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나면 두 번 다시 단식 안 할 것… 너무 힘들다”
- 평생을 경찰로 헌신한 강베드로, 좌경화되어 가는 나라와 천주교를 바로 세우기 위해 순교 결심- 24일간의 단식 끝에 순교
글쓴이 : 이마리아/조갑제닷컴
4월2일 필자는 지인으로부터 한 천주교인이 잘못되어 가는 나라와 교회를 바로잡기 위해 서울시 화곡2동 성당의 마당 구석에서 순교할 각오로 단식 중이라는 메일을 받았다.
그날 바로 카메라를 메고 단식 중인 강남수 베드로님께 달려갔다. 그는 87세라는 나이와 단식 4일째였음에도, 2시간가량 인터뷰를 쉼 없이 하실 정도로 정정하신 어르신이셨다. 인터뷰를 하면서 한평생을 깨끗하게 선하게 살아오신 겸손한 분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그분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깊은 신앙심과 애국심이 우러나오고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필자는 그분 장녀인 강아네스에게 “아마도 머지않아 2~3일 후쯤, 그 전이라도 아버님의 기력이 쇠약해지시면 단식을 중단하고 바로 병원으로 모시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고 말했고, 강아네스도 “물론 그렇게 할 겁니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4월22일, 강베드로님이 단식 24일째에 순교하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잠시 멍하니 할 말을 잃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강베드로는 천주교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단국대에서 국문학을 공부했고, 경찰에 입신하여 평생을 경찰로 헌신했다. 특히, 김신조 사건 당시에는 청와대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유족으로는 부인과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고, 손자·손녀 2명이 있다.
“순교 결심… 공산혁명기지로 변하는 천주교에 경종 울리겠다”
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이하 대수천)의 이계성 대표는 강베드로와의 인연, 그의 순교 결심, 단식 만류 등 일련의 과정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지난 3월29일 강베드로님이 만나기를 청했다. 그동안 명동성당 대수천 미사에 꼭 오셨는데, 코로나로 미사가 중단되면서 뵙지를 못했다. 강베드로는 내게 “천주교회에 마지막 인생을 걸겠다.”며, “내 나이 87세로, 이제 살 만큼 살았으니 나라와 천주교를 위해 순교(殉敎)로 인생을 마감하겠다.”고 하셨다.
“정치사제들로 인해 천주교가 공산혁명기지로 변하는 것을 두고만 볼 수 없다”면서, “평생을 경찰로 살아온 자신이 천주교와 나라가 망해가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고, 마지막 남은 인생을 나라와 천주교에 바치고 가고 싶다.”
강베드로는 “문재인 대통령이 국정을 너무 못해. 그리고 좌경화된 천주교에 경종을 울려줘야 해요”라면서 대통령과 정치사제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현수막을 걸고, 교회 앞에서 단식으로 순교하겠다고 하셨다.
내가 말렸지만 이미 가족들에게도 의사전달을 했다면서, 자기결심을 철회할 의사가 없다고 하셨다. 마음이 아팠다. 평생 경찰에서 나라를 위해 헌신해 오다 말년에 천주교와 나라를 위해 단식으로 인생을 마감하겠다는 절절한 애국심과 깊은 신앙심에 감동했다. 선량한 그의 순교 결심을 들으니, 문재인 대통령과 정치사제들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다.
마지막 인사라며 “건강을 찰 챙겨 반드시 문 정권을 퇴치하고, 천주교를 바로 세워달라.”는 유언 같은 말씀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위로할 말씀이 없어 “형제님의 숭고한 정신으로 천주교를 잘 지키는 등불로 삼겠다.”고 위로해드렸다. 온종일 마음이 아프고 괴로워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단식 중에 여러 번 찾아가서 단식을 말렸더니, 강베드로는 “몸은 고통스럽지만 정신은 맑다”고 하셨다. 강베드로는 자신이 40년 동안 다니던 성당 마당 한구석에 조그만 텐트를 치고 단식 중이었는데, 성당에서 내쫓으려고 했다. 플래카드도 걸지 못하게 하고, 단식 중이던 텐트 바깥으로 금줄을 치고 사람을 벌레처럼 취급했다. 급기야는 성당 마당에서 나가라며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내었다. 나가지 않으면 하루에 50만 원씩 벌금처분을 받았다.
그 성당은 강베드로가 40년을 다닌 성당이고, 성당을 건축할 때에 평생 박봉의 경찰로 3자녀를 키우며 검소하게 살아오신 강베드로가 적지 않은 금액인 수천만 원을 헌금한 성당이기도 하다.
“정치인처럼 보여주기식 아닌, 정직하게 끝까지 단식”
고인의 단식을 지켜본 내과전문의 이광우 박사는 “저런 분은 평생 처음 본다. 기쁜 마음으로 단식하셨다. 단식 중에 찾아가면 ‘왜 또 오셨느냐. 보잘것없고 미미한 나로 인해 귀찮게 해드려 미안한 마음이다’ 하고 그렇게 겸손하실 수가 없다. 단식으로 괴롭다는 표정이 없고, 웃음으로 맞아주셨다. 일부 정치인들이 하는 단식처럼 보여 주기식 단식이 아니라, 정직하게 끝까지 단식하셨다”며 안타까워했다.
이 박사는 “단식 며칠 후, 성당에서 하도 나가라고 난리를 쳐서 앰뷸란스를 불러 병원으로 모셔 가려고 했는데, 완강히 거부하셔서 못했다. 그래서 ‘의식을 잃으시면 얼른 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치료를 해야겠다.’ 생각하고 거의 매일 단식 현장인 텐트에 왔었다. 단식 18일 째였던 4월16일, 간신히 가족들이 병원응급실 입구까지 모시고 갔는데, 병원 입구에서 너무 완강하게 치료를 거부하셔서 입원을 못 하셨다. 순교하겠다는 의지가 너무나 강했다”고 전했다.
“다시 태어나면 두 번 다시 단식 안 할 것… 너무 힘들다”
강베드로는 4월22일 오전 9시경 별세했다.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필자는 그날 저녁 빈소를 지키고 있는 강베드로의 따님인 강아네스를 만났다.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순교자의 책을 많이 보셨다고 해요. 특히 세월호 사건 이후 아버지는 ‘종북좌익세력들에 의해 나라가 위기에 빠졌는데 나라를 위해, 가톨릭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뭔가’를 고민하셨어요.”
강베드로는 작년 겨울부터 단식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아네스는 “사실 아버지는 지난 겨울 명동성당에서 단식하려고 하셨다. 내가 ‘봄에 다시 생각해봐요’라고 말렸다. 그래서 아버지가 봄에 하신 거 같다”고 전했다. 강베드로는 올해 3월 하순, 딸에게 작은 텐트를 구입할 것을 부탁했고 3월30일 낮부터 바로 단식에 돌입했다.
“30일 점심 때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쭈꾸미 식당을 갔는데, 아무리 권해도 전혀 드시지 않으셨어요. 아버지가 ‘나는 지금부터 단식이다’라고 하셨는데, 나는 한번 약속하면 반드시 지키는 아버지 성격을 아니까 ‘큰일났다’는 생각이 들었죠.”
강베드로가 ‘단식으로 순교하겠다’고 한 지 일주일, 열흘이 지나도 그의 아버지 정신은 맑았다고 한다. 강아네스가 “아버지, 단식 할 만해?”라고 묻자 “다시 태어나면 두 번 다시 단식 안 할 거다. 너무 힘들어서…. 먹는 유혹이 뱃속에서 그렇게 요구를 한다. 그렇게 뱃속에서 난리를 한단다. 그러나 참아야 한다”라며 괴로워하면서도 단식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 때 되어서 자연사는 어쩔 도리가 없지만 이렇게 돌아가시는 것은 안 돼요. 남편도 죽고 제가 의지할 데라고는 아버지밖에 없는데 안 돼요.”“아네스, 너는 너의 삶이 있고 아버지는 아버지의 삶이 있으니 놓아 달라. 그리고 아버지가 가더라도 슬퍼하지 말고 행복하게 살아라.”>
강아네스는 “아버지 뜻에 반하여 강제로 가족들이 마취주사라도 놓아서 병원으로 모시고 가라는 의견들이 있었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깨어나시면 난리가 나고, 과연 아버지 뜻에 반하여 치료가 가능할지도 의문이었다. 결국 아버지의 뜻을 받드는 것이 최선이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밤에, ‘아버지 병원으로 모실게요. 난 아버지랑 하루라도 더 살고 싶어요’ 하니 ‘아니다. 이제 끝났다. 그러지 말거라’ 하셨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강베드로는 돌아가시기 전날 딸 강아네스에게 “나는 하느님에게 가는 것이니 너무 너무 행복하다. 슬퍼하지 말고 춤을 춰달라, 나를 살리려고 병원에 데려가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멋진 가장, 정말 멋진 아버지”
강아네스는 이렇게 아버지를 기억하며 그리워했다.
“아무리 나이가 드셨어도 삶에 대한 애착은 누구나 있는 것인데…. 아버지는 연세 드셔서 무릎이 조금 아프신 거 말고는 건강하셨다. 이도 튼튼하고 좋으셨다. 아버지가 워낙 강건하신 분이라 100살까지는 거뜬히 사실 분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나의 기둥이셨다. 광화문 집회에 갈 때나 애국 활동하러 아버지가 가실 때도 모시고 같이 다녔는데…. 아버지랑 같이 다니는 것이 너무 좋았다. 아버지는 항상 주위에 베푸는 분이셨다. 그러시면서도 절대로 생색내거나 하는 법이 없었다. ‘생색내려면 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
나는 멋있는 우리 아버지를 의지하고 존경했다. 어려서부터 궂은일이 있거나 고민이 있을 때 아버지에게 얘기하면 다 해결해 주시는 멋진 가장, 정말 멋진 아버지였다.”
단식 반대하고 홀대한 주임신부와 신자들
그녀는 “아버지가 40년 동안 다니신 화곡2동 성당이 곤란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서 단식 중 있었던 성당과의 마찰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아버지가 이 성당을 40년 다니셨다. 그동안 이 성당 신자 가운데 약 900분 정도는 알고 지냈다. 친하게 지낸 분도 많다. 하지만 애국심과 신앙심이 강한 아버지가 나라를 망치고 있는 문재인 정권을 규탄하고 좌경화되어 가는 천주교에 경종을 울리는 단식을 시작하자, 주임신부가 반대했다.
신자들이 주임신부 눈치를 보고, 아버지께 매몰차게 대했다. 아버지는 ‘세상에 이럴 수가…’하며 너무나 상심하셨다. ‘세상이 이렇구나’하고 너무나 낙담했다. 나중에서야 신자 2명 정도만 단식 중인 아버지를 문안하러 왔다.”
강아네스는 “아버지는 ‘나 죽고 난 뒤에 너는 어디 몇 달간 친구네 집이나 다른 데 몇달 있다가 오너라. 아버지가 단식하는 동안 너가 드러나 위험해질까봐 그런다’며 저를 걱정하셨다. ‘아버지가 진정 날 사랑하시는구나’ 하고 새삼 느끼게 되었다”고 말했다.
강아네스는 “단식 중인 아버지를 내쫓으려 한 성당이 서운했지만, 아버지의 장례기도를 본당 신부가 아닌 다른 성당 신부님이 하는 것은 절차가 까다롭기도 하고, 또 무엇보다 이 성당을 40년 동안 다니시면서 성당과 교우들에 애정을 쏟으신 아버지를 생각해서 서운했던 마음을 잊으려고 한다. 성당에 장례 기도를 해달라고 했더니, 내일 신부님이 오시겠다고 했다”고 밝혔다.
순교자 강베드로 의과대학에 시신 기증
순교자 강남수 베드로의 발인은 26일 오전 9시30분이다. 발인 후 서울카톨릭대학교 해부학교실에 시신을 기증한다고 한다. 시신(屍身) 기증은 이미 10년 전에 약속한 것이다. “나로 인해서 몇 사람을 살릴 기회가 있는데,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 평소 고인의 생각이었다. 강베드로의 부인도 사후 시신 기증 약속을 했다고 한다.
고인의 딸인 강아네스는 이렇게 말을 맺었다.“아버지 딸이라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유족은 강베르로 순교 소식을 접한 시민들의 요청에 따라 당초 예정되었던 3일장을 5일장(유튜브 애국시민장)으로 변경했다.
- 발인: 4월 26일 (일요일) 09:30, 홍익병원 목동관 장례식장
- 운구: 4월 26일 (일요일) 10:00 운구, 화곡2동 성당들이
- 애국시민장: 4월 26일 (일요일) 11:00 애국시민장, 대한문 앞 유튜브 애국시민장
- 장지: 강남성모병원 (해부학 교실에 시신 기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