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 국밥집 / 김치주
젊은 시절 나의 직업은 집 장수였다. 헌 집을 수리해서 되팔고, 싼 땅을 구해 집을 지어 파는 직장이었다. 그것도 서른이 채 안 된 새파란 새댁이 아이를 등에 업고, 험한 공사판에 뛰어든 것이었다. 결혼하던 당일, 남편이 지병을 앓고 있는 것을 알았으니, 서러운 팔자에 노동으로 생계를 헤쳐 나가야할 그런 운명이었다.
친척 집 아저씨에게 일을 배우고 고령에서 첫 공사할 때였다. 공사장 일꾼들은 돌아서면 늘 허기가 졌다. 그럴 때면 고령시장 국밥집으로 향했다. 흙 묻은 옷을 털고 국밥집에 들어서면 중년의 여주인은 언제나 구수한 미소로 우리를 맞았다. 가마솥에서 벌겋게 끓어오르는 국물은 저절로 침이 고이게 했다.
주인은 김이 무럭무럭 나는 국밥을 차려놓고 "먹고 더 드세요." 나에게 넉넉한 인심을 보였다. 같은 여자의 관점에서 그것도 젊은 새댁이가 집을 짓는 공사장에서 일하고 국밥 먹는 모습이 딱해 보였던 것일까, 그렇게 몇 달 동안 국밥집 아주머니와 정이 들었다.
어느 날 아주머니는 개진에 사는 친정 오빠가 집이 낡아 새집을 지을 계획이라고 소개해 주었다. 이튿날 일꾼들과 개진으로 찾아갔다. 허물어가는 초가집이었다. 지붕은 썩어서 거무스레한 볏짚이 덮여 있었고, 대문 없는 토담 위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인기척을 내자 방문을 열고 주인이 신발을 끌며 나왔다.
“새댁이가 집을 짓는 분이요?”
남자는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젊은 여자가 집을 짓는다고 찾아왔으니 그 당시로는 놀랄 법도 했다.
어디에 집을 짓느냐고 물어보니 손으로 도라지밭을 가리켰다. 일꾼이 삽으로 한 자 정도 파 내려갔다. 잠깐 멈추고 손바닥으로 만져보라 하니 물기가 자작하게 묻어났다. 주인에게 논농사 짓던 곳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몇 년 전까지 논이었다고 했다. 시골 땅은 집을 올릴 때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이 많다. 맨땅이라고 기초를 단단하게 하지 않으면 완공한 다음 집 전체가 기울 수도 있다.
집을 짓기 위해 기초부터 다졌다. 바닥에서부터 석 자 정도 1m를 파냈다. 그리고 합판을 대고 철근을 바닥에서부터 단단하게 깔았다. 그 위에 통 콘크리트를 쳤다. 보름이 지나자 단단하게 양생이 되었다. 그 위에 먹줄을 놓고 벽돌을 쌓았다. 그리고 1층 천장을 만들고 슬라브를 쳤다. 1층은 농업용 창고가 되었다.
또 보름이 지났다. 바닥에 먹줄로 방 구조를 그렸다. 문틀이 올라가면서 미장의 칼날이 미끈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친척 건축업자를 따라다니면서 배운 기술대로 빈틈없이 집을 지어나갔다.
어느 날 어디에서 ‘쾅’ 하는 벼락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건너편 공사장에서 대문 슬래브가 바닥을 치는 소리였다. 가보니 집 전체가 주먹이 들어갈 만큼 갈라져 있었다. 역시나 기초를 다지지 않은 것이 원인이었다.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우리 공사장 주인도 달려왔다. 그는 우리 집도 무너지는 것은 아니냐고 따지듯이 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처럼 야물게 짓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는 기초공사를 할 때부터 짐작이 갔다고 했다. 시골집에 땅을 저렇게 많이 파고 철근을 통째 넣어서 짓는 집은 못 봤다고 했다. 처음에는 여자가 집을 짓는다고 해서 긴가민가했는데 안심이라며 웃었다.
며칠 후 국밥집 아주머니한테서 좀 들리라는 연락이 왔다. 아주머니는 고기가 가득 담긴 특제 국밥을 차려주었다. 친정집을 잘 지어서 고맙다는 인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와 일꾼을 부른 까닭은 다른 곳에 있었다. 이웃 길가에 헌 집을 철거하고 새 건물을 짓는다며 또다시 건축주를 소개해 주었다. 이 층 양옥을 허물고 4층 상가를 짓는다고 했다. 나로서는 첫 대규모 공사였다. 가슴이 뛰었다.
다음날 현장에 갔다. 우선 땅을 살피기 위해 목수에게 남쪽과 서쪽의 수평을 보라 했다. 목수는 남쪽이 서쪽보다 일 미터 오십 센티미터가 높다고 했다.
공사가 시작되었다. 안전 막을 가리고 굴삭기가 들어갔다. 기계 소리가 우렁차게 ‘탕탕’ 들려오고 건물은 허물어졌다. 이제부터는 굴삭기로 흙을 끌어내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한참 잔토를 끌어내더니 기사가 내려왔다. 암반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지반에 암석이 받쳐있으니 철근은 많이 들어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암반을 잘만 이용하면 한 층 더 올릴 수도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주인을 불렀다. 그리고 구조 변경을 제안했다. 남쪽에서 보면 사층 건물이고 서쪽에서 보면 오층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사층 건물을 5층 건물로 만들어 준 것이다. 드디어 건평 삼백 평 건물이 완공되었다. 일 층부터 사층까지 상가이고 오층에는 살림집이 들어섰다.
집주인은 건축비 정산이 끝나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일백만 원을 더 주었다. 지금 돈으로 치면 천만 원이 넘는 돈이었다. 그 돈을 일꾼들과 의좋게 고루고루 나누었다.
마지막 날, 일꾼들을 데리고 국밥집을 찾았다. 나는 그날 그때로는 제법 귀한 선물이었던 화장품 세트를 선물로 준비해서 진심으로 고맙다고 인사를 드렸다. 그렇게 국밥을 먹으면서 이날까지 40년 넘는 인생 친구가 되었다.
젊은 시절 그렇게 살아보려고 애쓰던 시절, 나에게는 고맙고 눈물 나는 고령 국밥집이었다.
[김치주] 수필가. 《한국수필》신인상 등단. 수필 알바트로스 회원
* 대구일보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어른들 명으로 얼굴도 못 본 채 한 결혼이었다고 해요. 신혼여행지에서, 식사 후에 약을 한 움큼이나 먹는 남편이, 어릴 적부터 지병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합니다. 병든 남편을 봉양하며, 아이를 업고 건축 현장을 누볐다고 하네요. 벽돌을 나르고 시멘트를 비비며. 그렇듯 키운 아이가 어언 40대의 중반이 되었고요. 평생 등짐이 된 남편은 여전히 옆에서 자리를 보전하고 있답니다. 세상에 다시없는 분이네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를 증명해 보였네요. 진심을 다하고 최선을 보태니 감사하게도 선한 이웃이 도와주었네요. 대단한 여장부이시고 그 희생과 열정에 숙연해집니다.
‘집 장수’,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풍랑 거친 삶의 바다에서 굳건한 삶을 영위해 오신 작가는, 차원이 다른 층위를 이루셨습니다. 삶의 구체적인 현장과 닿아 있는 글, 그래서 공감을 확장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