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른다섯 살을 넘긴 미혼의 딸이 있다. 결혼은 삶의 과정에서 만나는 통과의례다. 그것은 선택하지 않았을 뿐, 실패나 결함은 아니라는 게 요즘 사회적 인식이고 추세다. 하지만 예전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뿌리 뽑지 못했다면, 자식 일에 태연할 수는 없다. 결혼이라는 울타리를 왜 마다하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외면에 대한 걱정으로 시름은 깊어간다.
2. 딸은 자신의 나이를 걱정하거나 초조해 하지 않는다. 이십 대 후반으로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AI같은 내 눈은 고개를 치켜들 때 이마와, 웃을 때 눈가의 주름을 포착한다. 그럼에도 주눅들지 않고 남자 보는 눈은, 남산타워 꼭대기를 바라본다. '너 자신을 알라'는 명언에 기여도가 크다.
3. 저 나이에 사귄 남자가 없다면 무능의 극치일 텐데, 딸은 고고함의 정수라 말한다. 나이에 밀려 끌리지도 않는 사람 만나 시간을 낭비하느니, 독야청청한 게 백 번 낫단다. 말은 맞는데 어쩐지 모태솔로인 게 창피해 둘러대는 것 같다. 하긴 끼가 없는 데는 할 말이 없다. 독신을 주장하던 나와, 나를 만나 가까스로 노총각 딱지를 뗀 남편을 봐도 안다. 유전자의 힘은 무서운 법이다.
4. 언제부턴지 모임에 나가도 시큰둥하다. 하나같이 사위나 며느리 이야기와 손주들 자랑에 여념이 없다. 사진을 봐주며 장단을 맞추지만, 사실 예의만 차릴 뿐이다. 답답한 가슴 한편에서 불길이 솟는다. 갱년기가 부활한 것처럼, 무언가를 할퀴고, 물어뜯고 싶은 맹수의 본능을 느낀다.
5. 그러다 또 자책감이 밀려온다. 지금이라도 엄마의 자격으로 간섭을 해야 하는지, 자유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방임과 관망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제 인생인데 어련히 알아서 하지 않겠냐는 생각도 든다. 그게 안될 때는, 천생의 배필은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독인다.
5. 남편이 흥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한다. 친구가 자기 조카를 우리 딸에게 소개해 주고 싶다는 것이다. 그가 들뜬 건, 소개남의 이력이 괜찮기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딸은 그의 신상을 듣기도 전에 거절한다. 능력 있고 같은 서울에 거주하며, 잘 생겼다고 강조해도 들은 척 않는다.
'그리 잘난 놈이 어째 나한테까지 굴러와?'
'호박도 아닌데 뭘 굴러와? 멀쩡한 총각에게 놈이라니.'
내 딸이지만 싹수없고 건방을 떠는게 기가 막힌다. 가기 싫다던 청학동 예절교실을 꼭 보냈어야 하는데, 후회는 고스란히 나의 몫이다.
6. 물론 내키지 않는 제안은 거절할 수 있다. 하지만 엄마도 납득할 수 없는 설명이 조금은 필요하다. 남편은 내게 특사의 전권을 준다며, 딸의 속내를 낱낱이 알아오라고 한다. 거북스러운 일은 그럴 듯하게 포장해 내게 미룬다. 나 역시 궁금하긴 하다. 결혼이 언제부터 관심 밖의 일이 되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최근 자주 집에 오지 않는 이유까지 알고 싶다. 딸에게 간다고 하니 애매한 말을 한다. 약속은 없는데 놀아주지는 못하니 마음대로 하란다. 불면 날아갈까 키워놨더니, 내 마음과 다른 게 자식인 것 같다.
7. 금요일 저녁 기차는 사람들로 붐빈다. 산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기울자, 멀리 들녘 위로 길다란 산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은빛 비닐하우스들이 지나간 세월같이 휙휙 지나간다. 어리기만 하던 아이가 기차를 타고 십칠 년을 왕래했다. 청춘의 꿈을 안고 시작한 재수부터, 대학생활과 외국에 나가 있던 시간과 직장생활까지. 자식이 원하는 건 다 해주려고 노력했건만, 딸은 왜 예전처럼 곰살맞지 않은지 모르겠다. 머리가 굵어져서 그럴까.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되고, 자기주장이 강하고 기분나쁜 지적질도 한다.
8. 부모 품을 떠난 뒤 매사 혼자 판단하고 결정을 해서 그럴까. 딸의 입장에서도 힘든 날이 많았을 것이다. 몸져누워 텅 빈 위장 속으로 약을 삼키던 날, 공부나 일에 진척이 없어 암담할 때, 열 열등감으로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 때도 있었을 것이다. 이유도 모르는 슬픔으로 엄마 품이 한없이 그리울 때도, 딸은 한 번도 전화로 울먹이거나 상경해 달라는 요청이 없었다. 응석도 위로도 받을 수 없었던 순간들이 가슴에 맺힌 것일까. 일찌감치 삶은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외로운 투쟁이라고 느꼈기에, 자신의 괴로움을 엄마에게 상쇄하지 않으려는지 모르겠다.
9. 딸의 오피스텔 센서등이 번쩍 켜진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라고 만다. 좁은 공간일수록 정돈을 잘해야 한다고 일렀거늘,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다. 벗어던진 옷들이 침대에 널브러져 있고, 쌓인 그릇에는 양념이 말라붙었다. 복잡한 문양의 카펫 위에 머리카락이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 이런 상황에 무슨 결혼이며 살림인가.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데. 와인을 먹여 아이의 속내를 살피려 한 전략이 소용없어 진다.
10. 허리가 휘도록 집을 치우고 라면을 끓이는데, 딸이 숨을 헐떡이며 들어온다.
"엄마, 내 것도."
여태 밥도 안 먹고 뭘 했단 말인지. 대충 상을 차린다. 냉장고에 먹다 둔 소주를 꺼낸다. 아이의 얼굴은 전보다 야윈 듯하고, 눈 밑엔 거무스름한 어둠이 깔려있다. 라면을 애 쪽으로 밀어주며 뭐 하다 이제 왔냐고 추궁한다.
"뭐 하긴 여태 일했지. 엄마 때문에 뛰어왔구먼."
업무 외에 일 시키는 것, 저녁밥 안 먹이고 일 시키는 것, 모두 근로기준법에 위반이라고 화를 내며 말한다.
"수당도 식사비도 다 받아. 빨리 오려고 저녁을 안 먹은 것뿐이야."
11. 그 해명이 다행이다 싶으면서 또 마음을 울컥하게 만든다. 더 일찍 와서 맛있는 밥을 해놓고 기다리는 건 나여야 했다. 약한 애가 매일 출근하는 것도 힘들 텐데, 책임감과 상사의 압박 속에서 전전긍긍하는 건 아닌지. 그걸 견디고 한 달을 어김없이 채워서 받는 보상이, 어찌 눈물같은 짠 소금 맛이 아닐까. 셀러리 맨의 애환이 달리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집안 일이 왜 미뤄지는지 설명이 되고도 남는다.
12. 이것저것 눈치 볼 것 없이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사실은 엄마가 너 결혼을 독촉하러 왔는데, 사는 거 보니 말 안 해도 되겠다. 힘들지?"
뭔가 말하려다 말 끝을 흐리는 딸이 더 가엾게 느껴진다. 힘든 세상을 경쟁하고 사는데, 거기에 결혼의 짐까지 보태고 싶지 않다. 결혼하기 싫으면 억지로 하지 말고, 혼자가 편하면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다고 말해 버린다. 행복하다면 삶의 형태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라면서.
13. 내 말이 그쯤에서 그쳤으면 좋았을 것이다. 술이 좀 오르자 이상한 말까지 한다. 성분 구조상 엄마의 독신주의 피를 네가 물려받았다는 둥, 결혼에 얽매이지 않을 면책특권을 오늘 주겠다는 둥, 엄마의 자유를 방해한 사람은 사실 네 아빠더라. 너만은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니는 삶을 택하라고.
14. 딸은 내 말에 피식 웃더니 입을 연다. 사실은 일주일 넘게 야근하다 집이 엉망이 되었을 뿐, 다른 날은 오늘 같지 않다고 말한다. 일이 많은 건 동료가 얻은 긴 결혼 휴가 때문이라고. 그뿐만 아니다. 자신은 애초에 엄마의 유전자를 닮은 독신주의자가 아니라고 한다. 일에 지쳐 생각이 없을 뿐, 언제고 마음 맞는 사람이 나타나면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엄마도 결혼했으니, 독신주의자는 아니니 멋있는 페미니스트 흉내는 내지 말라고 한다. 진심 결혼하고 싶을 때나 목표한 것을 이루고 난 후가 적령기니, 그저 나이만으로 밀어붙이지 말라고 부탁한다.
15. '저리 똑 부러진 애를 내가 낳았단 말이지.'
딸의 명쾌한 의중을 듣고 나니 속이 후련해 진다. 그렇다. 결혼은 필수 관문이 아니라 여러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다. 상황에 따라 신중하게 고민하고 결정할 일이다. 더 이상 아이에 대한 걱정을 접기로 한다. 저 애의 몸과 마음이 원할 때, 자연적인 이치로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리고 지지하기로 한다. 사랑과 걱정 사이는 비늘 한 조각도 되지 않음을 느낀다. 그 사이에 믿음과 소통이 비집고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동이 트려는지 블라인드 사이로 희붐한 안도감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첫댓글 딸 하나인지 모르겠어나, 아직 자식들 결혼 못 시켰군요. 친구들 손주 자랑 하는데, 고립감을 느낄 수 있겠네요.
요즘 30대 중반이후, 결혼을 많이 하니깐에, 노산이라 임신도 잘 안되어 시험관 시술도 많이 하더이다. 절에서 기도하는 모친이 있어서,
스님으로 간곡히 축원하고 있는 중입니다.
결혼 안 해도 걱정, 하여도 걱정이니 부모 마음은 늘 속앓이 하게 되는 모양입니다.
좋은 혼처가 나타나길 바라겠어요.
잘 읽었습니다.
딸이 결혼한 지 2년이 다 되어갑니다. 교수님께서 사건을 쪼개서 쓰라하셔서, 딸이 결혼하기 전 저의 심정을 써 보았습니다.
스님 읽어주시고 축원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