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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꿈꾸는 교회 1(말1:1-5)
-사랑이 주도하는 교회
1. 지난주일 교회 창립 3주년을 지내며 오늘부터 우리가 꿈꾸는 교회에 대해서
말씀을 나눕니다. 구약성경 마지막 책인 말라기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인 교회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6주간 말라기 말씀을 통하여, 우리
교회가 함께 꿈꿀 수 있는 교회의 비전선언문을 각자 작성해 봅시다. 여러분이
작성한 비전문을 우리 교회 인터넷 카페(다음 카페, 포항 빛내리교회)에 자유롭
게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샘플을 조만간 제가 나눠드릴게요. 인터넷 사용이 불
편하신 분은 제게 주셔도 좋습니다. 우리 교회 비전문은 제가 일방적으로 내놓
는 비전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이 공동으로 작성하는 꿈입니다. 이 꿈을 저와
여러분이 우리 세대 안에 꼭 이룰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꿈을 말하는데, 성경 66권 가운데 하필이면 말라기일까요?
말라기 시대는 오늘 우리 시대와 매우 비슷하였습니다. 말라기 당시의 문제가
오늘 우리의 문제이기도 해요. 1절,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성경의 모든 주어는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이세요. 창세기부
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두 그래요. 신명-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로, 하나님으로,
예수 그리스도, 주 예수 등으로 다양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세요.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주체이시고, 그 말씀을 대신 전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선지자-navi-는 대언자(대변인)란 의미입니다. 모세나 선지자들,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2. 말라기 선지가 활동할 때 말씀하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
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말라기 말씀을 통해 주시는 메시지는 오늘 우리 교
회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과거 말라기 시대 이야기만이 아닙니
다. 말라기라는 이름의 뜻은 나의 사자(my messenger)입니다. 사자는 하나님의
전권대사를 의미해요. 대사는 자기 말을 하지 않아요. 자기를 대표로 보낸 통
치자의 말을 대신합니다. 선지자란 말과 같이요. 말라기는 말라기의 말이 아
닙니다. 저나 여러분의 말도 아니에요.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한국교회는 20세기 후반부터 마이너스 성장 시대를 맞이해서 침체가 장기화 되
고 있습니다. 한국교 교회가 부흥을 갈망하고 찬양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때
부터 20년이 넘었어요. 부흥 찬양 가사를 보세요.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우리의 죄악 용서하소서 이 땅 고쳐 주
소서, 이제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이 땅의 무너진 기초를 다시 쌓을 때, 우리의
우상들을 태우실 성령의 불 임하소서,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
씀 이 땅 새롭게 하소서, 은혜의 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제 불어
와 오 주의 영광 가득한 새날 주소서, 오 주님 나라 이 땅에 임하소서. 고형원
이 한국교회를 대표해서 귀한 노래를 만들어주었어요.
3. 부흥을 노래해왔지만 부흥은 이뤄지지 않고 있어요. 왜 그렇습니까? 노래
가사와 같이 죄악을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너진 기초를 쌓지 않기 때문
이에요. 노래만 한다고 부흥이 되지는 않습니다. 온갖 악기와 대규모 찬양팀을
세워서 찬양한다고 부흥이 되지 않아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없기 때
문입니다. 교회 부흥은 우리가 힘쓴다고 이뤄지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노력으로
되는 일이 있고, 되지 않는 일이 있지요. 4절,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
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
이라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한 절이 무척 길지요. 이 긴 절이 전하는 말씀이 무엇일까요? 하님께서 행하시
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몸부림치고 애쓴다 해도 아무 일도 이룰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서양 격언 가운데 매우 신앙적인 것 같은데 실제는 아닌 것이 있
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에요. 이것은, 하늘은 스스로
노력하는 사람을 도와 성공하게 한다는 말인데, 오늘 말씀을 보면 이 격언은
성경과 관계없는 말이에요. 사람이 노력으로 모든 일이 된다면 세상살이가 얼마
나 쉽겠어요. 세상만사, 모든 일은 노력으로만 되지 않아요.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해요.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노력하는 자와 함께 하는 것이 아
닙니다.
4. 오늘 본문 말씀은 이 문제를 우리에게 제기하고 답을 줍니다. 오늘부터 말
라기를 여섯 번에 걸쳐 나눕니다. 이 기간에 말라기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우리가 꿈꾸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비롭습니다. 그 말씀이
선포된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인데,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시고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라기를 통해서 제기하는 첫 번째 주제가 무엇일까요?
사랑 이야기입니다. 야곱의 자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있다는
말씀이에요. 2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 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
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주께
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하고 질문했어요. 이 말씀을 들을 때 금방
이해가 됩니까? 사랑은 은사입니다. 은사는 선물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
랑하심은 은사-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도 은사요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랑 안에 사는 것도 은사요 선물입니다. 이스라엘이 하
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그 사랑 안에 살지 못한 것은 참 불행한 일이에
요. 왜 이스라엘은 그렇게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그 사랑 안에 살지
못했을까요? 그들의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불신앙은 하나님의 은사가 우리
에게서 떠나게 합니다.
5. 오늘 우리 삶에도 이런 불신앙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불신앙이 무엇인지
점검해볼 수 있는 첫 번째 시금석이 여기에 있어요. 우리가 이스라엘처럼 하
나님의 사랑하심을 깨닫지 못하고 그 사랑 안에 살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 가운
데 불신앙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불신앙의 증거로 나타나는 것이
불평과 원망과 부정적인 생각입니다. 오늘 본문말씀과 같이 우리 안에도 “언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습니까?” 이
런 질문이 우리 속에서 나오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도 나오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데 도무지 감사가 없어요. 감사가 없으면 불신앙의 싸인-징조에요.
오늘 본문 말씀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신앙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이
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한 사랑의 개념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의 개념이
달랐기 때문이에요. 이스라엘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 이
스라엘을 사랑하셨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보다 더 잘 살고 더
행복해야 하지 않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증거를 찾지 못했어요. ‘하나님
이 우리를 사랑하신 증거를 말해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말라기 시대 이스라엘
의 상황은 이랬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 성벽
을 재건하고 성전도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6. 하지만 주변 정세는 유다 왕국 멸망과 바벨론 포로로 붙잡혀 갈 때와 크게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완전히 독립하거나 풍요로운 생활이 보장되지
도 못했어요. 그들은 적어도 성전이 재건되면 뭔가 희망적인 일들이 당장 나타
날 줄 알았어요. 실제는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정치적 안정이나 경제적 풍요
는 그들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때 유대인들의 마음이 식어지고 하나님께
멀어져 가고 말았어요. 급기야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소홀히 여기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생활을 잊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불신
자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인생을 살고 말았어요.
오늘 우리도 말라기 시대 이스라엘과 다를 바 없는 상황에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고대하며 살았습니다. 특별히 러시아-구 소련과 동유럽
의 공산주의가 무너지기 전까지 그랬어요. 20세기 말까지. 그런데 주님의 재림
이 계속 연기되고 있어요. 이때부터 한국교회 성도들의 생활이 점차 흐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의 열정이 점차 식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다 잘못된 종말론
자들-시한부 종말론-이 등장하여 종말 신앙까지 포기해버렸어요. 예배는 형식
화되어 버렸습니다. 교회는 나오나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합니다. 그야말로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어요. 그리스도인들이 축복받았다고
자랑하는 것은 집이요, 자동차요, 좋은 옷입니다. 몇 평 집, 무슨 차, 어떤 브
랜드의 옷 등을 자랑합니다.
7. 이렇게 풍요로운 삶을 누리다 예기치 않게 형편이 어려워지면, 자세가 돌변
합니다. 말라기 시대 이스라엘처럼 ‘언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습니까? 증거
를 말해보세요.’ 하소연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당장 눈앞의 현실적 상황으로 판단할 수 없어요. 물질이나 건강, 자녀교
육 등의 문제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지 마세요. 이것은 하나님을 내 카테고리-
울타리 안으로 가두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제한시키는 어
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장기적 안목에서 바라보고 판단해야 합니다.
신앙은 마라톤 경주와 같습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급히 판단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신하고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라기 시대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증거가 무엇일까요? 2-3절, 하나
님께서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말씀하셨요. 여기에
하나님 사랑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셨습니
까? 이것은 해석이 불가능한 말씀입니다. 만일 누군가 이것을 설명하려고 한다
면 곤란합니다. 가령, 야곱이 에서보다 나은 것이 있어서라고.(적극적인 성격?)
이런 해석은 올바르지 않아요. 하나님의 사랑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선택적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나 사랑하지 않으세요. 선택하신 사람
만 사랑하세요.
8.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힘써도 소용없습니다. 4절에 말
씀하는 에돔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십
니다. 아들-자녀이기에 징계하세요. 자녀 사랑에는 징계가 따라요. 자녀가 잘못
된 길을 가는데도 불구하고 징계하지 않는다면 자식을 포기한 것입니다. 내가
자녀를 자랑하지 않는다면 그 자녀를 포기한 것입니다. 내가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나타내는 것이에요.(demonstration)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끌려가 포
로생활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 기간 동안 험한 세월을 보내야 했던 것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기들 임의로 살았을
때 내리신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70년간 징계를 받는 동
안 하나님께서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주셨어요. 포로 후 예루살렘에 돌아와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도와주셨습니다.(느헤미야 통해, 평
신도 리더십) 비참하게 무너지고 짓밟혔던 성전도 아름답게 건축하도록 도와주
셨습니다. 정복국가인 페르시아(바사) 황제들의 도움으로요. 이런 일은 세계 역
사에 찾아볼 수 없는 이야기에요. 어느 정복자가 피정복 국가가 재건하도록 돕
고, 나아가 그들의 종교 사원을 짓도록 허락한 경우는 없습니다.
9. 이스라엘은 이렇게 특별한 혜택을 받았습니다. 반면 에돔은 다시는 끝내 재
건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증거라고 말씀하
셨어요. 에돔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지만, 너희는 이렇게 건재하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증거란 말씀이에요. 이런 면에서 우리 대한민국도 하나님께서 크
게 사랑하신 나라요 민족입니다. 5,000년-반만년 역사를 지내며 외세로부터
수많은 침략을 당했어요. 때로는 무참히 짓밟히기도 했습니다.(중국이나 일본에)
이런 상황 속에서도 지금까지 건재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특징은 5절, “너희는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
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하리라.” 하나님의 사랑이 이스라엘 내에서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밖에서도 나타났다는 말씀이에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
님만이 아니세요. 하나님은 모든 민족의 하나님-우주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은 이방인을 통해서도 역사하시는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매우 잔인한 정복자였어요. 당시 세계가 두려워 떨었던 정복자였어요. 이러
한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는 조서를 내렸습니다. 그가 다니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기 때문입니다.(단4장-느부갓네살의 찬양)
10. 바사(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은 바벨론을 무너뜨린 새 정복자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유대인들을 조건 없이 해방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냈습니
다.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도록 명령을 내리기도 했어요. 느부갓네살이 뺏어온
성전의 기물들도 다 돌려보내주었어요. 메대의 다리오 왕은 다니엘을 사자굴에
넣었던 왕입니다. 그도 다니엘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다리오 황제는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신임을 온 세계에 공포하고 하나님을 찬양했어요.(단6장)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계임을 드러내신
것이어요. 불행하게도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자꾸 이스라엘 내에 제한시키고 말
았습니다.
오늘 말라기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꿈꾸는 교회의 첫 번째 모습을 발견하였습
니다.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의 사랑을 깨닫고 그 안에 살아갑시다. 이것이 무엇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해요.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내가 너희를 사랑하노라!,” “내가 포항 빛내
리교회를 사랑하노라!” 말씀하세요. 이 사랑이 우리에게 넘쳐흐를 때, 이 사랑으
로 우리가 이웃과 세계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지 않다면, 우리는 이웃과 세계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없는 사랑 가지고
짜내려니 내 마음과 몸만 힘이 듭니다.
11.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넘쳐흐를 때 상황은 전혀 달라요. 내가 생각지 못한
일들을 감당해 나가요.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선택적인
사랑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선택적인 사랑을 받은 복된 자들임을 확
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포항 빛내리교회가 하나님의 선택적인 사랑을 받았
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 사랑받은 자들이 아니에
요. 우리가 선택받을 자격이 없었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와 긍휼로 선택적인
사랑을 입었어요. 하나님께서는 한번 택하신 자를 끝까지 버리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족하고 실수를 좀 해도 버리시지 않습니다. 회개하고 돌이켜 변화되
어가면요.현대 교회는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아요. 이것이 큰 과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우리는 변화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
내도록 해야 합니다. 이 변화는 성령이 임하시면 가능합니다. 이렇게 할 때 하
나님께서 우리 포항 빛내리교회를 성장시키시며, 부흥케 하실 것입니다. 단지
인원수나 헌금이 증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포항 땅을 거룩하게 교회가 되게 하
실 것이에요.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첫 번째 교회의 모습이에요. 사랑이 주도하
는 교회입니다. 반대는 율법이 주도하는 교회입니다. 항상 공로를 따지고 섬기
기보다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는 교회입니다. 지금 끝없이 쇠퇴하는 한국교회들
과 같이 은혜도 없고 사랑도 없는 교회가 되어버려요. 포항 빛내리교회는 하
나님의 선택적 사랑을 입고, 사랑이 주도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말
씀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