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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아져도 좋다!
마태복음 3:13~17
(마 3: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마 3:14)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레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마 3: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마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 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제가 목회를 하면서 닮고 싶고 그런 모습을 가져야 되리라고 여기는 롤모델(role model)되시는 두 분이 계십니다. 한 분은 신길교회 원로목사님이셨던 이낙현 목사님이십니다. 그 분은 제가 자주 뵙지를 못했던 분이었지만 제가 전도사시절 그 교회에서 철야예배를 인도하였을 때 보여주신 겸손의 모습이 제 마음에 깊이 남아 있습니다. 목회연륜으로 보나 연령으로 보아도 저는 새카만 후배입니다. 그럼에도 그 분은 깍듯이 저를 존중해 주셨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주차장으로 향할 때 저의 뒤를 쫓아 오셔서 허리를 숙여 배웅을 해 주셨던 분이십니다. 또 한 분은 제가 부목사로 재직할 때 섬겼던 정진경 담임목사님이십니다. 옆에서 지켜 본 그 분의 인품은 가면 갈수록 돋보이셨습니다. 부목사라고 하대(下待)를 하는 법이 없으셨습니다. 또한 언제나 온화한 미소를 지으시며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던 분이셨습니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존경이 우러나오는 분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겸손에 있습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고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이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이란 단어가 아주 흥미롭습니다. 영어로 Humility인데, 이 단어는 라틴어 Humus(땅, 흙), Humilis(땅바닥에 엎드린) 등에서 유래합니다. 이 말처럼 인간은 흙입니다. 그 위치는 땅바닥입니다. 그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겸손의 본을 보이시므로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될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의 모든 영광을 지니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있는 요단강에 오셔서 세례를 받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세례는 죄인이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그 증표로 받는 예식입니다. 죄인 된 몸이 물에 들어가 죽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씻을 세(洗)’와 ‘예도 예(禮)’ 를 써서 ‘세례’보다는 침례(浸禮), 즉 담글 침(浸)을 사용하여 ‘침례’ 가 더 확실한 용어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히 4:15에서도 예수님에 대하여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굳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겠다고 고집을 피우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선지자 세례 요한은 구원자 메시아로 이 땅에 태어나신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하였지만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 예수님이 세례를 받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는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14절 보면 요한이 난처해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여기서‘말리다’ 라는 말은 아주 강하게 만류한다는 뜻입니다. 또 이 단어가 문법적으로 미완료시제로 되어 있는데, 여러 번 계속해서 만류했음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요한에게 세례를 베풀 것을 강권합니다. 결국 요한은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게 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모든 의’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것이 어떻게 완전함을 이루는 길이 될까요?
여기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겸손함이 몸에 배여 있는 사람이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고 그 분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세상의 부귀영화를 벗어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자신을 맡긴 사람입니다. 결국 겸손이란 내 것을 버리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으로 인류에 대한 구원이 이뤄졌고 믿음의 성도 역시 예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겸손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하는 거룩함, 즉 완전함을 이룰 수 있음을 알게 합니다. 예수님의 겸손과 구원의 사역과 어떤 연관이 있기에 예수님이 낮아 지셨을까요?
만약에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를 거부하시고 하늘의 영광을 누리는데 머무셨다면 우리들의 생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구원에 이르는 길은 철저하게 차단되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또 다시 원초적인 의문이 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죄를 허용하고 그 죄로 인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실 이유가 무엇이냐 말입니다. 그렇게 죄로 인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신 후 그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하실 필요가 있겠냐는 것입니다. 마치도 병 주고 약주는 식으로 그렇게 이끌어 갈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들 나름의 상상의 나래를 펴 보도록 하시지요. 만약에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죄를 지을 수 있는 여건을 허락지 않으셨다고 하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러면 인간은 한 방향으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방적으로 그 분을 사랑해야 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택할 수 있는 의지를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그 분을 기꺼이 사랑하느냐 아니면 내 자신이 좋은 대로 내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여 하나님을 떠나느냐에 대한 결정을 스스로 하게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의도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시고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되는지를 보여주시는 모범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낮아지심으로 사랑을 보이셨다면 낮은 곳으로 내려앉는 것이 그리 손해 보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처럼 낮은 곳에 머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불평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첫 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신앙을 우선시하는 영성교육으로 삶의 참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거창고등학교의「직업선택의 십계」가 있습니다.
제1계명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제2계명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제3계명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제4계명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제5계명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제6계명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제7계명 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제8계명 한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제9계명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제10계명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는 내용입니다. 이 교훈을 발상한 분의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제자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낮고 천한 자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행복 아니겠습니까?
제 인생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하고 된 것은 교회개척을 하고 건축을 한 후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제는 명예도 자랑할 것도 없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자리에 내동이 쳐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때에 저의 아픔을 고백할 때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신 것이 아직도 선연하게 남아 있습니다. “너는 스스로 비천하다고 느끼느냐? 너에게는 가장 중요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시는 내 아들 예수가 있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낮은 곳에 처할 때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나는 낮아지고 천해지고, 초라해져 아무 것도 자랑할 것 없고 내세울 것도 없는데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있어 모든 만물이 조성되기 전에 변함없이 존재하였던 하나님의 사랑이 내 가슴 속 깊이 들어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증거가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난 자신을 보게 된 것입니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하신 말씀으로 사방은 욱여쌈을 당하고 낙심하는 일이 많은데 내 안에 평안과 더불어 하나님의 신뢰하는 믿음을 더욱 확실하게 저를 붙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본문을 대하면서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러 나오시는 모습을 연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30년간 나사렛이라는 촌 동네에서 육신으로는 아버지가 되는 목수 요셉을 도와 생계를 도왔던 분입니다. 그러니 그 분이 남다른 복장을 입었으리라는 기대는 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 행색을 초라하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그 분의 외모도 위풍당당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사 53:2에서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고 했는데 이 말씀에 비춰보면 예수님의 외모는 잘 생기거나 늠름한 외모를 가지신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외모에 어쩌면 약해 보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이를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요즘 외모 콤플렉스(complex)에 시달리는 분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형중독에 걸린 사람들이 많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외모에 전혀 신경 쓰지 않으셨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음주운전자의 실수로 발생한 교통사고로 전신 55%에 3도 중화상을 입고 40번이 넘는 대수술과 재활치료를 이겨낸 이지선씨가 지은 <사랑해 지선아>에서 그녀는 화상을 입기 전에 지녔던 아름다움과 지금 현재의 찌그러진 모습과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임을 고백하였급니다. 이제는 "어떻게 살아"가 아닌 "백 번 살 맛 난다"는 표현을 하였습니다.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당당하게 만들었을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영혼을 만족하게 하였고 당당하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내게 있는 것을 그대로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태도 말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빌 4:11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나의 있는 그대로 내 모습 이대로 하나님을 향할 때 그 안에 위로부터 주시는 사랑이 임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16절~17절 보면 예수님의 세례 장면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고 하늘의 모든 영광을 지니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그 분은 낮고 천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고 죄인의 모습으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바로 그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리면서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함께 계실 때에도 아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때의 사랑과 예수님이 낮아진 자세를 보일 때 보이신 사랑과는 차이가 있을까요? 차이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의 깊이와 누리는 느낌은 달랐을 것입니다. 사랑은 머물지 않습니다. 사랑은 완전하나 그 풍성함과 영역은 제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이르러서도 사랑은 더욱 더 활성화 되고 진보될 것입니다.
저는 제 아내를 사랑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 아내가 자궁에 물혹이 생겨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제 아내가 수술방에 들어가기 전에 수술복을 입고 이동식 침대에 누워 저의 기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전에도 아내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제 아내가 지극히 약한 모습으로 누어 있을 때 제 안에서 울음이 북받쳐 올랐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생기면서 이전에 알 수 없는 지극한 사랑이 제 안에서 치밀어 오름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제가 탈장수술을 하고 몸은 가누지 못했을 때 제 아내는 제 옆에 밤낮으로 함께 하여 주었습니다. 그 때 또 다시 아내의 사랑을 가슴깊이 느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발전하고 더욱 앞으로 성숙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 예수님께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아들에 대한 사랑은 더욱 깊어지고 더욱 넓어지는 과정이 바로 예수님이 낮아졌을 때 이뤄졌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에 살면서 가장 큰 소망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모든 것은 자 지나가는 것들뿐입니다. 그러나 현재나 장래 그리고 영원한 세계로 이어지는 것이 있다면 사랑이 아닐까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열매를 맺는 것이 최상의 행복이요 성공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랑을 바탕으로 한 성공이 가치가 있고, 사랑을 바탕으로 한 업적이 빛이 납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열매 맺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면 내가 그 분의 사랑을 받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 당연히 내가 낮은 자리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또한 예수님이 나에게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입하시기 위하여 내가 죄인되었을 때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신을 드려 희생하셨다면 나도 누구를 위하여 희생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누구 때문에 손해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누구 때문에 내가 억울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나의 희생으로 그가 자유로울 수 있다면 나는 내 희생을 감내(堪耐)하겠다는 결단이 내게서 사랑이 흐르게 하는 지름길입니다. 누구 때문에 내가 억울하고 누구 때문에 내가 고생한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로 인하여 기뻐하고 소망을 잃지 않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흘러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