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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래(春來)에 불사춘(不似春)
함석헌
사월이 왔습니다. 꽃이 만발했습니다. 호지(胡地)에 무화초(無花草)하니 춘래(春來)에 불사춘(不似春)이란 글귀가 있습니다. 호지(胡地)란 시베리아입니다. 그 슬픈 귀를 읊은 사람은 꽃피는 남쪽나라 고향을 떠나 쓸쓸한 시베리아를 갔기 때문에 그랬겠지만 이거는 꽃이 만발했는데도, 창경원엔 꽃. 구경하는 사람이 인산인해를 이룬다는데도, 도무지 봄 같지 않은 것을 어찌합니까?
호지에 無花草라 한 사람도 사실 꽃이 없어서만 그런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 胡地라는 胡字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꽃만이 꽃입니까? 사람이 있어야 꽃이 있습니다. 사람이면 다 사람 입니까? 마음이 맞아야 사람입니다. 뜻 맞는 친구와 마주 앉으면 모진 눈보라 치는 것을 봐도 흥이 나서 六花가 날린다 하고, 마음에 찬 기운이 돌면 얼굴을 서로 맞부딪치는 종로를 걸어도 사막 같습니다. 전쟁에 시달린 두보는 감시화천루(感時花濺涙)요, 세월 형편 생각하면 꽃을 봐도 눈물이 나고, 한별조경심(恨別鳥驚心)이라 이별에 애가 끊기니 새 소리를 들어도 끔쩍끔쩍 놀라난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胡字를 놓은 것도 사람 잃고 외론 마음을 표시한 것일 것입니다.
4·19이라기에 수유리 4·19묘지엘 갔더랍니다. 꽃도 만발 했고 사람도 많습니다. 꽃은 사람 같고 사람은 꽃 같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도무지 봄같은 느낌이 들지 않으니 어떻게 합니까? 그래 그런지 비만 부슬부슬 옵디다.
뭘하자고 여길 왔습니까? 잔디만 무연한 무덤 보려? 거기는 아무것도 없는 것을 뻔히 아는데, 옛날 그 누군가가 잘했지. 생전에 제 무덤 비석에 새길 글을 써 두고 죽었는데 거기는 이랬다는 것입니다.
He is nat here.
그는 여기 있지 않다.
아마 예수 부활했을 때 무덤에 찾아온 사람들 보고 했던 천사의 말에서 나온 것일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그들은 여기 있지 않습니다. 천사는 부활한 예수는 죽은 그 자리에 있지 않고 갈릴리로 갔다고 했는데 우리 4·19 영웅들은 어딜 갔을까? 어디 가면 부활한 그들을 만날까?
갈릴리라니 갈릴리가 어디 입니까? 본래 있던 곳, 거기서 서로 찾았고, 서로 만났고, 서로 뜻을 주고받았고, 서로 맹세하고 의를 맺고 선생 제자가 되고 동지가 됐던 곳, 거기서 하늘나라를 세우고 새 법을 선포했던 곳입니다.
그럼 우리 갈릴리는 어디지? 경무대, 지금의 청와대가 우리의 골고다라면 우리의 갈릴리는 해방을 맞던 우리 가슴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나라를 찾고 우리 동지를 찾았습니다. 우리는 자유와 평등과 정의와 평화의 나라를 선포했고 그것을 믿고 그것을 위해 충성을 다할 것을 서로 맹세했고, 그 결과 십자가는 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부활한 4·19의 정신을 만나려면 마땅히 우리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발이 수유리로 가는 것은 마음이 우리 가슴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수유리를 가도, 그 봄 풀 파랗게 돋아나는 무덤을 봐도, 비 바람에 버티는 돌과 쇠로 만들어 세운 기념탑을 봐도, 저 꽃처럼 떨어졌지하는 흩날리는 꽃잎을 봐도, 너도나도 그 때문에 짐승 되기를 면하고 사람이 됐지 하는 그 남녀노소의 새처럼 지저귀는 소리를 들어도, 글쎄 내리는 비를 맞으며 우두커니 섰어도, 그 마음은 살아나지 않더란 말입니다.
그러니 이게 不似春 아닙니까? 봄은 왔는데 봄 같지 않습니다. 부활의 철은 왔는데 내 마음은 들 무덤 같이 닫겼더란 말입니다.
야, 젊은 혼아, 푸른 피야, 의를 살리자고 죽었는데 이제 의가 어다 있단 말이냐? 자유 찾자고 죽었는데 자유가 어디 있단 말이냐?
이것이 胡地 아니냐? 꽃 못피는, 푸름 모르는 시베리아 아니냐? 삼천리 금수강산이라는 이 나라야 이게 胡地 아니냐? 되놈의 땅, 오랑케 땅 아니냐?
이 지꺼리는 사람들아 너희가 다 내게 대해서, 또 서로서로에 대해서 말이 통치 않는 되놈이로구나. 문화를 모르는 오랑케들 아니냐? 쑤라 가 짐승 아니냐? 금수(錦繡)가 아니라 금수강산(禽獸江山) 아니냐? 자유 없는 몸 정의 없는 사회가 짐승 아니고 뭐냐? 4.19 기념도 못하게 하는 대학, 그게 대학이냐? 기념 강연 위해 장소 빌려 주지 말라 미리 압박하는 그것도 나라 일 하는 정부냐? 아니면 짐승 길러 잡아먹는 목장이냐?
집엘 돌아와 앉으면 발간했다가 경찰에 방해 받아 도로 걷어온 잡자 묶음이 시집갔다 쫓껴온 딸처럼 소리도 없이 우두커니 구석에 쌓여 있습니다. 그 꼴을 어떻게 보랍니까? 내가 그 잡지를 시작할 때 어떤 마음으로 했는데? 딸 시집보내는 정도 따위가 아닙니다. 정보부에서는 무슨 돈으로 하느냐 묻고 묻더랍니다 마는, 무슨 돈이야? 이름 없고 돈 없는 씨알들이 푼푼이 보내준 돈이지. 글을 쓸 때 어떤 심정으로 누구 위해 쓰는데? 그것을 인쇄하려면 얼마나 힘이 드는데? 일을 보는 사람은 그 보수도 보수 같이 못받고 희생적으로 수고하고, 오직 독자들이 열심으로 읽어 주는 그것을 보수로 알고 있는데, 그 수고하는 죄로 정보부에 불려가 매를 맞고 거의 매일 같이 불려가 조사를 당하고 위협을 받고 유혹을 받습니다. 세상에 나라 일 한다는 사람들이 어찌 이럴 법이 있습니까? 남의 일,그것도 돈 벌이도 아니오 그래도 공공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더러 거기서 물러나라 위협을 하고, 위협에 아니 넘어 가면 유혹을 합니다. 돈을 많이 받고 잘살게 해주마, 그래도 아니 들으니 나중에는 여자를 가져다 억지로 안겨줍니다. 이것이 사람이 하는 사람대접입니까? 이것으로 사회가 바로 되겠습니까? 무엇이 잘못이라는 말도 없고, 정당하게 폐간을 시키지도 않고 그저 인쇄소에 압력을 가해 인쇄만 못하게 하고 책이 나오면 서점에 위협해 팔지를 못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그럼 차라리 글쓴 사람을 잡아가라 하면 천연히 언론 자유의 나라에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익살을 부립니다. 정보부에 물으면 경찰이 한 일이라 하고, 경찰에 물으면 정보부라 하고 이 정부의 일은 미꾸라지 같아 잡을 데가 없고 유령 같아 출처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봄이 온들 어떻게 봄 같겠습니까?
내가 정부 비판의 장본인이면 차라리 죽이거나 살리거나 나를 잡아가면 좋겠는데 나는 아니 잡아가고 공연히 시키는 대로 일하니 주위의 사람만 못살게 학대합니다. 그리고는 나를 가르쳐서는 노망한다 하고 버리고 떠나라고 이간을 시키고, 심지어는 지방의 독자로서 찾아왔던 사람까지 잡아다 고생을 시키는 일까지 있습니다. 나는 물론 잘못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씨알의 소리 내는데 관해서만은 양심에 조금도 주름살 갈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하면 당할수록 내 마음은 평안하고 확신은 더 갑니다. 감히 못할 말씀이지만 근래에 되는 이 잡지 일이나 일반적 언론 탄압으로 인해 나는 어떤 일이라도 당해 좋다는 각오가 더 굳어집니다. 그러니 나라가 나라 같이 뵈지 않고 사람이 사람같이 뵈지 않는데 봄이 오고 꽃이 핀들 어떻게 봄 같겠습니까?
또 그것만입니까? 요새 신문은 월남 전쟁에 관해 어떻게 전하고 있습니까? 아, 월남 민족 참 불쌍합니다. 무슨 죄로 그 참혹한 운명을 당해야 합니까? 설혹 우리 나라에 문제가 없다 해도 도저히 무관심할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우리가 그 차마 못할 역사적 죄악을 짓는데 한몫 들고 있는데서이겠습니까? 부끄럽고 두렵고 분하고 슬픔니다. 우리가 그 죄를 짓다니! 이 세계에 월남을 참으로 동정할 수 있는 나라가 있다면 우리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나라가 일본의 악독 앞에 풍전등화 같았을 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입에 올려 말한 것이 월남이요, 많이 읽힌 책이 월남망국사였습니다. 어려서 듣기에 불란서 놈들이 월남을 먹을 때 세금을 가지가지로 받다받다 못해 나중에는 너희가 하늘을 쓰고 있으니 하늘 세 내라 했다고 했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나 하여간 그렇게 해서 망했던 월남이요, 그 죽음에서 살아나자 악을 쓰는 월남인데, 소위 강대국이라는 놈들이 그것을 십년을 두고 짓밟습니다. 좌고 우고 물을 것 없습니다. 하여간 강한 놈들이, 살아나려는 약한 것을 짖밟고 있습니다. 그러나 강한 것들은 강해 그렇다 하고 우리는 그들과 무슨 원수입니까? 아, 슬픔니다. 더구나 이 어리석은 백성들이 돈 벌러 간다는데 어떻게 합니까? 월남은 결코 남이 아닙니다. 요새는 우리 군대도 희생이 많답니다. 죽고도 명분이 아니서는 죽음!
또 내 심경을 더 말하랍니까? 나는 이제 설 땅이 없어져 갑니다. 나는 직업이 없습니다. 말하고 글쓰는 것이 내일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는 것이 잘하는 일이라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하루도 내 마음에 내 일생을 반성해서 부끄럽고 슬프지 않은 날 없습니다. 그렇지만 낙심은 말고 이제라도 상처난 내 인격을 가지고, 재목에 쓰려다 못쓰게 된 나무 가치를 똥 찌르는 데라도 쓰는 격으로, 다만 조금이라도 보람 있는 일을 해 지은 죄를 속해 보자는 것이 내 심정입니다. 이제 명(名)이고 이(利)고 권(權)이고 세(勢)고, 생각할 여지가 없습니다. 내 딴으로는 더러워지고 썩었더라도 그래도 전체의 제단의 불더미에 던진다면 한 불길에 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소원인데, 그 나의 활동을 거의 완전히 봉쇄하여 갈 곳이 없어졌습니다. 대학의 학생들이 오라고 해서 약속하면 틀림없이 그 시간에 가서 못하게 됐다고 합니다. 그러는 것이 다섯만 아니고 열만 아닙니다. 교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내가 노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노했습니다. 노라야 계란으로 바위 때리는 노입니다. 그러나 나는 좋습니다. 바위는 무너지는 날이 올 것입니다. 계란은 억억만만일 것입니다. 씨알의 노는 태평양의 노한 물결 같습니다.
그렇게 만들어 놓고는 나를 가르쳐 자극적인 말을 한다고 정부를 무너뜨릴려고 그런다고 한답니다. 두려울 것 없습니다. 나는 씨알의 마음을 자극시킬 것입니다. 이 이상 더하지 못하는 것이 한입니다. 예수 말씀같이 불을 땅에 던졌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오해할 것입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도 받고 예수도 받은 오해를 나 따위 쭉정이 씨알이 면할 리 있습니까? 받아 좋습니다. 나는 도리어 이 나라와 점잖을 빼려는 지성인들이 밉습니다. 무덤이 죄인들의 열에 섞긴다면 영광입니다. 그러나 말하고 노하는 목적이 정권을 뺐는 것 따위에 있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히 말해 두고 싶습니다.
장자 같이 통쾌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 추수장(秋水章)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혜자(惠子)가 양(梁)나라에 재상이 됐을 때 장자가 갔더니 어떤 사람이 혜자 보고 장자가 네 자리를 뺏으려고 왔다했습니다. 혜자(惠子)가 그 말을 듣고 신경이 곤두서서 三日三夜를 전국에 수사진을 폈습니다. 장자가 그 소리를 듣고 혜자한데 갔습니다. 가서 말하기를 저 남쪽에 완추(봉황의 새끼)라는 새가 있는데 자네 아나? 그놈이 남해에서 일어나 북해를 가는데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고 연실(練實-참대 열매)이 아니면 먹지 않으며 예천(醴泉)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 그런데 올빼미란 놈이 하나 썩은 쥐를 움켜쥐고 있다가 그 완추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올려다보며「흑」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제 자네가 양나라 재상 자리를 가지고 나보고 흑 하는 것인가? 했다는 것입니다. 우주 사이에 자유자재 하는 도를 통한 장자의 눈에 한 나라의 재상 자리 같은 것은 썩은 쥐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속된 생각에 잡힌 혜자의 생각에는 그것이라도 뺏으려는 것 같이 보였던 것입니다.
나는 감히 장자에 견줄 수는 없지만, 나도 그래도 배운 것은 옛 도입니다. 작고 못나기는 했어도 대통령 자리쯤을 욕심을 내기에는 내가 들은 것이 너무 큽니다.
그러니 어떻게 봄이 봄 같겠습니까? 창경원 꽃구경에 미친다는 사람들 그 마음 나 모르겠습니다. 비상시라면서 한편으로 관광 선전하는 것도 나 모르겠습니다. 헌법 고친다는 소리를 농담으로 했다는 데는 한 나라 동포일까 의심이 듭니다. 春來에 不似春입니다. 속 봄이 봄입니다.
씨알의소리 1972. 4 10호
저작집; 8- 57
전집; 8-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