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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랑의 고향 강진, 장보고의 청해진이 있는 완도를 다녀오다
2020년 1월부터 찾아온 코로나19 감염 바이러스는 우리 사회를 뒤흔들어 놓았다. 중국 우한에서 출발한 이 질병은 우리나라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대구 신천지 교회에서 전염되기 시작한 이후 대구·경북 지역으로 확산하여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게 했다. 이로 인해 국민의 일상이 비정상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내 아들이 경영하는 태권도장까지 휴관할 정도로 사회적으로 큰 혼란을 겪었다. 정말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사회였다. 모든 사회활동이 중지된 것이다. 외출할 때에는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했다. 우리들의 3월 모임도 사회적 제약으로 할 수 없었다. 이 바이러스가 조금 수그러든 5월부터 사회적 거리 두기를 통해 조금씩 활동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대표적 스포츠인 야구도 한 달 후인 5월 5일(무관중) 개막을 했다.
그동안 있었던 우리들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게 했다. 주민 센터나 노인복지관의 행사는 모두 중지되었다. 평상시 자주 만나 웃고 지내던 시절은 없어졌다. 평소 잘 하지 않던 마스크도 써야 했다. 그리고 바이러스에 전염되지 않기 위해서 서로 의심하는 일까지 생겼다. 그래서 만남은 자동으로 뜸해졌다.
3개월에 한 번씩 모임을 했던 우리는 6월에야 겨우 만나게 되었다. 우리가 늘 모임을 했던 장소에 전화했더니, 예약이 다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모일 장소를 다시 물색해야 했다. 회원들에게 자문을 얻은 결과 마산에 있는 그랜덤 예식장 내 경회루에서 만나기로 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아쉬움을 해결한 듯이…….
식사하면서 살아온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가운데 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밥을 해 주는 친구가 여름휴가를 일주일 받았다고 한다. 이 기간에 여행을 갔으면 좋겠다고 안건을 제시했다. 우리의 계획은 3월 모임과 12월 모임에는 여행을 가게 되어 있었다. 여름휴가 때에는 한 번도 여행을 간 적이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 간에 의견이 어느 정도 일치를 보았다. 그 가운데 친구 하나는 코로나 때문에 가겠느냐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나는 총무로서 회의 결과를 카톡에 기록해 놓았다. 그 결과를 회원들에게 전달했다. 그 후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제주도를 가는 게 좋다고 한 친구가 있었다. 그래서 이곳을 가기 위해 사전 조사를 했다. 일정을 8월 3∼5일로 안내하고 1인당 경비를 조사했다. 1인당 경비가 36만 원이라고 관광회사에서 알려주었다. 이 사실을 공지하니 어떤 친구는 비싸다 하고 어떤 친구는 코로나 19가 기내에서나 관광지에서 감염될 우려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직장을 가진 사람들을 배려하는 측면에서 1박 2일 머물 수 있는 다른 장소를 선택했다.
회장의 아들이 농협 직원으로 콘도 예약을 담당하고 있었다. 회장이 아들에게 하동에 있는 농협 콘도를 예약했는데, 후보 1순위가 되어 확정을 짓지 못했다. 그 아들의 말을 빌리면 기간이 다 되어 가면 취소하는 사례가 많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러나 기간이 점점 다가오니 불안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만약에 예약 취소가 되지 않을 경우, 우리의 여행은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다시 회원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장소를 정하기로 하였다. 누군가 완도 바하펜션을 알아보라고 했다. 그때 문득 내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지난
해 12월에 여행 가기로 짜 놓은 계획서였다. 그것을 바탕으로 강진 및 완도 여행 계획서를 카톡에 올려 친구들의 의견을 들었다. 모두가 바깥에 나가는 것이 중요하니 어디라도 괜찮다고 했다. 그래서 완도에 있는 모텔을 검색해 보았다. 그리고 가격을 물어보았다. 이때가 7월 3일이었다. 방 4개로 개당 90,000원이었다. 왜 이렇게 비싸냐고 물었더니, 주말이라 어쩔 수 없다고 하였다. 또 한 곳을 물어보니, 방 1개당 50,000원이라고 했다. 또 한 곳은 리모델링하고 있는데 그때 가 봐야 알 수 있다고 했다. 일단은 성수기라도 너무 비싸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사실을 친구들에게 알려 주었다. 근데 친구들은 모텔 숙박비에 관심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편하게 여행할 수 있을까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일정을 8월 2∼3일로 정하고 1박은 8월 2일(일요일)로 하고 예약을 했다. 8인이 잘 수 있고 거실이 있는 다용도 방을 20만 원으로 정하고 선금 5만 원을 지불했다. 그리고 가까이 사는 친구에게 승합차 예약을 부탁하였다. 친구가 승합차 임대료가 250,000원이라고 했다. 나는 회원들이 승차할 수 있는 장소에 시간을 정하여 알려주었고 이틀간의 여행 계획서를 작성하여 카톡에 올렸다.
7월 25일 초등학교 동기회 번개 모임이 통영에서 있었다. 나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참석하지 않았다. 회장이 왜 안 가느냐고 전화가 왔기에 선약이 있어서 거절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이야기했다. 그날은 대학 친구와 낙동강변 둑길을 걷기로 되어 있었다. 구포역에서 낙동강변을 따라 사상역까지 친구와 둘이서 이야기를 하면서 걸었다. 중간쯤 되는 부분에 쉼터가 있어서 잠깐 쉬고 있는데, 초등학교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용인즉 지금 통영 가는 차 안에서 전라도 지방으로 여행 가는 것을 모두 취소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코로나19 감염 바이러스 때문에 갈 수 없다고 하였다. 누구도 반대하고 누구도 반대한다고 하면서……. 나는 황당하게 느꼈다. 이때까지 장소 때문에 고민했고 계획서 작성하고 예약까지 해 놓았는데 무슨 뚱딴지같은 이야기를 하는가 싶었다. 아니, 예약까지 다 해 놓았는데, 계획을 취소하라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심지어 예약금을 얼마나 지불했는지 모르지만, 떼이면 되지 않느냐고 하였다. 전화상이라 확답을 하지 않았다. 그곳에 참석하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지만, 참석하지 않은 친구와 회장의 의견도 들어 보아야 하고, 나 자신도 우리가 가자고 한 지역이 코로나19 감염 바이러스 지역인지 아닌지 늘 군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확인하고 청정지역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참으로 말이 많았다. 그 당시 광주 지역에 코로나19 감염 바이러스가 다른 지역에 비해 활성화가 되어 매스컴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 일부 지역의 감염이 전라도 지방 전체인양 오인하고 강하게 어필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의견을 반박하였다. 창원 지역에 코로나19 감염 바이러스가 확산하였다고 창원 지역 전부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너희들이 사는 아파트도 감염 지역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되물었다. 자기들끼리 온갖 이야기들이 오고 갔는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알 수 있었다. “가고 싶기는 가고 싶은데, 코로나19 때문에 가기가 힘이 든다.” 하였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하니 일을 추진하는 사람은 듣기가 거북했다. 이런 전화가 여러 번 오니, 옆에서 듣고 있던 내 아내가 다시는 이런 사람들과 여행을 가지 말라고 야단을 쳤다. 남의 신랑을 뭐로 보느냐고 하면서 열을 내기도 했다. “진짜 말 많네” 하였다. 그래서 나는 가기 싫은 사람은 안 가도 된다는 내용을 카톡에 올려놓았다. 그중에 한 사람은 안 간다는 의견을 올려놓았다. “누구는 가고 싶기는 가고 싶은데 딸이 그곳에 가면 같이 안 살려고 한다는 둥” 이런 이야기들이 나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오지 마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꼭 전체가 다 참석해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안 가도 된다고 한 번 더 성을 내면서 말했다.
나는 다시는 여행을 추진하지 않는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다. 자기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해 주면 다소 무리가 있어도 받아들여야 할 텐데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확실한 정보를 갖고 말을 하면 내 역시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텐데, 떠도는 이야기만 듣고 의견을 제시하니 너무 힘들었다. 사람은 역시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확인했다. 하루살이는 하루 동안의 일 외에는 알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배움이 적은 그들에게 무엇을 기대한다는 것은 절에서 젓국을 찾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남자 친구들은 여자들의 말을 한 쪽 귀로 듣고 한 쪽 귀로 흘리라고 하지만 내 마음은 그게 안 되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었을까? 우리가 가고자 하는 지역에 코로나19 감염 바이러스가 전파되지 않았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정확한 정보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 지역의 군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확인한 결과이었다.
나는 모두가 다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러 모임을 다녀보아도 100% 참여하는 것을 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몇몇 남자 친구와 참여할 수 있는 여자 친구를 합하면 6명 정도는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적게 가면 운영하는 내 편에서는 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상황일수록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추진해야 한다는 신념이 생겼다.
여행 날짜는 점점 다가왔다. 출발하기 전에 친구들이 승차할 장소와 시간을 정리하여 카톡으로 알려주었다. 그리고 당일 일정표를 작성해서 함께 보내주었다. 회장한테서 콘도에 자리가 비었다고 전화가 왔다. 어떻게 할 것인가? 물었다. 이미 그 장소는 우리가 마냥 기다릴 수 없어서 다른 장소로 예약을 해 놓았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반문을 했다.
여행을 가지 않겠다고 말한 친구도 마음이 변했다. 모두 가는데 자기만 빠지면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랬다저랬다 변덕이 심한 사람은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어떻든 함께 가고 싶은 사람을 냉정하게 되돌릴 수 없는 형편이라 말하지 않고 있었다. 출발하는 날, 가지고 갈 준비물을 챙겼다. 마스크, 물, 손 소독제 등…….
8월 2일 08시 20분에 승합차를 빌려주는 회사에 갔다. 주인을 만나 내가 타고 갈 차를 요청했다. 주인과 더불어 차를 점검하고 내비게이션을 확인했다. 스타렉스 12인승을 운전하고 가면서 내외동에 사는 ○○친구를 싣고 창원으로 넘어갔다. 창원 정우상가 앞에 도착하니 예정 시간보다 20분 정도 먼저 도착했다. 여자 친구 둘은 나와 있는데, 남자 친구는 나오지 않았다. 지난번에는 정확하게 도착했는데 이번에는 왜 이럴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지난번에는 늦게 출발해서 예상하는 시간에 도착했고 이번에는 정확한 시간에 출발해서 일찍 도착했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났다. 그래서 친구에게 전화했다. 아직 시간도 안 됐는데 벌써 도착했나? 하고 놀랐다. 친구의 집으로 가려고 하니 대충 안내를 하는데 알 수가 없었다. 창원에 사는 친구들이 어디에서 기다리면 된다고 하면서 그쪽으로 나오라고 했다. 운전자는 늘 주정차가 가능한 곳을 찾게 마련이다. 그곳에 가면 카메라가 없으니 정차해도 된다고 하였다. 그래도 운전 경험이 많지 않은 나로서는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 친구가 도착했다. 친구를 싣고 우리들의 친구들이 많이 기다리는 마산역 광장으로 갔다. 그곳에서 친구들을 싣고 남해고속도로로 달리기 시작했다. 원래 섬진강 휴게소에서 쉬기로 했는데 아침에 일찍 일어나 준비한다고 잠이 부족해서 운전하는데 어려움이 따랐다. 사천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커피 한 잔씩 마시고 다시 우리의 목적지인 강진으로 갔다. 이때 운전은 운전 경험이 많은 ○○친구가 했다.
강진의 모란한정식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그곳에는 점심으로 보리굴비 특선이 있었다. 친구들에게 이것을 주문해서 먹을 거라고 했다. 주문하니 이미 예약이 다 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늦은 점심시간이니 한 번 가 보자고 해서 가 보았다. 식당에 들러 사장에게 이야기하니 오늘 주문은 끝났다고 한다. 그래서 옆 골목으로 가니 짱뚱어탕 전문집이 있었다. 친구들 모두가 짱뚱어탕도 괜찮다고 해서 그곳에 들어갔다. 우리는 여기서 점심을 먹은 후 김영랑 시인의 생가로 갔다. 생가에 들어가 사진 촬영도 하고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여기서 놓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시문학파기념관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데 친구들은 김영랑 시인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어느 누가 기념관에 들어가 보자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대충 둘러보고 다음 여행지인 완도로 출발했다.
완도에 들어가는 입구에서 코로나19 감염 바이러스에 대해 검사를 했다. 내가 예상한 대로 이렇게 검사를 철저히 하니 청정지역이 되었구나! 하면서 완도에 진입했다. 가장 먼저 간 곳은 장도 청해진 유적지이었다. 청해진에 들어가는 장좌리 주차장에 주차해 놓고 장도를 바라보았다. 거기까지 가는 다리가 놓여 있었다. 예전에는 이 다리가 없었겠지 하면서 걸어서 갔다. 장도에 들어서니 제일 먼저 맞이하는 건물이 청해정이었다. 이곳은 1만 명의 군인들이 물을 마셨다는 우물이다. 그 다음 만난 건물은 외성문이다. 이 문을 지나면 내성문이다. 다리가 불편한 친구들은 외성문에서 기다리고 우리는 내성문을 지나 고대(高臺)로 올라갔다. 거기서 바다의 경치를 보았지만, 숲이 앞을 가려 제대로 보지 못하고 내려왔다. 산책길을 따라 걸어서 당주와 굴립주(掘立柱)를 관람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이 섬이 어째서 청해진이 설치된 곳이라고 하는지 의문이 생겼다. 그래서 올라가면서 예사로 보았던 ‘완도 청해진 유적’이라는 안내판을 다시 읽었다. 그것도 부족해 폰으로 촬영을 해 왔다.
유적지 관람을 마치고 장보고 기념관에 들렀다. 이곳에서 장보고의 활동 사항을 살펴보았다. 시간이 좀 촉박해 빨리 움직여 장보고 해상공원에 갔다. 장보고의 동상이 웅장하게 배 위에 서 있었다. 장보고 동상 앞에서 친구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기념으로 사진을 촬영했다.
해가 어느 정도 기울어졌을 때 우리는 숙소 가까이 왔다. 숙소에 들러 우리의 짐을 풀어놓고 완도 수협 쪽으로 거닐었다. ‘완도’라고 하면 전복이 유명하다는 것은 웬만한 사람이면 안다. 우리는 즐비하게 늘어선 가게들을 보면서 수협으로 향했다. 수협은 이미 문을 닫아 내부를 구경할 수가 없었다. 친구들이 나보다 사회생활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런 쪽은 그들에게 맡겨 두고 나는 도롯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들이 정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전복요리 풀코스는 생각보다 비쌌다. 1인당 5만 원이라고 했다. 여행 온 기분으로 모두 풀코스를 선택했다. 막상 차려진 풀코스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초라했다. 때에 따라서 다를 수 있지만, 여러 가게를 둘러본 친구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대동소이했다.
오랜만에 나온 여행이니 소주 한 잔은 해야 한다면서 모두는 즐거운 마음으로 한 잔씩 마셨다. 준비과정은 힘들고 말이 많았지만, 억지라도 여행을 하니 기분은 좋았다. 살아있는 교육이요 삶의 즐거움이 아니던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 내일 아침 준비를 해야 했다. 친구들이 경비 지출을 줄이기 위해 아침 식사는 간단하게 하고 출발하자고 했다. 그래서 GS 25에 들어가 삼다수와 컵라면 등을 준비해 갔다.
숙소에 들어가 하루의 피로를 풀기 위해 모두 샤워를 했다. 경비 절약을 하기 위해 한 개의 큰 방을 준비했는데, 몸이 불편한 친구들을 위해 침대 방을 하나 더 구한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남자는 본부 방 샤워실을 사용하고 여자는 침대방이 있는 샤워실을 사용하게 되어 불편함이 없었다.
샤워를 마친 후 오늘 일정에 대해 반성하고 내일 일정에 대해 잠시 의논을 했다. 그리고 각자 배정된 방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남자 둘은 거실 바닥에서, 둘은 방에서 잠을 잤다. 여자들은 옆방에 4명이 어우러져 잤다. 거실과 화장실이 붙어 있는 관계로 거실에서 잠을 잤던 친구들은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다가 화장실 가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주변이 시끄러워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식사를 했다. 간편하게 먹고 완도 타워로 향했다. 우리 일행들은 완도 타워 주차장에 도착했다. 거기서 약간 걸어 올라갔다. 전망대에 도착했다. 아침이라 공기도 맑고 신선해서 좋았지만, 구름이 끼어서 경치를 조망할 수 없었다. 친구들은 전망대에 올라가 보자고 했다. 경로 우대이니까 돈 드는 것도 아닌데 망설일 것 없다고 했다. 근데 그 중에 주민등록증을 놓아두고 온 친구가 있었다. 총무인 내가 곗돈으로 지출해도 되는데 야멸차게 개인 돈으로 탑승하라고 했다. 내가 뭔가 부족한 사람 같았다. 올라가 봐도 뾰족한 멋은 없었는데, 사람들의 마음이라는 것은 다 올라가는데 나만 소외된다 싶어 동참하게 되더라고.
이곳에서 신지대교를 향해 출발했다. 여행을 가기 전에는 신지도가 있는지조차 몰랐다. 완도에서 신지도까지 다리를 놓았으니, 섬사람들의 생활이 훨씬 편리하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신지대교를 지나 장보고대교(신지도와 고금도를 잇는 다리)를 지나고 다시 고금대교(고금도와 마량면을 잇는 다리)를 거쳐 마량항에 도착했다. 가는 도중에 뒤에 있는 친구가 여기가 어디인지 설명을 해 달라고 한다. 여행 가이드처럼……. 나는 속으로 내가 전문가도 아닐뿐더러 운전하면서 안내를 어떻게 한다고 했다. 마량항은 강진군에 속해 있으며 고려시대는 강진만 일대에서 만든 고려청자를 개성까지 실어나르던 뱃길의 시작점이었고 조선시대는 제주에서 싣고 온 제주마들이 처음 육지에 내리던 곳으로 말이 바다에서 내려 먹이를 먹었던 곳이라고 하였다. 요즈음은 놀토수산시장으로 유명하다. 마침 월요일이라 시장 구경은 할 수 없었다. 항구의 의미를 알려주는 쌍마가 형상화된 조그마한 광장에서 고금도를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잠시 거닐었다가 고려청자 도요지가 있는 대구면으로 향했다. 대구면 고려청자박물관 앞에 들어서니 도공이 청자를 빚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월요일이라 박물관은 개관하지 않았다. 사당리 41호 청자가마를 보고 안내하는 글을 폰에 찍었다. 그리고 박물관에 들어가 청자의 생성과정 및 작품들을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래서 주변에 있는 가게에 들러 도자기들을 감상했다. 도자기를 감상하러 갔는데, 도자기마다 그 위에 똑같은 책이 놓여 있었다. 주인에게 이 책을 파느냐고 물었더니, 필요하면 가지고 가라고 했다. 그래서 책을 들고 급히 친구들이 있는 장소로 왔다. 친구들이 어디 갔다 오느냐고 물었다. 도자기를 감상하고 왔다고 했다.
우리는 다시 차를 타고 다산 초당으로 향했다. 실로 오랜만에 가 보는 곳이었다. 친구가 운전해 가다가 백련사 앞을 지나면서 안 들어가도 되느냐 했다. 나는 다산 초당과 백련사가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차를 뒤로 돌려 백련사로 들어갔다. 백련사 주차장에 주차해 놓고 일주문을 지나서 해탈문을 만났다. 동백나무 숲속을 바라보며 경내로 들어갔다. 우람한 건물이 우리를 맞이했다. ‘만경루’라고 적혀 있다. 만경루 누각 가운데 계단으로 올라가니 대웅전이 나왔다. 대웅전으로 들어가 부처님께 참배하고 나와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 절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네 번쯤 온 것 같았다. 처음은 ○○고등학교에 근무할 때 역사 탐구반과 함께 왔던 것 같고, 두 번째는 고향의 어느 암자에서 시행했던 순례에 참여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또 한 번은 관광으로 한 번 들렀던 기억이 있다. 이 절과 인연이 많은 것은 사실이었다. 이번처럼 주마간산으로 보고 갔으니까 또렷하게 머리에 남지 않았나 보다. 다음에 올 기회가 있다면 백련사에서 다산 초당 가는 길도 걸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동백나무 숲길을 바라보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백련사 동백숲의 아름다움은 고재종 시인의 ‘백련사 동백숲길에서’를 감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여기에 소개해 본다.
백련사 동백숲길에서
고재종
누이야, 네 초롱한 말처럼
네 딛는 발자국마다에
시방 동백꽃 송이송이 벙그는가
시린 바람에 네 볼은
이미 붉어 있구나
누이야, 내 죄 깊은 생각으로
내 딛는 발자국마다엔
동백꽃 모감모감 통째로 지는가
검푸르게 얼어붙은 동백잎은
시방 날 쇠리쇠리 후리는구나
누이야, 앞바다는 해종일
해조음으로 울어대고
그러나 마음속 서러운 것을
지상의 어떤 꽃부리와도
결코 바꾸지 않겠다는 너인가
그리하여 동박새는
동박새 소리로 울어대고
그러나 애석하게도 애진 마음을
바람으로든 은물결로든
그예 씻어보겠다는 나인가
이윽고 저렇게 저렇게
절에선 저녁종을 울려대면
너와 나는 쇠든 영혼 일깨워선
서로의 무명을 들여다보고
동백꽃은 피고 지는가
동백꽃은 여전히 피고 지고
누이야, 그러면 너와 나는
수천 수만 동백꽃 등을 밝히고
이 저녁, 이뜨건 상처의 길을
한번쯤 걸어보긴 걸어 볼 참인가?
우리는 11시 40분경 다산 박물관 앞에 도착했다. 월요일이라 박물관은 개관하지 않았다. 친구들 몇몇은 박물관 옆에 있는 정자에서 쉬겠다고 했다. 그들은 몸이 불편하거나 관심이 없는 친구들이었다. 귤동마을로 올라가 초당이 있는 곳으로 갔다. 올라가는 길이 쉽지 않다는 것은 예전에 와 보았기 때문에 짐작이 됐다. 숲속 돌계단을 밟으며 올라가야 했다. 돌이 솟아 있어서 발이 미끄러질까 걱정도 되었다. 나무 뿌리가 길 위에 돋아나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나와 있었다. 초당으로 가는 길은 수백 년 된 소나무 뿌리들이 서로 뒤엉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 정호승은 이 길을 ‘뿌리의 길’이라고 명명하였다.” 이 길을 걸으면서 다산 선생님을 생각해 보았다. 이 오지에서 답답함을 승화시켜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는 것에 대해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전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는 듯도 하였지만, 그분이 지은 저서를 제대로 본 적이 없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초당에 이르렀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초당이 아니고 기와집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것은 다산유적보존회가 1958년에 다산을 기리는 마음에서 생전의 오막살이를 헐고 큰 집을 지어드린 것이라고 했다.(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다산초당 앞에서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친구들의 마음은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동암으로 가 ‘다산동암’과 ‘보정산방’이라는 현판만 폰에 담아왔다. 천일각으로 가 구강포를 바라보지 못하고 걸음을 바쁘게 재촉했다. 그래도 아쉬웠던지 ‘정석’이란 글씨를 놓칠 수 없어서 흔적을 갖고 왔다. 친구들은 빨리 내려가자고 했다. 아마 기다리는 친구들을 위해서 그랬을 것이다. 내려오면서 그중에 좀 똑똑한 친구에게 ‘초당’이 무슨 뜻이야 하고 물었다. 그 친구는 ‘초당’의 의미도 모르고 있었다. 그냥 따라왔는지? 내 생각에는 다산 정약용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또 시간에 쫓겨 윤종진의 묘에 있는 동자석 구경도 못하고 왔다.
다산 박물관에 도착해 우리가 점심 식사를 예약했던 모란한정식에 전화를 했다. 예약 시간보다 20분가량 늦게 도착할 것이라고 전했다. 차를 타고 식당까지는 10여 분 정도 가면 도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친구가 네비게이션에 입력하자고 해서 식당 이름을 불러 주고 입력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상하게도 입력된 식당 이름이 뜨지 않았다. 그래도 별로 의심을 하지 않았다. 강진읍으로 들어가야 할 차가 고속도로 진입로 쪽으로 운행을 했다. 친구가 강진 교육지원청이라고 쓰인 현수막을 보고 다 온 것이 아닌가 했다. 운전하는 친구에게 이야기했더니 안내를 고속도로로 하고 있는데 ‘왜’ 하고 말을 건네기에 응대하지 못했다. 차는 고속도로로 진입해서 달리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았다. 도착 시간은 벌써 넘었고 네비게이션의 안내로는 도착하기 힘든 거리였다. 친구에게 어디 주차할 만한 장소를 물색해서 주차를 권했다. 주차 공간이 있는 데서 정차를 하고 우리가 입력했던 식당 이름을 확인하고 계획서에 명시된 것과 대조를 했다. 그 결과 ‘모란한정식’ 식당을 ‘모란식당’으로 알려준 것이었다. 이것은 나의 불찰이었다. 정확하게 식당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우리는 서영암 IC까지 가서 차를 돌려 강진 입구로 돌아왔다.
식당에 도착하니,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 늦게 도착했다. 이미 음식은 차려져 있고 일부 음식은 신선도가 떨어지기도 했다. 그래도 친구들은 즐거워했다. 배도 물론 고팠지만, 남도 한정식을 맛본다는 것에 흥이 났는지 모르겠다. 영남에서 볼 수 없는 남도의 한정식은 가지가지 반찬에다 정갈한 차림이 우리들의 눈을 즐겁게 해 주었고 실제로 먹으니 맛도 있었다. 이렇게 점심을 먹는 동안 약주도 한 잔씩 나누었다. 운전한 친구는 아예 운전할 생각을 접어두었는지 소주 몇 잔을 마셨다. 그로 인해 내가 운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진에서 김해까지 먼 거리를 운전해 왔다. 이렇게 우리들의 여행은 시작은 시끄러웠지만, 마무리가 잘 되었다. 여행 후 대구면 탐진요에서 얻었던 박균조가 쓴 ‘시골 부군수의 음식 이야기’란 책을 얼마나 재미있게 읽었는지 모른다. 이 책을 통하여 다산 정약용 선생님이 세계문화 4대 인물로 지정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2020년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기행문을 쓰다.
2020. 12. 14.
첫댓글 누이야, 그러면 너와 나는
수천 수만 동백꽃 등을 밝히고
이 저녁, 이뜨건 상처의 길을
한번쯤 걸어보긴 걸어 볼 참인가?
모란님은 어떤 분일까? 이렇게 이른 시각에 잠도 자지 않고
지루하게 쓴 글을 읽으셨다니 이해가 잘 안 가는구만요.
이런 글을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운전한 친구는 아예 운전할 생각을 접어두었는지 소주 몇 잔을 마셨다. 그로 인해 내가 운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ㅋ
나이 들어 운전하는 것은 힘에 버거웠습니다. 타고 있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서 신경이 여간 쓰이는 게 아니더군요.
어떤 성향의 모란님일까?
영랑의 강진, 장보고의 청해진, 완도가 아름다웠다
‘다산동암’과 ‘보정산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