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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모습 / 행 2:42∼47
선교사가 낯선 선교지에 파송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달 뒤 파송 교회에 선교보고서를 띄웠습니다. 또 한달 뒤 선교보고서를 보내고, 또 한달 뒤 보고서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보고 할 내용이 없었습니다. 파송 받은 뒤 6개월이 지날 즈음부터 파송 교회로 부터 불만 섞인 요청이 들어 왔습니다. 왜 6개월이 지나도록 한 명도 전도의 열매가 없냐는 것입니다. 이럴 때 선교사의 입장이 어떠할까요?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합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전도합니다. 열심히 설교도 준비하고 여하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나고 1년이 지나도 단 한사람의 등록성도가 없습니다. 1년 내내 가족들만 앉혀놓고 예배드릴 뿐입니다. 이럴 때 그 목회자의 심정이 어떠할까요? 모든 목회자와 모든 선교사들이 부흥에 한이 맺혀 있습니다. 목회에 꿈이 있고 교회를 향한 여러 좋은 계획들이 있고, 하나님 앞에서 좋은 교회 한번 만들어 보고 싶다는 굳은 결심이 있지만,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다는 덫에 걸려서 계획도 꿈도 결심도 다 무너지고 어떻게 하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교회를 부흥시켜야 되겠다는 이런 자세로 바뀌고 맙니다. 신학교 시절에 많은 신학생들이 이런 결심을 합니다. 기성교회 목회자들이 교회 부흥에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절대로 저렇게 하지 않으리라. 순수하고 진실되게, 그리고 바르게 목회하리라" 하고 결심하지만 목회현장에 뛰어들어 채 1,2년도 지나지 않아서 자신도 똑같이 선배 목회자들의 뒤를 밟아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부흥이 안 되니 어쩔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한국의 모든 목회자들에게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거의 99%이상이 나의 소원은 교회부흥이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남북한이 함께 모이면 언제나 마음을 합하여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입니다. 목사님들이 모여서 노래 부른 다면 가장 부르고 싶은 노래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소원은 부흥, 꿈에도 소원은 부흥 이 목숨 다 바쳐 부흥, 부흥이여 오라...♬ 새벽에 눈뜨자마자 부흥을 생각합니다. 온종일, 밤에 잠자리에 들면서까지 머리속에, 마음속에 부흥을 간직하며 잠을 청합니다. 그러다가 꿈속에서 교회가 부흥되는 꿈이라도 한번 꾸면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교회 부흥 시켜주시는가 보다 하면서 어쩌면 개꿈일지도 모르는 그 꿈에 큰 비중을 두고 좋아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꿈도 자주 꾸어지는 게 아니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100% 200% 수직 상승하면서 부흥을 가져왔던 한국교회가 이제 부흥이 끝났습니까? 하나님은 한국교회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갈보리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위에 다시 제2의 부흥의 길, 부흥의 계획을 주셨습니다. 무엇입니까? 이제는 양적인 부흥이 아니라 교회가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행'속에 교회 건강의 해답이 있습니다. 어려운 게 아닙니다. '행'을 살피면서 그대로 뒤따르기만 하면 저절로 초대교회처럼 건강해 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말씀드립니다. 건강한 교회는 어려운 게 아닙니다. 너무나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껏 왜 건강하지 못했습니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100% 대접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00% 대접해 주는 믿음이 있을 때 그 내용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99%만 대접하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설교했을 때 3000명이 회개했습니다. 이제 제자의 수는 3120명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47절 보시면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날마다 더 했나요? 42∼47절에 있는대로 했더니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해답을 찾은 셈입니다. 지금 우리 갈보리교회가 10명이든 50명이든 100명이든 상관없이 42∼47절의 내용대로 한다면 주께서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을 더 하게 해주십니다. 정욕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원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천국을 확장시키겠다는 자세, 곧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시키겠다는 자세 때문에 성장을 원하는 것은 절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면 초대교회가 되는 해답은 무엇입니까?42절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교회였습니다. 좋은 교회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좋은 성도는 말씀 배우기를 즐겨하는 사람입니다. 가르침은 곧 훈련과도 같습니다. 훈련 없이 좋은 그리스도의 군사가 될 수 있겠습니까?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을 깊이 있게 알아 가기 바랍니다. 말씀이란 종자 씨앗과 같습니다. 아무리 농사를 망쳐 기근이 올지라도 종자는 먹어치우지 않습니다. 종자는 다음해의 농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씨앗 없이 열매를 거둡니까? 뼈대 없이 몸이 세워집니까? 뿌리 없이 싹이 납니까? 말씀이란 종자요 뼈대요 씨앗이요 뿌리입니다. 가지 한 두개 없어도 됩니다. 잎사귀 많이 떨어져도 괜찮고, 태풍 불어 열매가 많이 떨어져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뼈대가 끊어지면 끝장입니다. 뿌리가 뽑혀도 끝장입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귀한 말씀도 배워서 나의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말씀이 없는 신앙은 허수아비요 신기루며 잎사귀만 무성한 나무입니다. 겉으로 화려한 사람보다는 속이 꽉 찬 성도가 되십시오. 성경공부, 기도회 참석, 예배를 자주 드리는 것, 이런 모든 것이 말씀을 배우는 것입니다. 3,000명은 새신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자마자 곧바로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가르침을 받아 뒤이어 이루어진 일이 무엇입니까?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 좋은 공동체가 되기 위해선 교제가 활발해야 합니다. 말씀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세워 주고, 교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세워줍니다. 우리는 지체입니다. 지체는 모여져야 몸을 이룹니다. 혼자서 외톨이처럼 지낸다면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교제는 서로 서로를 돕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정도나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 내 진심을 털어놓을 사람이 얼마나 되나요? 다른 사람의 마음에 담긴 말을 진지하게 들어줄 수 있습니까? 내가 병들어 누워 있을 때 내 일처럼 병문안 와 줄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교회 오면 낯설고 외롭지는 않습니까? 남이 찾아오지 않으면 내가 찾아가면 됩니다. 그리고 교제의 가장 좋은 방법은 교회의 모든 예배와 모든 행사에 적극 참여하는 것입니다. 요즘 교인들을 보면 교회 이동을 너무도 쉽게, 쉽게 결정합니다. 진정한 교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문제가 있어서 떠나는 것만은 아닙니다. 문제없는 교회는 하나도 없습니다. 좋은 이웃이 없기 때문에, 적응을 못하기 때문에 떠나는 경우도 무척 많습니다. 우리교회에서는 외롭고 낯설어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 그들은 떡을 뗐습니다. 먹는 것은 좋은 교제의 방법이 됩니다. 음식 문화란 게 참 이상합니다. 아무리 서먹한 사이라도 한 끼만 식사를 같이 하면 금방 가까워집니다. 주일 낮 예배가 끝난 뒤 함께 식사하는 교회들은 웃음이 많은 교회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교회에는 주일이 기다려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예배도 좋지만, 함께 먹고 마시는 시간이 즐거워서 기다려진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오후예배 후 티타임을 갖는 것도 좋은 결과를 약속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떡을 떼는 시간을 마련할 수 있을까요? 그 일을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 희생하면 십여 명 정도는 즐거울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보온병에 커피를 끓여오고, 한 사람은 전을 부쳐오고, 한 사람은 과자 한 봉지 사오면 웃음이 넘치고 정겨움이 넘치는 좋은 자리가 마련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집안도 자꾸 open시키십시오. 내 집을 open시키면 좋은 교제의 장소, 좋은 떡을 떼는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초대교회에서는 집을 open시키고 그곳에서 아름다운 교제를 이루었습니다. 교제, 떡을 뗌, 그 다음엔 무엇입니까?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다고 했습니다. '오로지 힘썼다'는 말은 한 가지 일에 마음과 몸을 다 바쳐 매진했다는 뜻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서 오로지 기도에 힘쓴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가 조화를 이룰 때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에 강점이 있으면 기도가 약한 경우가 많고, 기도가 강하면 말씀에 약점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에 말씀의 든든한 반석 위에 기도로 교회를 세운다면 얼마나 건강한 교회가 되겠습니까? 말씀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 교회로부터라면, 기도는 개인으로부터입니다. 여러분, 오로지 기도에 힘을 쓰십시오. 오늘 본문에 표현된 그대로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기 바랍니다. 기도를 대치할게 뭐가 있습니까? 기도보다 먼저 해야 할 위급한 것이 있을까요? '행'적인 교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 사람 편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승리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망했단 말 들어봤습니까? 기도하는 교회가 실패했단 말 들어봤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잘 되는 사람, 잘 되는 교회들의 공통점은 '오로지 기도에 힘쓰니라.'입니다. 열흘 동안 오로지 기도에 힘쓰자 성령이 임하셨고, 기도에 힘쓴 자 모두 다 성령 충만을 받았습니다. 기도하십시오. 성령 충만 받습니다. 기도하십시오. 교회가 건강해 집니다. 기도하십시오. 축복 받습니다. 우리 갈보리교회도 '오로지 기도에 힘쓰니라.'를 한번 실천해봅시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사도들의 기도하라는 가르침에 순종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 기도하라는 성령님의 지시 앞에 순종합시다. 한국 교회를 위해서 예수님처럼 피땀이 흘려지기까지 기도 한번 해보고, 엘리야처럼 머리를 무릎 속에 쳐 박고 응답이 이루어 질 때까지 기도한번 해보십시다. 기도 한 번 실컷 해보십시다. 기도 원 없이 한번 해봅시다. '너 기도의 사람 아무개야. 너 기도의 교회 갈보리교회야' 하고 하나님께 부름 받는 여러분과 우리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43절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는 교회였습니다. 왜 이런 일이 나타났습니까? 그 이유는 42절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과 기도를 가까이하면 하나님의 능력은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내가 기적을 나타내고 싶다고 해서 나타나는 게 아닙니다. 말씀과 기도 속에 파묻혀 산다면 능력은 필요할 때마다 나타납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우리는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기적의 사건을 살피게 됩니다. 그 날 예배시간에 못 걷게 된 사람이 일어선 것처럼 여러분이 질병 속에서 일어섬을 믿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이 기적을 맛보나요? 그날 주시는 말씀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를 가져야 하고, 한 주일동안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병 고침 받는 것 아무 것도 아닙니다. 너무나 쉽습니다. 믿음과 기도면 얼마든지 나타납니다. 마지막 때 악한 사탄이 발악을 하면서 능력을 나타내 믿는 자들을 미혹합니다. 여러 종교들을 공부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단을 살펴보았더니 이들에게도 병든 자를 치료하는 일이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잡신들도 이처럼 능력을 나타내는데 만 왕의 왕 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 기독교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지 못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노릇입니까? '행'의 목표는 능력이 아닙니다. 그러나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서는 '행'적인 교회가 되지 못하고 '행'을 절대로 이루지 못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죽을 수 있고, 이웃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는 높은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행'의 흐름입니다.44-45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함께 나누는 교회였습니다. 여유 있는 사람, 부유한 사람이 어려운 사람과 나누는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듣고 싶나요? 자격 있는 신앙인이 되고 싶나요? 그러면 내 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믿음은 좋지만 나누지 못하는 사람을 많이 봤습니다. 예배 잘 참석합니다. 직분 맡아서 열심히 감당합니다. 기도도 열심히 하면서, 심지어 능력도 나타냅니다. 그러나 물질 앞에만 서면 벌벌 떨고 인색함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왜 그런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우리 교회들의 모습이었고, 그것 때문에 한국 교회가 불신 세계로부터 욕먹는 이유임을 알았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물질문제가 회개되지 않는 상태에 있습니다.(이번 검찰개혁 촛불집회에서 사랑의 교회가 화장실 개방하지 않은 것으로 욕을 먹습니다.) 주는 것은 예수님의(하나님의) 정신입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하셨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너희들이 구하는 모든 것을 얼마든지 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궁극적인 목표는 예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려면 무던히 애를 써야 할 것입니다. 복음서를 살피면 예수님과 사람들의 모습이 극명히 대조가 됩니다. 예수님을 만난 자마다 예수님께 뭔가를 받기를 원했습니다. '병을 치료해 주소서. 먹을 것을 주소서. 입을 것을 주소서. 귀신을 쫓아 내 주소서. 오른편, 왼편자리를 주소서. 바다를 잔잔하게 해주소서. 나를 명하여 걷게 하소서.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해결해 주소서. 죽은 자를살려주소서.' 반대로 예수님은 어떠했나요? 예수님은 만난 사람마다 무언가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달라고 해보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은 주시고, 주시고 또 주셨습니다. 막 10:45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사람은 섬김까지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섬김까지도 주셨고, 나아가 목숨까지 주셨습니다. 주님을 닮길 원한다면서 얼마나 나누고 있나요? 얼마나 주고 있나요? 이웃을 위해 내 주머니를 털고 금고 문을 열고, 통장 문을 연 적이 있나요? 우리는 그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 몸입니다. 우리는 형제입니다. 지금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웃은 나와 같은 몸이요, 내 사랑하는 형제입니다. 나눔은 교회 안에서 시작하여 교회 밖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어렵더라도 주기에 힘써야 합니다. 어려울 때, 아무 것도 없을 때, 주는 사람은 부자가 되어서도 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주는 것은 손해가 아닙니다. 물론 손해일지라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행 20:35에 의하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눅 6: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마 19:2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데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주는 것은 이 땅에서 축복 받는 비결이고, 주는 것은 천국에서도 축복 받는 비결입니다. 여러분이 축복 받기를 원하시나요? 그럼 하나님 앞에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하면서 기도할 필요 없이 자꾸 주면 됩니다. 내 것을 자꾸 나누어주면 이 땅에서도, 천국에서도 축복 받게끔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법칙입니다(교회 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만 생각하지 말고 내 교회만 생각하지 맙시다. 적은 것 잃지 않으려고 욕심부리다 큰 것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맙시다(소탐대실). 그리고 어려운 사람일수록 나누기에 힘쓰고 심기에 힘써야 합니다. 왜? 그래야 축복 받기 때문입니다. 어려울수록 우리 하나님께 해야 할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어렵다고 본분을 소홀히 하면 더 어려워집니다. 사르밧 땅 과부는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남은 식량이라곤 가루 한 움큼과 기름 몇 방울뿐이었습니다. 그것 떨어지면 아들과 함께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과부 모자는 그 가뭄 속에서도 살아났습니다. 가장 어려울 때 가장 귀한 생명과 똑같은 것을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자신 위해 사용했다면 한 끼뿐이요, 그리고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주었더니, 드렸더니 가루와 기름이 마르지 아니했고 두고두고 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주는 자, 드리는 자가 받는 축복입니다.46절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였습니다. 누가 모이라고 억압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성전으로 발걸음을 향합니다. 날마다 모였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좋았으면 매일 모였을까요? 우리들 모습과 얼마나 다릅니까? 날씨가 조금만 추워도 빈자리가 많습니다. 날씨가 좋아도 빈자리가 많습니다. 국가 대항전 축구 경기라도 있는 날이면 교회가 아니라 운동장으로 달려갑니다.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매일 매일이 주일이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되 날마다 모이기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일이 있든 없든 교회에 가고 싶어서 어쩔 줄 모릅니다. 하루라도 못 가는 날이면 손에 아무 것도 잡히지 않습니다. 성전에 와서 교육관 문도 한번 열어보고, 에배당 문도 한번 열어보고 그래야 마음이 편합니다. 또 그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모였습니다. 같은 마음, 한마음으로 모였습니다. 추구하는 방향이 같다는 것입니다. 모이는 목적이 같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날마다 모이니 그 교회가 얼마나 잘되었겠습니까?47절상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아름다운 모습들이 많이 보이니 칭찬하지 않을 수가 있나요?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건강한 교회가 되려면 교회 주변에서 인정받고 칭찬 받아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칭찬 받나요? 위에서 살핀 내용들, 곧 교회가 교회다울 때 자연스럽게 칭찬이 뒤따릅니다. 지금 왜 전도가 막히고 있나요? 한국교회가 칭찬대신 책망 받기 때문입니다. 행을 통해서 이 문제가 반드시 해결되어야겠습니다. 전국의 교회가 칭찬 받는 교회로 바뀐다면 한국교회를 향한 부정적인 시각이 많이 바뀌리라고 생각합니다. 바뀌면 교회가 소망이 생깁니다.47절하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여기에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교회의 건강한 성장은 주님께 달려있습니다. 교회다운 교회가 될 때, 칭찬 받는 교회가 될 때, 교회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할 때, 주께서 날마다 믿는 자를 더하게 해주십니다. 교회 건강의 해답이 주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를 살피면서 우리 갈보리교회의 부족함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셨나요? 부족함이 너무 많아서 희망이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부족함을 찾았다면 해답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노력하면 반드시 좋은 교회가 되고, 21세기의 초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 말씀이 우리 갈보리교회를 향한 말씀이 됨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