진주 만세시위 이틀째인 3월 19일 기독교 학교인 광림학교 학생들이 나팔과 큰 북을 들고 시위에 가담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일제 경찰 기록 등은 만세운동이 교회 종소리로 시작됐다는 점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진주에 뿌려진 복음’ 등을 집필한 조헌국 진주교회 장로는 “창원 출신으로, 광림학교 악대부 출신들의 활동을 드러내고자 한 이가 나팔이 만세운동의 시작 신호였다는 기록을 60년대 남긴 바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라며 “이전 기록 등을 보면 교회 종이 신호였던 점은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진주교회 연혁사’는 1922년 10월 진주교회가 만세운동 당시 사용된 종을 단계교회로 보내고, 새 종을 구입했다고 전한다. 새 종은 1942년 일제의 침략전쟁에 공출당했다. 1947년 대구에서 다시금 종을 제작해 사용했지만, 한국전쟁 때 소실됐다.
교회는 2012년 만세시위 당시의 종을 복원해 교회 앞마당에 설치하고, 그 의미를 지금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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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린시절단계의 새벽을 깨우던 단계교회에서 사용하던종이 맞다
1949년도에 단계뚝아래 교회가 있었는데 그곳에 통나무 종탑위에 달렸던 종 분명기억한다
그해봄 공비들이 불을지른후 지금의자리 방직공장으로 교회가 옮겨져 통나무로 종탑을 세워
종이 뒤집어지며 새벽을 울리던 종이다 내가 단계를 떠날때까지 새벽을 알렸다
무식한 역사학자들 때문에 엿사 왜곡이된다고 본다
당시에 단계 교회가 그런대형종을 대구가서 사올 여력이 없었다
그때에 놋그릇 등은 공추레 견디기 힘들었지만 소죽솟도 공충하지않았고 그것은 2차대전 중이였다
2차대전이 몇년도에 발생했나 그이전의 소죽솟 지금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