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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안드레아 김대건 사제 순교자 대축일
1821년 충청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비상한 재주와 굳센 성격과 진실한 신심을 드러내었다. 15세 때인 1836년 고국을 떠나 중국 마카오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고 1845년 1월 무수한 고생 끝에 압록강을 건너 귀국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다. 서울에 도착하자 건강이 극도로 쇠약하여 두 주일을 병석에서 보냈으나, 전교 신부를 이 나라에 인도하기 위해, 건강이 회복되기도 전에 한 척의 작은 목선으로 중국 상해를 향했다. 풍랑으로 고생한 끝에 마침내 상해에 도착하여 1845년 8월 17일 그 곳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다시 고국에 돌아와 전교 신부를 입국시키고자 출발하려던 찰나 순위도 부근에서 관헌에게 체포되어 여러 차례 문초와 형고를 받고 마침내 참수의 선혈로써 거룩한 순교의 팔마를 얻었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는 김 신부를 다른 78명의 순교자와 함께 복자위에 올렸고, 교황 비오 12세는 1949년 11월 25일에 한국에서 전교하는 모든 성직자들의 특별 수호자로 선정하였다. 그리고 교황 요한 바울로 2세에 의하여 1984년 5월 6일에 시성되었다.
성 안드레아 김대건 사제의 편지에서
(제23신의 발췌, 옥 안에서, 1846년 8월 26일: 이원순, 허인 편저, 1975년, 정음사)
천주교는 내게 천주 공경하기를 가르치고 또 나를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합니다
그들은 저를 잡아 가지고 상륙한 뒤에, 옷을 벗기고 다시 마구 때리며 온갖 능욕을 가하다가 관가로 압송했는데, 거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관장이 제게 묻기를 "네가 천주교인이냐?" -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라고 대답하였더니, "어찌하여 네가 임금의 명을 거역하여 그 교를 행하느냐? 배교하여라." 하길래, "나는 천주교가 참된 종교이므로 받듭니다. 천주교는 내게 천주 공경하기를 가르치고, 또 나를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합니다. 내게 배교하라는 것은 쓸데없는 말입니다."라고 대답했더니, 이런 대답을 하였다고 주리를 틀고서, 관장이 또 말하기를 "네가 배교하지 않으면 때려 죽이겠다." 하기에,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결코 나는 우리 천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 우리 교의 진리를 알려거든 들어 보십시오. 내가 공경하는 천주는 천지와 사람과 만물을 조성하신 이요, 착한 이를 상 주시고 악한 자를 벌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다 그를 공경하여야 합니다. 관장께서 내가 천주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형벌을 당하게 해주시니 관장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리 천주님이 이런 은공을 갚고자 당신을 더 높은 관직에 올려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자, 이 말을 듣고는 관장과 모든 사람이 비웃었습니다.
그 후에 여덟 자나 되는 긴 칼을 가져오기에, 제가 즉시 그 칼을 잡아 제 손으로 제 목에 대니, 둘러섰던 모든 사람이 또한 다 크게 웃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미 배교한 두 사람과 함께 옥에 가두는데, 저의 손, 발, 목, 허리를 어떻게나 몹시 결박하였던지, 걸을 수도 없고 앉을 수도 없고 누울 수도 없었습니다. 또한 구경꾼들이 둘러쌌기에 매우 괴로웠습니다. 저는 밤이 이슥토록 저들에게 교회의 도리를 설명하였더니, 그들은 흥미 있게 듣고 나서, 나라에서 금하지만 않으면 자기들도 봉행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포졸들이 저의 봇짐에서 중국 물건을 찾아내더니 이튿날 관장이 제게 중국인이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아니오, 나는 조선 사람이오."라고 대답하였더니, 그는 저의 말을 믿지 않고 또 말하기를, "중국 어느 곳에서 사느냐?"라고 묻기에 "나는 중국 광동현 마카오에서 공부하였소. 나는 교우이므로 구경도 하고 또한 교회의 도리를 전할 마음으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다시 저를 하옥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서울에 도착하자 도적을 가두는 옥에 수감되었고 아전들은 저의 말하는 것을 들어 보고는 분명히 조선 사람이라고 단언했습니다. 이튿날 저를 관장 앞에 대령시켜 놓고 관장이 네가 누구냐고 문초하기에, "나는 조선 사람으로서, 공부를 하기는 중국 가서 하였소."라고 대답하자 중국말을 하는 통역을 불러 저와 이야기를 시켜 보았습니다. 1839년 박해 때 배교자는 조선 소년 세 명이 서양말을 배우러 마카오로 떠났음을 고발하였을 뿐 아니라, 저와 함께 잡힌 교우들이 벌써 제가 누구라는 것을 실토하였으므로, 오랫동안 저의 신분을 감출 수 없음을 짐작하고, 관장에게 "나는 그 소년 셋 중의 하나인 김 안드레아"라고 자백하는 동시에, 고국에 다시 들어오려고 고생하였던 것을 모두 이야기했습니다. 이 말을 듣던 관장과 구경꾼들도 "가련한 소년, 어려서부터 허다한 고생을 많이 당하였구나." 하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 후로는 임금의 명령에 의하여 배교하기를 독촉하기에 "임금 위에 또 천주께서 계시어 당신을 공경하라는 명령을 내리시니, 그를 배반함은 큰 죄악이라, 임금의 명령이라도 옳은 일이 될 수 없습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다시 교우들을 대라고 위협하기에, 우리에게는 애덕의 의무도 있고 천주께서 사람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내리신 까닭에 말할 수 없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들은 다시 교회의 도리를 묻기에, 저는 장황한 설명을 시작하여 천주의 존재, 만물의 조성, 영혼의 불멸, 지옥과 천당, 조물주를 숭배할 의무, 외교의 헛되고 거짓됨을 말하여 주었습니다. 관장들은 대답하기를 "너의 교도 좋거니와 우리 유교도 좋으니 우리는 유교를 한다." 하기에 "당신들의 의견이 그러하다면 우리를 편히 지내도록 할 것이고 우리와 서로 화목해야 하지 않겠소. 그런데 그렇기는 고사하고 당신들은 우리를 박해하고, 우리를 가장 극악한 죄인과 같이 혹평을 하니, 우리 교를 옳고 좋은 교라고 인정하는 당신들로서 마치 극악한 교와 같이 박해하는 것은 당신들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입니다."라고 반박하였더니, 이 말을 들은 그네들은 다만 어리석은 웃음을 띄울 뿐이었습니다.
관장은 제게 영어로 된 지구 전도를 번역하라고 분부하기에, 여러 가지 채색으로 두 장을 그렸는데, 한 장은 임금께 드릴 것이며, 지금은 대신들의 부탁으로 간단한 지리서를 편술하기에 분주한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저를 위대한 학자로 인정합니다. 가련한 인생들, 저는 감히 주교 각하께 저의 어머니 우르술라를 부탁 드리옵니다. 저의 어머니는 10년 동안 못 본 아들을 불과 며칠 동안 만나 보았을 뿐 또다시 홀연 잃고 말았으니, 각하께 간절히 바라건대, 슬픔에 잠긴 저의 어머니를 잘 위로하여 주십시오. 이제 저는 진심으로 각하의 발 아래 엎디어, 저희 사랑하올 부친이요 공경하올 주교님께 마지막 하직의 인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그리고 베시 주교님과 안 신부님에게도 공손히 하직을 고하옵니다. 이후 천당에서 만나 뵙겠습니다.
예수를 위하여 옥에 갇힌 탁덕 김 안드레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 앞서가신 신앙의 선구자
요사이 청소년들에게 많은 관심을 끄는 인물은 단연 ‘인기 스타’인 것 같다. 그들의 이름을 꿰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의 근황과 생활 구석까지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관심이 많다. 스타는 인기를 먹고 산다. 아니 인기에 죽고 산다. 그러니 생명력이 짧다. 한시적이다.
반면에 청소년들에게 존경하는 영웅이 있느냐고 물으면 대답을 잘 못한다. 존경하는 영웅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영웅들은 시대가 지나고 세대가 바뀌어도 변함없이 늘 공경받는다. 그들은 스타처럼 인기에 죽고 사는 것이 아니다. 영웅들의 위대한 업적은 어느 시대에나 큰 영향을 끼치고, 삶의 지혜로 작용한다. 그들의 삶 자체가 후대 사람들에게 존경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그들은 우리 세대에도 살아있는 것이며, 그래서 항구하다.
영원을 생각하고 하느님 나라를 찾는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신앙의 영웅이 있다. 믿는 이는 인기에 좌우하는 스타가 아니라, 신앙의 훌륭한 모범을 보이신 신앙 선조들을 기억한다. 우리 한국교회에도 신앙의 귀감이 되는 선구자가 많다. 특히 해마다 7월 5일이 되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대축일을 지낸다. 이날은 신부님이 복자위에 오르신 날로서, 신부님을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인 최초의 사제이실 뿐 아니라, 박해 속에서도 굳건한 신앙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충실하였던 착한 목자의 모습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김대건 신부님은 1821년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신앙의 깊은 가르침 안에서 성장하였다. 신부님의 가족들도 모두 순교의 영광을 받을 정도로 열심하였다. 1836년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사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박해의 어려움 때문에 학업을 지속하고자, 유방제 신부의 인도로 길을 떠나 마카오 신학교에 들어갔다. 1841년 11월 조선교회가 박해 때문에 소식이 끊어지자, 고국의 양들을 걱정하여 여러 차례 의주 방면으로 입국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1843년 중국의 ‘소팔가자’에서 최양업과 신학공부를 계속하다가, 조선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두만강을 건너 입국을 시도하였지만 또 실패하였다. 다시 돌아가 1844년 부제품을 받고, 1845년 1월 1일 변문을 통해 서울로 들어오는 데 성공하였다. 고국에서 선교사 영입 준비를 마친 다음 상해로 되돌아와, 그해 6월 상해에서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8월에 상해를 떠나, 10월 충청도 강경 나바위에 도달하였다.
새 사제로 입국하여, 숨어 지내는 교우들을 찾아 사목하였고, 조선교구 부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46년 5월 선교사를 영입할 뱃길을 개척하려고 백령도에 도착하였다. 그러다가 6월 초 관헌에 체포되어, 해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 3개월 동안 문초를 받고, 그해 9월 16일 반역죄로 군문효수형을 선고받아 새남터에서 참수되었다.
신부님은 1857년 가경자로 선포되고, 1925년 7월 5일 복자위에 오르셨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 온 교회가 공경하는 성인이 되셨다.
신부님은 한국인 최초의 사제이시며, 최초의 서양학문 유학자이시다. 비록 짧은 기간 동안 사목하셨지만, 교회를 사랑하는 목자의 열정을 느낄 수 있다. 25통의 옥중서한을 통해 탁월한 학문의 지혜와 신자들을 배려하는 목자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신부님은 한국인으로서 전통 관습을 가장 잘 이해한 목자이셨다. 또한 관헌들의 온갖 회유에도 흔들리지 않고, 타협을 모르는 불 같은 신앙으로 모든 후배 사제의 신앙적 귀감이 되셨다.
이렇듯이 신부님은 순교를 통하여 굳건한 신앙을 지켰고 자신이 흘린 피로써 한국교회에 신앙의 뿌리를 내린 것이다. 그만큼 앞서가신 우리 신앙의 선구자이시기에, 성인의 대축일을 모든 신자가 참여할 수 있도록 7월 5일에 가까운 주일로 옮겨서 지낸다. 이날 교회는 순교자의 용기(제1독서)와 주님의 나라를 위한 박해를 뛰어넘는 참된 행복(복음)을 선언하며,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희망을 주는 하느님의 사랑(제2독서)을 상기시키는 성서 대목들을 봉독한다.
신부님은 한국인 첫 사제로서, 천국에서 한국교회와 특히 후배사제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전구해 주실 것이다. 성인의 축일을 맞아, 여름 날씨처럼 뜨거운 열정으로 교회를 돌보시던 그 깊은 사랑을 묵상해 보자. 우리도 성인을 본받기로 다짐하고 그분의 전구를 구하여 굳건한 신앙의 은혜를 받도록 하자.
성 김대건 사제 순교자 대축일 특집 - 체포에서 순교까지 -
(사진설명)
▲순위도에서 체포됨
김대건 신부가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서양 선교사 입국로 개척을 위해 서해안 일대 해도를 작성하던 중 황해도 순위도 등산나루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있다.
▲옥중 세례를 베풂
포도청으로 압송된 김대건 신부가 한달여간 혹독한 옥중생활을 하면서도 죄인들에 복음을 전파, 함께 체포된 선주 임성룡의 아버지 임군집에게 옥중 세례를 베풀고 있다.
▲위대한 순교
김대건 신부가 1846년 9월16일 서울 한강변 새남터에서 어영천 군사들에게 참수형에 처해지고 있다. 그림= 탁희성 화백
"나는 '천주'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는 기해박해(1839년)와 병오박해(1846년) 순교자 79명과 함께 1925년 7월5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한국 천주교회는 해방 후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이 되던 해인 1946년 김 신부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로 정하고, 그 축일을 그의 시복일인 7월5일로 정했다. 올해는 김대건 신부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로 선포된 지 60돌이 되는 해이다. 이 뜻깊은 날을 기념해 김대건 신부 생애 중 '체포부터 순교까지'의 과정을 구성해 보았다.
1846년 6월5일(음력 5월12일) 황해도 작은 섬마을인 순위도 등산나루. 밤새 대지를 탐한 해무가 채 증발하지도 않은 이른 아침. 대지의 나른함을 깨우는 날카로운 소리들이 포구에 울려 퍼졌다. 나루 옆 주막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맨발로 뛰쳐나와 보니 말쑥한 양반 차림의 한 청년과 순라 포졸들이 때아닌 시비를 벌이고 있었다. 포졸들은 "조선 해안에서 어민들에게 해를 끼치는 중국 어선들을 몰아내기 위해 배를 징발하겠다"며 위협했고, 청년은 "한양에서 순위도까지 몇차례 왕래했지만 이런 법은 없었다"며 한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황금어장인 백령도 인근에는 중국 어선들의 횡포가 극심했던 모양이다.
포졸들은 예상보다 선주의 저항이 거세자 호패를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불심검문이다. 마침 호패를 차지 않았던 청년이 불응하자 포졸들은 "행색이 조선 사람이 아니라 중국놈 닮았다"며 청년과 뱃사람들을 포박해 등산 진영으로 끌고 갔다. 이 청년이 바로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 신부다.
김 신부가 서울에서 순위도 등산나루까지 배를 타고 온 이유는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 지시로 서양 선교사 입국을 위한 '해도'를 만들기 위해서다. 그는 5월12일 선주 임성룡의 배를 타고 마포에서 강화, 연평도, 장연 터진목을 거쳐 등산나루까지 오면서 해도를 그렸다. 또 마합, 목동 2곳에선 중국 배를 만나 선원들에게 상해에 있는 메스트르 신부 등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탁하기도 했다.
등산 첨사 정기호가 진영에 끌려온 김 신부 일행을 심문하는데 그의 행장에서 '예수성심상'과 '성모자상', 언문 소책자 1권이 나왔다. 등산 첨사는 이들이 천주교도임을 바로 알아채고 힐문하자, 청년은 "중국 광동성 오문현(지금의 마카오) 출신 '김대건'으로 25살이며 천주교를 봉양하고 있으며, 1844년(갑진년)11월에 압록강을 건너와 서울에 기거하다 올해 4월18일에 황해도 산천을 유람하려고 한강 마포에서 임성룡의 배를 타고 함께 이 곳에 왔다"고 진술했다.
김 신부 일행은 닷새 후 6월10일 해주 감영으로 압송됐다. 황해 감사 김정집은 김 신부 일행이 압송돼 오자 곧바로 의금부에 보고했고, 의금부는 다시 국왕에게 이를 알렸다.
당시 국왕인 헌종은 13일 이 보고를 받고 의금부에 '김대건'의 행적을 낱낱이 밝힐 것을 지시했고, 국방부격인 비변사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들을 서울로 압송하도록 명했다.
같은 날, 해주 감영에선 황해 감사가 직접 김 신부 일행을 문초하고 추가로 임성룡의 아버지 임군집(요셉, 임치백이라고도 함)과 김중수를 체포했다. 이날 김 신부는 네 차례, 임성룡(23)과 사공 엄수(44)는 세 차례 문초를 받았다. 김 신부는 이 날 황해 감사에게 "자신은 '김대건'이 아니라 '우대건'"이라며 "우씨는 조선의 희성이고, 김씨는 흔해 김가로 속였다"고 거짓 진술을 했다.
김 신부 일행은 포도청 군관 6명과 군사 4명의 특별 호위 속에 18일 해주에서 출발, 칼과 수갑을 찬 채 쉬지않고 걸어서 3일만에 서울에 당도, 포도청에 투옥됐다. 황해 감사 김정집은 김대건 일행이 압송되는 동안 김 신부가 중국 배에 부탁한 편지를 집요하게 찾아내 조정에 보냈다. 김 신부가 쓴 편지에는 여러 장의 조선 지도가 들어 있어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김 신부에 대한 문초는 6월20일부터 7월19일까지 포도청에서 도합 6차례 진행됐고, 40회의 진술이 있었다. 김 신부는 심문 첫 날 여섯 번째 진술에서 비로소 자신이 중국인 우대건이 아니라 '용인 태생' 김대건이라고 밝혔다. 김 신부의 이 '용인 태생' 진술 때문에 김 신부의 고향이 '솔뫼'가 아니라 '용인'이라고 조심스레 주장하는 학자들이 최근 간간히 등장하고 있다.
김 신부와 함께 압송된 선주와 사공은 문초를 이기지 못하고 이의창(베난시오)ㆍ이재용(이재의 토마스)ㆍ이기원(이신규 마티아)ㆍ현석문(가롤로) 등을 밀고했다.
영의정 권돈인은 김 신부 신원이 모두 밝혀지자 9월15일 어전회의에서 헌종에게 김대건을 조국을 배반한 반역자로 사형에 처할 것을 간청했다. 함께 있던 우의정 박회수, 예조 판서 조병현, 병조 판서 김좌근, 좌참찬 김흥근, 수원 유수 이약우, 지돈녕(왕족 재판관) 이헌구 등도 영의정을 동조했다. 이에 헌종은 "김대건의 군문효수형을 즉각 시행할 것"을 명했다.
김대건 신부는 옥중 생활을 하면서도 복음 선교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김 신부는 옥중 죄인들뿐 아니라 좌포도청 포장 이응식에게까지 천주교 교리와 복음을 전했다.
1846년 9월16일 아침. 포도청 감옥에 갇혀있던 김 신부는 지금의 서울 인의동에 있는 어영청으로 압송됐다. 어영청은 1개 중대를 총으로 무장하게 하고, 나무채 2개로 만든 가마 위에 등 뒤로 손을 포박한 김대건 신부를 태워 10여리 떨어진 처형지 새남터로 갔다.
군인들은 새남터에 도착하자 하늘을 향해 일제 사격을 하고 나팔을 불었다. 시끌벅적하던 처형장에 일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군사들은 일사불란하게 흩어져 원을 만든 후 그 안으로 김 신부를 밀어 넣었다. 그러자 관장이 일어서서 "죄인 김대건은 외국인과 교섭했기에 사형에 처한다"며 선고문을 재빨리 읽었다.
관장의 낭독이 끝나자 김 신부는 큰 소리로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았으니 여러분은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내 종교와 내 하느님을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천주께서는 당신을 무시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벌을 주시는 까닭입니다"라며 복음선포로 유언을 남겼다.
군사들은 김 신부의 속바지까지 벗기고 양 손을 등 뒤로 묶은 채 얼굴에 물을 뿌린 뒤 회가루를 뿌렸다. 그런 다음 군사 2명이 김 신부의 겨드랑에 몽둥이를 꿰고 그를 어깨에 맨 채 원 둘레로 3바퀴 돌았다. 그러는 동안 군사들은 김 신부에게 갖은 희롱과 모욕을 주었다.
희롱이 끝나자 김 신부를 매고 돌았던 군사 2명은 그의 무릎을 꿇리고 두 귀에 화살을 뚫어 꽂았다. 그런 다음 김 신부의 머리채를 새끼로 매어 모래사장에 꽂아 놓은 창 자루에 뚫린 구멍에 꿰어 반대쪽에서 그 끝을 잡아당겨 머리를 쳐들게 했다.
김 신부는 이런 와중에도 조금도 냉정을 잃지 않았다. 그는 군사들에게 "이렇게 하면 되었소? 마음대로 칠 수 있겠소? 자! 치시오. 나는 준비가 다 되었소"라고 말했다.
군사 12명이 칼을 들고 서로 싸움을 하듯 김 신부 주위를 빙빙 돌며 검술시범을 보이더니 차례로 김 신부의 목을 쳤다. 김 신부의 머리는 8번째 칼을 맞고서야 떨어졌다. 군사 한명이 김 신부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관장에게 보여주니, 관장은 형집행을 조정에 보고하려 즉시 그 자리를 떠났다. 이렇게 김대건 신부는 만 25살에 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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