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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自性, pali. sabhāva, skt. svadhava)>
‘자성(自性)’은 사물의 본질을 말한다. 즉, 자성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항상 불변하는 성질을 가진 독자적 존재성을 말한다. 그래서 서양철학의 ‘실체’라는 개념과 유사하다.
산스크리트어 ‘svabhava(自性)’는 ‘자신(sva)에게 고유한 성질(bhava)’
혹은 ‘자체의 고유한 성질’이란 뜻인데,
어떤 현상(법)이 다른 현상과 구분되는 고유한 성질을 스와바와라 한다.
자성(自性)은 나의 성품(性品)이 아니라 스스로의 성품이다.
쉽게 말하면, 인간의 본성(本性)을 말한다.
이와 같이 자성이란
‘본래 지닌 마음’이라고 해서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본성[불성(佛性)],
근본 마음자리를 말한다.
보고,
듣고,
말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이 모든 생명작용을 일으키는
바탕 자리인 자아(自我)의 본성을 일컫는다.
따라서 자성은 우리 인간성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참나’의 본성, 인간성의 순수한 자리라고 한다.
그리고 자성은 금생에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세나 현재나 미래에도
영원히 존재했고,존재한다고 본다.
그렇기에 자성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위와 같은 내용으로 볼 때
자성(自性),
본성(本性),
법성(法性),
자아(自我),
불성(佛性),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등이 모두 같은 개념 선 상에 있다고 하겠다.
자성은 진여자성(眞如自性)이라고 붙여 쓰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자(自)’라는 한문 글자를 여기서는 스스로라고 해석하지 말고
원래, 본래, 본디로 해석하면 의미가 잘 통한다.
즉, 번뇌 망상(노여움, 증오, 시기, 질투, 분별, 차별심 등)이
없는 최초(본래)의 마음이다.
그러니 자성(自性)은 정신작용의 근원이고,
따라서 자성(自性)에서 온갖 인식작용(정신작용)이 일어난다.
그리고 진여(眞如)란 ‘참나’를 의미한다.
‘참나’라고 하는 것은
, ‘참나’라고 하지만 사실은 형체도 없고, 볼 수도 없는,
이름 지을 수도 없는 것이기에
‘참나’의 본성을 편의상 자성(自性)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 자성을 보는 것, ― 깨닫는 것을 견성(見性)이라고 한다.
“앞으로 10만원만 더 벌면 100만을 만들 수 있는데 하고 10만원에 집착하고 있는 '나',
결혼만 하면 내 인생은 행복해질 텐데 하고 결혼(여자)에 집착하고 있는 '나', 오래 살려고 보약을 지워먹고
건강에 좋다는 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먹으면서 장수에 집착하고 있는 '나', 이 ‘나’의 실체가 뭔가?”
이 말이 곧 자성인 것이다.
이렇게 쉬운 것 같으면서도 그 자성을 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누가 보여준다고 해서 보게 되는 것도 아니고 배워준다고 해서 배워지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이 수행을 철저히 해서 깨쳐야 한다. 또한 이것은 글자로도 알 수 없는 것이고, 형상으로도 알 수 없는 것이며, 생각으로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오로지 본인의 수행 정진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바로 이 본래면목을 알게 하기 위해서, ―
견성(見性)을 하게 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법문을 하신 것이다.
그런데 초기불교에서는 자성(自性)이라는 말이 성숙되지 않았다. 그것은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무아사상에 근거한 초기불교에 있어서는 연기론(緣起論)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서 불변하는 영원성의 존재는 철저히 부정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변하지 않는 존재성’은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부파불교시대에 아비달마교학의 성장이라는 사상적 배경 속에 자성(自性)의 개념이 등장했다. <구사론(俱舍論)>에서는 존재를 승의(勝義)의 존재와 세속(世俗)의 존재로 나누고,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그 자체로 존재하는 자성을 승의의 존재라고 하고, 자성(自性)이란 승의의 존재로서 다른 것과 혼동되지 않으며, 변하지도 않는 독자적인 본성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리고 설일체유부에서는 법체(法體)라고 하고, 독자부(犢子部)에서는 개아(個我, 뿌드갈라/pudgala=인상/人相=아체/我體)라고 했다.
이와 같은 부파불교에서의 인성론, 즉 초기불교의 인성론에 반하는 부파불교의 인성론이 등장했으나 이에 반발해서 대승불교가 등장했다. 특히 중관학파에 의해 부파불교의 인성론이 부정됐다. 즉, 자성론을 부정한 것이다.
중관학파의 <중론>에서는 자성이 있다고 가정할 때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해 논파하고, 공성(空性)은 자성(自性)의 부재[무자성(無自性)]에 근거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연기(緣起) → 무자성(無自性) → 공(空)」 사상은 중관학의 창시자인 용수(龍樹) 철학의 근간이었다.
그러나 4세기 무렵 등장한 세친(世親, 바수반두/Vasubandhu)이 정립한 유식불교에서는 이러한 중관파의 입장을 방편적인 관점이라고 다시 비판했다. 그리하여 중관학파에서 「무자성(無自性) ― 공(空)」을 주장했음에 비해
유식학에서는 「자성(自性) ― 공(空)」을 주장했다. 다시 자성론을 긍정한 것이다.
인간존재엔 근본 마음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 근본 마음자리를 자성(自性)이라고 했다. 생각이나 인식작용
(정신작용)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끝없이 반복하지만, 자성(自性)은 한 번도 생기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인식작용이 일어났다고 해서 늘어나거나, 인식작용이 사라졌다고 해서 줄어들지 않는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부증불감(不曾不減)이다.
이 자성(自性)은 어떤 모습이나 형태도 없으며 무엇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다. 그래서 이것을 ‘공(空)’이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자성-공」이라 하고, 자성(自性)에서 온갖 인식작용(정신작용)이 일어난다고 했고, 자성(自性)은 정신의 근원이라고 했다. 이후 중국의 선종(禪宗)에서도 대체로 이러한 유식사상의 입장을 존중했다.
이와 같이 중관학에서는 「무자성(無自性) ― 공」이라 하고, 유식학에서는 「자성(自性) ― 공(空)」이라 해서,
서로 상반되는 주장을 함으로 해서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자성이 있다고 했다가 자성이 없다고 했다가 하는 등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든 15년 동안 숨어 지내며 수행을 하다가 수계의식을 마친 육조 혜능(慧能) 선사는 세상을 향해 법의 문을
활짝 열어, 오(悟)와 수(修), 정(定)과 혜(慧), 번뇌(煩惱)와 보리(菩提)가 모두 자성(自性)일 뿐이라는 혁명적
사고를 일으키며 새로운 선종사의 흐름을 시작했다. 이와 같이 선종(禪宗)에서는 유힉학의 입장을 수용한 것이다.
방안의 등불은 두 가지 일을 한다.
첫째는 방안의 대상을 비추는 것이요,
둘째는 자기 자신을 비춘다.
객체를 비추는 것은 대상인식이요, 주체를 비추는 것은 자체인식이다. 이 둘 중 중요한 것은 자체인식이다.
등불이 그 빛에 의해 객체로서의 대상을 비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객체를 비추는 자체를 자체가 비춘다는 것은 더 중요하다. 이것은 자체에 비춤의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체용일여(體用一如)이다.
다시 말하면 즉체즉용(卽體卽用)이다.
이것을 인간의 자성(自性)에 비유하면, 자성은 그 자체에 비춤,
즉 자체에 지혜작용이 함장 돼 있어서 지혜작용이 스스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자성의 지혜작용을 달리 말하면
함장식(含藏識)이다.
자성청정(自性淸淨)이다.
성자만족일체공덕(性自滿足一切功德)이다.
대주 혜해(大珠慧海) 선사의 표현에 의하면 자가보장(自家寶藏)이다.
이러한 자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회광반조(回光返照)이다.
불교에서 불성(佛性) 혹은 자성(自性)의 유무 문제는 오랜 쟁점이 돼 왔다.
남전불교와 북전불교 사이의 논쟁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북전불교 안에서도
이에 대한 논의는 상당히 중요한 쟁점이 돼 왔다.
불성⋅자성의 존재에 대한 논의는 불교에 있어서 중대한 문제이고,
어떻게 보면 불교의 근본을 흔드는 민감한 일이라서 찬반의 의견이 심각한 편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는 상태에 있다.
우리나라에선 불성⋅자성이 있음을 주장하는 쪽의 세가 워낙 커서 부정적인 의견은 소극적인 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성론(自性論)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있다.
자성(自性)은 불교사상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엄격히 얘기해서 자성은 비불교, 반불교 사상이라는 것이다.
일체 중생이 본성(자성) 혹은 불성이라고 하는 것을 감추고 있다는데,
결과적으로 그것이 힌두교의 아트만(atman)과 동일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불성(佛性)과 더불어 자성을 존재론적인 실체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어떤 경우라도 존재론적인 실체를 용납하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자성은 무아법에도 위배되고,
연기법으로도 해석할 수 없는 존재이므로 불교적 개념일 수 없다는 것이다.
짧은 소견이나마 피력한다면, 자성이고 불성이고,
어느 것이든 존재론적 실체로 파악해서 안 된다고 본다.
그것은 무아론을 정면으로 부정하기 때문이다.
다만 특이한 성향이고, 공성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유식학에서는 「자성(自性) 공(空)」이라 했다.
저성이 있기는 한데, 공한 성향이라는 말이다.
공성이기는 한데, 특이한 (불교적)성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성청정(自性淸淨)’에서 자성(自性)은 공(空)하다는 뜻이다.
스스로의 성품이 공하다는 뜻이다. 자성(自性)이란 스스로의 성향을 뜻한다.
공(空)이란 어떤 영원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몸과 마음에는 스스로의 실체가 없어 공(空)한 것이며,
그게 곧 청정(淸淨)하다는 뜻이다.
몸과 마음에 내재된 어떤 고정불변의 실체,
즉 나ㆍ영혼ㆍ아트만 이런 게 없다는 뜻이 청정이다. 그래서 변화하는 것이다.
실체가 없으니까. 뭐가 어떤 게 있어서 그게 깨끗해서 청정한 게 아니고,
마치 하늘에 티끌 하나 없을 때 청정하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은 공한 마음이다.
공을 저해하는 ‘그 무엇’이 전혀 없이 본래 청정해서
모든 더러움을 여윈 것이라는 것, 공성의 본래 청정한 마음을 말한다.
자성청정(自性淸淨)이란 자성이 깨끗이 비어있다는 뜻이다.
불성을 인간 내면에 있는 부처가 될 가능성으로서의 자성청정(自性淸淨)으로 봤다.
비유하자면, 호수는 본래 맑고 깨끗한데, 공연히 쏟아진 폭우로 흙탕물이 내려와 흐려졌을 뿐이다.
비가 그치면, 흙탕물도 잦아들고, 호수는 본래대로 맑고 깨끗한 청정함이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자성청정심이란 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우리의 마음은 그 바탕이 청정하다는 뜻이다.
이것을 심성본정(心性本淨)이라 하고, 이 마음을 자성청정심이라고 한다.
소승에서도 주장한 바 있고,대승에서는 이 마음을 불이 될 성향이라 해서 불성(佛性)이라고도 했다.
그러니 불성(佛性), 자성(自性),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 모두 같은 맥락의 말이다.
그런데 마음은 본래 청정하지만 현실에 있어서는 번뇌에 덮여서 오염돼 있다.
이 번뇌는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객(客)과 같은 존재이므로 객진번뇌(客塵煩惱)라고 한다.
중생 마음의 본래성품은 청정한 것이며, 번뇌는 우발적인 것으로 청정한 마음을 더럽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설사 나쁜 생각을 하고 남을 미워도 하지만 우리 본마음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오염시킬 수가 없다.
흔히 우리가 생각 할 때는 나쁜 짓을 많이 하고 나쁜 생각도 많이 하면 우리 마음이 오염돼 나쁜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 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근본성품에서 볼 때는 우리 마음이라 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오염이 된다거나 크고 작고 할 것이 없다. 따라서 아무리 나쁜 짓을 많이 했다하더라도 우리 마음 자체,
성품으로 볼 때는 조금도 오염이 안 되는 청정심(淸淨心)이다.
공(空)이니 중도(中道)니 무상(無常)이니 하는 것은 모든 번뇌를 없애기 위한 방편이다.
하지만 결국은 필경공(畢竟空)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니 공이니 중도니 하는 것마저 버려야한다.
마치 비누로 빨래의 때를 없애지만 결국 깨끗한 물로 비누까지 없애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청정하다는 것은 우리의 본성이 허공처럼 텅 비어있어서 더러움이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중생은
번뇌로 물들어 있으니 그 청정함을 못 본다. 그래서 상(相)에 머무르지 않는 마음을 자성청정심이라 한다.
헌데 자성청정심에 대한 비판의 소리도 있다.
중생에게 본래 있고 항상 하는 성품이 있다면 그것이 더러워질 리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자성이 청정하다면 반드시 자성이 더러운 자가 있다는 상대적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니
이러한 논리는 비약이라는 것이다.
<대승기신론> 등 대승불교 여래장사상 계열에서는 진여의 무분별지(無分別智)
또는 자성청정심(自性清淨心)을 본질의 입장에서 본각(本覺)이라 한다.
<범망경>에서는 계체(戒體)를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으로 보고 있다.
중생의 마음은 번뇌로 더렵혀져 있다. 질투와 교만심, 탐욕과 분노 등, 보기 싫은 심리적인 힘으로
마음이 동요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번뇌로 더렵혀진 마음 깊숙이 더렵혀지지 않은 청정한 마음이 있다.
그것이 즉 '양심'이다. 이 양심은 어떠한 나쁜 사람에게도 있다. 우리가 악을 저지를 때 그것이 악이라는 것을
마음에 알려주는 것이 양심이다. 마음이 악 일색으로 뒤덮여 있을 때도 자기가 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즉, 양심은 남아 있다. 마음 깊은 곳에 악에 물들지 않은 마음이 있다.
오히려 커다란 악을 저지르면 그럴수록 양심의 가책도 심한 법이다.
세상에는 선심(善心)이란 한 조각도 없는 듯한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그런 사람이라도 어떤 순간에 잠자고 있던 양심이 깨어나서
아주 착한 사람이 되는 일도 드물지 않다.
악에 강한 사람은 선에도 강하다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들 마음속에는 아주 착한 마음이 있다. 이 선심은 우리의 마음 전체가
악으로 물들여진다 해도 악에 오염되지 않는다. 순수청정하고 반짝이는 선심,
그래서 이것을 '자성청정심'이라고 한다. 여기서 '청정'이란 눈부시게 빛난다는 의미이며,
순백한 아름다운 마음이라는 뜻이다.
우리들 마음에서 선과 악은 불가사의한 관계에 있다.
어떻게 보면 마음이란 착한 마음(善心)과 악한 마음(惡心)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즉, 선악불이(善惡不二)의 관계에 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선인인 동시에 악인이라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라도 착한 사람에 대해서는 나쁜 사람이다.
그러나 어떤 나쁜 사람도 나쁜 사람에 대해서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어떤 착한 사람도 절대적으로 착한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는 얘기다.
누구라도 어느 정도의 악은 가지고 있다.때문에 마음속에는 선과 악이 하나로 돼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에게는 선악불이(善惡不二)의 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간은 선과 악을 분명히 나누고 있다.
우리들 심중에는 악을 용서하지 않는 마음이 있다.
선을 긍정하고 악을 부정하는 강한 힘은 어떤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있다.
도덕을 지지하는 마음은 선과 악을 확실하게 구별하는 마음에 기인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의 마음은 선악불이의 면과 악과 선을 구별하는 힘이 혼재돼 있는 불가사의한 존재이다.
그런데 계체(戒體)로 하고 있는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은 마음의 밑바닥에 있으면서
항상 선을 탄생시키는 힘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마음의 본성이라고 보고 자성청정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마음의 보배 구슬(寶珠)'라고 한다. 마음 깊은 곳에 있고 번뇌로 가리어져 있지만 반짝이고 있는
청정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음속에서 이런 보배 구슬을 발견해야 한다.
즉, 우리가 이런 청정심을 잃지 않도록 하고,
다 이 마음을 강화시키도록 노력하는 일이 계(戒)의 의미이다.
계는 서약으로서 생기는 것이므로 이 마음을 잃지 않도록 더욱 강화되도록 서약을 세우는 일이 보살계다.
이러한 자성청정심은 항상 활동하고 있는 것이어서 마음이 잠들어 있을 때에도 장성청정심은 잠자지 않는다.
그리하여 성불할 때까지 선(善)의 성질을 유지해 나가고 있다. 그러므로 '일체중생 모두에게 불성이 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범망경>에서는 “중생이 불계(佛戒)를 받으면 곧 부처님의 위치에 든다.
위치(지위)는 대각(大覺)과 같다. 참으로 이것은 모든 부처님의 자식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시 노사나불의 말씀으로서, “그대는 앞으로 성불할 부처님이고 나는 이미 이루어진 부처이다.
항상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면 계품(戒品)은 이미 구족 하리라”고 말하고 있다.
즉, 이 말은 자신이 '이제부터 성불할 부처'라는 신념을 가질 때 계체(戒體)가 얻어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