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그러나’의 하나님” 『しかし』の神様라고 하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예전에 일본어 시험반을 맡고 가르칠 때에 보면, 학생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과목이 아무래도 독해입니다. 독해는 단어도 많이 나올
뿐만 아니라, 단순한 암기력만이 아닌, 짧고 긴 문장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도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독해 문제 중에서 제일 어려운 지문 중 하나가 뭐냐 하면 “필자의 생각”을 묻는 문제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을 묻는 것이라면 본문
중에서 찾아내면 되지만, 이 “필자의 생각”을 묻는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문장 내용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필자의 생각을 가장 빨리 찾아내는 방법이 바로 본문 흐름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당시 저는 수업에서 독해 문장을 읽을 때에 접속사를
주목하라고 강조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본문에 나오는 단어 하나하나를 모두 완벽하게 알지 못하더라도 글의 흐름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바로 “필자의 생각”이라고 하는 것을 집어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흐름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접속사’이기 때문입니다.
접속사는 말 그대로 문장과 문장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데, 접속사의 기등들을 보면 여기에는 뭐 첨가도 있고, 조건도 있고, 병렬도
있고, 화제전환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가장 대표적인 접속사는 아무래도 순접과 역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말은 어려울지 모르겠습니다만, 알고 보면 쉽습니다. 먼저 ‘순접’이라고 하는 것은 앞에 나오는 문장을 이어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러므로, 그러니까 따라서, 때문에’ だから それで같이 앞에 오는 문장의 흐름을 그대로 이어 받을 때 쓰는 접속사가 이
‘순접’입니다.
반면에 ‘역접’이라고 하는 것은 앞에 오는 문장의 흐름에 반대되는 내용을 쓸 때 사용됩니다. ‘그러나, 하지만, ~에도 불구하고’
같은 것이 바로 ‘역접’에 해당됩니다.
이 접속사 중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접속사를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이 ‘역접’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지요. 이 역접 다음에 ‘필자의
생각’, ‘필자의 의도’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독해 문제에서 사용되는 문장들을 보면, 평범한 것이 없고, 대부분 필자만의 독특한
시각이 담긴 글들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식이지요.
많은 사람들은 돈을 좋아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합니다…….이런 문장인데 마지막에 가서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라는
식의 본문은 잘 안 나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필자만의 생각이나 견해가 없기 때문이지요.
이런 글 보다는 오히려, 글쎄요……, “세상 사람들은 돈을 좋아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합니다……이렇게 이어진다 하더라도
마지막에는 뭐예요? “그러나! 돈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돈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뭐 이런 글이라고 한다면, 바로 이 “그러나!”라고 하는 역접 뒤에 “필자의 독특한 생각, 필자만의 견해”가 당겨진 문장이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눈을 돌려보면 어떻습니까. 세상에는 온통 순접이 넘쳐납니다. 무슨 사건이라도 일어나보세요. 아니면 얼마 전에 일본에서도
선거가 있었습니다만, 무슨 사건이나 어떤 현상이 발생하면, 이른바 많이 배웠다는 분들은 이를 두고 자신의 지식과 경험에 비추어보며
분석을 하고 이유를 달아서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A라서 B라는 현상이 일어났다. A이기 때문에 B라는 사건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 A였기 때문에 B라는 선거결과가 나오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뭐 이런 식이지요. 이것이 무엇입니까. 모두 다 순접입니다. 이런 어려운 내용이 아니더라도, 예를 들어서, 돈이 없다. 그래서
고생한다. 건강하지 못하다. 그래서 불행하다. 나이가 많다, 아니면 나이가 너무 어리다 그래서 어쩌구 저쩌구……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순접 투성이입니다. 이렇게 이유를 달고 저렇게 이유를 달아놓고는 그래, 그래서 어쩔 수 없다……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 생각입니다.
과거 당나라 시절에는 관리로서 출세를 하기 위해서는 4개의 조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신언서판……이라고
합니다. 몸 신, 말씀 언, 글 서, 판단할 판 자를 써서 신언서판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먼저,
신…… 이란 건강도 건강이지만 풍채와 용모도 중요시했다고 합니다.
언…… 이란 언변입니다. 즉 말을 잘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 는 글씨를 잘 써야 한다는 것이고,
판…… 은 판단력도 판단력이지만 문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아무리 아는 것이 많고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은 신언서판……이라고 하는 요소를 갖추고 있어야지만 당나라 때에는 관리로
등용될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오늘 말씀 중에서 고린도전서 1장 26절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절
“26.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兄弟たち、自分たちの召しのことを考えてみなさい。人間的に見れば知者は多くはなく、力ある者も多くはなく、身分の高い者も多くはありません。
이 글을 좀 이해하기 쉽도록 현대인의 성경판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셨을 때 여러분이 어떠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적으로 볼 때 여러분 가운데는 지혜로운
사람도 많지 않았고 유능한 사람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현대인의 성경을 참 좋아합니다만, 이 고린도전서, 바울은 당시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들을 가리켜,
당신들은 인간적으로 볼 때 지혜로운 사람도 많지 않고, 유능한 사람도 없고, 가문이 좋은 사람도 별로 없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 드리면 당신들은 배운 것도 없고, 능력도 없고, 그렇다고 배경이 좋은 사람들도 없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배운 것은
초등학교 나온 게 다고, 머리도 나쁘고 빽도 없어요. 이런 사람이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뭐 꼭 당나라 때 관리 임용이
아니라 요즘 세상에 있어서도 제대로 이력서 한 장 내밀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옛날에는 못 배웠어도 그냥 부모한테 물려받은 농사나 지으면서 살아가면 되지……라고 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요즘은 뭐 아무나 농사를 짓나요? 농사를 지으려면 얼마나 많이 공부를 해야 하는데요.
세상적으로 본다면 이 말 뒤에 나오는 가장 자연스러운 접속사는 순접입니다. 당신들은 지혜로운 사람도 많지 않다. 그래서 당신들은
성공할 수가 없다. 유능한 사람도 별로 없다. 그래서 잘살 수 없다. 가문이 좋은 사람도 별로 없다. 그래서 출세하기는 틀렸다……
그래서, 그래서……이게 세상 이치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은 어떻습니까. 바로 다음 구절인 고린도전서 1장 27절은 무슨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장 27절 첫 단어.
“27.그러나!” 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역접이라고 하는 접속사는 정말 대단합니다. 이 역접이 가지고 있는 힘은 막강합니다. 왜냐하면 앞에 있는 모든 조건들을 완전히
뒤집어버리기 때문인 것입니다.
앞에 이런 저런 그런 나쁜 조건들이 있어요. 안 좋은 상황들이 있습니다. 불리한 환경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자, 여기에 역접을 한번
집어넣어 보십시오. “그러나!”입니다. 아무리 나쁜 조건들, 안 좋은 상황들, 불리한 환경들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모두 “그러나!”로
물리칠 수 있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처럼 성경을 자세히 보면 여기에는 반대로 ‘역접’으로 넘쳐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라고 하면 사울이었습니다. 그가 왕이 되기 위해 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지요. 처음에 그는 겸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점점 교만해지더니 마침내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을 저버리고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데에만 급급해집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고, 그 왕위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십니다. 그 사람이 바로 다윗이지요.
다윗은 영문도 모르는 채 사울에게 쫓깁니다. 그 때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함께 있었습니다만 그게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보면 성경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사무엘상 22장 2절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そして、困窮している者、負債のある者、不満のある者たちもみな、彼のところに集まって来
たので、ダビデは彼らの長となった。約四百人の者が彼とともにいるようになった。
상대는 지금 누구입니까. 어느 개인 한 두 명이 아니라 한 나라의 왕이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변에 좀 더 나은 사람들이
함께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기 성경에 보면 환난 당한 모든 자, 빚진 모든 자,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윗한테 모였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다윗도 참 얼마나 답답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어째 내 주위에는 좀 쓸만한 사람들은 없고 다들
무슨 사정이 있는 사람들, 돈도 없는 사람들, 이런저런 문제가 있는 사람들만 모였을까, 괜찮은 사람들은 어디 가고 다 못난 사람들만
모여왔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무엘상 18장 12절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サウルはダビデを恐れた。それは、主がダビデとともにおられ、サウルを離れ去られたからである。
내가 아무리 배운 것도 없고 능력도 없고 배경도 없고,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내 주위에 나쁜 조건들이 있어요 내가 놓인 상황은
안 좋습니다. 환경들도 너무나 불리해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무슨 하나님이시라구요? 예, 그렇습니다. “’그러나’의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에 ‘그러나’를 넣으면 어떻게 되요? 예, 27절 이후가 됩니다.
오늘 말씀 중 고린도전서 1장 27절~29절을 보시겠습니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27. しかし神は、知恵ある者を恥じ入らせるために、この世の愚かな者を選び、強い者を恥じ入らせるために、この世の弱い者を選ばれました。
28. 有るものを無いものとするために、この世の取るに足りない者や見下されている者、すなわち無に等しい者を神は選ばれたのです。
29. 肉なる者がだれも神の御前で誇ることが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하나님께서는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신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28절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신다
(有るものを無いものとするために、この世の取るに足りない者や見下されている者、すなわち無に等しい者を神は選ばれた) 고 하십니다.
이것이 이상하신가요? 그렇죠. 이상하죠. 이해가 안 되시나요? 그렇죠. 이해가 안 되지요.
아니, 하나님도 참 이상하시지. 이왕 쓰시려면 좀 똘똘하고 잘난 사람을 쓰시면 얼마나 좋아요. 그렇잖아요? 내가 회사 사장이에요.
그런데 직원을 뽑으려고 해요. 그렇다면 똘똘한 사람과 미련한 사람, 누구를 뽑겠습니까. 그야 당연히 똘똘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뽑지요. 그래야 나나 우리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해주지 않겠습니까. 미련한 사람을 뽑아보세요. 회사가 잘 돌아가겠습니까. 그런 사람을
내 돈 들여가면서 데리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참 하나님도 이상한 양반이야. 말도 안돼. 그러니까 성경은 엉터리라니까……. 그렇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렇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누가 먼저 버림을 받아 마땅합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나 자신부터 버림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대단해서, 우리 스스로가 좀 남들보다 착하고 똘똘해서 하나님이 사랑해주시는 것 같습니까.
잠언 26장 12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잠언 26장 12절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自分を知恵のある者と思っている人を見たか。彼よりも、愚かな者のほうが、まだ望みがある。
우리가 만약에 지혜롭고 능력 있고 나 혼자라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내가 잘났었다면,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일찌감치 버리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아직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사랑해주시는 이유는 어쩌면 참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미련해서, 어쩌면 참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능력이 없어서, 어쩌면 참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지혜롭지 못해서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자학인가요? 아닙니다. 동물 양을 보십시오. 양은 늑대나 사자가 달려든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좇아오는 늑대나 사자를
뿌리칠 정도로 빨리 달리지 못합니다. 맹수들과 싸워서 이길 만한 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인가요? 아닙니다. 이는 오히려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미련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지혜로움이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아이구, 나는 맹수가 달려들면 내 힘으로는 살아남을 수가 없어요. 꼼짝없이 죽고
말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예, 그렇습니다. 양치기 목자한테 꼭 붙어 있을 게요…… 이게 진정한 지혜이자 진정한 능력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10장 14절~15절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갈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0장 14절~15절
“14.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わたしは良い牧者です。わたしはわたしのものを知っており、わたしのものは、わたしを知っています。
ちょうど、父がわたしを知っておられ、わたしが父を知っているのと同じです。また、わたしは羊たちのために自分のいのちを捨てます。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께서는 그냥 말로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 죄악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준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3장 5절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心を尽くして主に拠り頼め。自分の悟りに頼るな。
잠언 16장 20절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みことばによく通じた者は幸いを見出す。主に拠り頼む者は幸いである。
잠언 29장 25절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人を恐れると罠にかかる。しかし、主に信頼する者は高い所にかくまわれる。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시편 23편 6절에 보면 다윗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편 23편 6절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まことに 私のいのちの日の限り いつくしみと恵みが 私を追って来るでしょう。 私はいつまでも 主の家に住まいます。
다윗은 평생토록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 결과 그렇게 문제도 많은 사람들, 정말 인간적으로 보면 전혀 쓸모 없는 것처럼 보인
사람들을 거느리고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자, 하나님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기 때문에, 오히려 사울이 다윗을 두려워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이스라엘 왕으로 오르게 되어 40년이나 통치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요, 뭐, 그러나의 믿음, 좋습니다. 하지만 제가 모르나요. 예, 알지요. 뭘 아냐 하면, 이런 믿음, 그러나의 믿음이 생기더라도
어떻습니까. 주변을 돌아보면 믿음도 없는 사람들이 잘 되고 그런 모습을 봅니다. 그러면 이게 어느 쪽이 맞는 것일까.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데 이렇게 어려움이 닥쳐옵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성경대로 살아가지도 않고 자신들의 욕심만 채우려고
하는데 잘 되는 것처럼 보여요. 그러면 이거 나만 바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잠언 24장 1절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悪い者たちを羨んではならない。彼らとともにいることを望んではならない。
잠언 24장 19절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悪を行う者に対して腹を立てるな。悪しき者を羨むな。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는 지금이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수천년 전에도 이와 같은 일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악인인데도 잘 되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있어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일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잠언 19장 3절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人の愚かさは自らの道を滅ぼす。その心は主に向かって激しく怒る。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미련하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지혜롭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5절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神の愚かさは人よりも賢く、神の弱さは人よりも強いからです。
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제아무리 머리가 좋고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능가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승리를 주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된 인도자가 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 우리가 부족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힘들더라도, 우리를 높이시고 우리를 쓰시고 우리를 인도해주시고,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분,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질문을 안 드린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한 번 질문을 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오늘 드린
말씀을 잘 들으셨는지 아닌지 알 수 있는 질문입니다. 앞서 제가 이 역접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그 이유가 뭐라고 말씀
드렸는지 혹시 기억하십니까? 왜 접속사 중에서 ‘그러나’ 같은 역접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씀 드렸는지 기억하시나요?
예, 그 이유는 이 역접 다음에 ‘필자의 생각’, ‘필자의 의도’가 등장하기 때문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성경의 필자는 누구입니까. 물론 직접적으로 성경을 기록한 것은 사람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세나 다윗, 솔로몬 바울 등 수
십 명에 달하는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만, 이는 그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지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第二テモテへの手紙 3章16節
聖書はすべて神の霊感によるもので、教えと戒めと矯正と義の訓練のために有益です。
그러니까 성경의 필자는 하나님 자신이라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말씀 중에서 필자의 생각, 하나님의 생각이 어디에
나오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절 ‘그러나’ 다음입니다. 마지막으로 필자의 생각, 성경의 필자이신 하나님께서 가장
말씀하고 싶은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절~29절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しかし神は、知恵ある者を恥じ入らせるために、この世の愚かな者を選び、強い者を恥じ入らせるために、この世の弱い者を選ばれました。
有るものを無いものとするために、この世の取るに足りない者や見下されている者、すなわち無に等しい者を神は選ばれたのです。
肉なる者がだれも神の御前で誇ることが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할렐루야! 그리고 또 로마서 8장 28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神を愛する人たち、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召された人たちのためには、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나쁜 조건들, 안 좋은 상황들, 불리한 환경들을 단번에 좋은 조건들, 좋은 상황들, 놀라운 환경으로 바꾸어주시는
‘그러나’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여, 진정으로 주님으로부터 충성된 일꾼으로 쓰임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