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오랜만에 개봉관에서 신작 영화를 보았다. <조조>였다. 뛰어난 영화라고 하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꽤 볼 만하다.
삼국지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놓치면 좀 아쉽게 된다. 무엇보다도 조조(曹操)에 대한 그간의 통념적 악평을 넘어서 있는 영화라는 점에서 그렇다.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주인공은 단연 유비와 그 집단들이다. 조조는 ‘선량한’ 유비를 돋보이게 하는 ‘간웅(奸雄)’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왜곡도 이런 왜곡이 없다.
정사(正史)의 관점에서 보면 삼국시대의 진정한 주역은 조조다. 유비의 촉이 힘이 약한 작은 나라고 조조의 위가 가장 강했기 때문이 아니다. 한 시대의 결산과 새 시대의 개척이라는 영웅적 풍모에 진정으로 어울리는 인물이 바로 조조이기 때문이다.
유목민을 받아들인 조조의 인구정책
위나라는 처음부터 강했던 게 아니다. 위가 자리 잡은 중원 화북 일대는 황건적의 난으로 완전히 황폐화돼 있었다. 무엇보다도 인구가 격감했다. 사람들이 수없이 죽어나간 데다 그나마 살아남은 자들도 난리를 피해 대거 남쪽으로 피난 가버린 탓에 거의 진공 상태가 돼 있었다.
한의 천자(天子)를 끼고 있는 게 유일하게 유리한 정치적으로 조건이었다. 하지만 사실 난세의 기준으로 보면 허울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조조는 이 악조건을 뛰어넘어 강력한 나라를 만들었다. 어떻게 했을까?
조조는 우선 항복한 황건적 잔당을 정규군으로 편성하고 이들을 병농일치(兵農一致)의 둔전제(屯田制)를 통해 화북일대에 정착시켰다. 토지문제는 황건적 봉기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조조는 이들에게 농토를 지급해 숙원을 해결해 준 셈이었다. 이들의 충성은 당연했으니 바로 그 유명한 청주병(靑州兵)이다. 청주병은 삼국시대 최강의 무력을 자랑하는 조조의 최정예 군단이 됐다.
조조가 취한 또 하나의 정책은 내몽골 서부에서 유목하고 있던 흉노족을 산서고원으로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조조는 이를 계기로 흉노의 일부를 자신의 병력으로 편성할 수 있었다. 흉노는 진한시대 이래 누대의 골칫거리였는데 조조는 이 오랑캐 집단을 받아들여 자신의 백성과 병력으로 삼은 것이다.
207년 오환을 정복한 조조는 그들 대부분도 병력으로 수용하고 선비 등의 유목민도 적극적으로 포섭했다. 나아가 저, 강 등의 유목종족도 그의 세력으로 끌어들였다. 부족한 인구와 병력을 보충하기 위한 정책이었다지만 당시의 통념을 과감하게 뛰어넘는 발상의 전환이었다.
도수수금(盜嫂收金)이라도…
조조는 편견과 통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인물이었다. 조조 문집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군사를 일으키면서 도수수금(盜嫂收金) 즉 “형수와 사통하고 뇌물을 받은 자라도 한 가지 재주만 있으면 다 내게로 오라”고 선언했다. 가문이나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과거를 묻지 않는 실력위주의 기준을 천명한 것이다. 요즘 표현을 빌자면 참으로 ‘쿨’했다 하겠다.
조조는 이 원칙을 황건 잔당과 흉노 등 오랑캐 무리에게도 그대로 적용했다. 백성을 모으는 데서도 과거불문이었다.
조조의 위나라가 가장 강력한 나라가 된 것은 입지조건이 좋아서가 아니다. 거의 전적으로 조조 자신의 기량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한의 천자를 모시는 신하의 예를 지켰다.
영화 <조조>는 그의 그런 진면목을 일부나마 드러내 준다. 원래 제목은 <동작대(銅雀臺)>다. 조조가 자신의 도성에 쌓은 건축물의 이름이다. 그런데 우리말 제목의 부제는 ‘황제의 반란’이다.
제법 잘 붙인 제목이다. 용렬한 황제와 영웅 조조 사이의 긴장이 기둥 줄거리다. 영화 감상을 통속적으로 표현하면 한마디로 ‘사나이 조조’다. 주연인 주윤발의 연기 덕분에 더 빛이 난다. 영화를 보고 새로운 시각으로 삼국지연의를 다시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이강호 미래한국 편집위원
위 기사의 출처는 미래한국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