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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에게 주시는 풍성한 삶의 약속
본문 / 여호수아서 1:1-9
약속의 땅
당신은 불신자들에게 일어나는 최대의 사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불신자의 생애에서 그들이 경험했던 모든 일들 가운데 가장 의미있고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놀라운 사건은 그들이 구원받는 사건입니다. 죄에서 놓임을 얻고 하나님을 알게 되고 구원받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더 위대한 사건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구원받은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구원이라는 것이 목표는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새로운 삶의 출발지점에 불과한 것입니다. 구원받은 우리들은 새로운 삶의 목표를 향해서 가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그 삶을 이루며 이 삶을 통해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영광스럽게 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의 최대의 사건
애굽 땅에서 바로의 종살이를 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대의 사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이 최대의 사건이 그들에게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광야로 나왔습니다. 이 최대의 사건, 애굽 땅에서 자유를 얻어 출애굽하는 탈출의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이 바로 성경의 맨 처음에 나타나는 다섯 권의 책, 즉 모세 오경(창세기 출애굽기 ·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초점입니다.
이제 애굽 땅을 나온 그들에게 있어서는 애굽 땅을 나왔다는 사건이 더 이상 그들의 삶의 목표는 아닙니다. 그들이 이제 가야 할 목표는 약속의 땅 가나안입니다. 이 땅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서 예비하신 땅입니다. 그들은 이제 이 땅에 들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이루어 주 앞에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책이 여호수아서입니다.
□ 약속의 땅, 가나안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은 그들이 가야 할 땅이며, 싸워서 얻어야 할 땅이며, 개척해야 할 땅이며, 삶을 누려야 할 땅입니다. 이 땅은 그들의 삶의 터전이기에 이 땅에 들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애굽 땅에서 자유를 얻었지만, 그들의 목표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방황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광야를 헤매고, 방황하던 이 사건이 이스라엘 민족사에 있어서 커다란 비극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꼭같은 비극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자유케 하시는 용서의 감격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새롭게 가야 할 목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놀랍고, 감격스럽고, 역동적인 (dynamic) 삶 속에 들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목표임에도 불구하고, 애굽 땅 바로의 사슬에서 벗어났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광야를 방황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이러한 비극에서 벗어나 이제 우리는 가나안을 향해서 우리의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가나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본문에는 약속의 땅에 대한 세 가지 교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약속의 땅은 하나님이 보증하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본문 3 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3,4절). 이 말씀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팔레스타인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물로 보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땅은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땅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약속의 땅은 잘 준비되어 포장된 선물이 아니었습니다. 6절에 보면, 그 땅을 선물로 주시기로 약속하신 하나님이 그 땅에 들어가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만일 하나님이 그 땅을 아름다운 낙원으로 준비해 놓으셔서 그들이 들어가 얻기만 하는 것이라면 여기에 무슨 용기를 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피와 땀을 흘려 수고를 하며 애써서 얻어야 할 땅이기에, 그 땅에 들어가서 그들은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야 했기에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혼을 앞둔 아들에게 아버지가 "내가 너에게 땅과 살 집을 주마"고 약속합니다. 그래서 아들이 아버지가 준비해 둔 그 땅에 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그 땅은 가시덤불과 바위와 돌로 뒤덮인 황무지였습니다. 아버지가 그러한 땅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집 지을 많은 재목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완성된 제품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아들은 아버지가 예비해 둔 땅, 또 아버지가 예비한 그 재목을 가지고 땀을 흘려야 합니다. 그리고 수고해서 아름다운 집을 만들어야 합니다.
장군인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얼마든지 부하들의 계급을 올려 주고 출세시킬 수 있는 실력자였습니다. 이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이 사관학교에 들어가자 이런 약속을 합니다. “얘야, 너는 틀림없이 5년 안에 중위 계급장을 달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다른 젊은이들과 꼭 마찬가지로 사관학교의 엄격한 교육 과정을 밟게 합니다.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다른 젊은이들과 똑같이 일선에 배치시켜 피나는 현지 적응 훈련을 받게 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왜 이런 식으로 다룰까요? 계급장을 선뜻 달아주고 계속해서 순탄하게 진급하도록 하지 않고 굳이 이런 방법으로 아들을 다루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또는 좋은 땅에 좋은 집을 장만해서 주지 않고 왜 아들로 하여금 수고의 땀을 흘리며 땅을 가꾸어 집을 짓게 합니까?
그 의도는 하나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해서 놀라운 선물을 주시되 아들이 불로소득(不勞所得)의 정신을 배우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들어지는 과정을 경험하지 않고 결과만을 선물로 받는 삶의 방식에는 무서운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노력하지 않고도, 땀을 흘리지 않고도, 애쓰지 않고도 받을 수 있다는 사고를 조장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처음 방문해 보면 실망을 많이 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약속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한번 가 보십시오. 그 곳 어디에 젖과 꿀이 흐르는지. 그 곳은 사막뿐입니다. 특히 남쪽의 그 황무한 사막을 여행해 보면 성경에 대하여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남쪽의 그 황무한 사막이 점차 낙원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땀을 흘리는 작업을 통해서 사막이 낙원으로 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실 것을 보증하시면서 그들의 발로 밟는 곳이 확실히 그들의 땅이 될 것을 약속하시면서도, 그리고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것을 주께서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땅은 하나의 완성된 제품으로 그들에게 다가온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그들이 그 땅에 들어가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는 수고를 통해서, 이 땅을 가꿈으로써 비로소 가나안 복지가 되도록 하신 하나님의 경륜과 의도는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보통 불신자에게 전도할 때에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를 믿어 보십시오 예수는 당신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십니다. 주께서는 풍성한 삶을 약속하십니다. 그 삶이 얼마나 놀라운지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경험하지 않으면 모릅니다. 한번 믿어 보십시오" 이것은 좋은 전도 방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믿은 후에는 그전에 전도 받았던 그 말이 꼭 사실만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믿는 삶 속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사막과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 앞에 다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하시지 않았나요? 그리스도 앞에 오는 사람들에게 주께서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주께서는 풍성한 삶, 감격스러운 삶, 놀라운 삶, 아름다운 삶을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치나요?』
그리스도인인 당신은 왜 그렇게 얼굴이 창백합니까? 왜 그렇게 얼굴을 찌푸리고 있습니까? 눈빛에서 환희가 사라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삶, 신앙의 삶이 감격과 영광과 환희와 놀라움으로 가득찬 경이적인 삶만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믿으면서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왜 그럴까요?
주께서는 풍성한 삶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이 공수표란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두 다 함께 주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풍성한 삶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놀라운 삶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풍성한 삶, 놀라운 삶은 완성된 제품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눈물과 땀과 수고와 그리고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하려는 우리의 노력과 도전을 통해서만 이 신앙의 풍성한 삶의 의미를 갖게 될 것입니다.
제가 전에 섬기던 교회의 어느 집사님 한 분이 복권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저를 찾아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복권을 산 뒤에 기도를 많이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 이것이 꼭 당첨되어 우리 주님을 위해서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그런데 놀랍게도 복권이 당첨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십일조로 피아노를 헌물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주님은 이런 세밀한 일까지도 돌봐 주시네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이 집사님을 별로 사랑하지 않는 것 같으네요」
그 분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냥 나가십니다. 제가 설명을 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분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설명을 안 했습니다.
그러나 그 복권이 당첨되지 않았어야만 주님이 그 분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공짜로 얻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성경의 정신입니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이것이 성경의 분명한 교훈이라면 당첨이 안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 번 심심풀이로 복권을 사 보십시오. 그리고 만일 떨어지거든 당신은 진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안 되어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증거입니다. 복권이 당첨되기 시작하면 잘못되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우리는 요행수를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일단 하나님이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시험해보기 위해서 복권을 사 보시기 바랍니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약속하셨습니다. 얼른 내 삶 속에 그대로 손에 쥐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함에도 불구하고 눈물과 사막과 계곡과 어둠과 숱한 많은 난관이 우리의 삶 속에 다가오고 있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도전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도전을 통해서 이 메마른 삶을 풍성한 삶으로 바꾸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심정을, 우리 하나님의 의도를 이 말씀을 통해서 배웁시다.
세째로, 약속의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싸워서 얻어야만 했었던 땅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격려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중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딤전 6:12). 신앙이 전투인 것을 아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여, 가나안 땅으로 가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가라!" 그들이 전쟁을 예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전쟁을 치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전쟁을 통해서, 피땀 흘리는 노력을 통해서 아름답게 가꾸어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젖과 꿀이 흐르는 지상 낙원을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삶에 도전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다가 지쳐서 가끔 주저앉습니다. “하나님, 노력하지만 안 되는데요"이렇게 우리는 절망합니다. 좌절합니다.
만일 본문이 4절 말씀에서 끝났다면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절망 속에 내버려 두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본문 5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싸우면서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이 어렵고 힘든 작업인 것을 아시는 주님은 그들에게 세 가지 약속을 하십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어떻게 훈련시키는지 아십니까? 아버지 독수리가 이제 이만하면 날 수 있다고 판단되는 시기가 되면 새끼 독수리를 데리고 높은 공중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무자비하게, 사정없이 새끼 독수리를 아래로 내동댕이칩니다. 새끼 독수리는 안간힘을 다해서 날개를 파닥거립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연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약한 새끼 독수리는 바람에 날아가 버리기도 하고 허우적거리다가 그냥 땅에 떨어져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열심히 날려고 애쓰는 새끼 독수리가 떨어지려 할 때 아버지 독수리는 쏜살같이 다가와서 자기 날개로 새끼 독수리를 받습니다. 그리고 다시 공중 높이 올라가, 또 새끼 독수리를 떨어뜨립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 독수리가 새끼 독수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상상해 봅시다.
"내 사랑하는 아들아, 자랑스런 아들아, 너도 이제는 아빠처럼 하늘올 날 수 있어. 다시 날아 보아라. 네가 위험에 처할 때, 두렵고 떨리고 불안할 때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라."
본문의 말씀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 들어가 피땀 흘리는 수고를 통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꾸도록 하시는 주님은 그 일에 많은 어려움이 뒤따른다는 것 또한 아시므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라. 내가 너와 함께한다."
이것은 여호수아만을 위한 약속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 주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약속입니다.
모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직 여호수아는 미숙한 지도자이지만 모세는 얼마나 숙련된 지도자입니까? 그러나 모세가 처음부터 그렇게 유능한 지도자였습니까? 주께서 모세를 처음으로 불러 위대한 사명을 맡기시던 그 날을 기억합니까?
"사랑하는 모세여! 내 백성을 이끌고 저 바로와 대결하여 바로의 사슬에서 내 백성을 풀어 그들로 자유케 하여 그 땅을 나오게 하라. 내 백성을 설득하고 바로를 설득하라.”
모세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 저는 못 합니다. 특히 저는 말을 잘 못합니다. 어떻게 바로를 설득하며 그 백성을 설득합니까? 저는 입이 뻣뻣한 자입니다. 도대체 제가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습니까?』
그 때 주께서 모세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출애굽기 4장 11 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이제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11,12절).
주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가 사랑하는 조국의 몰락의 운명을 예언하게 하십니다. 자기의 입술로 자기 조국의 몰락을 예언해야 하는 이 슬픈 선지자, 주변의 국가들에게 찾아오는 하나님의 진노를 예언해야만 했었던 그는 이 일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렘 1:6).
그러나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렘 1:19).
예수께서 지상을 떠나 가시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11명의 제자들을 모아 놓으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마 28:19).
11명의 제자들은 지금까지 팔레스타인 밖을 한 번도 나가 본 일이 없는 촌부들이었습니다. 세계라는 것을 생각할 엄두조차 못 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그들에게 세계를 맡기십니다. "너희는 전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라. 가서 전 인류를 내 제자가 되게 하라.“
이 명령은 얼마나 암담합니까? 얼마나 불가능한 숙제입니까? 제자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씀입니까?”
그러나 그 다음 약속을 보십시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
그렇습니다. 이 약속 때문에 그들은 갈 수 있습니다. 주께서 함께 하신다면, 전지전능하시고 우주를 창조하시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쥐고 계신 그분이 함께 하시는데 무슨 일인들 못 하겠습니까?
주님은 바울에게 세계 선교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마음 속에 많은 두려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많은 적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고린도의 전도에서 숱한 박해를 직면하여 자기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기 속에 빠져 있었을 때에 주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너와 함께 있으매..." (행 18:9).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말씀으로 인도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할 뿐만이 아니라 내가 너에게 계속해서 말할 것이다. 그래서 너는 네가 가야 할 곳을 알게 될 것이다. 나로부터 지혜를 얻게 될 것이다. 올바른 판단을 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며 어떻게 행진하며 어떻게 적을 대적하며 어떻게 절망에서 빠져 나오며 어떻게 시련을 극복하며, 마침내 이 놀라운 땅에서의 삶을 어떻게 승리로 이끌 것인지 네가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내가 계속해서 너에게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네가 나의 지시를 구체적으로 받을 수 있도록 내가 너에게 선물을 주마.“
그 선물이 무엇입니까? 성경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으로부터 성경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주께서는 지금 저와 당신에게도 공중에서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잠꼬대인지 또는 환상인지 착각이 없도록,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만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에게 기대하시는 바를, 그 말씀을, 그분의 뜻을, 그분의 교훈을 기록하셔서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것이 성경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출 17:14 ).
주님께서는 모세가 사라지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할 새로운 지도자로 이미 여호수아를 지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주님의 분명한 지도를 받아 분명하게 그들의 방향을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그에게 멧세지를 주시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히 들을 수 있도록, 공중을 통해서 말씀하시지 않고 분명히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문자적인 말씀을 모세로 하여금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그것을 읽어서 여호수아에게 들려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당신은 똑같은 이유 때문에 성경이 저와 당신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오늘 하루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이 걱정과 염려를 어떻게 해결할까?
많은 염려와 생의 풍랑을 겪어야 하는 이 삶의 전쟁터에서 주의 지혜를 발견하여,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하나님의 자녀답게 삶의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주께서 나에게 분명한 말씀으로 도와 주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습니다.
당신은 성경을 펼칠 때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신다'는 감격을 가지고 성경을 읽으십니까?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이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으시는지요? 우주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 만유를 손에 쥐고 계신 그 하나님, 말씀으로 만물을 지배하시고 섭리하시는 그 하나님이 내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면 이 말씀은 굉장한 선언입니다. 이 말씀은 놀라운 격려입니다. 이 말씀은 얼마나 위대한 약속입니까?
세째로,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을 지키면 형통케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삼국지에 보면 제갈공명이 지휘관들에게 작전을 지시할 때에 종종 사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편지를 서너 장 써 주고 "네가 어느 지점에 도달하면 그 곳에서 편지를 펴보라"고 말합니다. 또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그 편지를 펴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지휘관들은 앞을 내다보는 이 제갈공명의 지시를 따라 어려울 때마다 난관을 극복하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윈스턴 처칠 수상은 후배들과 수행원들을 잘 격려해 주는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한 번은 자기의 후배 중 국회의원이 된 사람 하나가 의회에서 처녀연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하는 연설이라 얼마나 두렵고 얼마나 떨리겠습니까? 그래서 말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처칠은 그에게 사람을 보내어 쪽지를 건네주었습니다. 연설 도중에 이 사람이 메모를 받았습니다. 그 메모의 맨 밑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너는 해낼 것이다 - 처칠."
이 격려로 그는 용기백배하여, 연설을 성공적으로 끝낼 수가 있었습니다. 믿을 만한 한 사람의 격려가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주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 만물을 손에 쥐고 계신,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의 삶이 형통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내 음성을 들어라. 그리고 내 음성에 순종하라."
만약 이런 말씀이 나에게 들려와 내가 그 길을 걸어갈 수가 있다면... 우리의 눈이 열려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우리의 귀가 열려 지금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말씀을 지키기만 하면 인생은 황무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황무지를 가나안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황무지와 계곡이 도사리고 있는 험준한 땅 속에 젖과 꿀이 흘러내리는 기적을 창조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름다운 것만은 아닙니다. 불신자와 꼭 마찬가지로 우리도 사막을 경험합니다. 실망해서 넘어지고 쓰러지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는 인생을 이따금씩 그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그저 그런 이 삶의 불모지를 위대한 약속의 삶으로, 희망의 삶으로, 창조의 삶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나는 내 아들이 온실에서 자라난 꽃처럼 자라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일이 한 번 생기면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여 넘어져서 쓰러지고 마는 아들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아들을 바다로 보냅니다. 험악한 파도와 싸우는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나는 아들을 전쟁터로 보냅니다. 폭탄이 날아다니는 하늘 아래로 기어다니는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강한 아들이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약한 아들로 우리를 천국에 받아들이기보다 강한 아들로 받아들이기 원하셔서 이 세상에서 나를 훈련시키시고 나에게 강함을 추구하시는 주의 음성을 들으십니까?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케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7,8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