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곳은 끝부터 들어간다
“아들이 통화하고 싶다는데 컨디션 괜찮아요?”
“지금 힘든데……. 조금 있다가.”
병원에 입원해 있던 남편은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만 갔다. 그는 생전 병원이라든가 입원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갑작스레 건강의 이상 신호와 맞닥뜨리자 익숙하지 않아 힘들어했다. 때로는 시동생에게 전화하여 데리러 오라고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힘이 없어 통화하기 힘들다던 남편이 갑자기 통화하겠다고 했다.
“아니야, 지금 통화해야겠어. 지금 아니면 통화 못할지도 몰라.”
며칠 후를 내다보았는지 힘들어하면서도 모로코에 사는 아들 며느리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했다. 오랫동안 꿈꾸던 삶을 찾아 먼 나라에 자리를 잡고 사는 아들. 얼마 전 모로코 왕의 이름을 딴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한 아들을 무척이나 대견해하던 즈음이었다. 교수님을 모시고 동기들과 찍은 사진을 보여주자 ‘우리 아들 멋있다’라고 말하며 해맑게 웃었다. 왜인지 그 모습이 나에게 너무나 선명하게 각인되어 잊을 수가 없다.
남편은 유언을 남기기라도 하듯이 아들에게 여러 가지를 당부하였다. 사사로운 개인의 일로 공적인 일을 해치면 안 된다며 공익을 먼저 생각하며 지내라고 했다. 지금 너무 잘하고 있다며 지금처럼만 하면 된다며 칭찬까지 했다. 평생 몇 번 없던 칭찬이었다. 남편은 아들을 강하게 키우려는 의도였는지 칭찬을 아꼈다.
아들은 아픈 아버지를 위해 본인 앞날의 설계를 구체적이면서도 장황하게 설명했다. 몸이 아파 마음마저 약해지는 아버지께 희망을 드리고 본인의 의지를 다지는 것으로 느껴졌다.
“송곳은 끝부터 들어가는 법이야. 서두르면 아무것도 안 돼. 한 계단씩 차근차근 올라가야 끝까지 갈 수 있어.”라고 말했다.
통화는 평소보다 길었다. 한마디 한마디 아들에게 너무 잘하고 있다며 여러 번 칭찬하며 응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날의 대화가 아들과의 마지막이나 다름없었다. 점점 기운이 없어지고 정신마저 혼미해져 길게 통화할 수가 없었다. 평소에도 자주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지만, 병원에 있을 때는 틈나는 대로 더 자주 연락하며 일상을 공유했다.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은 실타래처럼 얽혀있던 매듭을 하나씩 풀어가며 화해와 사랑의 대화를 나누며 이별을 준비했다.
아들과 남편은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자기주장을 펼치는 관계였다. 지켜보는 처지에서는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일 정도였다. ‘아들에게 좀 양보해 주지, 아버지의 의견을 따르고 존중해 주면 안 되나?’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한편으로는 ‘그래 우리 집은 민주적인 가정이야. 본인의 의견을 언제 어디서나 마음껏 펼칠 수 있어야지.’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이기도 했다. 우리 집은 늘 시끄러웠다. 삼대가 어울려 사는 대가족이기도 했지만, 본인의 철학이 분명하고 한결같이 목소리가 큰 사람들의 공동체였다. 밖에서 들으면 싸우는 것 같지만, 그저 일상적인 대화일 뿐이다.
그날 이후 아들의 핸드폰 메신저 프로필에는 <송곳은 끝부터 들어간다>로 저장 되어있다. 아버지와 통화 후 저장하고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곤란할 때마다 아빠라면 어떻게 해결했을까, 무어라고 조언할까를 먼저 생각하면서 답을 찾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30대 중반으로 접어든 아들은 본인의 미래를 생각하며 목적과 목표 앞에 때로는 흔들리고 조급해하기도 한다. 그래도 아버지와의 마지막 통화에서 들었던 <송곳은 끝부터 들어간다>라는 말을 잊지 않고 새기는 모습을 보면 믿음이 가고 대견하게 생각된다. 그 말을 새기며 생활한다면 좀 늦을지라도 목표 지점에 도달할 테고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되리라 믿는다.
똑 닮은 아버지와 아들. 가치 있는 일에 집중하여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랄 뿐이다. 그것이 아들에게 말하고 싶은 아버지의 마지막 부탁이 아니었을까.
첫댓글 가슴에 와 닿는 글 잘 읽었습니다. 언제나 선생님은 모두의 등불이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