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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집을 나왔을때, 빗방울은 더욱 굵어져 있었다.
겨울비가 장마처럼 쏟아지는 일은 생전 처음보는 일이었다. 정말 예사롭지 못한 날이다.
한사람 간신히 몸을 피할수 있을 크기의 처마밑에서 선뜻 우산을 펴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그녀가 느닷없이 내 우산을 빼앗아 돌돌말더니 메고있던 쌕 안으로 쑤셔 넣고는,
"빨래 하기 진짜 좋은 날씨다, 그지? 우산 써도 젖는건 마찬가진데, 우산까지 적실필요 있겠어?"
하더니 내 손을 잡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넘어지지 않기위해 거의 내정신이 아닌채로 빗물고인 웅덩이만 간신히 피해 달린것 같다. 그녀가 손을 너무 꼭 잡은 탓에 조금지나 왼팔이 당겨왔고, 나는 안중에도 없이 제앞만 보고 달리느라 나는 몇번이나 행인과 부딪혔다.
"이게 뭐하는거야..!!! 이 손좀 놔 줘!!"
난 숨이 턱에 받혀 헉헉대며, 그러나 여전히 그녀를 쫓아 뛰며 소리쳤다.
"야, 일본에는 '비사이로 막가'는 사람도 있다던데, 가능한지 실험중이야!"
역시 숨이 가쁜 목소리로 되받아친 그녀 얘기에 나는 너무 기가막히면서도 도저히 숨이차 웃을수도 없었다. 이 아이는 분명 영화를 너무 많이 보았거나 만화를 너무 많이 읽은걸꺼라고 생각했다.
어렸을적엔 우유에다 사이다를 넣어 '밀키스'를 만들고, 도둑고양이를 불러다 장화를 신겨보았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다행인것은, 그녀가 나를 만난 그날 '추락하는것은 날개가 있는지'를 실험해보려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얼굴을 따갑게 때리는 빗방울과, 버스를 기다리거나 우산을 쓰고 종종걸음을 치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앞만보고 달리던 그녀는 60년대 영화간판이 달린 술집 앞에 다달아서야 속력을 줄였다. 족히 10분은 쉬지않고 전력질주를 했던것 같다.
우리는 나란히 술집 처마밑에 털썩 주저앉아 턱까지 오른 숨을 헐떡였다.
"하하, 옷 다 빨았다...하하..그.지.??? 하..하..."
그녀가 멈추는대로 무섭게 노려봐 주려고 마음먹고 달렸었는데, 난 눈에 힘한번 못 줘보고 웃어버렸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라는 소설의 주인공 '제제'는 자기 누나더러 툭 하면 '비맞은 러시아 고양이'같다고 놀리곤 했는데, 비맞은 러시아 고양이를 실제로 보았다면, 분명 홀딱 젖어 킬킬대며 웃고 있는 그녀를 닮았을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말이 왜 욕인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제제의 누나가 화낼만도 했다.
그녀는 다시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촌스런 옛날영화간판에 어울리지도 않게 '명월관'이라고 쓰여있는 술집문을 당겼다. 외진 골목 귀퉁이에 위치한 동네 비디오가게 보다 조금도 크지 않은 술집 이름치고는 너무 과분한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처마 밑에서 처마 밑으로, 긴 여행끝에 도착한 포상치고는 술집이 지나치게 초라했다.
"명월아씨~, 나 왔어."
빗을 꽂아놓으면 한달이 지나도 머리에 붙어있을만큼 손질되지 않은 파마머리를 한 여주인이, '명월이'인가 보았다. 그녀는 두명의 여자가 나란히 앉은 테이블에 골뱅이무침 접시를 내려놓으며 버럭 소릴 질렀다.
'가쉬나! 오는 비는 니가 다 맞았나?"
나는 이상한 나라에 버려진 앨리스나, 외계인에게 납치된 둘리의 기분으로 낡은 양철 테이블 위에 턱을 괴고 그들의 싸움에 가까운 대화를 지켜봤다.
못 본 사이에 피부가 썩었다는둥, 머리에다 '이' 박물관이라도 차린 거냐는둥, 그들의 대화는 적응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나는 아직 11년을 알아온 친구에게도 저런 말들을 해본적이 없었다.
얼굴이 많이 상하면 어디 아픈거냐고 물었고, 머리가 보기에 않좋으면 미용실에좀 가야겠다고 얘기했지, 저런식은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어쩌면 그래서 내 삶은 늘 다큐멘터리 같았는지도 모른다.
영화나 만화를 너무 많이 본것 같은 그녀에게서도 배울점은 있는가 보았다.
명월관 주인의 이름은 '명월이'나 '향금이'따위가 아닌 '희지'여서 무척이나 의외였다.
벌써 4년째 지긋지긋한 얼굴을 보고 산다고 혀를 내두르며 소주 한병과 잔 세개를 손에 든 희지라는 여자가 합석을 했다. 이곳 찾아오느라 다 젖었으니, 옷이 다 마를때까지는 마시는거 다 공짜로 줘야 한다며 생떼를 쓰는 주희를 흘겨보던 희지가 나에게도 잔 하나를 건넸다.
"우리 조강지처가 요즘 맘에 두는 아가씬가 보네?"
나는 막 입에 가져다 대었던 소주를 뿜어낼뻔 했다.
"우리 옛날에는 하나였어. 그래서 사람들이 '주희지'라고 불렀는데...???"
도무지 이해할수 없는 사람들 가운데서 나는 다시 의자에서 가시가 돋아날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기분이 급속도로 상해서 당장에라도 일어나고 싶었다.
왜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녀의 농담이 기분나빴고, 농담이 아닌 사실이라 해도 내키지 않는 만남이 될것 같았다.
나는 정주희란 여자의 애인이 되고싶은 마음도 없었고, 그들이 연인사이었던 사실따위에는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언니, 언니 앞에 앉은 아가씨는 농담이 불법인 사람이야. 말 조심해."
그녀가 거든다고 한 말에 더 기분이 상해 나는 말없이 물만 한모금 들이켰다.
정말 60년대 선술집처럼 가게 정 중앙에 석탄난로가 놓인 명월관의 후덥한 공기조차 내게 불리하게 돌아가는듯 했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젖었던 옷이 마르며 비린내가 풍겼다.
"얘가 여기 데려오는 여자중에 젤 성격이 까다로운것 같네...? 후후"
희지라는 여자는 얼굴에 점하나만 찍으면 영락없이 앞뒤 안가리고 말을 뇌까리는 주막집 주모였다.
상대의 기분에 상관없이 불쾌한 농담을 지껄이는 꼴이란.
유독 소심한 성격을 지닌 내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이런류의 사람들과는 마주하기 거북할것이었다.
나는 또 다시 주희와의 만남이 후회스러워졌다.
"죄송해요. 저는 그 여자들중에 젤 성격이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제일 참을성도 없는 여자일것 같네요. 먼저 일어날께요."
나는 젖은 머리에서 물방울 한방울을 떨구는 걸로 주희에게 인사를 대신하고 자리를 일어섰다.
그녀는 알수 없는 미소를 띤채 소주잔을 비울뿐, 일어나 나를 잡지 않았다.
그녀가 나를 잡아주길 원했었는지는 지금도 확실치 않다.
희지라는 여자의 농담이었는지, 내가 주희가 데려오는 수많은 여자중의 하나라는 것이었는지, 정확히 나를 화나게 했던 이유도 불분명하다.
나는 그저 그녀들의 인형이 되어 웃음거리가 되고싶진 않다는 생각뿐이었다.
헤어진 전 애인의 술집에 다른 여자를 데려오는 레즈비언따위의 주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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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걸어나왔어야 했다.
그녀로부터 나는 벌써 오래전에 당당히 걸어나왔어야 했다.
벌써 몇년전에, 그녀가 불쑥 날 찾아와 '안녕'이라고 말하는 오늘이 오기 전에 나는 미리 도망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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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벽에 걸린 시계가 7시를 가르킨다.
시간의 흐름이 불규칙해져버린 하루동안, 나의 모든 신경세포 조직들도 제 페이스를 잃어 제대로 튠이 되지 않은 악기와 같았다.
"당신 정말 어디 않좋은거 아냐?"
쏟은 쌀을 다 주워담고 부엌 바닥을 걸레로 훔쳐낸 그가 넥타이를 느슨히 풀어쥐며 물었다.
"아니에요. 손이 미끄러워서 그랬나봐요."
4차원 공간에서 나아닌 다른 이주현의 감정전달에만 몰입하는 신경세포들을 감지하며, 나는 저녁준비를 시작했다.
저 벽 넘어 그녀도 나처럼 앞치마를 두르고 저녁을 짓고 있을까.
그녀는 할줄아는 요리가 하나도 없었다.
내가 하얀 앞치마를 메고 음식을 할때면 의사보다 하얀옷이 잘 어울리고 과학자보다 위대해 보인다며 두손을 모아 부벼대며 흡족해했다. 소금만 있으면 끓이는 콩나물국을 끓여주어도, 분명 특수조미료가 들어간 거라며 명탐정 셜록홈즈처럼 가는 눈을 뜨고 꼬치꼬치 캐묻곤 했다. 그런 그녀가 지금 이시간 다른이를 위해 파, 당근 따위를 썰고 있을거라고 생각하면, 단지 5년의 세월이 흐른것이 아닌 한 생이 바뀌어 우리가 다른이로 환생을 해버린 느낌이 든다.
겨우 저녁상을 차려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남편과 마주 앉아,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시금치 된장국 한술을 떴다. 국은 너무 싱거웠고, 고등어 조림은 바닥에 잔뜩 눌어 보기 흉했다.
설탕을 넣었는지, 고춧가루를 얼마나 뿌렸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친구랑은 꽤나 친했던것 같은데,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하지 그랬어?"
"네?"
갑가지 그가 던진말은 당황스러웠다.
"앞집으로 이사온 친구말야. 꽤 친해보였는데, 이런 우연 생긴날 집으로 초대나 하지 그랬냐구.."
딸그락.
갑작스런 이야기에 젓가락 한짝을 놓쳐 식탁위로 요란하게 떨어뜨렸다.
"이삿짐 정리도 아직 제대로 안됐을텐데요, 뭘..."
정말 꽤나 친한 친구사이였더라면, 지금쯤 두 부부가 마주앉아 맥주잔을 기울이며 대학시절, 연애시절 얘기를 나누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란히 앉아 사과를 깎으며 지난 애기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말, 꽤나 친한 친구사이였다면.
"참, 그 친구도 결혼했지? 남편은 뭐하는 사람이래??"
나도 그녀에게 묻고 싶었던 말이다.
하지만 몇시간 전 저 쇼파에 앉은 그녀의 왼손 약지에서 반지를 발견하고, 피가 나도록 손톱만 부벼파고 있던 내모습을 떠올려보면, 질문을 하는것이 무리일것도 같았다.
"모르겠어요..."
남편이 된장국을 후루룹 들이키는 소리, 둥근 벽시계의 초침이 째깍이는 소리, 그리고 나의 한숨소리만이 교차했다.
"이번 주말에 저녁이나 한끼 하자고해. 부부끼리"
나는 남편에게 괜한 얘기는 꺼냈다고 생각했다.
경우가 바르고 정이 많은 남편은 잃어버렸던 내 지갑을 찾아준 청년까지 집으로 초대를 했을정도이다. 사람을 좋아하고 베푸는걸 좋아하는 그가 앞집으로 이사온 와이프 친구 가족과 가까워지려 하는것은 당연한 일이었는데...
애초부터 없었던 식욕이 제로로 떨어져버려 나는 수저를 내려놓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꿈을 꾸고 있거나, 앓다가 환영을 보고 있는것처럼, 일어나니 현기증이 찾아왔다.
그녀가 어릴적 너무 많이 보았던 영화처럼, 한시대를 들려주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여주인공이라기엔 많이 부족한 한 여자와, 엑스트라가 되기엔 너무 눈에 띄는 다른 한 여자가 마주 선 장면이 마구 눈앞에서 울렁거렸다.
찬바람을 쐬야 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 슈퍼좀 다녀올께요."
지갑을 들고 신발을 신으려다가 나는 다시 침실로 들어갔다.
옷을 새로 꺼내 갈아입고, 머리를 빗은후, 부르튼 입술에 생기를 주기위해 립글로스를 바르고 거울속의 내모습을 몇번 확인했다.
혹시라도 그녀와 마주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늦게 귀가하는 남편을 맞기위해 문을 열다 마주칠수도 있고, 쓰레기를 버리러 내려오는 그녀와 엘레베이터나 복도에서 마주칠수도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나를 의아히 바라보는 남편을 외면하고 현관문을 열었다.
702호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에 눈이 시렵다가 이내 눈시울이 붉어진다.
하루종일 룰에서 어긋나있던 신경회로들이 나를 멋대로 조정하기 시작했다.
내 멈춘 심장을 다시 뛰게하고, 왼쪽가슴이 미치도록 저리게 하고, 비명이 새어나오지 않게 오른손을 들어 입을 막고, 뻗뻗한 다리를 움직여 702호라 쓰인 문앞까지 다가가게 하고, 끝내는 그 문에 왼손을 가져다 댄채 모아쥐고 있던 눈물을 모두 토해내도록 만들었다.
이 벽만 건너면 그녀가 있지만, 넘을 수 없는 벽이었고, 열어선 안되는 문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소라색 현관문을 쓰다듬다가, 엘레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를 듣고 서둘러 계단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내가 열수 없었던 문이 열렸다가, 낮에 들었던 낭랑한 꼬마의 목소리가 "아빠~"하며 반기는 소리가 들리다가, 닫혔다.
차갑고 어두운 계단에 앉아 고개를 숙이니, 맺혀있던 눈물이 방울지어 떨어진다.
이렇게 나타난 그녀가 원망스러워 견딜수가 없었다.
그보다, 그런 그녀가 보고싶어 견딜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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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는 스칼렛이 죽은후,
어떤 겨울날은 태양도 떠오르지 않고 죽은듯 어둡기만 하다.
시계바늘은 벌써 8에 와있는데, 커튼사이로는 아직 아무 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지 의심이 들어 눈을 조심스레 두어번 깜박였다.
주희를 만나는 꿈을 꾸었던것 같다. 주희가 앞집으로 이사오는 끔찍한 악몽이었던것 같다.
요즘 남편과 아이문제로 너무 신경을 쓴 탓에 지독한 악몽을 조금 길게 꾼것이라고 생각하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싶은 희망이 생겼다.
늦잠을 잔 탓에 남편은 아침을 거르고 나갔지만 아침은 고요하고, 짹각이는 탁상시계는 모든것이 트랙에 올라있다는 안정감을 주었다.
갈증을 느끼고 거실로 나와 냉장고 문을 열려는데, 자석으로 고정시켜놓은 메모가 눈에 띄었다.
<어젯밤 얇은 스웨터 하나 걸치고 나간 당신이 자정이 다 되어서야 돌아오고, 당신 눈가에 붉은물기가 비추었던것 같소. 당신이 애기해줄때까지 아무것도 묻지 않겠지만, 기다림이 길지는 않았으면 좋겠소. 오늘 저녁은 외식이나 하지. 전화해.>
남편의 쪽지를 보니, 나는 어젯밤 몽유병환자처럼 거리를 쏘다녔던게 분명하고, 거리로 나오기 이전에 아파트 계단에 앉아 눈물을 흘린것도 분명했다.
꿈이 아니었나보다.
현관앞으로 가 쭈그리고 앉아보니, 꼼꼼하게 쓸어내지 못한 시루떡 콩가루가 구석에 반토막의 몸뚱아리를 숨기고 있었다.
꿈이 아니었나보다.
<따르르르 따르르르>
'그래 맞아'라고 소리지르는 전화기를 돌아다 보니 빨간불이 위험하다고 깜박이며 어서 정신차리라 울어댔다. 이 아침에.
"여보세요?"
-나야.
은숙이었다. 창원에서 올라온 모양이다.
-목소리가 왜그래?
"늦잠을 좀 잤어.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시댁에서 고추가루를 좀 많이 가져왔는데, 너희 고춧가루 떨어져가지? 들를께.
그리고, 할말도 있구.
은숙이는 내가 기억하는 순간부터 내곁에 있었던 친구이다.
우리집 고춧가루가 얼마나 남았는지도 아는 친구. 그녀는 우리집에 짝이 맞지 않는 젓가락이 몇개 있는지까지 관리하려고 같은 아파트 옆동으로 이사를 왔다.
무언가 잔뜩 결핍되어 보였던 나를위해 학교로 어머니가 해주시는 모든 음식을 싸들고 와 아이들 몰래 옥상에서 풀어놓던 그녀는, 언제나 언니같다.
"나도 할말이 있는데..."
-내 얘기가 더 듣고 싶을거야.
30분쯤 지나서 은숙이 문을 쾅쾅 두들겼다. 소라색 보자기에 고춧가루며 무말랭이 등을 푸지게 싸들고 낑낑대며.
뚱뚱한 보자기에는 그녀의 '정'도 그득하다.
"얼굴이 왜그래..."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벌써 얼굴이 상하기야 했겠어. 라고 생각하며 얼굴을 쓰윽 쓰다듬어봤다.
조금 거칠뿐, 가슴처럼 썩어 곪진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런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은숙이 뜬금없이 내 두손을 잡고 끌어 앉힌다.
"너.....주희....아직도 찾고있니...?"
나도 이제 꿈이 아니란것쯤은 아는데, 은숙은 왜 주희 얘기는 또 꺼내는지....
나는 대답대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은숙은 나와 주희를 안다. 자의에 의한것은 아니었지만, 은숙은 주희를 알게 되었다.
은숙과 함께 저녁을 먹을때 나타나 "주현이 애인 정주희라고 해."라고 말한 그녀덕에 은숙이 낚지볶음 한숟갈을 꿀떡 삼키고 눈물까지 흘렸던 날 이후로, 은숙도 우리의 연극에 끼어버린 셈이 되었다.
"아직도 주희 찾고 있다면, 그만 하라구..."
2년전쯤, 얼굴이라도 한번 봤으면 좋겠다고, 동창회가 끝나고 은숙과 단둘이 갖은 술자리에서 울어버린적이 있었다. 그때 자기가 찾아주겠다고 어깨를 쓰다듬어주며 했던 약속이 아직도 유효했나보다.
"얼마전에 그쪽 사람들한테 들으니까, 결혼했다더라. 애도 있대....
망할년. 결국은 그렇게 살거면서 널 그렇게 뒤 흔들어놨다니..."
은숙이 혀를 끌끌 차며 아직도 내 두손을 거머쥔 그녀손에 더욱 힘을주었다.
"은숙아...."
은숙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는 말줄임표가 20개 찍힐때까지만 기다리기로 했다.
"우리 앞집에 새로 이사온 사람 이름이 정주희야. 그 여자도 결혼했고, 애가 있더라. 시루떡 들고 찾아와서 '안녕, 잘 지냈어...?'라고 묻더라."
은숙은 그제서야 쥐었던 내 손을 자유롭게 풀어 주었다.
난 다시 못생긴 손톱을 뜯으며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반응속도와 시간은 충격의 강도에 의해 좌우된다는걸 증명해주듯, 은숙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고,그녀 역시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는지 마른침을 들이키듯 큰 소리로 삼켰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둔중한 폭음이 새어나올지도 몰라 귀를 기울여 보았다.
"처음부터 알아봤어. 처음 봤을때부터 니 인생을 지옥까지 갉아먹을 인간이란거...알아봤어..."
나는 못난 손을 만지작대었을 뿐인데, 뭐가 그리 슬퍼 보이는지 은숙이 눈물을 흘렸다.
과학기술의 진보는 언젠가 인간의 눈물까지 대신 생성해줄거라는 상상을 해본적이 있었는데, 아무런 장치없이 은숙이 그 일을 실현시키고 있었다.
"너 이제 어떡할거니...?"
나는 고개만 두번 가로젓고, 아직 아무일도 생기지 않았음을 상기했다.
"아직은 모르겠어. 이제 하루가 지났을 뿐이야..."
몇년전처럼, 은숙이 눈물을 흘리고 나는 그녀품에 안겨 눈을 껌벅거리고 있었다.
지병이 도진것이나, 무서운 바이러스의 발병을 알리는것이라면 모를까,
여전히 꿈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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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숙이 돌아가고 나는 가는 수천만 갈래의 실로 묶인 거인 걸리버가 되어버렸다.
눈을 뜨면 주희와의 작고 사소했던 기억들이 온몸에 덕지덕지 붙어있어 꼼짝도 할수 없을것 같아,
나는 눈을 감은채 가만히 은숙이 엘레베이터를 타는 소리를 듣고 그 문이 닫히고 찾아오는 정적을 맞을 준비를 했다.
보통 은숙이 찾아오면 그녀를 일층까지 배웅하곤했지만, 나는 집밖으로 발을 내기가 두려웠다.
참을수 없는 그리움과 신물처럼 입안을 메워오는 묻지못한 말들이 나로 하여금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할지도 몰랐다.
열어선 안되는 문.
욕망에 귀를 기울이다가는 모든게 허물어지고 붕괴될것이다.
창문을 열고 서재문을 열었더니 며칠째 들여다 보지 못했던 번역책이 쌓여있다.
머리를 묶어올린후 안경을 쓰려다가, 다시한번 갈증이 올라와 냉장고 문을 열었지만, 언제 이렇게 비어버렸는지, 나는 마음만큼이나 허탈한 텅빈 냉장고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장을 못본게 몇일 됐나보다.
냉장고 문을 연채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화장대 앞에 앉았다.
대충 눈썹을 그리고 연한 립스틱만 바른뒤, 쉼호홉을 했다.
아파트 안 지하상가에 가는데 심장박동이 빨라지다니. 출발음을 기다리는 단거리 달리기 선수도 아니고.
난 크게 숨을 들이마신후 현관문을 열고, 어릴적 시골집에서 구판장 가는길에 있던 돼지우리옆을 지나갈때처럼 눈을 꼭 감고 엘레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닫힐때까지 내 심장은 비트를 늦추지 않았다.
이른 오전이어선지 매장안은 비교적 한가했다.
맞벌이부부가 많아지면서 아침에 장을 보는 사람들이 줄었기 때문일거다.
바구니에 파와 버섯을 담고 남편이 좋아하는 도라지나물과 고구마 줄기도 샀다.
바구니 하나를 모두 채운후에, 마지막으로 떨어진 샴푸를 사려 목욕용품코너에 들어섰을때,
또 다시 심장 비트에 가속이 붙으며 볼이 화로처럼 달구어졌다.
"안녕, 장보러...나온거야...?"
쉐이브크림을 손에 든 그녀가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응."
그녀의 다른 한손에는 무릎까지 올까한 작은 꼬마가 츄파춥스를 앙증맞게도 빨고있다.
그녀를 목놓아 부르던 그 여자아인가 보았다.
"민아야, 아줌마한테 인사해야지....얼른~"
"안넝하데어~"
엄마손과 츄파춥스 둘다 놓치지 않고 양손을 높게 쳐든 아이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웃었다.
동그란 얼굴. 유난히 검은자가 많은 큰눈. 장난기 서린 입꼬리까지.
주희의 어릴적 사진을 본적은 없었지만, 어릴적 그녀의 모습이 분명 저랬을거라고 생각될만큼 아이는 그녀를 쏙 빼닮았다.
"이름이..민아니..?"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듯 아이를 바라봤다.
가슴속에서 담석같은것이 움틀거리는듯 뱃속 이곳저곳이 따꼼거려왔지만, 나는 미소를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몇살이야....?"
"세잘이요."
민아라는 아이가 냉큼 대답하고 다시 오렌지색 막대사탕을 입에 물고 웃는다.
엄마를 닮아 똑같이 부침성도 좋고, 제 할말은 해야만 먹을것도 먹히는 그런 성격을 지녔는가 보다.
민아가 쓴 귀가 가려지는 깜찍한 모자속 귓볼 뒤에는 주희가 태어날때부터 있었다던 점이 고대로 찍혀있을지도 몰랐다.
문득 작은 민아를 꼬옥 끌어안아보고 싶었다.
"동네..맘에 들어?"
가끔 나는 내 몸 모든 기관이 각각 지방자치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머리가 지시하는 일을 제대로 지켜 하는 기관이 드물었다.
이번에도 입이 쓸데없는 말을 나불댔다.
"사람 사는데가 다 그렇지 뭐...."
그 사람사는곳엔 나도 살고 있는데, 그래도 괜찮다는 뜻일까.
"저...이번 주말에...시간좀 있어?"
왠지 긴장하는 빛이 역력하다. 그녀 얼굴에.
"왜....?"
"남편한테 니얘길 했었어. 친구가 앞집으로 이사를 왔다고.... 그랬더니 가족끼리 저녁이라도 한끼 먹재. 미안. 그런얘기 하는게 아니었는데...."
바구니를 들었던 손을 바꿨다.
땀이 축축히 베어나와 미끄러질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야. 그래. 그러지 뭐. 나도 남편한테 애기해볼께."
"엄마~ 민아 쉬....민아 쉬야할래~"
"그럼 토요일날 보자. 나 그만 가볼께."
이번에도 민아란 아이는 그녀를 나꿔챘다.
"아둠마 안넝히계데요..."
오줌이 마려워 다리를 비비 꼬면서도 인사는 잊지 않고 하는 아이가 귀여워 손을 들어 흔들어보였다.
주희가 늘 하던것처럼 허공을 간지르듯 손가락을 몇번 까닥여 주다가,
그녀가 스며들어있는 습관을 그녀앞에서 보이기가 싫어서 서둘러 팔을 내렸다.
바쁜 걸음으로 모녀가 에이즐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사라지자 나는 바구니를 땅에 내려놓고 양손을 코트에 부벼 땀을 닦았다.
말을 해버리고 나니, 오늘이 어느새 목요일이다.
주말이 서둘러 올까봐, 내손에 다시 촉촉히 땀이 베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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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전 이곳으로 이사오면서 남편 회사 동료들을 불러 집들이를 한후로 처음으로 한 저녁초대여서 그렇다고 남편에게 부담감을 털어놓고, 나는 아침부터 부산하게 움직였다.
남편이 걸레를 들고 집안 곳곳을 닦는 동안 나는 어젯밤 재워두었던 불고기를 후라이팬에 얹고, 약간은 싱거운듯한 잡채에 간장 한큰술을 더 넣고 비볐다. 손가락 사이에 낀 시금치와 콩나물을 털어내는데, 잡채 한젓갈을 입에 넣어주려는 내 손을 막고, 인상을 잔뜩 찡그린채로 시금치를 골라내던 그녀가 떠올랐다.
"난 시금치가 싫어. 시금치가 주는 비타민 없이도 건강하다구. 난 뽀빠이도 싫더라."
내가 해주는 음식이 아무리 맛있어도, 시금치는 곤란다하며 눈웃음으로 양해를 구하던 그녀가 떠올라, 나는 이미 양념까지 마친 잡채에서 서둘러 시금치를 모두 골라냈다.
"여보, 우리 결혼사진 액자 바꿀까? 이사하면서 여기저기 기스가 많이 났네...?"
새까매진 걸레를 든 남편이 허리를 펴고 땀을 닦는다.
시금치를 쓰레기통에 넣고 남편을 돌아보니, 몇년전의 결혼식을 회상하며 기분이 좋은듯 그는 흡족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그래요....."
어제 서울에 7센치의 눈이 내리고, 음식을 도우러 온다는 은숙이의 전화를 성의없게 끊어버렸던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사건이 없었다. 가령 슈퍼마켓에서 에서 그녀를 또 마주친다거나, 오늘 약속을 못 지키겠다고 그녀에게서 전화연락을 받는일 따위 말이다.
그래도 맘이 놓이지 않아, 7시를 20분 남겨놓고 있는 벽시계를 초조하게 바라봤다.
<치지지직...>
해물탕이 넘치고 있었다.
서둘러 불을 줄이고 뚜껑을 열자 거품에 딸려 올라온 유독 작은 미더덕 한개가 렌지위로 떨어진다.
"아 뜨거워..!"
주희가 공기밥 뚜껑위로 툭.하고 씹다만 미더덕을 뱉어놓고,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신다.
미더덕은 잘 식혀서 먹어야 한다고 했는데도 성격 급한 그녀는 주의없이 굵은 미더덕을 한입에 깨물었었다.
"괜찮아..? 안데었어??"
물수건을 들고 그녀에게 손을 뻗으면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듯 빨갛게 물든 혀를 내밀고 목젖이 내비칠때까지 입을 벌리고 '응'하며 고개를 끄덕였었다.
나는 그녀의 고른치열을 보며 미더덕을 숟갈위에 놓고 '후..후..' 어지러워질때까지 불어주곤했다.
오늘은 그녀가 미더덕을 식혀서 먹어야 할텐데.
두부부 사는데는 4인용이면 충분하겠다 싶어 구입했던 식탁대신에, 거실 중앙에 큰 상을 펴고 남편이 행주질을 했다. 남편은 모처럼만의 손님맞이에 기분이 들뜨는지 휘파람까지 불어댔다.
<띵동, 띵동>
벨소리가 들리자 남편은 행주를 놓고 현관으로 달려갔고, 나는 국자를 내려놓으며 가슴을 한번 쓰다듬었다. 한숨소리는 찌개가 끓는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을것이다.
"안넝하데요~?"
꼭 제 키만한 엽기토끼 인형을 안은 민아가 낭랑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 뒤로는 검은 폴라티에 진주목걸이를 한 주희와, 그녀의 남편으로 보이는 키가 훤칠한 남자가 무릎에도 닿지 않는 민아의 머리에 손을 얹은채 웃고있었다.
둥글고 낮은 코와 살짝 아래로 쳐진 눈꼬리덕에 선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회색 브이넥 스웨터를 입은 그의 그림자처럼 보이는 검은 주희가 그의 팔짱을 꼬옥 낀채 남편에게 인사했다.
"처음 뵙네요, 주현이 친구 주희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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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는 타고난 것이었지만, 나를 제외한 나머지 세사람은 모두 사교성이 좋고 대인관계에 훌륭한 기질이 있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동기간처럼 어느새 두 남자는 죽이 맞아 거듭 술잔을 비웠고, 맞은편에 앉는 주희도 대화에 한발짝도 뒤쳐지지 않고 맞장구를 쳐댔다.
그 피가 어디 가겠느냐만은, 어린 민아마저도 그 거부할수 없는 유전자탓에 어느새 남편 무릎에 앉아 한손에는 사이다잔을 들고 엽기토끼의 귀를 만지작대고 있었다.
처음보는 아저씨한테도 그렇게 찰싹 안겨있는 민아에게도 주희에게 느꼈던 존경심이 생겨났다.
남편은 워낙에 아이를 좋아하는데다 방실거리며 잘 따르는 민아가 예뻤는지 수시로 민아에게 말을 걸며 눈을 맞추고 웃었다. 사이다를 좋아하는 민아를 위해 직접나가 사이다 몇병을 사다주기도 했다.
저렇게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너무 많은 행복을 빼앗은것 같아 남편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민아를 보고있음 평소엔 모르고 살았던 아이에 대한 애착이 내게도 끓어오를것 같았다.
"그나저나 두사람은 대학도 다른데 나왔는데 어떻게 친해진거야...?"
술기운이 올라 양 볼이 붉어진 남편이 소주잔을 입으로 가져가다가 물어왔다.
그런 질문을 하리란걸 예감못한건 아니었지만 준비했던 답변은 긴장으로 뻣뻣이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인터넷 까페 활동하다가 아는 선배 소개로 만났어요. 취미가 비슷해서 안 시간이 길지 않아도 금방 친해졌죠."
나는 한번의 머뭇거림, 더듬거림도 없이 대답하는 그녀의 눈을 향해 조소를 던졌다.
그녀가 내눈을 정면으로 받아내다 이내 '어쩔수없잖니'라고 말하는듯한 미소를 보이고 앞에 놓인 맥주잔을 들어 모두 들이켰다.
어떤 상황이 주어져도 훌륭히 소화해내는 그녀의 연기는 대상감이다.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마음에 그녀를 노려보다가도, 그녀의 맥주잔이 빈것을 보면 술이 약한 그녀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몇년전 신년계획에는 '주희를 미워하자'라는 항목도 있었을것 같다.
한달이 넘게 지켜지는 계획이 없던탓에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말이다.
"우리 이제 자주 이런자리 갖읍시다. 주말에는 가족들끼리 여행도 가고 그럼 좋잖아요. 안그래요 이형?"
주희의 남편도 주희 못지않는 부침성을 지닌듯, 어느새 남편을 '이형'이라 부른다.
"주현씨, 우리 와이프 요리도 좀 가르쳐주고 그래요, 지엄마가 해주는 밥이 세상의 모든맛이라 생각하고 자라는 우리 민아가 불쌍하잖아요~"
두 남자가 크게 웃고, 주희는 그의 팔뚝을 꼬집고, 나는 피식 웃다가 그녀를 따라 이제껏 만지작거리기만 한 맥주잔의 김빠진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전에는 한번도 그녀에게 요리를 가르쳐야 겠단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다.
영원히 아이처럼 밥달라 조르는 주희에게 나역시 영원히 눈을 흘기며 음식을 하고 있을거라 생각했기에, 그녀에게는 요리보단 차라리 한곳에 얌전히 앉아 기다리는걸 가르치고 싶었다.
"주희가 요리에 좀 소질이 있어야지요....차라리 파출부를 쓰시는게 어떠시겠어요?"
이번엔 주희를 제외한 모두가 박장대소를 한다.
웃고는 있지만 정말 재미있어서 내 입이 벌어져 있는지는 나도 알수가 없었다.
"자, 조형, 와이프 흉 그만 보고, 술이나 한잔 받아.
어, 없네? 술 더없나??"
조형이라 불리는 주희의 남편은 생각보다 주량이 쎘는가보다. 충분할거라 생각하고 사다놓은 소주 네병과 맥주 다섯병이 어느새 빈병이 되어 한켠에 나란히 줄서 있었다.
"금방 가서 사올께요. 아직 슈퍼 문닫았을 시간도 아니니까..."
지갑을 찾아 들고 일어서는데
"나랑 같이 가자."
그녀가 외투를 집어 들고 이어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