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18번’ 주기도문
아마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주기도문’은 알고 있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하는 ‘주기도문’을 일생에 한번 쯤은 들어 봤을 게다. 물론 나도 ‘주기도문’을 안다.
모태신앙이라 태어나서 부터 교회에 나갔던 나는 유년반에 처음 들어가 외운 것도 ‘주기도문’이었고, 또래 아이들보다 먼저 외워 연필을 상품으로 타서 엄마에게 한 걸음에 달려가 자랑하고 기뻐한 적도 있다. 즉, 내 인생에 처음으로 상을 받은 것이 ‘주기도문’ 때문이었다.
지금은 거의 도심에선 없어졌지만 내 어릴 적에는 동네마다 목욕탕이 있었다. 아주 어릴 적에는 엄마 손에 이끌려 여탕에도 들어가는 행운(?)을 누렸지만 조금 커서는 주로 아버님과 같이 남탕에 다녔다. 그런데 목욕탕에 들어가서 보면 탕 속에 들어가 있는 어른 분들이 중얼중얼 읊조리는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그때마다 그 노래 음률이 참 정겹게 느껴졌다. 내 아버님은 좀처럼 노랠 부르시지 않으셨지만 항상 ‘시원하다. 시원하다.’ 말씀하셔서 날 당황하게 만드셨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참 노래를 좋아한다. 저녁 회식 끝에 술이 얼큰해지면 노래방을 가거나 하다못해 야유회를 가서도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른다. 관광버스 속에서도 예외 없이 노랫소리가 그치질 않는다. 모두가 가수다.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 우리 부서에서 야유회를 갔는데 서양사람 두 명에게 노래를 청하니 두 명 모두 기겁하는 것을 보곤 참 의아했다. 예로부터 가무를 좋아하는 민족이었다는 것이 지금도 그대로 우리의 생활 속에 나타난다. 그래서 자기만의 18번 몇 곡 가지고 있지 않으면 왕따 당하기 십상이다.
난 예전에는 어려운 노래를 선호했는데, 왜냐하면 음치를 가릴 수 있어 좋고, 남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경청해서 좋다. 어느 노래는 소개된 지가 꽤 오래 되었는데도 남들은 최신 곡으로 알고 있는 것도 있다. 지금도 가끔 노래방에 가면 이문세나 김수철 노래 몇 곡은 자신 있게 부를 수 있다. 그리고 다른 레퍼토리도 많다. 노래를 참 구성지게 잘 부른다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마치 진짜 가수가 된 것 같은 착각 속에서 노래를 부른다. ‘왜 이리 노랫말이 나랑 같나.’ 하면서......
회사 근처 헬스장에 다닌 지 일 년 남짓 된다. 가끔 운동도 하고, 목욕탕 시설이 잘 돼 있어 단순히 샤워를 목적으로도 다닌다. 특히 헬스클럽 목욕탕은 시설이 좋아 샤워시설 뿐만 아니라 스팀 욕도 할 수 있고 냉온탕도 있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목욕탕에서 내가 평소에 하지 않던 습관 하나가 생겼다. 온탕이나 냉탕, 스팀 장에 들어가서 ‘주기도문’을 노래로 부르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물론 소리 내어 부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읊조리는 것인데 뜨겁거나 찬물 속이나 스팀 장에서 긴 시간을 참고 견디면서 마음속으로 부른다. 한 네 번을 반복하면 5분이 조금 넘게 걸린다. 성당에서는 모든 기도를 미사곡이라 하여 노래로도 부르는데 내가 아는 주기도문 노래 세곡 중 하나를 선택하여 부른다. 물론 컨디션이 나빠 뜨거운 스팀에 참기 어려울 때는 템포가 빨라진다.
그래서 요즈음 내 18번은 ‘주기도문’이 되었다. 하루에 적어도 다섯 번 이상을 부르는 애창곡이 된 것이다. 기도도 제대로 안하고 신심이 투철하지도 않은 나에게는 마음의 짐을 덜어주고, 편안하게 해주고, 그래서 여러모로 좋다. 샤워를 막 마친 후라 기분도 상쾌한 것은 물론이다.
사실 주기도문을 처음 노래로 접한 것은 미사곡이 아니고 70년대 히트했던 록 오페라 ‘지저스 클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들은 합창곡이다. 록이니까 빠른 템포로 ‘Our Father who art in heaven, Hallowed be thy Name.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으로 시작하는 노래였다. 세월이 많이 지났는데도 가끔씩 그 리듬이 생각나면 혼자 운전할 때 남 눈치 안보고 부르곤 했었다. 그러니 ’주기도문‘은 비록 곡조는 다르지만 참 오래된 내 18번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18번’을 통해 돌아가신 아버님도 생각하고, 그러면 할머님도 생각나고 2000여 년 전 제자들에게 이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던 예수님도 생각나고, 그래 좋다. 비록 사이비 신자가 목욕탕에서 읊조리는 아주 작은 기도문이지만 말이다.
첫댓글 참 비가 엉청나게 많이 온다. 장마인가 보다. 날이 날인지라 하루종일 외출도 안하고 회사에 있다가 갑자기 생각나서 짧은 글 하나를 남긴다. 모두들 장마철에 건강들 조심하고....
글 재밌게 잘 읽었네.. 그러고 보니 나도 탕 속에 들어가면 하나 둘 셋 숫자만 세고 있었는데.. 나도 탕 18번 하나 만들어야겠네 ㅎㅎㅎ
정말 효과적이야. 18번 만들어 시행해봐. 글고 방배동 한 번 만나자. 아라찌?
아랐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