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 양규봉입니다.
신라천년(BC 57~AD 935년)의 수도인 만큼 왕경(王京) 유적과
불교 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고 유적의 밀집도나 다양성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오늘은(10월 23일) 전에 없었던 새로운 발굴지 '동궁과 월지'를 중심
으로 현지를 답사하고 유물을 관람 합니다.
경주 캔싱톤리조트의 전경
이곳은 우리 일행이 하루 숙식한 경주 켄싱턴리조트이다.
휴양지로 이름난 보문호수가에 ㄷ자모양의 웅장한 규모로 자리를 하고 비수기에는 51%할 수 있다고 한다.
507개의 객실이 있고 '타이니' '패밀리' '스위트'등 다양한 형태의 유형으로 분류하여 나누고 TV 냉장고 욕실등이 있고
조리시설이 완비한 부엌도 있어 간편한 취사가 가능하다.
경주 캔싱톤리조트의 현관
신경통, 관절염, 및 혈액순환에 좋은 알칼리 온천수를 사용한
'더 프리 싸우나'가 있어 안락한 여가를 즐길 수 맀는 온천이다.
현관 반대편(서관) 숙소가 있는 동
식당은 동관 아래 층에 조용한 휴식을 즐길 수 있는 북카페(독서실)와
셀프카 BBQ. 등의 다채로운 부대시설도 있어 여행을 즐길 수 있고
다양한 메뉴를 즐길 수 있는 한식부패는 물론 양식부패와 함께 다양한 부페도식(都食)을 제공하는 더클리우드부페가 있다.
주말에는 셀프 요리하는 BBQ 테이불도 가능하다.
동궁과 월지, 국립 경주박물관 지도
Ⅰ. 동궁(東宮)과 월지(月池)
동궁과 월지는 사적 제 18호(史籍 第 18號)이다.
동궁과 월지 모형도
동궁과 월지 설명도
사적 제 18호(소재지 : 경북 경주시 인왕동 26-1)
이곳은 통일신라시대에 별궁 안에 있던것으로 그 안에
임해전을 비롯한 여러부속 건물과 정원이 있었다.
신라 문무왕(文武王) 14년(674년)에 궁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귀한 새와 짐승들을 길렀다.
임해전(臨海殿)은 931년 경순왕(敬順王)이 고려 태조 왕건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군신들의 연회나 귀빈 접대 장소로 이용한 것으로 본다.
못 이름은 원래 월지였는데 조선시대에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와 안압지(雁鴨池)라 부르게 되었다.
1975년 준설을 겸한 발굴조사에서 신라때에 축조되었던 안압지의
모습을 거의 확인하였고 임해전지(臨海殿址)에서 출토된 보상화문전
에새겨진 기년명(紀年銘)으로궁궐의 축조된 년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진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아 안압지는 신라의 원지(苑池)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현제 월지의 모습(임해전지)
동궁터의 주춧돌
도깨비 귀면와
도깨비기와 설명
여러가지 용도에 따른 무늬기와
수막새 무늬들
뚜껑있는 작은 단지와 사자상의 향로
신라의 금속 용기
신라의 일상 용기
신라의 철제도구
토기 용품들
납석으로 만든 뚜겅있는 작은 단지와 향로. 귀면와
안압지출토 목제 주령구(酒令具) 설계도
안압지출토 목제 주령구(酒令具) 부분의 크기
안압지출토 목제 주령구(酒令具) 펼친그림
안압지출토 목제 주령구(酒令具)
복불복 주령구이다.
아마 던져서 14면중 정지된 한 방향의 지시문을 벌칙으로 정하여 행하도록 하는 멋진 기구이다.
신라시대 생활상을 연구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며 그 중에서 14면체
4.3cm 크기로, 참나무로 만든 주사위인 목제 주령구(酒令具)가 출토 되었다.
그 옛날 임금님과 귀족들이 풍류를 즐기며 연회를 배풀던 멋스러움이 연상된다.
* 4각형인 여섯면의; 벌칙.
1. 삼잔일거(三盞一去) : 한번에 술 석잔 마시기.
2. 중인타비(衆人打鼻) : 여러 사람 코 두드리기.
3. 자창자음(自唱自飮) : 스스로 노래 부르고 마사기.
4. 음진대소(飮盡大笑) : 술을 다 마시고 크게 웃기.
5. 금성작무(禁聲作舞) : 소리 없이 춤추기.
6. 유범공과(有犯空過) : 덤벼드는 사람이 있어도 가만히 있기.
* 6각형인 8면의 벌칙
7. 농면공과 : 얼굴 간지러도 꼼짝 않기.
8. 곡비즉진(曲臂則盡) : 팔 구부려 다 마시기
9. 추물막방(醜物莫放) : 더러운 물건을 버리지 않기.
10. 월경일곡(月鏡一曲) : 월경 한 곡조 부르기
11. 공영시과(空詠詩過) : 시 한수 읊기.
12. 임의 청가(任意請歌) : 누구에게나 마음데로 노래시키기.
13. 자창괴래만(自唱怪來晩) : 휘청거리며 들어오는 모양새로 노래하기.
14. 양잔즉방(兩盞則放) : 술 두잔 이면 먹어치우기.
안압지 뻘속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모두가 신라 왕실에서 쓰던 물건들
로 추측되며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은 피장자를 위해 만들어 넣은 유물 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1300년 전 수세식 화장실터 발견
동궁 화장실에 대해서는 최근 일반과 언론 그리고 학계의 관심이 뜨거
웠는데, 국내에서 최초로 확인된 고대 수세식 화장실 유구라는 점 때문이었다.
화장실 유구는 초석건물지 내에 변기가 있고, 변기를 통해 나온 오물이
잘 배출되어 나갈 수 있도록 점차 기울어지게 설계된 암거(暗渠)시설까 지 갖춘 복합 변기형 석조물이 있는 구조이다.
동궁과 월지 화장실 유구의 특징은 통일신라 최상위 계층의 화장실 모 습을 선명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고급 석재인 화강암을 가공하여 만든 변기시설과 오물 제거에 수세식
방식이 사용된 점과 변기 하부와 오물 배수시설 바닥에 타일 기능의 전돌
(쪼개어 만든 벽돌)을 깔아 마감한 점 등을 미루어 볼때 통일신라 왕궁에 서 사용된 고급 화장실의 실체를 짐작할 수 있다.
현재까지 국내에서는 변기시설만 발견(불국사, 8세기)되거나 화장실 유구
(익산 왕궁리, 7세기 중엽)만 확인되었을 뿐, 화장실 건물과 변기시설
그리고 오물 배수시설이 이렇게 같이 발굴된 사례는 없었다.
이번 동궁과 월지에서 확인된 화장실 유구는 화장실이라는 공간과 그
부속품들이 한자리에서 발견된 나아가, 신라 왕실의 화장실 문화의 발달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동궁원의 이색 화장실
경주시에는 1300여년전 옛 통일 신라인의 음주문화와 멋과 재치있는
생활과 시와 풍류를 즐기고 동물을 사랑하고 관찰할 줄 아는 민족임을
증명하는 주령구와 위생적인 청결생활을 실천해온 과학적 사고와
생활실천 증거인 수세식 화장실을 결합한 아이디어 작품 이색 화장실이 등장했다.
Ⅱ. 국립 경주박물관 관광
국립 경주박물관과 동궁과 월지 지도
경주박물관은 신라 천년의 수도인 경주에 위치하고 국립박물관에 속한다.
그리고 신라의 문화유산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대표적인 박물관이다.
1945년 박물관으로 출발하여 1975년 현제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인 경주역사유적지구 내에 위치한
국립경주박물관은 신라의 궁궐터인 월성과 월지, 신라의 능묘가 밀집된
대능원, 신라의 대가람이였던 황룡사 터 등과 이웃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한국 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을 바라보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상설전시관으로 신라역사관, 신라미술관, 월지관 등
3관과 그외 특별전시관이 있다.
정원에는 성덕여왕신종과 고선사터 3층석탑 등이 전시되어있다.
교육 프로그램으로는 어린이박물관학교를 60여 년 운영하고 있다.
신라의 건국과 성장
신라의 건국과 성장
① 건국
* 경주 토착 세력과 유·이민 세력이 6촌(6부)을 (이룸 → 박혁거세)
들이기중심으로 진한의 소국 중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 건국(기원전 57)
* 신라가 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어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
드리기 어려워 고구려나 백제보다 체제 정비와 국가 통합이 늦음
② 성장 : 초기에는 6부가 각자의 영역 지배하고, 박·석·김씨가 번갈아 가며
왕위에 오름(왕권 미약) → 점차 주변 지역을 정복하며 성장
③ 내물왕(4세기 후반)
* 김씨의 왕위 세습 독점
* 왕의 칭호를 대군장을 뜻하는 마립간으로 바꿈
* 영토 확장 :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 대부분 차지
*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도움으로 왜의 침입 격퇴
신라 왕의 호칭 변화
거서간(군장)→차차웅(무당)→이사금(연장자)→마립간(대군장)→ 왕(중국식 호칭)
▲ ‘호우(壺)’라는 글자가 새겨진 청동 그릇
그릇 밑바닥에 ‘광개토지호태왕(廣開土地好太王)’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잘 보여 준다.
철기문화 창살들
철기문화
철기문화 도끼 낫
신라인 금을사용하다
8세기에 편찬된 [일본 서기]에는 신라를 가르켜 '눈부신 금과 은 채색이 많은 나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금은 신라가 고대 국가로서는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마립간(왕) 시기에 집중적으로 사용하였다.
마립간은 왕관을 쓰고 금허리띠를 찻다.
금귀거리는 물론 반지와 팔찌를 끼웠고 금장식과 구슬을 꿴 목걸이 및 가슴걸이를 걸쳤다.
허리띠, 목걸이,옥, 장식품.
금목걸이. 금접시. 귀걸이.팔찌등
포항 냉수리 신라비각
국보 제 264호 신라비 (건립시기 : 443년 또는 503년)
특징과 의미 -
냉수리 신라비는 형태 및 내용상에서 몇 가지 특징과 의의를 보인다.
먼저 형태상에서 볼 때 상면에 촌주와 관련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점.
상면에 글자를 새긴 것은 이 비가 최초이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석
신라비의 의미 :
첫째,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시대의 비 중에서 포항 중성리 신라비 다음
으로 연대가 빠르다는 점,
특히, 이 비는 1988년 4월에 발견된 울진 봉평리 신라비와 긴밀한 상보
적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5∼6세기 신라의 정치·경제·제도사 정리
에 기본적인 자료가 된다
둘째, 한 인물의 재산 소유와 상속 문제를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어 이
시기 경제 관계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점,
셋째, 6부·갈문왕·사라·관등·촌주·도사 등 정치·제도사와 관련된 중요 내
용을 다수 보이고 있다는 점,
넷째, 국어학적으로 이두(吏讀)의 성립 시기와 성립 과정을 추정하게
하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자전(字典)에 나오지 않는 ‘사(斯)’자가 전면에 다섯 번 나오고 있어 신라식 조자(造字)의 방식을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이 비는 1988년 4월에 발견된 울진 봉평리 신라비와 긴밀한
상보적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5∼6세기 신라의 정치·경제·제도사
정리에 기본적인 자료가 된다.
이차돈 순교비
경주 소금강산 백율사(栢栗寺)에서 출토. 통일신라 817년으로 추정
경북 경주시 동천동 백률사지에 있었던 신라시대의 비.
높이 1.04m이며, 각 면의 너비 29㎝.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 국립경주박물관 |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차돈 순교비 설명
불교를 제창하다 527년(법흥왕 14)에 순교한 이차돈(異次頓)을 기념하기 위한 비백율사에서 출토되었다.
이차돈공양당(異次頓供養幢)이라고도 부르고, 191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석당(石幢)은 화강암 육면 기둥으로 방형의 석재 윗면을 육각형 복련
(覆蓮)으로 새긴 대좌 위에 세워져 있으며, 원래 당위에 옥개석이 있었 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제1면에는 이차돈의 순교장면을 부조하였다.
제2∼6면은 정간(井間)을 치고 그안에 자경 3㎝의 글자를 새겨 넣었다.
각 면의 명문은 마멸이 심하여 절반 정도만 판독된다.
그러나 명문의 뜻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미루어 알
수 있으며, 명문 중 '頸中白乳一丈(경중백유일장)'은 이들 기록과 합치 되고 있다.
이 석당기를 목판에 새긴 법첩(法帖) 2종 『흥린군신각금생서(興隣君
新刻金生書)』· 『원화첩(元和帖)』이 전래하여 마멸된 부분을 더욱 보충 하게 되었다.
명문 중에는 건립연대라고 고증할만한 확실한 연호나 연도는 없다.
단지 『삼국유사』 권3 염촉멸신조(厭觸滅身條)의 기사에 의하여 건립
연대를 당 헌종 원화(元和) 12년(헌덕왕 9년, 통일신라 817년)으로 추정한다.
명문에는 석당기의 찬자(撰者)· 서자(書者) 모두 밝혀져 있지 않다.
서체는 해서이면서도 예서의 필의(筆意)가 담긴 특이한 예라하겠다.
한편, 제1면의 화상(畵像)은 당대의 조각연구 및 복식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眞興王 巡狩碑)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북한산의 신라 진흥왕 순수비터.
(사적 제228호.)
이곳의 비석은 북한산 연봉의 비봉 정상에 세워졌다.
조선 말기 금석학자인 김정희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유남해) | 한국학중앙연구원
신라진흥왕 순수비가 있는 곳
경기도 북한산(北漢山)순수비. 경상남도 창영(昌嶺)순수비.
충청북도 단양(丹陽)순수비. 함경북도 황초령(黃草嶺)순수비.
함경북도 마운령(摩雲嶺)순수비. 등이다.
북한산 신라진흥왕 순수비
사적 제228호. 면적 1,697㎡.
이곳의 비석은 북한산 뒤편 승가사(僧伽寺)에서 위쪽으로 8㎞ 가량 떨어진 북한산 연봉의 비봉(碑峰) 정상에 세워졌는데,
이 비석이 세워진 이래 1,200여 년 동안 잊혀져오다가 조선 말기의 금석학자인 김정희(金正喜)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그는 1816년(순조 16)에 이 비석을 발견하였는데, 당시에는 비 갓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비문은 확인하지 못하였다가 이듬해에 다시
올라 68자를 확인하고 그것이 신라진흥왕순수비임을 알게 되었다.
현재 이 자리는 자연 암반에 얕은 2단의 비좌(碑座)를 내고 그 가운
데에는 비신(碑身)을 꽂은 홈이 장방형으로 남아 있으며,
이 비석의 옛터임을 알려주는 표지(標識)가 있다.
비석(국보 제3호)은 그간 오랜 세월의 풍화 작용으로 아래쪽 귀가
떨어져나가고 6·25동란으로 인한 총탄자국 등 상처를 입어
이에 대한 보호책이 강구되어 1972년 8월 17일에 경복궁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옮길 당시 이 비석은 아랫부분이 길이 7㎝, 두께 3㎝의 철심으로
암반에 견고하게 연결되어 있어 이전이 상당히 어려웠다고 한다.
1986년 8월 이 비석은 다시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로 옮겨져 보호를
받고 있다.
황초령 신라진흥왕 순수비 탁본
황초령 신라진흥왕 순수비
함경남도 함흥군 하기천면(下岐川面) 황초령(黃草嶺)
(일제강점기때의 지명)에 있었던 비이다,
황초령 신라진흥왕 순수비 내용
비문의 내용은
태창(太昌) 원년(元年) 568년에 진흥왕이 황초령에 순수(巡수)한 사실.
진흥왕의 영토확장과 선정을 칭송한 내용.
변경지형을 두루 순수 하시고 백성들에게훈시한 사실.
진흥왕을 따라왔던 신료들의 관직과 이름등이 기록되어있다.
마운령에서도 황초령과 함께 순수비가 발견된점으로 보아
함경도 함흥지역까지 영토를 확창하였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태창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육부명 관직과 인명등은 당시
싱라의 정치제도사를 이해하는데 기초자료가 되고있다.
김춘추와 김유신의 활약
신라가 최초로 삼국을 통일하게 된 것은 김춘추와 김유신의 힘이 컷기 때문이다.
몇 백년에 걸친 삼국의 영토확장을 위한 전쟁속에서 비록 당나라의 외
세에 힘을 빌어 삼국을 통일하였지만 현명한 군주와 뛰어난 신하 관계 에서 삼국통일을 이룬데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김춘추(김춘추)는 풍채가 좋고 친화력이 뛰어났다.
그는 백제와의 국경분쟁을 극복하고자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실패하자 바다건너 중국의 당태종 이세민(李世民)(599년~652년)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고 군사지원을 약속닫는다.
그뒤 진덕여왕(재위 647년~661년)이 사망하자 신라 29대 태종 무열왕
으로 추대받아 왕에 오르고 당나라 소정방의 13만 지원군의 협조로 백제를 멸망 시킨다.
한편 김유신은(진평왕 17년. 신라 595년 출생~문무왕13년.
신라673년 사망) 덕과 지혜, 용맹을 모두 갖춘 명장이다.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의 마지각 왕 구해왕(仇亥王, 仇衡王)이 김유신
의 증조부이고, 할아버지는 진흥왕의 아버지이고, 어머니는 지증왕의
증손녀인 신라의 왕손이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처남 남매지간이다.
즉 김유신의 둘째 여동생이 김춘추의 부인이 되며 추후 29대 태종 무열 왕의 왕비가 된다.
신라 삼국통일의 지도
문무왕(文武王) 전쟁 마무리
김유신은 고구려 정벌에 숱한 실페 끝에 연개소문 아들의 권력다툼으로 약해진 틈을 타 고구려 정벌에도 성공한다.
그러나 당나라의 야심은 순탄하게 물러서지 않는다.
무열왕의 병사로 첫째아들 김법민(金法敏)은 왕위를 계승하여 30대 문무 왕이 된다.
무열왕은 당나라 군대를 한반도에서 축출하고 좁아진 영토지만 삼국통일 의 대업을 이룬다.
경순왕 초상화
경순왕 초상화(敬順王 影幀) 설명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초상화는 통일신라말에서 고려초에 금강산 본, 해인사본, 고자암본의 세 종류가 그려졌다고 한다.
당시 원본은 확인할 수 없으나 금강산본을 제외한 두 본은 숭혜전에 보 관 되었다 한다.
이 초본은 1904년에 화승(畵僧) 이전춘(李殿春)이 택한 사본을 본 떠 그린 것이며 부분적으로 불화의 기법을 사용하였다 한다
최치원의 초상과 업적
최치원(崔致遠, 857년 ~ 908년 이후)은 신라 말기의 문신, 유학자, 문장 가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해부(海夫)이며, 시호 는 문창(文昌)이다.
6두품 출신 12세의 나이로 당에 유학하여 6년 만에 당의 빈공과에 장원
으로 급제하였으며,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절도사 고병의 막하에서
《토황소격문》을 지어 당 전역에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승무랑 시어사 로서 희종 황제로부터 자금어대를 하사받았다.
경주최씨 시조이며 신라의 문신, 유학자, 시인,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종교는 유교를 심봉하다가 후에 불교에 입문하여 가야산의 해인사로 들어가셨다. (삼국사기)
저서 《계원필경》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개인 문집으로 꼽히며,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난랑비서(鸞郎碑序)》는 신라 화랑도의 사상적 기반을 말해주는 자료로서 주목받는다.
성덕대왕 신종
771년 작. 국보 제29호. 높이 333cm, 입지름 227cm.
봉덕사종 또는 에밀레종이라고도 하는데 종소리가 아기 우눈 소리와 같다해서 아기를 넣어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기도 한다.
본래 봉덕사(奉德寺)에 있던 것을 영묘사(靈廟寺)로 옮겼다가, 1915년 8월 경주박물관으로 이전하여 전시하고 있다.
성덕대왕 신종 설명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종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며 완전하게 한국종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종의 몸체에 새겨진 긴 명문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하여 동(銅) 12만 근으로 주조를 시작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자 아들인 혜공왕이 뜻을 받들어 771년(혜공왕 7)에 완성했다고 한다.
종의 꼭대기에 있는 용뉴의 용은 사실적인 형태로 조각되었고 그 옆에
붙어 있는 음통에는 화려한 보상화무늬가 3단으로 장식되어 있다.
어깨와 구연부에는 보상당초무늬가 장식된 문양대가 돌려졌고,
구연부의 끝부분이 모서리로 이루어졌는데 각 모서리마다 연꽃 한 송 이씩을 배치하여 변화를 주고 있다.
어깨 밑에는 보상당초문양대가 장식된 유곽이 4곳에 배치되어 있고 그 안에는 연꽃 모양의 유두가 9개씩 조각되어 있다.
유곽 아래로는 서로 마주보고 있는 4구의 비천상과 연화 당좌 2개를 교대로 배치했다.
비천상은 연화좌 위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손에 향로를 들고 있으며 천의
자락과 보상화가 구름무늬처럼 생동감있게 표현되어 마치 천상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이 종은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동종(725)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동종을 대표하며 8세기경 금속공예의 높은 수준을 알려주는 예이다.
울주 반구대 바위그림
반구대 암각화는 국보 제 285로 지정되어 있으며, 태화강의 한
지류인 대곡천의 바위에 높이 5m, 너비 8m의 면에 새긴 암석화이다
신석기시대(7000년전)부터 여러 시기에 걸쳐 고래, 호랑이, 사슴, 거북,
물고기, 사람 등의 형상과 고래잡이등 생활상을 볼 수 있다.
근처 울산암각화 박물관은 국내 유일의 암각화 전시관이 있고
반구대 암각화와 천천리 명문각석(국보 제 147호)의 모습을
실물 크기로 재현하여 암각화와 명문각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림은 주제에 따라 사람의 전신(全身)과 얼굴을 표현한 인물상
(人物象), 바다와 육지동물을 표현한 동물상(動物象),
배나 부구(浮具)와 같은 수렵이나 어로와 관련된 도구상(道具象),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미상(謎象)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울주 반구대 바위그림
인물상은 측면(側面) 나체 전신상이 많으며 활로 동물을 사냥하거나
두 손을 치켜든 모습, 악기와 같은 긴 막대기를 불고 있는 모습 등
사냥과 일종의 종교적 행위를 연상시키고 있다.
다소 과장된 남근(男根)을 표현하고 있으며, 사지를 벌리고 있는
정면상이나 가면처럼 얼굴을 표현한 그림도 있다.
오른쪽 하단 사람이 월굴을 표현한 그림이 보인다.
3
반구대 그림을 색갈로 표현
육지 : 사슴, 호랑이, 표범, 늑대, 여우, 노루, 고라니, 멧돼지가 있고
수중 : 긴수염고래, 혹등고래, 귀신고래, 바다거북, 물개, 바다새등
바위그림에서 검정색은 고래들의 표현이고 적색계통은 육지동물들을 표현하였다.
아주 작게 표현한것 들은 어린 새끼를 나타낸 의미로 추정한다,
반구대 그림을 다른색깔로 표현
도구 : 배, 부구, 작살, 그물, 활, 창. 망 등.
그물을 쳐놓거나 여러사람이 몰아 둘러싸는 장면이 나타난다.
울주 반구대 바위그림
울주 반구대 바위그림
사슴 뿔의 특징을 잘 표현하였다.
울주 반구대 바위그림
왼쪽의 큰 고래 한마리는 등 쪽에 작살이 표현되어있다.
울산 울주 천전리 각석[蔚州川前里刻石]
국보 제147호
울산광역시 울주구 두동면 천전리에서 발견된 선사시대의 암각화.
시베리아를 제외한 극동지방에서는 한국에만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선사시대의 유적이다.
이 메일은 여행중 현장에서 수집한 '유인물'과 인터넷에서 조사한
'다음 백과' 나 복사를 허락한 '불럭' '카페' 들을 참조하여 같이
공유하고자 작성하였습니다
다음은 불국사와 석굴암중심으로 관강 하겠습니다.
2018년 11월 25일. 월용이가 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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