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관(金在瓘)
[문과] 헌종(憲宗) 3년(1837) 정유(丁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3위(33/41)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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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 을묘(乙卯) 1795년 (정조 19)
합격연령 43세
본인본관 김해(金海)
거주지 진주(晉州)
[관련정보]
[음관] 문음진신보(文蔭縉紳譜)
[이력사항]
선발인원 41명 [甲3‧乙7‧丙31]
전력 유학(幼學)
[가족사항]
[부(父)]
성명 : 김상추(金尙秋)
[조부(祖父)]
성명 : 김경문(金璥文),김경(金璥)
[증조부(曾祖父)]
성명 : 김용서(金龍瑞)
[8대 - 8대조1:7대조1의 부]
성명 : 김일손(金馹孫)
[외조부(外祖父)]
성명 : 강취백(姜就伯)
본관 : 미상(未詳) 진주(晉州)
[처부(妻父)]
성명 : ▣○○(▣○○)
본관 : 미상(未詳)
[출전]
『국조방목(國朝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貴 11655])
김일손(金馹孫)
[문과] 성종(成宗) 17년(1486)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2[亞元]위(02/33)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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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계운(季雲)
호(號) 탁영자(濯纓子)(주1)
시호(諡號) 문민(文愍)【補】(주2)
생년 갑신(甲申) 1464년 (세조 10)
졸년 무오(戊午) 1498년 (연산군 4)
향년 35세
합격연령 23세
본인본관 김해(金海)
거주지 청도(淸道)【補】(주3)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전기 『탁영집』을 저술한 학자. 문신.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또는 소미산인(少微山人). 대대로 청도에서 살았다.
할아버지는 김극일(金克一)이고, 아버지는 집의(執義) 김맹(金孟)이며, 어머니는 이씨이다.
1486년(성종 17) 생원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이 해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이어 같은 해에 식년 문과 갑과 제2인으로 급제하였다.
처음 승문원에 들어가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곧 정자(正字)로서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였다. 그 뒤 진주의 교수(敎授)로 나갔다가 곧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운계정사(雲溪精舍)를 열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에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정여창(鄭汝昌)·강혼(姜渾)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다시 벼슬길에 들어서서 승정원의 주서(注書), 홍문관의 박사·부수찬(副修撰), 전적(典籍)·장령(掌令)·정언(正言)을 지냈으며, 다시 홍문관의 수찬을 거쳐 병조좌랑·이조좌랑이 되었다.
그 뒤 홍문관의 부교리(副校理)·교리 및 헌납(獻納)·이조정랑 등을 지냈다.
관료 생활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사가독서(賜暇讀書:재능이 있는 문신들에게 문흥을 위해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한 제도)를 하여 학문과 문장의 깊이를 다졌다. 그리고 주로 언관(言官)에 재직하면서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위하라는 과감한 주장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훈구파의 불의·부패 및 ‘권귀화(權貴化:권세가 있는 귀족으로 됨)’를 공격하고 사림파의 중앙 정계 진출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 결과 1498년(연산군 4) 유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에서 조의제문(弔義帝文)의 사초화(史草化) 및 소릉 복위 상소 등 일련의 사실 때문에 능지처참을 당했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복관되고, 중종 때 직제학(直提學), 현종 때 도승지, 순조 때 이조판서로 각각 추증되었다.
17세 때까지는 할아버지 김극일(金克一)로부터 『소학(小學)』·사서(四書)·『통감강목(通鑑綱目)』 등을 배웠으며, 이후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평생 사사하였다.
김종직의 문인 중에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 등과 같이 ‘수기(修己:자기 자신을 닦으면서 수양함)’를 지향하는 계열과, 사장(詞章)을 중시하면서 ‘치인(治人:남을 다스리는 정치)’을 지향하는 계열이 있었는데, 후자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한편, 현실 대응 자세는 매우 과감하고 진취적이었다. 예컨데 소릉 복위 상소나 조의제문을 사초에 수록한 사실 등에서 정치적 성향을 엿볼 수 있다.이는 세조의 즉위 사실 자체와 그로 인해 배출된 공신의 존재 명분을 간접적으로 부정한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극히 모험적인 일이었다. 이같은 일련의 일들이 사림파의 잠정적인 세력을 잃게 한 표면적인 원인이 되었다.
저서로는 『탁영집(濯纓集)』이 있으며, 「회로당기(會老堂記)」·「속두류록(續頭流錄」 등 26편이 『속동문선(續東文選)』에 수록되어 있다. 자계서원(紫溪書院)과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일손(金馹孫))]
[생원] 성종(成宗) 17년(1486)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생원] 1등(一等) 1[壯元]위(1/100)
[진사] 성종(成宗) 17년(1486)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진사] 1등(一等) 2위(2/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甲3‧乙7‧丙23]
전력 생원(生員)
관직 한림(翰林)
관직 호당(湖堂)
관직 이조정랑(吏曹正郞)
문과시제 책문(策問)
타과 성종(成宗) 17년(1486)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1등(一等) 1위[壯元]
성종(成宗) 17년(1486)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1등(一等) 2위
기타 무오사화 피참화(戊午史禍被慘禍) 점필문인(佔畢門人) 유문명(有文名) 포암찬갈(圃巖撰碣)
[가족사항]
[부(父)]
성명 : 김맹(金孟)[文]
[조부(祖父)]
성명 : 김극일(金克一)
[증조부(曾祖父)]
성명 : 김서(金湑)
[외조부(外祖父)]
성명 : 이양(李讓)(주4)
본관 : 용인(龍仁)【補】
[처부(妻父)]
성명 : 우극관(禹克寬)(주5)
본관 : 단양(丹陽)【補】
[처부(妻父)2]
성명 : 김미손(金尾孫)
본관 : 예안(禮安)【補】
[안항(鴈行)]
형(兄) : 김준손(金駿孫)[文]
형(兄) : 김기손(金驥孫)[文]
서형제(庶兄弟) : 김원손(金元孫)【補】
서형제(庶兄弟) : 김형손(金亨孫)【補】
서형제(庶兄弟) : 김이손(金利孫)【補】
서형제(庶兄弟) : 김정손(金貞孫)【補】
서형제(庶兄弟) : 김흠손(金欽孫)【補】
서형제(庶兄弟) : 김명손(金明孫)【補】
서형제(庶兄弟) : 김문손(金文孫)【補】
서형제(庶兄弟) : 김사손(金思孫)【補】(주6)
[가족과거]
숙부(叔父) : 김용(金勇)[文]
[주 1] 호 : 탁영자(濯纓子) 이외의 호는 이당(伊堂), 운계은사(雲溪隱士), 소미산인(少微山人), 영귀학인(咏歸學人), 와룡초부(臥龍樵夫), 반계거사(磻溪居士) 등이 있음.
[주 2] 시호 : 「『승정원일기』 2302책, 순조 34년(1834) 5월 30일」 기사를 참고하여 시호를 추가.
[주 3] 거주지 : 『허암유집(虛庵遺集)』 續集卷3, 摭錄, [무오사화당적(戊午士禍黨籍)]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주 4] 외조부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권26, 명류(名流), [김맹(金孟)의 묘갈명(墓碣銘)]을 참고하여 외조부 본관을 추가. 『김해김씨삼현파족보(金海金氏三賢派族譜)』(1925)를 참고하여 외조부명을 추가.
[주 5] 처부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06]) 내의 급제 기록에 두주로 "갈문무전후취우당삭(碣文無前后娶禹當削)"이라고 적혀 있음.
『후천집(朽淺集)』 卷8, 行狀, [김탁영행장(金濯纓行狀)], 『포암집(圃巖集)』 卷18, 墓碣, [탁영김선생묘갈명(濯纓金先生墓碣銘)](尹鳳朝), 『탁영집(濯纓集)』 卷6, 附錄, [신도비명(神道碑銘)](尹鳳朝)에도 처부 우극관(禹克寬)에 대한 내용은 없음.
[주 6] 안항 : 『허백정집(虛白亭集)』 卷3, 碑誌, [도총부경력 겸 사헌부집의 김공 숙인이씨부장묘도비명(都摠府經歷兼司憲府執義金公淑人李氏祔葬墓道碑銘)]을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06])
김맹(金孟)
[문과] 세종(世宗) 23년(144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5위(08/33)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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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자진(子進)
호(號) 남계(南溪)【補】(주1)
생년 경인(庚寅) 1410년 (태종 10)
졸년 계묘(癸卯)【補】(주2) 1483년 (성종 14)
향년 74세
합격연령 32세
본인본관 김해(金海)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전기 좌익원종공신 3등에 책록된 공신.문신.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자진(子進). 김항(金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서(金湑)이고, 아버지는 김극일(金克一)이며, 어머니는 한성부윤 이간(李暕)의 딸이다.
생원시를 거쳐, 1441년(세종 23)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감찰·김천도찰방·예조좌랑이 되었다.
1451년(문종 1) 평안도도사를 거쳐 고령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455년(세조 1) 좌랑으로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3등에 책록되고, 곧 의금부진무를 거쳐 오위도총부경력을 역임하였다. 성종 초에 집의에 올랐다가 퇴직하였다.
성품이 단아, 청렴하고 명예와 이익에 초연하였으며, 부자가 모두 문명을 떨쳤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맹(金孟))]
[생원] 세종(世宗) 20년(143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생원]
[진사] 세종(世宗) 20년(143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진사]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乙3‧丙7‧丁23]
전력 생원(生員)
관직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문과시제 책문(策問)
타과 세종(世宗) 20년(143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세종(世宗) 20년(143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가족사항]
[부(父)]
성명 : 김극일(金克一)
[조부(祖父)]
성명 : 김서(金湑)
[증조부(曾祖父)]
성명 : 김항(金伉)
[외조부(外祖父)]
성명 : 이간(李暕)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정중건(鄭仲虔)
본관 : 진양(晉陽)【補】
[처부(妻父)2]
성명 : 이양(李讓)(주3)
본관 : 용인(龍仁)【補】
[안항(鴈行)]
형(兄) : 김건(金健)【補】
제(弟) : 김용(金勇)[文]
제(弟) : 김순(金順)【補】
제(弟) : 김인(金靭)【補】
제(弟) : 김현(金弦)【補】(주4)
[가족과거]
자(子) : 김준손(金駿孫)[文]
자(子) : 김기손(金驥孫)[文]
자(子) : 김일손(金馹孫)[文]
손(孫) : 김대유(金大有)[文]
[주 1] 호 : 『김해김씨삼현파족보(金海金氏三賢派族譜)』(1925)를 참고하여 호를 추가.
[주 2] 졸년 : 『김해김씨삼현파족보(金海金氏三賢派族譜)』(1925)를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3] 처부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권26, 명류(名流), [김맹(金孟)의 묘갈명(墓碣銘)]을 참고하여 처부2 본관을 추가. 『김해김씨삼현파족보(金海金氏三賢派族譜)』(1925)를 참고하여 처부1 본관과 처부2의 이름을 추가.
[주 4] 안항 : 『허백정집(虛白亭集)』 卷3, 碑誌, [도총부경력 겸 사헌부집의 김공 숙인이씨부장묘도비명(都摠府經歷兼司憲府執義金公淑人李氏祔葬墓道碑銘)]을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06])
김극일(金克一)
출생일 미상
사망일 미상
조선전기 청도에서 지성으로 조부모와 부모를 봉양하여 효자정려를 받은 효자.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용협(用協), 호는 모암(慕庵). 할아버지는 김항(金伉)이고, 아버지는 의흥현감(義興縣監) 김서(金湑)이며, 부인은 한성부윤 이간(李暕)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조부모와 부모를 지성으로 봉양하였고, 장성한 뒤에는 장인의 간곡한 사관 요청이 있었으나, 양친의 봉양을 이유로 거절하고 성심을 다하여 봉양하는 등 효행으로 명성을 떨쳤다. 또한, 아들 김맹(金孟)은 물론 손자 김준손(金駿孫)·김기손(金驥孫)·김일손(金馹孫)의 훈회에도 정성을 기울여 이들 모두가 문과에 급제할 수 있는 학식과 절행으로 명성을 떨치는 토대를 이루게 하였다.
세종 때 청도군수 이기(李掎)의 보고에 따라 효자정려(孝子旌閭)가 건립되었고, 1482년(성종 13) 김종직(金宗直)이 찬한 효자문비가 다시 건립되었다.
청도의 자계서원(紫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사시(私諡)는 절효(節孝)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극일(金克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