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메르의 설형문자 점토판과 성서
고대 수메르 문명이 발견된 후 지난 한 세기 동안 전세계적으로 수메르인에 대한 연구는 비상한 관심을 모아 왔다. 그 주된 이유는 수메르인들이 이처럼 인류사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 나날이 새롭게 발견되고 있는 점에 있다. 특히 수메르인들의 종교문학과 의식이 오늘날 서양 문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에 상당한 영향을 남겼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학계는 물론 일반인들의 관심도 더욱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수메르의 유적 발굴은 성서의 무대였던 중동 지역에서 성서에 기록된 사실들을 역사적으로 입증하고자 했던 기독교 단체들의 후원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발굴이 진전되면서 성서의 기록보다 훨씬 앞서나가며 신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수메르인들의 기록들이 나타나 성서의 독창성과 신비성을 위협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것이 오히려 일반인들의 관심을 자극하게 되었다.
| 1830년대 발굴된 수메르 설형문자 점토판에 의하면 수메르 문명의 유적이 발견된 이라크 남부지역이 성서에서 인류의 탄생지로 그려진 에덴동산의 현장일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태어나 자란 곳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수메르 유적 발견과 함께 이라크는 졸지에 인류의 고향이 되어버렸다.
수메르인들의 기록과 연대는 아브라함 시대 보다 앞서는 것이며 따라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되기 훨씬 이전에 인간 세상에는 이미 고도로 발전된 문명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문명은 기원전 6000년 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1830년대 최초로 발굴된 수메르 유적은 많은 학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눈으로 성서를 접근하게 만들었다. |
[수메르 문명의 도시 '우루크'와 '우르'는 이라크 남부지역에 있다]
성서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나아갔다고 전하는데 성서의 우르는 곧 이라크 남부지역 유프라테스 강변에 위치한 수메르의 중심도시로 밝혀진 우르와 일치한다. 이는 곧 아브라함은 수메르의 중심도시 우르에서 태어났고 60여년을 우르에서 살다가 가나안땅으로 이주했으며 가나안땅에 들어간 그가 어느 언어를 사용했고 어떤 문자를 사용했는지는 쉽게 짐작이 간다. 이로 인해 수메르 문명은 학자들과 일반사람들 모두에게 지대한 관심과 흥미를 유발하여 많은 학자들이 수메르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아브라함]
수메르 우르 지역에 남아있는 대홍수의 흔적 또한 모든 이들의 관심 대상이 되고있다. 정확한 시대는 알 수 없으나 기원전 5000년경에 이 지역이 수몰되어 장시간 잠겨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일각에서는 수메르인들이 점토판에 기록한 홍수 이야기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 영향을 준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더 나아가 수메르에서 발견된 유적과 유물들을 판독해나가는 과정에서 성서에 등장하는 야훼의 창조이야기, 에덴동산설화, 노아의홍수 이야기, 욥기, 아가서, 바벨탑사건 등 수많은 성서 내용들이 수메르에 그 기원을 두고 있음이 밝혀지자 성서학자들은 성서의 역사적 입증의 반가움과 함께 한편으론 이를 어찌 해석해야 할지 매우 난감해 하고 있다.
수메르 문명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급문명이며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 문명보다도 최소 천년이나 앞선 문명이라는 사실에 학자들 역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수메르 유적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수메르인들이 설형문자를 사용하고 직조기술의 사용으로 옷감을 만들어 입고 다닐 당시 히브리인들은 문자도 없었으며 동물가죽을 벗겨 허리에 감고 어깨위에 걸치고 다녔다고 한다.
성서학자들은 인류최초의 문명 발상지가 팔레스타인(지금의 이스라엘) 지역이라고 여겼고, 에덴동산도 그지역 어딜 것이라 믿어오던 터에 이라크에서의 수메르 유적 발견은 그야말로 세계를 놀라게한 발견이 아닐수 없다.
| 일생을 수메르 점토판 해석에 바친 사무엘 노아 크레이머 (Samuel Noah Kramer)박사의 책에서 소개되고 있듯이 성서의 천지창조, 에덴 동산, 노아의 홍수, 바벨탑 이야기 등은 수메르인들에게서 영감을 얻었거나 그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왔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
[수메르 설형문자 점토판]
이뿐만 아니라 성서의 가장 독창적인 요소들로 꼽히는 시편이나 잠언, 전도서, 아가, 욥기 등의 지혜 문학도 이미 수메르인들에게서 그 원형이 발견되고 있으며 크레이머 박사가 소개한 최초의 욥 이야기는 성서의 욥기와 거의 완벽하게 동일한 주제, 동일한 구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 역시 부인하기 어렵다.
성서와 흡사한 기록중에서 가장 큰 관심을 모으고 있는 기록은 길가메쉬 서사시에 나오는 홍수 이야기다. 수메르의 왕이자 영웅이었던 길가메쉬는 삶의 무상함을 느끼고 영생을 얻는 방법을 찾아 헤매다가 대홍수에서 살아 남은 지우수드라(Ziusudra)라는 노인을 만나 영생의 비결을 듣게 되는데, 이 때 이 노인이 들려주는 홍수 이야기가 바로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의 원전일 것이라는게 학자들의 생각이다.
홍수 이야기는 당시에 이미 여러 민족의 언어로 번역되어 그 사본들이 최근 발견되었고, 바빌론인들이 지우수드라(Ziusudra)를 우트나피슈팀(Utnapishutim)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기록했는데, 성서에 기록된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바로 이 우트나피슈팀의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반영했다고 볼 정도로 유사하다.
[터키의 아라라트(Ararat)산맥에서 발견되었다는 노아의 방주 상상도]
수메르인들과 유태인들은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 구약성서의 기록에 따르면 유태인들이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는 아브라함은 그 아버지 데라를 따라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다고 되어 있다 (창세기 11:31). 갈대아땅은 수메르인들이 활약하던 메소포타미아지역을 의미하며, 우르는 유명한 수메르 왕조가 건설되었던 도시의 이름이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추정한다면 유태인들의 조상은 수메르 지역에서 유목 생활을 하며 떠돌던 유목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수메르의 문명과 역사를 소개할 때 언급되었지만 수메르인들이 도시를 만들고 문명생활을 누리고 있을 때 그 주위에는 유목 생활을 하는 다수의 농경민족이 있었다. 그 중에는 셈족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고 이들은 수메르인들과 공존하면서 훗날 아카드와 바빌론 등의 대제국을 건설하기도 했는데, 이 셈족이 바로 오늘날의 유태인과 아랍인들의 원형인 것이다. 성서의 독창성을 견지하려는 기독교계의 논자들은 수메르 유적에 대한 접근을 다양한 관점으로 시도하고 있는데 이는 곧 그들의 논지가 수메르 유젹 발굴로 인해 얻는점도 있지만 한편으론 성서의 독창성이 매우 취약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재와 구성이 동일하지 않고 신관이 다르다는 점에서 수메르의 유적을 아예 관련시키지 않겠다는 거센 거부반응이 기독교 논자들로부터 일고 있다.
한편 수메르 연구학자들은 수메르 문화가 고대 중동세계에서 보편 문화의 역할을 하고 있을 때 이들 주위에서 떠돌던 유목민족의 일파였던 유태인 조상들이 수메르 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히 높고, 이에 따라 유태인들이 만든 성서에서 수메르적 요소가 발견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유적으로 보는 수메르
[우르의 지구라트 (Ziggurat)]
우르는 이라크의 남부 지역이며 대홍수로 파괴되었다가 기원전 5천년경 수메르인들의 등장으로 최고의 문명 도시로 번창했다. 우르는 고대 수메르와 바빌로니아(바벨론)의 도시로 한때 문화가 번성했으며 주전 2600∼2400년경에는 바빌로니아의 강력한 지도국가로 등장했다. 우르는 아브라함이 출생한 고향으로(창11:27,31:15) 성경에는 ‘갈대아 우르’라고 기록되어있다.
우르는 우르 제3왕조(주전2500∼1950년) 곧 아브라함 시대 이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성읍으로 토지는 매우 비옥하고 주민의 생활은 부유하였으며 농업, 공업, 어업의 중심지였다. 여기에서 대상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배는 구리와 돌을 싣고 바사만을 항해하였다. 그후 바빌로니아 전역은 함무라비의 바빌로니아 제1왕조에 의해 통일되었는데, 이때 우르는 수메르인의 반란 중심지로 파괴되었다가 신바빌로니아 때 재건되었으나, 페르시아(Persia) 때에는 다시 쇠퇴하였다가 주전 4세기경에는 폐허가 되었다.
[우르의 지구라트 (Ziggurat)] 기원전 2100년경 (학계 추측)건설되었다는 우르의 지구라트는 지금까지 발견된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 중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전된 신전이다.당시 우르 제III 왕조의 왕 우르-남무는 이 도시의 수호신이자 달의 신 난나(Nanna)를 모신 신전을 좀더 높은 곳에 세워 도시의 중심적인 상징으로 만들고자 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바벨탑의 원형이기도 한 지구라트는 원래 꼭대기의 신전을 받치기 위한 받침대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무덤이 아닌 신전 받침대로 활용됐다.재질이 약한 흙벽돌을 주로 건축자재로 사용했기 때문에 강도를 높이기 위해 역청을 사이사이에 깔았고 어떤 경우에는 갈대로 엮은 매트리스를 일정한 간격으로 흙벽돌 사이에 끼워넣기도 했다.
이러한 형태의 지구라트는 카시트시대(BC 2000년대 후반) 두르쿠리갈주에서도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기단 위의 신전과 같은 신을 모시는 신전이 산기슭에 세워져 있다. 이것은 신이 있는 곳(높은 곳의 신전)과 인간이 예배를 드리기 위한 장소(낮은 곳의 신전)라는 종교개념의 확립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 뒤의 지구라트 양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우르 지역에 살던 수메르인들이 섬기던 신들중에 가장 대표적인 신이 '이난나' 여신이다. 머리에 솟아있는것은 뿔이 아니라 '달'을 뜻한다. 당시 수메르인들은 이 여신이 흥분하고 땀 흘리면 비가 내리고 농사도 잘 된다고 믿어 봄철에 이난나를 숭배하는 기간동안 모든 남녀쌍들이 자유로운 성교를 즐길 수 있게 하였다.
이난나 여신은 가나안 지역에서는 아스다롯 여신으로 불렸고,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로 들어가면서 이쉬타르 여신이 되었으며 그리이스로 가서는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되었으며 나중엔 로마로 가서 비너스가 되었다. 이난나는 달의 신 난나(Nanna)의 딸로 전쟁과 성애의 여신이다. 금성에 해당하며 질투의 여신, 다산의 여신, 육체적 사랑을 즐기는 여신이다. 죽음과 재난의 여신이기도 해 이중성을 가지고 있으며 원 안에 6, 8, 16개의 광선을 발하는 별이 상징이다. |
[이난나 여신]
[달의 여신전]
근래에 펜실베니아 대학 박물관과 대영 박물관의 공동 발굴대(C.L 울레이 박사 지도하에 12년간:1922∼1934년)는 폐허의 고적을 발굴하는 데 성공했다. 두 개의 주요한 신전은 달신 난나(Nannar)와 여자 달신 닌갈(Ningal)을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거리와 골목마다 잡신을 섬기는 조그마한 제단들이 즐비하였고,전설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부친 데라가 이런 신의 우상을 제조 판매했다고 전한다. | 20세기 발굴 유물 중 최고품의 하나로 꼽히는 4500여년전 수메르문명의 수금 (수메르 여왕 푸아비의 하프).
이라크 남부의 고대유적도시 우르. 1920년대때 발굴된 기원전2600~2400년으로 추정되는 여왕 푸아비의 무덤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안에는 10명의 여인이 순장됐는데 한 여인의 주변에서 금빛이 번쩍이는 황소의 황금 가면이 목제 11현 수금(하프의 일종)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
[수메르 여왕 '푸아비'의 하프]
[수메르 설형문자 점토판 발굴모습]
| 최초의 인류 문명이라 여기기엔 너무나 고도로 발달된 건축물을 지어낸 수메르 문명. 건물 하나가 많게는 수백개의 방을 보유했고 현대판 회의실 그리고 연회석을 상상하게끔 하는 대거주 공간을 보유한 점으로 보아 수메르인들은 확고한 계율안에서 매우 조직적으로 주거지역을 이루며 살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
[수메르인들이 거주했다는 건물] | 바그다드의 동쪽 하파자 (Khafajah)의 닌투 신전에서 출토된 기원전 2500년경의 수메르 유뮬 '씨름하는 청동상'. 우승자는 신과 씨름 대결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성서에도 인간이 천사와 씨름대결을 벌이는 이야기가 있다. |
[수메르 씨름 청동상] |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 엔릴(Enlil)을 맞이하는 신 엔키(Enki). 아래는 신전을 떠받드는 수메르인. |
[하늘에서 내려오는 엔릴]
[엔키 신전]
[엔키 신전에서 발굴된 보좌에 앉은 엔키의 모습]
[엔키의 노여움을 묘사한 수메르 벽조물] | 수메르의 영웅 '길가메쉬' 부조상.
길가메쉬는 기원전 2812년부터 126년 동안 수메르의 우르크를 통치했던 인물이면서 동시에 반은 신이고 반은 인간이었던 4미터 장신의 영웅이다. 그의 이야기를 담은 <길가메쉬 서사시 Epic of Gilamesh>는 신처럼 죽음을 넘어 영생을 누리고자 했던 그가 끝내 인간의 죽음 앞에 굴복했던 내용을 담고있다.
길가메쉬서사시는 영국의 고고학자 오스틴 헨리 레이어드 경이 1851년 이라크의 니네베에 있는 아슈르바니팔 궁전 지하서고에서 발견하였는데 모두 12개의 점토판에 134행의 시(poem)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노아의 홍수와 매우 유사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어 발견되었을 당시 성서학자들의 최고 관심사였다. |
[고대수메르신화에서 반인반신의 영웅으로 등장하는 길가메쉬의 부조상. 품에 사자를 안고 서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프랑스 파리 루브르미술관 소장]
[길가메쉬 서사시 점토판. 대홍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수메르 유적지에서 발견된 수메르인 두상]
[수메르 여신전에서 발굴된 여신을 모시는 수메르 여인의 두상]
길가메쉬 서사시 (The Epic of Gilgamesh)
수메르(지금의 이라크 남부지역)에서 발견된 설형문자 점토판에 따르면 '길가메쉬'는 기원전 2812년경 126년 동안 수메르의 우르크를 통치했던 수메르의 왕이다. | 3분의2는 신이고 3분의1은 인간이었다는 길가메쉬는 키가 4미터가 넘는 거인이었고 사자 다루기를 마치 고양이 다루듯 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기 보다는 신화적인 인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게 현실이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 중에는 길가메쉬가 구약성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거인 네필림 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영국의 고고학자 오스틴 헨리 레이어드 경이 1851년 이라크의 니네베에 있는 아슈르바니팔 궁전 지하서고에서 발견했는데 모두 12개의 점토판에 134행의 시(poem)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발견되었을 때부터 성서학자들에게 커다란 관심사가 되어왔는데 서사시에 기록된 대홍수 이야기 때문이다. 최초의 발견 이후에 길가메쉬 서사시는 다른 점토판들에서도 초기의 다른 고대 언어들로 번역되어져서 발견되고 있다. 하지만 사실상 기원전 650년 경으로 연대가 평가되어지는 점토판들은 원래의 것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고있다. 이유는 이보다 매우 앞선 기원전 2000년 경으로 연대가 평가된 점토판들에서도 홍수 이야기의 단편들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기원전 2000년 이전에부터 잘 구성되어 기록된 홍수 이야기조차 그 연대보다 훨씬 오래 전에 있었던 수메르 기록으로부터 편찬된 것으로 밝혀졌다. |
[키가 4미터에 이른다는 길가메쉬는 기원전 2800년경 수메르를 통치했던 왕이었으며 수메르의 영웅이었지만 한편으론 매우 난폭한 성격의 폭군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프랑스 파리 루부르 박물관 소장]
길가메쉬 서사시는 시(poem)의 형태로 구성 되어있다. 점토판 기록에 의하면 그는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적인 인물이었다. 수메르 왕들의 목록에 의하면 길가메쉬는 우르크(Uruk)의 최초 왕조에서 126년 동안 통치한 것으로 되어있다.
길가메쉬의 이야기는 영웅으로 칭송되었던 그의 업적들을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그는 위대한 지식과 지혜를 가진 사람으로서 홍수 이전 시대의 자료들을 보존했던 사람이었다. 길가메쉬는 우르크의 도시 성벽을 건축했던 일과 우르크의 엔나(Eanna) 사원을 세운 일을 포함하여 그가 이루었던 모든 일들을 점토판에 기록해 두었다. 서사시에 의하면 그는 억압적인 군주였고 그의 난폭함은 곧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신(gods)들’에게 길가메쉬를 대적할 상대를 만들어 달라고 울부짖게 만든 원인이 되었고 신들은 백성들이 요구한데로 엔키두 (Enkidu) 라는 거인을 창조한다.
그렇게 등장하는 인물이 털북숭이 거인 '엔키두(Enkidu)'이다. 길가메쉬는 엔키두를 맞이하여 동이 틀 때까지 목숨을 건 힘겨루기를 하는데 승부가 나질 않는다. 그러나 이 한 번의 싸움으로 엔키두는 길가메쉬와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버린다. 이 둘은 훗날 수많은 모험을 함께 하면서 명성을 얻게 되고 엔키두는 결국 그 모험으로 인해 죽게 된다.
[길가메쉬와 엔키두. 길가메쉬는 사자로 표현되었고 엔키두는 황소로 표현되었다]
[ 엔키두와 길가메쉬의 결투를 그린 벽화]
그들의 모험 이야기 중 대표적인 일화는 괴물 '홈바바'와의 결투이다. 길가메쉬와 엔키두는 괴물 홈바바를 맞아 힘을 합쳐 혈투를 벌이는데 결국 홈바바는 엔키두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길가메쉬와 엔키두가 모험 중 만나는 홈바바 괴물(가운데)을 처치하는 모습을 묘사한 수메르 벽조물]
괴물 홈바바를 죽인 엔키두에 신의 저주가 내리고 엔키두는 12일동안 병을 앓다가 죽게되는데 친구의 죽음을 슬퍼한 길가메쉬는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신들처럼 영원히 살 수 있는 불사(immortality)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한다.
[엔키두의 죽음을 슬퍼하는 길가메쉬]
불사를 찾아 떠난 그는 대홍수에서 살아난 우트나피쉬팀(Utnapshtim)을 만나 그가 신의 계시로 인류를 전멸시켜버릴 거대한 홍수를 이겨낼 배를 만든 후에 불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길가메쉬는 우트나피쉬팀이 그의 가족과 친척들, 그리고 모든 종류의 생물들을 배에 태워 물로 가득 찬 세상을 떠돌았으며 땅을 발견하기 위해 새들을 내어 보냈고, 배는 마침내 니쉬르(Nisir)산 위에 정박하여 인류의 문명이 다시금 시작되었음을 알게되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지하세계로 엔키두를 방문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과연 수메르인들의 상상력으로 창출된 일개 신화에 불과할까? 100년이 넘도록 수메르의 유적 발굴과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학자들은 2003년 이라크에서 길가메쉬의 무덤으로 추측되는 유적을 발견하여 또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2003년 4월29일 영국의 BBC는 길가메쉬의 무덤으로 추측되는 유적을 발견했다는 학자들의 발표를 대서특필로 다루었다. 무덤을 발견한 학자들은 발견된 무덤이 길가메쉬 서사시 점토판에 기록된 내용과 매우 흡사하여 길가메쉬의 무덤이라고 전하고있다] BBC뉴스 링크 http://news.bbc.co.uk/2/hi/science/nature/2982891.stm]
대홍수 기록도 흥미롭지만 길가메쉬가 4미터 장신의 거인이라는 기록도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수메르 점토판, 성서, 그리고 인도의 고대 신화와 이슬람 경전인 코란에도 네필림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실상 인간형태를 지닌 이런 거인들이 그 옛날 지구상에 존재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본다.
[우르 지역에서 발굴되었다는 인간의 얼굴 형태를 지닌 대규모 두개골. 사진 출처가 제시되지 않아 조작으로 무시되고 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고대문명의 비밀을 캐내는 학자들에 의하여 네필림으로 추측되는 유골들이 이라크, 사우디, 인도 등 지역에서 서서히 발굴되고 있다. 문제는 이 유골들이 다른 유물이나 유적지처럼 공개되지 않고 현지 정부로부터 극비에 처해진다는 것이다.
길가메쉬 서사시가 많은 학자들의 관심 대상이 되는 이유는 첫째, 인류 최초의 초자연적 내용의 문자 기록이라는 점과 둘째, 이 서사시에 대홍수 이야기가 기록되어있기 때문이다.
아래는 창세기와 길가메쉬 서사시에 기록된 홍수 이야기를 Frank Lorey (Biblical Research Writer and Historian)가 여러 측면에서 비교한 내용이다.
일부 유사점들은 매우 놀랍다. 반면에 다른 것들은 매우 일반적이다. 배를 만들기 위해 우트나피쉬팀이 받은 명령은 주목할 만하다.
('오, 슈루파크(shuruppak)의 사람이여, 우바투투(Ubar-Tutu)의 아들이여, 그대의 집을 뜯어내라. 배를 지으라. 부를 포기하고, 내세의 삶을 구하라. 소유들을 경멸하라. 너의 생명을 구원하라. 살아 있는 모든 종류의 씨들을 지은 배로 데려 오라. 배의 규모를 잘 측량하여 지으라.')
사람의 죄를 심판하기 위한 홍수의 원인 역시 인상적이다. 7번째 점토판 180줄에 이렇게 쓰여 있다.
('죄인에게 그의 죄를 물으라. 거역한 자들에게 그의 거역을 물으라')
다른 많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창세기 6-9장과 길가메쉬 서사시의 유사점에 대한 연구는 이들의 유사성이 우연히 일치하지 않았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영웅들 이름의 의미는 공통적인 뿌리나 연결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노아(Noah)는 ‘안위(rest)’를 의미한다. 반면에 우트나피쉬팀은 ‘삶을 발견한 자(finder of life)’를 의미한다. 둘 다 완벽한 사람들은 아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과 비교하였을 때, 의롭고 비교적 흠이 없던 사람들로 여겨진다.
우트나피쉬팀은 방주에 그의 가족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항해자와 소수의 기능인들을 태우고 있었다. 또한 두 이야기 모두 배가 중동의 어떤 지역에 도착했다고 기록한 것은 흥미롭다. 그러나 아라랏산(Mt. Ararat)과 니시르산(Mt. Nisir)은 300마일(480km) 정도 떨어져 있다. 홍수 후에 영웅들이 받은 축복도 꽤 다르다. 우트나피쉬팀은 영원한 삶을 얻게 되었고, 노아는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되었고 동물들을 지배했다..... Frank Lorey
134행 시 구절로 12개의 점토판에 기록된 길가메쉬 서사시는 수메르 점토판 설형문자 원전 해독에 일생을 바친 사무엘 노아 크레이머 (Samuel Noah Kramer) 박사의 노력으로 원내용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롭 시몬 (Rob Simone)의 '길가메쉬 서사시' 영문판]
[점토판 원전을 그대로 옮긴 김산해 저자의 한글판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수메르(Sumer)의 문명과 역사
현재 우리에게 알려진 인류 문명의 발상지중 가장 그 기원이 오래된 곳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곧 고대 바벨론과 아시리아 문명을 떠올리게 하는데 그들보다 앞서 존재했다는, 인류 최초의 문명으로 밝혀진, 수메르의 유적 발견은 인류 역사 기록의 새로운 정립과 더불어 수많은 의문점을 동반하고 있다. 1830년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고대인들의 유적이 처음 발견된 이래 많은 학자들이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데 1849년 이들이 남긴 고대문서 (설형문자 점토판)들이 무더기로 발굴되면서 수메르 문명의 실체가 오늘날 우리에게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기원전 오천년 경에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거주하던 농경민족이 있었지만 그들은 문자가 없어 자세한 기록을 남기지 못했으며 그들은 대략 농지를 경작하고 가축을 방목하는 등 자연환경에 맞추어 번성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로 이 지역에 농경민들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나게 발달된 문명을 가진 수메르인들이 나타나 고대 수메르 문명을 건립한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 유역 (지금의 이라크 남부지역)]
기원전 4천5백년 경 (학계 추측) 고도화된 지능과 함께 메소포타미아 (지금의 이라크)에 나타난 수메르인들은 그 지역을 생활터전으로 삼고 그들만의 문명 제국을 쌓아올린다. 천문학, 달력, 문자, 기호, 도시건설 등 그들의 지능은 당시 원시적 생활을 했던 농경민들에겐 상상도 할 수 없는 과학지능이었으며 인간이 수십 세기에 걸쳐 이룩했다고 믿어온 그런 인류의 고도문명을 이들은 일순간 시행해낸 것이다. 수메르인들은 에리두, 바드티비라, 라르사 등을 위시한 최초 5개의 도시를 필두로 우르, 우르크등과 같은 고도의 문명도시국가를 형성해갔다. 수천 년 전 이들이 남긴 고대문서 점토판에는 이들이 법률을 만들어 체계적인 조직을 구성하여 사회를 형성했고 주석과 동을 섞어 청동을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며, 인체의 내부구조의 이해와 백내장을 제거하는 고도의 의학 시술, 그리고 천문에 밝아 태양계를 꿰뚫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사용했던 달력과 천문에 대한 기록이다. 수메르인들은 일식, 월식의 기록은 물론이거니와 행성들의 공전주기, 자전주기 등 움직임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또한 2만 5920년을 주기로 하는 지구 축의 세차운동 마져 정확하게 표시했다는 점은 단순히 놀랍다라는 말 외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메소포타미아에 정착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기간에 그것도 미개 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주어진 환경 속에서 이런 고난도 지식을 발휘했다는 사실은 실로 믿기 어려울 뿐이다.
[수메르 우르지역의 신전 지구라트 (ziggurat)]
그럼 수메르인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타났으며 그들이 이런 문명을 어떻게 습득하게 된 것일까? 문명의 발달사를 보자면 문명이란 순차적으로 발달해 나간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수메르인들은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갑작스럽게 등장했다. 한편으론 시대를 앞선 어떤 존재가 이들의 문명을 급격히 발달 시켰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알면 알 수록 의아스럽고 신비스럽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이들의 문명은 어디에서 기원한 것일까? 수메르인의 고문서 (돌에 기록된 설형문자 또는 쐐기문자 일명 점토판) 기록에 따르면 자신들의 합금기술, 도시건설, 법률, 천문학, 의학 등 지식은 '신들로부터의 선물' 이라고 표현 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신들은(복수형) 민족의 단합을 위해 만들어낸 가상의 신인지 아니면 정말 신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어떤 존재로부터 전해 받은 지식을 뜻하는 것인지 의문투성이다. 또한 수메르어로 '인간'을 나타내는 말이 '혼합하여 합쳐진'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 이는 지구 원시 생물과 어디선가 나타난 고도 문명의 지성체와의 유전적 혼합을 뜻하는 것은 아닐지... 아무튼 수천 년 전 수메르인들의 설형문자 기록은 여지것 학자들로부터 수많은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시대와 동떨어진듯한 그들의 존재는 아직도 많은 부분이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수메르 설형문자 점토판 (Sumerian Tablet)]
| 대홍수가 지나간 자리에 새로운 문명의 싹을 심었다고 여겨지는 이 신비에 쌓인 수메르인들은 혹 홍수보다 훨신 앞서 존재했다는 전설의 아트란티스 민족의 자손으로서 선조들의 문명을 지금의 이라크 남부지역에 재건립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 학자들도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수메르의 기원은 B.C.5000년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현재 기록된 인류 역사에 의하면 수메르인들은 대략 기원전 4500-4000년경에 지금의 이라크 땅에 나타나 약 2천년 동안 이 지역을 지배하다가 바빌론인 들에 의해 멸망된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현존하는 세계의 민족 가운데 이들의 공식적인 후예는 없지만 그들이 쌓아올린 문명은 주위의 민족들이 흡수하고 각색하여 현재 수많은 문화 속에서 그 위상을 찾아 볼 수 있다. 수메르인들은 인류의 뿌리에 대한 비밀을 간직한 체 사라져버린 수수께끼 민족인 것이다. |
[인류 최초의 법률로 알려지는 수메르의 법률석]
러시아 태생의 저명한 미국인 수메르학자 사무엘 노아 크레이머 (Samuel Noah Kramer)는 인류 최초의 문자, 교육, 정치, 법률, 의학, 천문학 등 현재 인류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주요 요소 36가지가 수메르인들의 발명품 이라고 쓰고 있다. 그밖에도 2인 마차를 비롯하여, 활, 창 등 전쟁과 관련된 탈것과 청동 장비를 포함 수많은 인류 최초의 발명품들이 이 수메르 민족의 창작품이었다고 전한다.
수메르인들은 또한 인류 최초의 문자 발명가이자 도시 발명가들이다. 그들이 인류의 문명사에 남긴 족적은 그들의 유적 발견과 함께 모든 분야에서 뚜렷하게 밝혀지고 있으며 그들의 문자 발명과 도시 건설은 인류 성장에 가장 큰 기여라고 할 수 있다.
|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인류가 사용한 최초의 문자는 기원전 4000년경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방의 우루크(Uruk)에서 수메르인들이 사용했던 상형문자였다. 처음에는 사물의 모양을 본뜬 기호로 뜻을 나타낸 형식이었으나, 이것이 점차 간결화 되고 개량되어서 나중에는 쐐기 모양의 부호로 뜻을 나타내는 이른 바 설형(楔形)문자가 되었다. 수메르인들은 진흙을 빚어서 말린 점토판을 막대기 끝을 가늘게 깎아 점토판위에 긁는 방법으로 문자를 기록했다. |
[이라크에서 발굴된 수메르 점토판 조각] 문자의 발명은 인류사를 선사(prehistory)시대와 역사(written history)시대로 구분 짓게 하는 획기적인 사건이다. 문자 발명과 더불어 인류는 역사시대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며, 이점에서 본다면 수메르인들은 인간에게 처음으로 역사라는 것을 가져다 준 민족이라 할 수 있다.
수메르인들의 도시 발명이 인류에 가져다 준 혜택은 매우 크다. 도시 건설은 인간들이 모여서 집결된 주거지를 형성하고 체계를 만들어 서로간의 삶을 규율하게 함으로서 인간에게는 절대적인 삶의 요소라 할 수 있으며 이들의 발명은 오늘날까지 인류의 기본 패턴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당시 수메르에는 이미 완벽한 상수도 시설이 완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상수도시설이라 함은 기존 자연 상태의 물을 물지게 등으로 운반하여 사용하거나 직접 취수하는 방식이 아닌 일련의 과정 즉 정수, 송-배수 등을 거쳐서 물을 공급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의 상수도 시설은 불과 백 년 전인 1908년 9월에 완공되었으나 수메르인들은 수천 년 전 이미 상수도 시설을 완벽하게 구현해 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이라 알려진 그들이 이렇게 지식과 과학이 겸비된 고도의 문명을 가지고 나타났던 것이다. |
[수메르의 상수도. 파이프의 원재료는 열을 가한 흙과 역청이다 (콘크리트와 유사)]
The god of scribes bestowed on me the gift of the knowledge of his art. 문학의 신은 나에게 그의 예술을 알아볼 수 있는 지식을 선물하였다.
I have been initiated into the secrets of writing. 나는 문자의 비밀을 알게 되었고
I can even read the intricate tablets in Sumerian. 난해한 수메르인들의 점토판 기록을 읽을 수 있었으며
I understand the enigmatic words in the stone carving from the days before the flood. 홍수 이전의 돌위에 새겨진 불가사의한 문자도 이해할 수 있었다.
Language of Sumer not changed. 수메르의 언어는 변하지 않는다.
[수메르를 최초 문명으로 하는 B.C.연대기]
수메르인들은 자신들을 "검은 머리의 사람들"(black-headed people)이라고 불렀으며 자신들이 사는 땅을 수메르(Sumer)라고 불렀다. 많은 학자들이 이 수메르라는 이름의 어원에 대해 찬반론을 벌이고 있는데 가장 설득력이 있는 학설은 노아의 후손 '셈'이 자신의 이름을 따 '셈 의 나라' 즉 수메르라고 칭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학설은 훗날 수메르땅을 침략한 아카드 (Akkad)사람들이 자신들이 정복한 지역을 수메르라 부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고 그 이전에 수메르인들은 스스로를 상기가 (sang-giga)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다.
| 하지만 수메르의 원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는 설이 없다. 분명한 것은 수메르인들의 생김새가 그들 주위에 있던 민족이나 인도유럽어족과 비교했을때 매우 달랐기 때문에 차별을 강조하기 위해 자기 민족을 주위 민족들과 구분해 칭했다는 것이다.
이들의 언어 역시 주위의 민족들이 사용하던 언어와 비교했을때 매우 독특하게 달랐다. 그들의 언어는 명사에다 토씨를 바꿔서 주어나 목적어로 표현하는 교착어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것은 우랄 알타이 언어의 특징과 매우 흡사하다 할 수 있다. |
[수메르인의 대표 석상]
수메르 유적 발굴에 지대한 공을 세운 고고학자 레오나드 울리(Leonard Woolley)와 역시 고고학자인 독일인 세람(C.W. Deram)등은 수메르인들이 계단 모양의 신전을 만들어 그곳에 신을 모신 것을 본다면 산악지대가 그들의 고향으로서 신들은 높은 언덕 위에 산다고 생각한 것같으며, 수메르 축조물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 목조건물 양식에 따라 지어져 있는 점으로 보아 나무가 무성한 고지대가 그들의 발원지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인류학자인 영국인 아더 케이트(Arthur Kate)는 인더스강 (파키스탄 중앙을 가로지르는 강)계곡이 수메르인들의 발원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수메르 우르 도시의 3D그래픽 재현 모습]
수메르인들이 남긴 문화유산은 그 후 인류사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수메르인 들의 기술과 생활양식, 종교, 문학 등은 그들 주변의 많은 민족들에게 하나의 전형이 되었고, 수메르의 뒤를 이은 바빌론, 아시리아, 히타이트제국, 그리고 멀리 이집트 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수메르인들이 발전시킨 농경기술은 점차 유목과 수렵생활을 대체해 나가면서 원시 상태에 있던 인류의 생활을 풍족하게 해주었으며 인류 최초로 도시를 건설한 수메르인들의 건축 기술은 후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우르(Ur)의 수메르 신전 "지구라트"(Ziggurat)"는 지금도 그 웅대한 자태를 보존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후 중동 각지에 세워진 신전 양식의 전형이 되었으며 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의 모델이 되었다.
수메르인들이 만든 사회제도와 관료제도, 법률 등도 후대의 제국들에 그대로 차용되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왕정을 이룩한 민족이 수메르 민족인데 이것이 주위의 민족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는 훨씬 후대에 이르러 유태인들이 사울을 최초의 왕으로 추대하는 성서 속의 이야기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왕이 있어야 강력한 민족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유태인들이 갖게 된 것은 수메르인들의 왕정제도의 영향이며 수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변함이 없다.
| 왕정제도와 더불어 인류 최초의 법률 역시 수메르인들이 만든 것이다. 우르남무라는 수메르왕이 반포한 이 법률은 유명한 바빌론의 함무라비법전에 큰 영향을 남겼으며, 이밖에 수메르인들의 종교적 관념과 의식 등도 주위 민족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마치 로마가 그리스의 신들을 수입해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듯이 바빌론과 아시리아제국의 신들은 수메르 신들을 그대로 들여와 이름만 바꾼 것들이 많았다.
수메르인들의 종교의식이나 기도문, 찬송 등도 이집트를 비롯한 후대의 제국들에 차용되어 각색되었고 먼 훗날 유태인들의 종교에도 반영되었다. 현재 중동지역에 존재하는 여러 신화와 종교는 수메르에서 파생되었음이 수메르 유적 발굴과 함께 밝혀진 것이다. |
[우르 주랑신전:
갈대아 우르 지역에서 출토된 주랑신전은 직경 2.6m의 원주가 늘어서 있으며 그 전면은 모자이크로 덮여있다. 이 시대의 모자이크 장식은 색점토를 7∼8㎝의 원추로 구워서 벽과 기둥에 박아 넣어 아름다운 기하학 문양을 만들어 냈다]
수메르인들의 문학 작품은 여러 민족의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으며 유명한 수메르의 영웅이자 폭군이었던 길가메쉬(Gilgamesh)를 노래한 서사시는 바빌론과 아시리아인들이 각색하여 더욱 발전시켰고, 기독교의 성경에도 뚜렷하게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더 나아가 이것이 그리스의 헤라클레스 신화와 호머스 일리아드, 오딧세이 등 영웅을 소재로 한 서사문학에까지 영감을 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역사는 바벨론과 아시리아를 메소포타미아의 최초 문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1849년 고대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현 이라크 모술)의 아슈르바니팔 서고에서 무더기로 발견된 25000개의 점토판을 장기간 연구해온 학자들에 따르면 바벨론인들과 아시리아인들은 하늘과 신을 묘사할때 아카드 언어에서 유래한 차용어(loanword)를 사용했고 대량의 점토판 또한 아카드 이전의 문명으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고대 기록의 사본으로 밝혀졌다. 바벨론과 아시리아의 문화와 신관은 아카드(Akkad)라는 제국으로 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또한 아카드의 문화가 수메르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는 아시리아의 왕 아슈바니팔이 남긴 23개의 점토판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아래는 그의 23번째 점토판 기록이다.
수메르인들은 사실상 기원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신비의 민족이다. 그들의 기원은 대홍수 전부터라는 것이 일부 학자들의 주장이지만 홍수 연대도 확실하지 않고 또한 그들이 홍수전부터 존재했던 민족이었는지 확신을 가질만한 증거는 아직 없다. 대홍수 연대는 학자들 사이에서 끝없는 논쟁을 부르고 있다. 일부 학자는 홍수의 연대를 B.C.7000년에서 6000년 사이라고 보고 있으며 B.C.2500년경 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성경연대표에 의하면 대홍수는 B.C.3500년경이다. http://cafe.daum.net/b-3927/EeRu/59?q=%EC%88%98%EB%A9%94%EB%A5%B4%20%EB%AC%B8%EB%AA%85%EA%B3%BC%20%EC%97%AD%EC%82%AC |
첫댓글 안녕하세요 ♡
날씨가 너무 춥네요
감기 조심 하시고 행복한 휴일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