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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병이 든 맹꽁이 형제
글 : 맹꽁이 오소운 원장
맹꽁이는 낮에는 아버지를 따라 논밭에 나가 일을 하고, 밤에는 밤을 새워 공부하면서 시름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몸은 날로 허약해졌고, 웃음도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한낱 즐거움이 있다면, 저녁에 예배당에 아이들을 모아놓고 찬송가와 세계 명곡을 가르치는 시간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아리실 교회에는 오르간이 없었고 찬양대도 없었습니다. 맹꽁이는 10대 소년 소녀들로 찬양대를 만들러 매일 밤 찬양 연습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또 세계 명곡을 혼자서 공부하여 익힌 다음 창호지(窓戶紙)에 붓글씨로 써 붙여놓고 가르칩니다.
가르친 명곡들은 중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곡들은 물론, 오페라 아리아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때를 회상하면 맹꽁이의 입가에는 미소가 흐릅니다. 웬만한 것은 한 주일 내내 가르치면 아이들이 다 외우는데, 한 곡만은 도저히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 곡은 마스카니(Mascagni)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Cavalleria Rusticana)>란 오페라의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란 합창입니다. 이 곡은 전문 합창단도 하기 힘든 곡입니다. 두 개의 합창단이 부르게 되어 있는데, 한쪽에서는 4분의 4박자 곡조를 부르고, 또 한 합창단은 4분의 3박자 곡조를 동시에 부르도록 작곡된 세상에도 특이한 곡조였습니다.
그런데 맹꽁이는 이 곡의 아름다움에 홀딱 반하여 이 곡조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겠다고 덤벼든 것입니다. 그것도 악보를 볼 줄 아는 아이는 하나도 없고, 악보도 없이 창호지에 쓴 가사만을 놓고, 맹꽁이가 ‘아아 아!’ 하고 노래를 하면 따라 하는 데, 이게 되겠습니까.
아이들은 ‘무슨 노래가 이러냐’,‘ 아무리 유명한 음악가의 작곡이라지만, 재미가 하나도 없다’ 하며 야단들이었습니다. 며칠을 애만 쓰던 맹꽁이는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이 때에 맹꽁이에게서 노래를 배운 아이들이 지금은 모두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교회의 권사가 되고 목사도 되었습니다. 그들은 맹꽁이 생일날 모여와서는 그 때 배운 명곡 덕분에 자식들에게 음악을 잘 아는 유식한 엄마, 할머니가 되었다며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1947년 여름, 시름시름 앓던 맹꽁이가 마침내 몸져눕고 말았습니다. 계속 설사만 하는데, 아버지가 아무리 간절히 기도하며 약을 지어 주어도 설사가 멎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때마침 맹꽁이네 집에는 귀신 들린 사람이 와서 맹꽁이 아버지의 기도로 거의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맹꽁이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의 병을 위해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자, 하는 수 없이 서울 병원으로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맹꽁이의 큰 누님(吳永順 작고)이 서울 북아현동 복주물 아래에 살고 있고, 누님네가 나가는 아현성결교회에는 ‘성향사(誠香舍)’라는 병원을 경영하는 이성구(李誠求)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맹꽁이는 성향사 병원에를 매일 다녔지만, 설사는 멎지를 않고, 가끔 기절까지 하는 것입니다. 따라 와서 간병을 하던 아버지는 병이 전혀 차도가 없고, 매일 기절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마침내 결단을 내립니다.
“안 되겠다. 죽더라도 집에 가서 죽자.”
그러자 큰 누님과 매형이 입을 열었습니다.
“맹꽁이는 공부 병에 걸렸어요. 마음이 병난 거예요.”
“학교 가고 싶은 애를 잡아 놓으시니 왜 병이 안 나겠어요?”
그러자 아버지 안색이 달라졌습니다.
“죽어도 아리실을 떠나게 할 순 없다. 자 가자.”
맹꽁이는 아리실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집에 돌아와 보니 동생 영근(榮根, 목사)이가 정신이 나가서 횡설수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귀신들린 여자는 다 나아서 집으로 돌아가고 없었습니다. 이제 맹꽁이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막내아들 영근이를 위해 기도하며,
“너도 하나님께 회개하며 열심히 기도하여라.”
라고 말했습니다.
“애통하구 회개해유.”
영근이의 이 정신없는 말에 식구들은 실소를 하였습니다.
“열 세 살 짜리 어린 네가 무슨 죄가 있다구 애통하고 회갤 하니?”
어머니가 눈물어린 눈에 미소를 담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영근이는 갑자기 허공을 쳐다보며
“꺼먹 부채!”
라고 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아니 어디 꺼먹 부채가 있다고 그러니?”
친정에 와 있던 작은 누님(完淳, 감학봉 목사 사모)이 말하자 영근이는 계속
“꺼먹 부채! 꺼먹 부채!”
하면서 허공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철야를 하며 두 아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맹꽁이도 동생을 위해 기도하며, 안 되겠다 싶어 기운을 차려 죽을 먹기 시작하였습니다.
약도 안 썼는데 설사가 멎었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영근이도 완전히 제정신이 돌아와 언제 앓았드냔 듯싶게 건강해졌습니다.
목사 부인이 된 작은 누님은 , 후에 이 때 일을 회상하며, 맹꽁이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때 아버지께서 귀신들린 사람들을 많이 고쳐 주셨지. 그러자 귀신들이 우리 집안을 뒤흔들었던 것 같애.”
맹꽁이도 그 말에 동감이었습니다.
36. “소가 밥해?”
맹꽁이 아버지는 맹꽁이의 결혼을 서두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공부하러 서울 가겠다는 맹꽁이의 마음을 잡아 놓으려면 그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기 저기서 중매가 들어왔습니다. 인근 교회에서
“아리실 교회 오장로가 며느리 감을 찾는대.”
하자, 여러 군데서 중매쟁이들이 들락거렸습니다.
맹꽁이는 불안하였습니다. 중매쟁이가 왔다 갈 적이면 맹꽁이는 동구 밖까지 따라 나가
“헛수고하지 마십시오. 전 서울로 가서 공부하고, 외국 유학을 다녀 온 후, 빨라야 10년 후에 결혼할 겁니다. 그러니 다시는 오지 마십시오.”
하고 못을 박아 보냈습니다. 몇 번 그러자 이웃 교회의 중매는 수그러들었는데, 이번에는 한 마을에 사는 큰 이모가 아리실서 10 킬로 떨어진 어느 교회 권사님 딸을 중매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이모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와서 그 처녀에 대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였습니다. 예쁘고, 건강하고, 일 잘하고, 믿음이 좋고, 온 집안이 다 잘 믿고, 맘씨 착하고...하나도 나무랄 데 없는, 맹꽁이에게는 넘치는 배필 감이라는 것입니다.
“이모, 전 그렇게 훌륭한 규수하고는 결혼 못합니다. 결혼이라는 게 비슷해야 하지, 그런 기우는 결혼 해 봤자 나만 기죽어 살게 되니 난 싫어요.”
맹꽁이의 말에 이모는 말이 막혔습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지기 싫어하는 이모였습니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너 같이 약해 빠지구 성질 고약한 놈, 그래두 이 이모나 되니까 중매를 서겠다구 나서지, 너 나 아니면 장가 못 가구 몽달귀신 된다. 뭘 알기나 하구 싫다구 해야지.”
“아니 조카보구 ‘빌어먹을 자식’이라니, 동생 너무 하지 않아?”
어머니는 듣다 못해 동생을 나무랐습니다.
“내가 틀린 말 했수? 말이야 바른 말이지, 맹꽁이 쟤가 힘이 좋아 일을 할 줄 아나, 생기기를 잘 생겼나, 눈깔만 커다란 게, 싸리 빗자루 같이 삐적 말라가지구 맨날 깡깽이를 켜질 않나, 책만 붙들구 있질 않나, 그런 놈이 형부 돌아가시면 내 말대루 빌어먹을 게 뻔하다구. 그래서 건강하구 일 잘 하구 맘씨 착한 처녀에게 장가를 보내 주겠다는데, 제 형편은 알지도 못하구 뭐? 싫다구? 너 나 아니면 장가 못 간다. 아니 어떤 정신 나간 계집애가 네게 시집 오겠다구 해두 내가 조밥 싸 가지구 다니며 말리겠다.”
이모는 그렇게 퍼붓더니 휭하니 집으로 갔습니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또 다시 맹꽁이를 설득하였습니다.
“내 나이 올에 60이다. 우리 집안은 단명(短命)하여 모두 60을 넘기지 못했는데, 나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 죽기 전에 며느리도 보고 손주도 안아보고 싶구나. 가세(家勢)는 날로 기울어져 가는데, 네가 어서 성가(成家)를 하여 이 집안을 일으키거라. 네 이모가 말하는 규수는 내 맘에 꼭 든다. 아 일두 잘 한다지 않느냐?”
“일을 잘 한다구요? 결혼 비용으로 소를 사면 더 일을 잘 할 텐데요.”
그러자 아버지가 꽥 소리를 질렀습니다.
“소가 밥 해?”
이 말에 어머니가 웃음을 터뜨리고, 맹꽁이도 웃었습니다. 아버지도 멋쩍게 웃으며 어쨌든 추진하겠다고 선언을 하였습니다.
색시 아버지가 선보러 온다는 날, 맹꽁이는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습니다. 나무를 다해 놓고도 집에 가기가 두려웠습니다. 해가 다 진 다음에 집에 돌아와 보니, 못 온다는 기별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온다는 날에는 병이 나서 못 왔다는 기별이었습니다. 맹꽁이는 자신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 색시 아버지가 못 오게 해 달라고 한 기도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왜 온다는 사람이 두 번이나 약속을 어기지요?”
“글쎄다. 이번엔 병이 났다는구나.”
“아닙니다. 제가 오지 못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했거든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아무 데나 하나님의 뜻을 들먹이는 게 아니다.”
“아버지, 언제 또 온대요?”
“한 주일 후에 온다는구나.”
맹꽁이는 용기를 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만약 한 주일 후에 오면, 저 아버지 말씀대로 결혼하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다.”
“그 대신 그 날도 만약 안 오면, 이 결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줄 아시고 없었던 일로 해 주세요.”
아버지는 대답을 못 했습니다.
“한 번은 일이 있어서 못 오고, 한 번은 병이 나서 못 오고, 이번에도 또 못 온다면 하나님이 원치 않는 결혼이라 믿어도 되겠지요?”
“그래, 네 말대로 하자.”
맹꽁이는 그 날부터 하나님께 그 날 오지 못하게 해 달라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 날이 되었습니다. 새벽기도를 가려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보니, 눈이 50 센치도 넘게 쌓여 있었습니다.
“야호!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 주셨다!”
아버지도 일어나 나와 보시더니
“이 결혼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같구나. 더 이상 얘기 안 하마.”
하셨습니다.
사흘 후 먼 길을 찾아 온 색시 아버지에게 전후 사정을 얘기하는 아버지는 진땀을 흘리셨고, 그 권사님도 이해하고 돌아갔습니다. “소가 밥해?” 이 말은 아리실에 한 동안 유행되었습니다.
37. 비행기를 만드는 아이
맹꽁이의 결혼이 물 건너가자, 아버지는 노골적으로 맹꽁이를 핍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힘든 농사일을 어서 익혀서, 딴 맘 못 먹고 농사일을 하게 하려는 심산(心算)이었습니다.
맹꽁이는 지게질이 아주 서툴렀습니다. 나무를 해 가지고 지게에 지고 오다가, 적어도 서너 번은 쉬어야 하는데, 지게를 세우다가 넘어뜨리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러면 가랑잎이나 솔 가래로 된 나무 짐은 다 풀어져, 다시 그것을 긁어 묶다 보면 나뭇짐은 반으로 줄고, 해가 져야만 집에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 까치 집 만한 나무하는데 하루해가 걸렸단 말이냐? 뒷집 정호(正鎬)를 보아라. 너하구 동갑인데 나뭇짐이 산더미 같고, 그 애 애비는 새파란 나이에 힘든 일 자식에게 맡기고 편히 지내지 않느냐?”
아버지는 맹꽁이가 일을 잘 못 할 적이면, 꼭 친구하고 비교해 말하는 게 싫었습니다. 사람은 각각 다른 재능을 타고나는데, 그 타고난 재능을 살려서 사는 사람은 성공하지만, 자기 재능과 다른 일을 하는 사람은 실패한다는 걸 맹꽁이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홍란파 선생이 쓴 <세계의 악성(樂聖)> 이란 책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헨델이, 음악을 하고 싶어했지만, 아버지의 강권에 못 이겨 법학을 공부하다가, 아버지 죽은 다음에 다시 음악을 했다는 이야기를 읽고, 자기는 그런 어리석은 일은 않겠다, 자기 가고 싶은 길로 가겠다고 다짐까지 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툭하면 자기를 뒷집 정호하고 비교하여 무능력자로 깎아 내리기까지 하는 것이 아주 못 마땅했습니다.
어느 날인가, 맹꽁이는 이 날도 가랑잎을 긁어서 꼭꼭 묶었습니다.
“이만 하면 정호의 나무 짐보다 못하진 않겠지.”
맹꽁이는 기분이 좋아서 집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번 쉬는 자리에서, 그렇게 조심한다고 했는데, 지게가 나뒹굴어버렸습니다. 단단히 묶은 나뭇짐은 데굴데굴 굴러 내려가 엉구렁텅이에 콱 박혀버렸습니다. 아무리 빼내려 해도 제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빈 지게로 갈 수는 없고, 맹꽁이는 하는 수 없이 다시 산으로 올라가 마른 삭쟁이 가지 얼마를 잘라 정말 까치집 같은 나뭇짐을 지고 해거름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가 이를 보고
“아니, 하루 종일 요걸 나무라고 했단 말이냐?”
하고 화를 냅니다.
“가랑 나무 한 짐 해 가지고 오다가 엉구렁텅이에 빠뜨리고, 빈 지게로 올 수 없어서...”
“빠뜨린 데가 어디냐?”
“풀무골 골짜기예요.”
아버지가 지게를 지고 가서 그 나뭇짐을 지고 돌아왔습니다.
저녁 먹는 자리에서 아버지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정말로 네 장래가 걱정이다. 세상은 날로 살아가기 힘들어지는데, 나는 하루가 다르게 몸이 안 좋고, 약도 없어서 팔 수가 없고, 우리 논은 모두 천수답(天水畓)이 되어버렸는데, 너는 몸이 약해 농사일을 잘 못하니...뒷집 정호만 보면 난 그게 그렇게 부럽구나.”
맹꽁이는 쓸쓸해하는 아버지를 위로했습니다.
“아버지, 사람이 살아가는 길은 여러 가지가 아녜요? 힘으로 하는 일은 힘이 있어야 하지만, 지혜로 하는 일은 아무리 힘이 세어도 못 합니다. 지혜가 있어야 그 일을 할 수가 있잖아요. 저는 몸은 비록 약해 정호처럼 힘든 일은 못해도, 머리가 좋지 않아요? 이 머리, 이 지혜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면 저는 성공하지만, 힘으로 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다간, 이모 말대로 빌어먹고 말 거예요.”
“아니, 네 이모가 널더러 빌어먹는다고 했단 말이냐?”
그러자 어머니가 입을 열었습니다.
“일전에 혼사 말이 났을 때 얘가 장가 안 든다구 하니까 그 사람이 화가 나서 ‘빌어먹을 자식’이라구 욕을 했지 뭐예요.”
“그러는 데도 당신은 가만있었소?”
“왜 가만있었겠어요? 너무 심한 말이라구 나무랐더니...”
“그랬더니...”
“몸두 약한 놈이 농사짓자면 힘들 거구, 당신 죽으면 빌어먹을 거라구...”
“아니, 그런 소릴 함부루 해? 내 당장 올라가서 그냥...”
아버지는 그래도 당신 자식을 이모가 ‘빌어먹을 자식’이라고 한 말이 화가 나는 모양입니다. 당장 윗마을로 올라가겠다고 화를 냈습니다.
“아버지, 참으세요. 저는 제 갈 길을 압니다. 정호가 힘으로 하는 일을 잘 한다면 힘을 쓰며 살면 잘 살겠지요. 그러나 저는 하나님이 명석한 두뇌를 주셨으니 그 머리를 쓰며 살면 잘 살 수 있을 거예요. 세계의 발명가, 위인들 모두 힘이 센 사람인 줄 아세요? 저보다 더 허약한 사람도 수두룩해요.”
“네 말에도 일리는 있다.”
아버지도 얼굴의 노기를 풀고 웃으며 맹꽁이의 말에 동조를 했습니다.
“아버지, 정호는, 말하자면, 지금 한양(漢陽)에를 가는데, 짚신 감발을 하고 이미 떠나서 아마 오산(烏山) 쯤 갔을 거예요.”
“그럼 너는?”
맹꽁이는 자신을 가지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지금 비행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정호가 안양, 시흥, 영등포까지 갔더라도 제가 비행기만 완성하면 금새 서울은 물론 미국, 영국 불란서 세계 어디나 갈 수 있어요.”
“허어! 그 녀석!”
“그러니 아버지 좀 참고 기다리세요. 제가 비행기를 만들도록 도와주세요.”
“말로는 네게 못 당하겠다.”
그러자 어머니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럼 말 잘 하는 맹꽁이는 목사가 되면 전도 잘 하겠네요. 하나님의 일도 잘 하고.”
“허허허허...”
아버지는 말은 않고 웃기만 했습니다. 모처럼 기쁨에 찬 웃음이었습니다.
38. 맹꽁이의 가출(家出)
1949년 봄, 맹꽁이는 서울 누님 댁에 다녀온다고 어머니에게 졸라서 아버지의 승낙을 받고 서울로 떠났습니다. 부모님에게는 죄스러웠지만, 자기 갈 길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누님네는 북아현동 골짜기, ‘복주물’ 이라는 약수터 근방에 방 두 개의 단독 주택에 살고 있었습니다. 큰 매형은 사진관을 하며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아니, 네가 웬 일이냐?”
누님 내외는 반기면서도 의아해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완강한 마음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주 집을 나왔어요. 고학을 해서라두 학교는 꼭 다닐 거예요.”
맹꽁이는 걱정하는 누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아버지 어머니 몰래 나왔단 말이냐?”
매형이 물었습니다.
“부모님께는 누님 댁에 다녀 오겠다구 하고 왔는데, 아버지가 데릴러 오셔도 전 안 갈 거예요.”
맹꽁이의 단호한 말에 매형이 걱정이었습니다.
“그게 그리 쉽진 않을 거다. 아버지 고집이 어디 보통 고집이냐?”
“매형님, 부전자전(父傳子傳)이란 말 있지요? 제 고집은 아버지 고집 못지 않아요. 이번엔 단단히 각오하고 나왔으니까, 매형님과 누님이 절 좀 도와주세요. 저도 일자리를 찾아서 밥값은 할게요.”
그리고 누님네 집에 있으면서 아현동의 신문 보급소를 찾아다니며 신문 배달 자리를 구해 보았지만, 너나없이 가난하던 그 시절, 신문 배달 자리도 구하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맹꽁이가 매일 일자리를 구해보려고 나갔다가 힘없이 돌아오는 걸 안쓰럽게 생각한 큰 매형은 어느 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일자리 구하러 다니지 말고 우리 사진관에서 일을 해라.”
맹꽁이는 귀가 번쩍 띄었습니다.
“일 자리가 있어요?”
“일 자리가 있다기보다 네가 나와서 도우며 사진 기술도 배우면 좋지 않겠나 해서 그런다. 요즘 사진관도 잘 안 되어서 어느 날은 한 장도 못 찍고 공치는 날도 있지만, 귀한 우리 처남이 딴 데 가서 구박받는 것보단 나을 것 같으니 내일부터라도 사진관에 같이 나가자.”
맹꽁이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몇 번이나 인사를 했습니다.
맹꽁이의 사진관 생활은 즐거웠습니다. 신촌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거의 다 가서 왼쪽에 자리잡은 2층에 <영신(永信) 사진관> 이란 간판이 붙어 있었습니다.
층계를 올라서면 사무실이 있고, 사무실 옆에 자그마한 암실(暗室)이 있습니다. 사무실에서 촬영실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정면 벽에는 푸른 바다와 흰 갈매기, 뭉게 구름이 그려져 있는 배경(背景) 그림이 있습니다.
친 형님에게 사진 기술을 배워 사진관을 낸 큰 매형은, 먼저 사진사가 기억해 두어야 할 것, 외부에서 출사(出寫) 요청이 왔을 때 가지고 가야 할 물건 외우기부터 가르쳐주었습니다. 모두가 일본식 발음인데 맹꽁이는 지금도 그 말들을 다 외우고 있습니다.
<렌즈, 샷다, 쟈바라; 암바꼬, 도리바꼬, 상갸꾸, 가부리...>
지금 사진기는 아주 발달해서 간단하지만, 1948년대의 사진기는 모두 분리형이어서 이렇게 외우고 챙겨 가야만 실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외우는 맹꽁이의 마음은 하늘을 날 것 같이 기뻤습니다.
그러나 며칠을 기다려도 아들이 돌아오지를 않자, 아버지가 찾아 서울로 오셨습니다.
“네 이 놈! 누님네 다녀온다고 해 놓고는 벌서 며칠째냐? 늙은 애비는 시골서 농사짓느라 뼈가 빠지는데, 장남이라는 너는 여기서 빈둥대고 있어? 당장 내려가자.”
맹꽁이도 각오를 한 바라 강경하게, 울면서 말을 했습니다.
“저 안 가겠어요. 제발 여기 서울에서 공부하게 놔두세요.”
“돈도 없는 녀석이 무슨 수로 공부를 한단 말이냐? 네 누이 가뜩이나 어려운데 너까지 와서 개갤 작정이냐? 어서 가자!”
그러며 팔을 끄는데, 매형이 자기 형님을 데리고 나타났습니다. 큰사위와 그의 형이 나타나자 아버지는 그들과 인사를 하느라 잡았던 맹꽁이의 손을 놓았습니다.
맹꽁이는 아버지에게서 될 수 있는 대로 멀찍이, 문간 쪽으로 앉아서 여차하면 밖으로 도망칠 차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맹꽁이는 매형의 형님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습니다.
아현성결교회의 장로 물망에 오른 매형의 형님 박용장(朴容璋) 집사는 맹꽁이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맹꽁이는 그 동안 아현성결교회 주일학교 선생으로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쳐서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청년회 헌신 예배 날 맹꽁이의 큰 매형은 맹꽁이더러 포스터를 한 장 그려 달랬습니다. 맹꽁이는 청년들이 나팔 불고 북을 치며 노방 전도하는 그림을 그린 다음 거기다가 ‘아현성결교회 청년회’란 글을 써넣었는데, 그 그림을 단상에 붙이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청년회 고문이었던 [성향사 의원]의 이성구 장로는 기도할 때,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는 그림 보기가 부끄럽다며, 그 자리에서 나팔과 북 살 돈을 헌금하여 그림 그대로 청년회가 나팔 불고 북 치면서 노방 전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장 어른, 저렇게 애절하게 공부하겠다는데, 놔두시지요. 지금 제 동생네 사진관에서, 사진 기술도 배우고 잔심부름도 하며, 적당한 기회를 찾고 있는데, 힘드시더라도 두고 내려가십시오. 아드님 공부하는 일은 저희 형제가 알아서 잘 돌보겠습니다.”
아버지는 어려운 사돈의 말이라 더 이상 고집을 못 부리고 한숨만 쉬고 있더니 아리실로 돌아갔습니다. 맹꽁이는 속으로 아버지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정말 죄송합니다. 꼭 아버지가 원하시는 하나님의 종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