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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 1박 2일 간월산(1.069m) / 진주남강유등축제(晉州南江流燈祝祭)
2023-10-12~13 (1박 2일) 둘째 목요일 / 맑음/구름 ( 14 º ~ 22 º)
1일 차 : 간월산(1.069m) 산행 / 진주남강유등축제(晉州南江流燈祝祭)
2일 차 : 진주남강유등축제(晉州南江流燈祝祭) / 진주수목원 / 금산인삼축제장
2일 차 여행 코스
▣ 진주남강유등축제 (晉州南江流燈祝祭)
코스 : 진주성 (공북문) → 영남 포정사 → 진주성포로 →
호국사 → 진주성 → 촉석루 →진주성(촉석문) → 진주성 (공북문).
경남 진주시 남강로 626 (공용주차장)
▣ 경상남도수목원(진주수목원) / 금산 인삼축제장
경남 진주시 이반성면 수목원로 386(주차장)
함께한 분들
달친 / 별 친 / 민대감 / 피오나 / 이프로 / 깃비 / 청마(靑馬).
차량 2대 지원(운전) : 달친 / 이프로
사진 촬영 청마(靑馬)
진주 다옴호텔에서 나와 조식으로 국밥집에서 식사 후 진주 남강 유등축제장으로 이동해서 의암을 둘러보고 진주수목원에 들려 이곳저곳을 둘러본 후 진주로 다시나 와 진주의 맛집에서 진주냉면을 점심으로 식사를 한 후 금산 인삼축제장을 둘러보고 대전역 앞 청주식당에서 오리로스고기로 뒤풀이를 하고 1박 2일에 여정을 마무리한다.
촉석문 앞에는 논개(論介)를 노래한 시비(詩碑)
논개(論介)
수주 변영로(樹州 卞榮魯)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情熱)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娥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石榴)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 맞추었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江)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진주성( 晋州城)
경남 진주시에 있는 사적 제118호 진주성은 외적을 막기 위해 삼국 시대부터 조성된 성이다. 본래 토성이었으나 고려 말 우왕 5년(1379년)에 진주 목사 김중광이 석성으로 고쳐 쌓았으며 임진왜란 직후에는 남북으로 내성을 쌓았다.
선조 25년(1592년) 10월 왜군 2만이 침략해 오자 진주 목사 김시민이 3,800여 명의 군사와 성민이 힘을 합쳐 왜군을 물리쳤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 대첩이다. 하지만 이듬해 6월에 왜군 10만여 명이 다시 침략을 해왔고 이때 7만에 달하는 민 ・ 관 ・ 군이 왜군에 맞서 싸우다 모두 순국하는 비운을 겪었다.
촉석문은 1972년에 복원하였고, 일제 강점기에 허물어졌던 서쪽 외성의 일부와 내성의 성곽은 1975년에 복원하였다. 1979년부터는 성 안팎의 민가를 모두 철거하는 등 진주성 정화 사업을 시작해 2002년 공북문 복원을 끝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성곽의 둘레는 1,760m이고, 높이는 5~8m이며 성 내에는 기념물, 문화재 자료, 유형 문화재 등이 있다.
촉석루( 장원루, 矗石樓)
촉석루는 진주의 상징이자 영남 제일의 명승이다. 남강 바위 벼랑 위에 자리한 탓에 뛰어난 경치까지 볼 수 있는 촉석루는 전시에는 장졸을 지휘하던 지휘소로, 평시에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는 곳으로 또 때로는 과거를 치르는 고시장으로 쓰였다. 지금의 촉석루는 한국 전쟁 때 불탄 것을 진주 고적 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1960년에 중건한 것이다
의기사(義妓祠)로 들어가는 문은 지수문(指水門)
의기사(義妓祠)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호
임진왜란 당시(1593년)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한 논개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으로 내부에는 논개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영조 16년(1740년)에 경상우 병사 남덕하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건립되었으며, 지금의 의기사는 의기 창렬회가 시민의 성금을 모아 재건한 것이다.
이 사당은 영조 16년(1740)에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처음 세운 뒤 수차례 고쳐 지었다.지금의 사당은 1956년 진주의기창렬회에서 힘을 모아 다시 고쳐 지은 것이다. 현판은 관찰사 이지연이 썼고, 진주 기생 산홍과 황현의 시판(詩板), 다산 정약용의 기문(記文)이 걸려 있다. 논개의 영정은 처음에는 김은호의 작품이 모셔져 있었으나 화가의 친일 행적으로 철거되고 지금은 2007년 표준영정심의위원회에서 통과되어 국가표준영정 제79호로 지정받은 영정(影幀)이 모셔져 있다.
촉석 정충단비( 矗石 旌忠檀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
숙종 12년(1686년)에 세워진 비로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국한 삼장사 김천일, 황진, 최경회와 삼장사를 중심으로 뭉친 7만 민 ・ 관 ・ 군의 충의가 새겨져 있다. ↓
논개(論介)
진주성이 왜적에게 짓밟힐 때 기녀로서 적장을 유인하여 남강(南江)에 빠져 산화한 사실은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널리 유포되었다. 구전되어오던 논개의 순국 사실이 문헌이나 금석문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1620년경부터라고 추정된다. 사회의 멸시를 받던 기녀의 몸으로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친 충성심에 감동한 유몽인(柳夢寅)이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채록하여 문자화된 것이었다. 한편 진주 사람들이 논개의 애국적 행위를 기리고 전하기 위하여, 순국한 바위에 ‘義巖(의암)’이라는 글자를 새겨넣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논개를 추모하는 지역민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중의 충신·효자·열녀를 뽑아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는 논개의 순국 사실이 누락되었다. 이는 유교 윤리에 젖은 일부 편집자들이 관기를 정렬(貞烈)로 표창함이 불가하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보수적인 집권 사대부들의 편견 때문에 논개의 애국 충정은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한 것이었다. 일부 사대부들의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진주성민들은 성이 함락된 날이면 강변에 제단을 차려 논개의 의혼(義魂)을 위로하였다. 그리고 국가적인 추모 제전이 거행될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진주성민들의 오랜 노력이 결실을 맺기 시작한 것은 경종 이후의 일이었다. 진주성민들은 절의(節義)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바친 논개의 의로운 행위를 정부가 마땅히 표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진주성민들의 요청을 받은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은 1721년(경종 1)에 기녀 신분으로 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논개의 의열에 대한 국가의 포상을 비변사에 건의하였다. 이때 거론된 구체적인 포상 방법은 봉작(封爵)을 내려주고 사당(祠堂)을 건립해주는 것이었다. 최진한의 건의를 받은 비변사는 보다 확실한 인증 자료를 요구하였다. 이에 최진한은 관민합동으로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를 건립하고, 그 인본을 제출하여 자손의 급복(給復)에 대한 특전을 허락받기에 이르렀다.
이는 진주 지역민들의 숙원인 논개에 대한 봉작과 사당을 세워 사액(賜額)을 받는 것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가 논개의 순국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의기가 논개를 지칭하는 공식 호칭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논개 자손에 대한 급복의 특전이 베풀어진 20여 년 뒤, 의혼을 봉안하는 사당이 건립되었다. 1739년(영조 16)에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의 노력으로 의기사(義妓祠)가 의암 부근에 세워지고, 논개 추모제가 매년 국고의 지원을 받아 성대히 치루어지면서 국가의 공식적인 포상 절차가 마무리된 것이었다. 의기사는 그 뒤 홍화보(洪和輔)·홍백순(洪百淳)·이지연(李止淵) 등이 여러 차례 보수하여 지금까지 촉석루(矗石樓) 옆에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1868년(고종 5)에는 진주목사 정현석(鄭顯奭)의 노력으로 매년 6월에 300여 명의 여기가 가무를 곁들여 3일간 치제하는 대규모 추모 행사인 ‘의암별제(義巖別祭)’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의암별제는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고 의식 절차만이 『교방가요(敎坊歌謠)』에 전해질 뿐이다. 19세기 이후 현재까지 논개의 출생이나 성장 과정에 대한 다양한 이설이 제시되었다. 논개는 전라도 장수 출신이며, 양반 가문 출신이고, 성은 주씨(朱氏)이며, 최경회(崔慶會) 혹은 황진(黃進)의 애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문헌 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논개의 출신 성분에 대한 지나친 미화는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
진주 의암사적비(晋州 義巖事蹟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3호)
의암사적비는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1593)에서 성이 함락되자 남강의 의암에서 왜장을 껴안고 강물에 몸을 던져 죽은 진주 관기 논개의 행적을 기록한 빗돌이다. 이 빗돌은 경종 2년(1722)에 세운 것으로 진주의 선비 정식이 지었다. 논개에 대한 이야기는 진주 사람들의 입으로 전승되다가 1620년에 유몽인이 지은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처음으로 기록되었다. 그 후 인조 7년(1629)에 정대륭이 논개가 순국한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새겼고, 영조 16년(1740)에는 사당인 의기사(義妓祠)를 세웠다. 그 이듬해에는 비를 보호하기 위해 비각을 짓고, 처마 밑에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라는 편액(扁額)을 달았다.
의암바위
원래는 위험한 바위라 하여 위암으로 불리다가 임진왜란 때 논개가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이 바위로 유인해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한 후 논개의 의로운 행동을 기리기 위하여 의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의암 바위 옆에 새겨진 '의암'이라는 글씨는 정문부의 유언에 따라 그의 둘째 아들 정대륭이 전서체로 쓴 글씨인데 남강에 물이 찼을 때는 안보이다가 물이 빠지면 보인다.
진주수목원
이용시간
동절기(11~ 2월) : 09:00~17:00 * 입장마감16:00
하절기(3~ 10월) : 09:00~18:00 * 입장마감 17:00
수목원 휴원일
매주 월요일(공휴일 또는 연휴인 경우 그 다음날) 1월 1일(신정), 설날(구정), 추석
일반기준
성인 1,500원 / 군인 / 청소년 1,000원 / 어린이 500원 주차료 무료
전동관람차 운행안내
운행기간
매년 3월1일 ~ 11월30일 09시30분 ~ 16시30분(마지막 탑승시간/30분 소요)
운행횟수 평일(8회) / 주말(13회) / 탑승인원 12명 / 운행거리 3.8km
휴무일 매주 월요일, 우천시, 동절기(12월부터 다음해 2월말일까지 운행 중지)
탑승요금 안내
성인(만 19세 이상) 2,000원 / 군인 및 청소년(만 13세 이상-만 18세 이하의 자와 정복을 착용한 하사 이하의 군인
(전투경찰 의무경찰 경비교도 및 공익근무요원 등 포함) 1,500원 / 어린이(만 7세이상-만 12세 이하) 1,000원
제41회 금산세계인삼축제는 6일부터 오는 15일까지 10일간에 걸쳐 금산인삼엑스포 광장 및 인삼약초시장, 금산읍 일원에서 개최된다. 특히 올해 축제에선 외국인 방문객의 방문도 눈에 띄었다. 금산군은 이번 축제에 외국인 인플루언서 팸투어, 외신기자 방문을 비롯해 교류 도시‧단체 초청, 문화탐방, 학술 세미나 등을 진행했다. 라오스, 니카라과, 세네갈, 몽골, 라트비아, 체코 등 11개국 주한대사관 임직원‧관계자들과 3도3군관광협의회에서 출시한 상품을 통해 일본인 관광객들도 축제장을 찾았다. 이외에도 체험, 경연‧공연, 전시‧학술‧교역 등 총 52개 프로그램은 각자 세대별 대상에 맞춰 추진되며 인기몰이에 한몫했다.
백종원이 참여한 푸드코너에서는 인삼국밥, 인삼쌀국수, 인삼소시지, 삼구마칩(인삼고구마칩) 등 음식을 선보였고 ‘금산인삼‧깻잎 푸드코너’, ‘금산인삼 푸드테크’, ‘인삼푸드트럭’, ‘금산 명품 삼계탕 판매코너’ 등을 통해 음식으로의 금산인삼의 면모를 보여줬다.
인삼약초시장 차 없는 거리에서 진행된 '인삼주병 만들기' 체험도 인기였다. 전국의 관광객뿐 아니라 외국 관광객도 흥미를 가지고 참여하며 인삼주에 들어가는 인삼꽃을 만들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보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첫댓글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함께해서 너무너무 즐거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