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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는
만해(萬海, 卍海) 한용운(韓龍雲) 님의 시집(詩集)이 모두 두 권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詩)를 낭송(朗誦)한 테이프도 하나 있습니다.
며칠 전,
인터넷 상에서 만해의 시, <고적한 밤>을 접하게 되어
반가운 마음에 책꽂이에서 꺼내어 다시 읽어 보게 되었습니다.
작은 사이즈의 포켓북인 시집(詩集)을 여니,
예전에 제가 써 놓았던 글씨가 아래와 같이 눈에 들어 옵니다.
’96. 9. 3. 파주 보광사에서…
그리고 그 글 위에는,
佛!!
이라고 가운데 획을 힘있게 길게 내려뜨려 써 놓은 것도 보입니다.
벌써 꼬박 십년전의 일이라 기억이 생생하진 않으나
만해의 시를 읽고 느낀 제 느낌을
부처를 뜻하는 불(佛)이라는 글자로 적었을 겁니다.
그것도 느낌표를 두 개나 찍은걸 보면
아마도 그에게서 강렬(强烈)한 인상(印象)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갖고 있는 두 권의 시집에서
다른 이들은 만해(萬海)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같이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문학 평론가(文學 評論家)이신 신동한 님께서
그 시집(詩集)에 올려주신 글에서,
‘한평생 <님>을 찾아 노래 부른 한용운’ 이라는 제하(題下)에 쓰신 글의
그 일부(一部)를 발췌(拔萃)하여 아래와 같이 그대로 옮겨 봅니다.
“......나라사랑 제 2 집 한용운 선생 특집호에서 정광호씨는
한용운의 ‘님’을 찾는 한평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중략….
한평생 65년 동안 하루도 ‘님’을 여의고 살아 본 일이 없는 만해.
이 민족적 애국 지사로서의 만해가
평생을 바라고 생각하며 지켜보던 대상은 일반이 알다시피 '님'이었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衆生)이 석가(釋迦)의 님이라면 철학(哲學)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薔薇花)의 님이 봄비라면 맛치니의 님은 이태리(伊太利)다.
님은 나를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연애(戀愛)가 자유(自由)라면
님도 자유(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自由)의 알뜰한 구속(拘束)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기루어서 이 시(詩)를 쓴다.
-<만해 한용운의 시(詩), 군 말>-
그 자신의 말대로 ‘님’이란 그에게 있어서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뉘앙스를 갖는 것이 사실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생각하는 ‘님’만이 님은 아니었다.
석가모니가 생각하는 님을 중생이라 한다면,
만해가 생각하는 님은 중생의 한 부분인 겨레요,
조국이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혹은 불교, 혹은 문학, 만해가 추구하는 대상이면
무엇이든 다 ‘님’일 수가 있는 것이다. ……………후략……………………”
이번에는 나머지 다른 시집(詩集)에 적힌,
또 다른 이가 보는 만해에 대한 글을 마저 봅니다.
역시 부분적인 발췌(拔萃)이며,
‘만해사상연구회(萬海思想硏究會)’의 회장(會長)이신 전보삼 님의 글 입니다.
“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 시집의 주어인 ‘님’은 누구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는 매우 조심스럽다.
그 이유는 한마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다양성과 통일성이 끝없이 교차하면서
새로운 조화의 세계를 이루어 내는 우주적 세계관을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님이란 조국, 민족, 불타, 중생, 애인, 연인으로 다 표현되어진다.
그러므로 어느 것 하나만의 의미를 함축할 수 없는 단어로서
일체의 모든 것을 포함하면서 다시 우리 앞에 다가온다.
그 한마디의 말을 만해 한용운은
님으로, 침묵으로, ? 으로, .(一點)으로
그리고 유, 무의 세계를 넘어선 공(空)의 세계로
차례로 나타내기도 하고 사라지게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것을 침묵으로 표현하기도 하였지만,
침묵은 다시 사자후가 되어 우리의 귓전을 때린다.
논리적 사고나 분별력으로
이 세상 전부를 안다고 하여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설하고 있다.
침묵의 언어 뒤에 숨은 함축적인 의미를 넘어
공(空)의 철학을 이해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진리, 그것 자체 즉 언어의 표현을 넘어선 그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중략……………………………………
한용운은 무엇이라고 말하는 순간에 이미 그 세계를 뛰어 넘어
중정(中正)의 도(道)를 가르치고 있다.
이 한 정신이 생명의 근원이 되고, 영혼이 되고,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종교적 신념의 결정체로
만해 한용운의 사상과 철학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후략………….
이제 본(本) 글로 돌아 와,
며칠 전에 본, 만해(卍海)의 시를 다시 보기로 하겠습니다.
그의 생멸 연도(生滅 年度)가 (1879~1944)인 것을 감안하여,
현대 맞춤법의 표기(表記)에 따르지 않고
그 당시(當時)의 표현을 그대로 따라 옮겨 봅니다.
고적한 밤
하늘에는 달이 없고, 따에는 바람이 없읍니다.
사람들은 소리가 없고, 나는 마음이 없읍니다.
우주(宇宙)는 죽음인가요
인생(人生)은 잠인가요
한 가닥은 눈썹에 걸치고,
한 가닥은 적은 별에 걸쳤든
님 생각의 금(金)실은 살살살 걷힙니다.
한 손에는 황금(黃金)의 칼을 들고,
한 손으로 천국(天國)의 꽃을 꺽든
환상(幻想)의 여왕(女王)도 그림자를 감추었읍니다.
아아 님 생각의 금(金)실과
환상(幻想)의 여왕(女王)이 두 손을 마조 잡고,
눈물의 속에서 정사(情死)한 줄이야 누가 알어요.
우주(宇宙)는 죽음인가요
인생(人生)은 눈물인가요
인생(人生)이 눈물이라면
죽음은 사랑인가요.
먼저,
‘고적한 밤’ 이라는 시(時)의 제목(題目)을 봅니다.
고적(孤寂)이라는 말은,
외로울 고(孤)와 고요할 적(寂)이 모여 이루어진 말입니다.
‘외롭고 고요하여 쓸쓸한 밤’이라는 이 제목(題目)에서부터
벌써 마음 한 편이 쓰리고 아려옴을 느끼시는 분도 더러는 계시리란 생각이 듭니다.
그러하시다면 그 어떤 무엇이 만해(萬海)로 하여금
과연(果然) 그토록 외롭고 적적(寂寂)하게 하였는지를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늘에는 달이 없고, 따에는 바람이 없읍니다.
사람들은 소리가 없고, 나는 마음이 없읍니다.
달 마저도 없는 늦은 밤에
벗할 가벼운 한 줄기 바람조차 없이 세상은 고요하기만 하고
그나마 사람들은 모두 깊은 잠에 들어 인기척도 없는 가운데
만해(卍海) 홀로 깨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거기까지는 만해(萬海), 비단(非但) 그 만이 아니라
다른 누구라 해도 고적(孤寂)하다는 표현을 할만하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 다음의 말로 인하여,
그 고적함은, 깊은 밤이라는 시간대(時間帶)에 나타난 상황(狀況)에 대해서만
언급(言及)하는 것만은 아니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다른 시(詩)에서도 자주 나타나듯이
어쩌면 그 ‘고적(孤寂)한 밤’이라는 그것은,
철저한 은유(隱喩)일 수도 있고 어쩌면 비유(譬喩)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다음의 말을 보기로 하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없습니다.’
나는 마음이 없다? …
이 글을 대하시는 님께서는
이 ‘마음이 없다’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理解)를 하고 받아들이시렵니까?
예컨대,
근심과 걱정이 많아서 잠을 잘 마음이 없다?
무엇을 잃어버린 듯 허전한 게 가슴이 뻥 뚫린 듯 하여 마치 마음이 없는 것 같다?
아니면 우스개로, 배가 출출하긴 하지만 뭔가를 먹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러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이 한 편(篇)의 시(詩)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나는 마음이 없습니다.’라는
다소 생소(生疎)한 듯한 말이
뜻하는 의미(意味)를 먼저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그 다음으로 나오는 말 또한 이해가 쉬울 듯 하여
그 말이 갖는 비중(比重)을 생각하여 좀 길어지더라도 찬찬히 풀어 나가려 합니다.
만해(卍海)는
시인(詩人)이면서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한 애국 지사(愛國 志士)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선각자(先覺者)이며 깨달은 선사(禪師)이기도 합니다.
그러하기에 불교적(佛敎的)인 시각(視角)의 접근(接近)을 통해
그 말의 뜻을 알아 보는것도
이해를 돕는 방법(方法)의 하나 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선, ‘마음이 없다’는 말을 한자어(漢字語)로 바꾸면
없을 무(無)에 마음 심(心)인, 무심(無心)이라고 표기하게 됩니다.
세간(世間)에서 흔히들 ‘무심(無心)하다’ 하면,
마음이 매정하고 쌀쌀하여 냉정(冷情)한 사람을 두고 이를 때
사용하는 말이 되기도 하지만
사람으로서의 따뜻한 생각이나 아무런 감정(感情)이 없는 사람을
지칭(指稱)할 때에도 사용하며
자신이나 다른 이가 힘들고 어려운 처지(處地)에 이르거나
안타깝고 억울한 일을 겪거나 보고 들을 때에도
‘하늘도 무심(無心)하시지…’ 하면서 그 말을 사용해 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만해(卍海)는 어떠한 경우에 해당되는 뜻을 가지고
‘나는 마음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는지 좀더 알아볼 필요(必要)가 있겠습니다.
마음이 없는 이는 이 세상 천지(世上 天地)에 아무도 없습니다.
하다못해 집에서 기르는 개도,
저 예뻐하는 줄을 알아, 만나면 꼬리를 흔들며 반가와 합니다.
사람의 말을 못하는 짐승이라고 해서 생각이 없는 것은
절대(絶對)로 절대(絶對)로 아닙니다.
생각이 깊고 얕고 를 떠나서 그 생각이 있다함은
곧 마음이 있는 것이라고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야기가 곁으로 새는 듯 하지만,
‘마음이 있다하면 불성(佛性)이 있다.’ 라고 또한 알아야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불성(佛性)이 있다’라고
분명히 말씀 하셨습니다.
세계 4 대 성인(聖人) 중의 한 분이 되시는 분께서
함부로 허튼 소리야 하셨겠습니까?
조주 선사(趙州 禪師)에게 학인(學人) 두 사람이 드린,
‘개(狗)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하는 똑같은 질문(質問)에
한번은 있다 하시고 한번은 없다 하시는 바람에 여러 사람 헛갈리게 된,
그 유명한 ‘무자화두(無字話頭)’의 이야기를, 아시는 분은 아실 겁니다.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느냐고 물어왔을 때
무(無)라고 대답한 그 뜻을 누구나 바로 아는 것은 아닌 것처럼,
‘나는 마음이 없습니다.’ 라는 말 또한 그러합니다.
조주(趙州)의 ‘무자화두(無字話頭)’와는 좀 다른 듯 하지만,
그 진의(眞意)의 파악(把握)이 모호(模糊)하다는 점에서는
거의 대동소이(大同小異)한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그 뜻을 해설(解說)함에 있어 알음알이의 지견풀이(知見解)로
마치 그럴 듯 하게 설명(說明)을 할 수 있는 이도 더러는 계실 겁니다.
비유(譬喩)를 하나 든다면,
아프리카 적도(赤道) 부근에서 태어나
평생을 작열(灼熱)하는 태양 아래에서만 살아 온 이가
함박눈 펑펑 내리는 한국의 한겨울에 대한 이야기를
비디오 테이프를 통해 수도 없이 보고 또 보았다고 했을 경우에
그 겨울의 맛과 정경(情景)을 짐작해 보고는,
주변 사람들에게 마치 자신이 직접 가서 보고 겪은 듯이
상세한(詳細) 설명을 해 줄 수 있게끔 되었다 하더라도
정작 본인은 그 겨울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體驗)이 없기에
눈(雪)이 자신의 몸에 닿는 느낌과 그 지독(至毒)한 추위의 맛은
결코 알 수 없는 것과도 같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마음이 없다 함은,
돌이나 마른 나무토막같이 생각이나 느낌이 없다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마음이 없다라는 그 말은 바로 ‘마음이 있기에 나온 말’ 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없다’ 라는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러한 표현이 나온 곳이 분명히 있기 때문 입니다.
그 표현이 나온 곳을 우리는 또 ‘마음’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없다는 마음의, ‘마음의 마음’ 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 ‘마음의 마음’이 바로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자리’ 입니다.
곧 일체(一切)의 생각이 비롯된 근본(根本)이 되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 근본(根本)이 되는 자리가 ‘허공에 뜬 본체(本體)로서의 달(月)’이라면,
근본이 있기에 표현이 된 모든 생각과 드러난 모습은,
‘물에 비친 허상(虛像)으로서의 달(月)’이랄 수 있습니다.
가리키는 손가락이 가상(假相)이라면 떠 있는 달은 실상(實相)인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달을 보지 못하고 가리키는 손가락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주객(主客)이 전도(顚倒)된 형국(形局)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생각을 무슨 수로,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 그 이전의 소식은 생각으로 알아지는 것이 아니기에
그것은 생각이 아닌, 체험(體驗)이라는 경험(經驗)을 통해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를 평생을 쉬지 않고 해 오고 있으면서도
숨을 쉰다는 생각을 해 가며 호흡(呼吸)을 해온 것은 결코 아니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그 모든 것은 어떤 형태(形態)가 되었든 전부 호흡을 하고 있습니다.
고등생물(高等生物)의 폐,
어류(漁類)의 아가미,
곤충류(昆蟲類)의 기관(器官),
식물(植物)의 탄소동화작용(炭素同化作用) 등을 통해
일체생명(一切生命)이 호흡작용(呼吸作用)을 한다 함에는
아무런 차이(差異)가 없습니다.
생각은 시시때때로 바뀝니다.
육신도 끝없는 세포분열(細胞分裂)을 거듭 합니다.
생각도 바뀌고, 육신의 모습도 변화(變化)를 계속 합니다.
고정(固定)되어 있지 않고 변화만을 거듭하니
그 언제 그 어느 때의 생각과 육신을 나라고 집어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곰곰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생각도 바뀌고 육신도 변하지만
그 바뀌는 생각들을 일어나게 하는 주처(主處)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 변화를 주도(主導)하는 그 자리는 결코 변함이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자리는 모습이 없기에 볼래야 볼 수도 없고 만져 볼래야 만질 수도 없습니다.
소리도 없기에 들리지도 않습니다.
태어난 적이 없기에 죽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 온갖 신통묘용(神通妙用)을 다 부립니다.
신통묘용(神通妙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보고 듣고 말하고 아는 이 모든 능력(能力)이 곧 ‘신통묘용(神通妙用)’ 입니다.
무정물(無情物)로서 자체(自體)에 생각이 없는 눈이
어찌 눈 스스로 볼 수가 있겠으며,
무정물(無情物)로서 자체(自體)에 생각이 없는 귀가
어찌 귀 스스로 들을 수 있겠으며,
무정물(無情物)로서 자체(自體)에 생각이 없는 코가
어찌 코 스스로 맡을 수 있겠으며,
무정물(無情物)로서 자체(自體)에 생각이 없는 입이
어찌 입 스스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무정물(無情物)로서 자체(自體)에 생각이 없는 몸이
어찌 몸 스스로 추위와 더위를 알 수 있겠으며,
또한,
무정물(無情物)로서 자체(自體)에 생각이 없는 뇌(腦)가
어찌 뇌(腦) 스스로 이 모든 것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이라 일컫는,
사람만이 대단하다고는 결코 말씀하지 마십시오.
사람의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몸과 뇌(腦)를 통해 하는 일을
겉 모습과 차원은 다르지만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도 나름대로 그 모든 것을 다 합니다.
이 층에 위치한 거실의 책상 앞에 앉아 이 글을 써 내려가고 있는 지금,
열린 유리창 문을 통해 쇠로 만들어진 대문(大門)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이어 아래 층에 사시는 분의 승용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는 창 문 아래로 내려다 보지 않고도 이러한 것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저만이 아니라 여러분들도 다 아실 수 있습니다.
인정하지 않으실지도 모르나 바로 이것을 신통묘용(神通妙用)이라고 합니다.
비단 사람뿐만 아니라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도 다 할 수 있는 능력(能力)입니다.
그래서 강아지도 신통묘용(神通妙用)을 합니다.
그것은 본래(本來)로 할 수 있는 타고난 능력(能力)입니다.
싱겁고 얼토당토 아니하다고 말씀 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으나,
작은 씨앗에서 싹이 나오고, 새 한 마리 날아감 조차도
진실(眞實)로 신통묘용(神通妙用) 아님이 없는 이 도리(道理)입니다.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서부터
방금 집 안으로 들어 온 분이 주차(駐車)를 하고 차에서 내리는 동안까지
그 분이 실내에서 기르는 아직 작고 어린 애완용(愛玩用) 강아지 한 마리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하며, 앓는 듯이 응석 부리는 듯한 목소리가
그 집의 닫힌 현관문을 뚫고 들려 옵니다.
평소에 외부인(外部人)을 보았을 때,
제 딴에는 제법 위협적(威脅的)으로 짖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입니다.
그 강아지는 홀로 집에 있다가 주인(主人)이 돌아 오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반복(反復)되는 일상사(日常事)에 어느 정도 익숙해 졌기는 했겠지만,
아마 외롭기도 하고 아마 무섭기도 했을 겁니다.
아무튼 그 강아지나 저나 소리만 듣고도 누가 왔는지를 안다 함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어린 강아지 조차도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자신의 말을 할 줄 알며,
배고픔의 무서움과 홀로 있는 외로움과 두려움을 압니다.
그러니 부디 강아지 한 마리라도 절대로, 절대로 우습게는 보지 마실 일 입니다.
다시 곰곰이 또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막힘도 없고 걸림도 없이 이리 알 줄도 알고 저리 할 줄도 아는
그 차별없는 자리를 우리는 마음이라고도 하고 불성(佛性)이라고도 합니다.
눈이 본다 하나 눈이 보는 게 아니요,
귀가 듣는다 하나 귀가 듣는 게 아닙니다.
눈과 귀를 통해 보고 들을 줄 아는 주인공(主人公)이 따로 있습니다.
바로 ‘마음’이라는 존재(存在) 아닌 존재(存在)입니다.
천지동근(天地同根)이요 만유일체(萬有一體)라는 말이 있습니다.
직역(直譯)하면, 하늘과 땅의 뿌리가 같고 세상의 모든 것이 한 몸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뿌리(根)’에 해당되고 ‘한 몸(一體)’에 해당되는 것을,
우리는 마음이라고도 하고 불성(佛性)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오직 그 마음 하나이기에 유심(唯心)이라 하고,
오직 그 마음 하나에서 모든 게 비롯되고 벌어지니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해(卍海)는 ‘나는 마음이 없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 거짓 말 입니까?
이 참 말 입니까?
…… ,
이는 말 중의 말인 ‘참 말’이라 할 수 있으니,
진어(眞語) 중의 진어(眞語)라고 알아야 할 이유(理由)가
분명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없습니다.’
여기에서의 ‘나’는,
절대성(絶對性)에서 비롯한 상대성(相對性)으로서의
만해(萬海)의 무상(無常)한 육신(肉身)인 ‘나’가 아닙니다.
만해의 육신과 생각이 비롯된 근본(根本)이 되는,
불성(佛性)으로서의 ‘나’인 것입니다.
싫으니 좋으니 기쁘니 슬프니 하는
온갖 희로애락(喜怒哀樂)의 느낌과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절대성(絶對性)의 무상체(無相體)로서의 그 ‘나’이기에
허망(虛妄)하게 변하고 스러지는 유한(有限)한 삶의 중생(衆生)으로서의 ‘나’가 아닌
변치 않고 멸(滅)함이 없는 부처로서의
영원(永遠)한 ‘나(我)’임을 자각(自覺)한 깨달음의 사자후(獅子吼)를 하는
당처(當處)로서의 ‘나(我)’인 것입니다.
이것이 만해가 말한, ‘나는 마음이 없습니다.’ 입니다.
마음도 이름이고 불성(佛性)도 이름 입니다.
이름이 마음이고 이름이 부처인 것 입니다.
그 자리는 보이지 아니 하여 없는 듯 하나 참으로 있고,
모습이 없기에 시공(時空)의 제약(制約)도 받지 않습니다.
선(善)과 악(惡)을 두루 막힘 없이 쓰되,
그 자리는 선(善)에도 악(惡)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善)과 악(惡)이 그 자리에서 나왔습니다.
무엇이든 알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어 전지전능(全知全能)이라 했고,
온 우주(宇宙)에 두루 하여 없는 곳이 없기에
무소부재(無所不在)라고 이야기한 바로 그 자리 입니다.
다시 말씀 드려,
그러한,
‘신(神)의 속성소(屬性所)가 만유(萬有)에 편재(遍在)하다.’는
그 소식(消息)인 것입니다.
크다 하면 크고 작다 하면 작기에, 큰 것도 아니요 작은 것도 아닙니다.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하나, 높은 것도 아니요 낮은 것도 아닙니다.
오래 된 것도 아니고 이제 막 생긴 것도 아니기에 언제나 지금 입니다.
시작이며 끝이고 끝이며 시작이기에,
끝 없는 일원상(一圓相)의 알파와 오메가 입니다.
언제나 스스로 홀로 밝은 소소명명(昭昭明明)한 그 자리이기에
어두움과 밝음이라는 상대적인 말이 전혀 해당되지 않는 자리인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없습니다.’에서의 ‘나’ 이고, ‘마음이 없습니다.’ 입니다.
진정(眞正)으로,
그러한 의미(意味)에 있어서의 ‘나’는
이 있는 듯 하나 보이지 않아 없고,
없는 듯 하나 분명히 드러나기에 참으로 있어
있다느니 없다느니 하는 분별(分別)을 떠난
초월(超越)한 자리에서의 ‘나(我)’이니,
‘참나’를 뜻하는 ‘진아(眞我)’라 이르는 것입니다.
이제 이쯤에서,
만해의 다음 글을 보겠습니다.
우주(宇宙)는 죽음인가요
인생(人生)은 잠인가요
우주(宇宙)와 ‘나’가 둘이 아님을 아는 깨어있음 이라,
잠잠하고 조용한 고요의 극치(極致)인 본체(本體)와 하나되고 보니
모든 것이 마치 죽어 있는 듯한 고요함을 봅니다.
깨어 있는 그의 분수(分數)에서 뭇 사람들의 인생(人生)을 보니,
죽음과도 같은 깊은 잠에 들어있는 또 다른, 무지(無知)의 고요함을 보게 됩니다.
모두들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듯하여
측은지심(惻隱之心)의 연민(憐憫)을 갖게 됩니다.
같이 입 섞어 이야기할 대상(對象)이 없음에서 오는
외롭고도 쓸쓸한 고적(孤寂)함의 심정(心情)이 됩니다.
하필이면, 달도 없고 바람도 없고 인기척도 없는 이 때에 말 입니다.
한데 섞여 함께 말을 나눌 이 하나 없는,
이 선각자(先覺者)의 그 고독(孤獨) 아닌 고독(孤獨)을
그 누가 있어 알아 주겠습니까!
한 가닥은 눈썹에 걸치고,
한 가닥은 적은 별에 걸쳤든
님 생각의 금(金)실은 살살살 걷힙니다.
만해(卍海)는 자신의 지나온 삶을, 고요한 가운데 돌이켜 회상(回想)해 봅니다.
한 가닥의 실은 한 가닥의 생각이요,
그 생각이 눈썹에 걸쳤다 함은
미간(眉間)을 찌푸려 곰곰이 삶을 고뇌(苦惱)하던 자신의 모습을 말 합니다.
또, 작은 별에 걸쳤던 한 가닥의 생각은 높고도 멀어 아득하기만 한
그러나 반짝이는 빛을 발(發)하는,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고자 하는 염원(念願)을 말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 때의 만해의 ‘님’ 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금(金)으로 된 실과도 같은 귀(貴)하고 가치 있는 생각들이
문득 밝아진 마음으로 인해 하나 하나씩 걷히게 되는 체험(體驗)을 하게 됩니다.
한 손에는 황금(黃金)의 칼을 들고,
한 손으로 천국(天國)의 꽃을 꺽든
환상(幻想)의 여왕(女王)도 그림자를 감추었습니다.
스스로 밝아져 알게 된 이후에 그 일을 돌이켜 보니 마치,
쇠로 만든 칼도 아닌,
변치 않을 순수한 황금(黃金)으로 된 지혜(智慧)의 칼(劍)을 갖추고
범부(凡夫)들은 가히 상상도 해 보지 못 할
하늘나라인 천국(天國)으로 표현한, ‘높은 차원(次元)의 정신계(精神界)’에 이르러,
꽃을 꺾어 희롱(戱弄)하듯 보란 듯이
만용(蠻勇)아닌 만용(蠻勇)의 유유자적(悠悠自適)함을 누려 보았으나,
그래 보았던들 그 모든 잘난 듯 함이
마치 여왕(女王)이라도 되어 누리는 호화(豪華)롭고 풍요(豊饒)로움인 듯 하지만
어차피 왕(王)은 왕(王)이로되
여왕(女王)의 분수(分數)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연유(緣由)로 인하여,
남아대장부(男兒大丈夫)로서의 더 높은 차원의 대왕(大王)이랄 수 있는
삼세(三世)를 뛰쳐 난 대웅(大雄)인 법왕(法王)이 갖는 권위(權威)로서의
완전한 깨달음에 이른 ‘해탈장부(解脫丈夫)’의 그것에는 못 미치는
그저 알음알이의 분별지심(分別之心)이었음을 알게 되어,
환상(幻想), 즉 변하는 생각 생각에 속았음을 또한 알게 되고
그에 따라 그러한 생각 자체(自體)를 미련 없이 놓아 버리니,
그 뒤를 쫓던 망상(妄想)의 그림자 또한 당연히 자취를 감추게 되어
능수능란(能手能爛)이니 활달자재(豁達自在)이니 하는 생각에 매여있던
부질없는 헛된 생각놀음의 견해(見解)마저 덩달아 여의게 되어
참 깨달음이라는 법(法)의 진수(眞髓)를 문득 맛 보기에 이르게 됩니다.
다시 말씀 드려서,
가아(假我)인 자아(自我)의 아상(我相)이라는 오랜 습(習)에 젖어
어정쩡한 ‘종이 호랑’이 노릇을 하다가
본체(本體)되는 실상(實相)인 진아(眞我)에 투철(透徹)하게 계합(契合)이 되니
비로서,
우렁찬 목소리로 포효(咆哮)하는 ‘살아있는 호랑이’가 되었다 하겠습니다.
아아 님 생각의 금(金)실과
환상(幻想)의 여왕(女王)이 두 손을 마조 잡고,
눈물의 속에서 정사(情死)한 줄이야 누가 알어요.
그 일을 생각해 봄에 어찌,
아아- 라는 감탄(感歎)의 탄성(歎聲)인들 나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정각(正覺)인 깨달음을 향한 귀한 금(金)과도 같은 염원(念願)과
변(變)하는 생각으로서의 환상(幻想)이랄 수 있는,
허망(虛妄)한 뒤바뀐 꿈으로서의 주객(主客)이 전도(顚倒)된
무가치한 풍요(豊饒)로서의 여왕(女王)과도 같은 삿된 견해(見解)가 한데 어우러져
안과 밖이 둘 이라지만 녹아 드는 몰아(沒我)의 과정(過程)에서 하나가 되고
다시 그 하나마저 없는 무아(無我)가 되니,
마치 남녀지간(男女之間)의 깊은 운우지정(雲雨之情)의 끝에 다 달아
너라고 할 너도 없고 나라고 할 나도 없어,
너도 죽어지고 나도 죽어진 듯하여
열애(熱愛) 끝에 차라리 둘로 다시 나뉘느니
죽음을 택하여 정사(情死)마저 불사(不辭)하도록 이끄는
극단적(極端的)인 희열(喜悅)의 맛봄에
유무일체(有無一切)에 유무상통(有無相通)한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는
불이도리(不二道理)의 둘 아닌 세계(世界) 속으로 침잠(沈潛)함이니,
그러한 환희(歡喜) 가운데에서 깨달음의 뜨거운 눈물과 함께
하나로 고이 잠들어 가라앉음을
그 어느 누가 겪은 바의 경험(經驗)이 있어
그러한 은밀(隱密)한 일을 과연 알 수나 있다고 이르겠습니까!
우주(宇宙)는 죽음인가요
인생(人生)은 눈물인가요
인생(人生)이 눈물이라면
죽음은 사랑인가요.
우주(宇宙) 온 법계(法界),
삼라만상(森羅萬象) 일체(一切)가 죽음과도 같이 고요한
근본(根本)을 여의지 않았건만
고요하고 말이 없다 하여 죽고 없음 이라고는 결코 말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결국 이러한 이치를 모르는 사람의 삶이란,
고통(苦痛)의 바다에 가득 채워진 눈물과 같다 하겠으니
비록, 사람의 인생(人生)이 고통으로 가득 찬
눈물의 바다인 고해(苦海)와 같다 할지라도,
그 고통이 죽은 듯이 사라져 고요함에 이르는 길이 있음을 깨닫고 만 지금에 이르러
어찌 연민(憐憫)의 자비(慈悲)로운 마음으로
둘이 아닌, 눈물의 인생(人生)들을 사랑치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있는 ‘나’인 유아(有我)가 죽어, 없는 ‘나’인 무아(無我)가 태어났으나
유아(有我)와 무아(無我)가 언제부터 둘이었던 적이 있기라도 하였습니까?
유무(有無)가 둘이 아니듯 부처와 중생(衆生) 또한 둘이 아니기에,
없는 ‘나’인 무아(無我)의 자리에서,
있는 ‘나’의 유아(有我)로서의 또 다른 ‘나’인
사실은 부처이나 스스로 속아 중생(衆生)으로 자신을 잘 못 아는
일체(一體)인 일체(一切)의 중생(衆生)을
도저히 사랑치 않을 수 없다는 철저한 자각(自覺)에 대한
스스로의 자백(自白)이며 또 고백(告白)인 시(詩)가 되고 맙니다.
그러한 즉 만해(卍海)의 시(詩), ‘고적한 밤’은
깨달음의 견처(見處)에서 노래한
증도가(證道歌)의 하나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님의 ‘고적한 밤’을 읽고 난 느낌의 조각들을 모아
나름대로의 깜냥대로 마구 적어 내리다 보니,
참으로 지루하고도 멋 대가리 없는 긴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붉은 사과 한 알이 있습니다.
같은 하나의 사과를 두고도 그 사과를 바라보는 각도(角度)에 따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이의 표현(表現)이 다르고,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이의 표현(表現)이 다르고,
왼편이나 오른편에서 바라다보는 이의 표현(表現)이 다릅니다.
이렇듯 하나의 사과를 보고도 그 느낌은 제각기 다르기 마련이듯이,
세상을 보는 각자의 위치에 따라 각자에게 다가오는 세상 역시 다를 것입니다.
어차피 나름대로의 생각과 견해대로 살아가는 세상사(世上事)이기에
마찬가지로 만해(萬海)를 대하는 느낌도 천차만별(千差萬別)로 다르다 하겠습니다.
그러하기에 천번만번(千番萬番)을 장황(張皇)하게 떠들어본들
만해(卍海)의 진면목(眞面目)이야 어찌 드러낼 수 있으리요마는
그러함에도 저는 저대로의 객기(客氣)어린 목소리로
공연(空然)히 그를 드러내 봅니다.
그러한 제 말이,
님들의 마음에 공감(共感)이 될 수도 있겠고
아니면 반감(反感)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하기에 비둘기가 모이를 찾는 구구대는 소리나
독수리의 허공(虛空)을 찢는 큰 외침이나 할 것 없이
서로의 목소리가 어차피 다르다 함은
분쟁(忿爭)거리가 아닌 오히려 조화(調和)됨이라 이르겠습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동물(動物)이든 식물(植物)이든
그 무엇이 되었든 간에
표현된 일체(一切)의 것은 우리의 절대성(絶對性) 자리를 결코 여읠 수 없고,
절대성(絶對性)은 상대성(相對性)인 일체(一切)로 인해 드러나고
상대성(相對性)은 유일(唯一)인 절대성(絶對性)으로 인해 표현되니
어차피 둘이 아님이거늘,
허공(虛空)에 그림자 없는 무영탑(無影塔) 하나는 쌓았으나
부질없고 덧없는 말 만이 결국은 무성(茂盛)해 지고 말았습니다.
이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진달래는 예로부터 진달래이고
개나리도 역시 예로부터 개나리인,
일체(一切)에 평등(平等)하여 차별(差別)이 없는,
"법(法)!"
그 하나만 무심(無心)히 내려놓고, 길기도 긴 글을 마칩니다.
2006년 2월 6일
묵조(默照)
<사진출처>
‘염정의’ 님의‘한국의 비경(秘景)
http://WWW.inyeung.com.ne.kr/bikyung.htm
첫댓글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글을 대합니다.
너무나 감사한 말씀이십니다. 선생님의 작품을 일일이 허락도 받지 아니하고 제 글에 사용하는 무례에도 불구하고 책망 한번 아니하시는 것만으로도 몸둘 바를 모르고 그저 감사한 마음입니다. 선생님께 거듭 거듭 감사한 마음과 또한 건강하시기를 바라는 마음, 한결 같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