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나의 파르테논 신전은 ‘전승기념물’이다
강대국 페르시아 물리친 아테네…‘유럽 탄생’ 역사적 사건
수호신 아테나 봉헌 위해 아크로폴리스 정상에 신전 세워
그리스 공동체 구심점·적에게 과시하기 위한 상징 역할도
신에게 제를 올리는 제단 문양은 있는데 신전을 모티브로 한 문양도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애석하게도 신전을 닮은 고대 문양은 찾지
못했다. 다만 고대 신전을 원용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특히 파르테논 신전은 세계 각지에서 저마다의 관점으로 해석한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했다.
우선 신전 건축의 배경부터 일아 보자.
기사사진과 설명

687년 베네치아군의 포격으로 신전
내부 화약고가 폭발하는 장면. |
고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기원전 5세기 그리스는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았다. 중동에서
이집트, 바빌로니아까지 거대 제국을 건설한 페르시아는 그리스의 모든 도시국가를 발아래 두고 지중해 패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그
많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모두 점령당했고,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비롯한 몇몇 도시만이 결사 항전을 이어오고 있었다.
이 페르시아
전쟁에서 1차 그리스 원정은 거센 폭풍우 때문에 실패했고, 2차 원정에서는 마라톤에서 아테네에 참패했으며, 3차 원정에서는 주력이 핫게이트
테르모필레의 스타르타군에 견제당하는 바람에 기회를 놓치고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해 페르시아는 선조 대대의 염원이던 지중해 석권의 꿈을 접었다.
역사가들은 이 전쟁을 “유럽이라는 아기가 탄생하는 울음 소리”였다고 평가할 정도로 “고대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전쟁이 특별한 이유는 만약 그리스가 페르시아에 졌다면 오늘날 유럽은 아예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의 영웅 페리클레스 주도로 건설
전쟁 후 평화를 되찾은
아테네인들은 제일 먼저 초강대국 페르시아를 물리친 위대한 사건을 기념하는 상징물을 남기기로 했다.
이들은 아테네에서 가장 높은
언덕 아크로폴리스(해발 156m, 길이 270m, 최대폭 156m)의 정상에 파르테논(Parthenon) 신전을 세웠다. 외형적으로는 아테네의
수호신이자 전쟁과 지혜의 신 아테나(Athena)에게 봉헌한 것이지만 속내는 달랐다.
오늘날의 신전은 페르시아 전쟁 이전에 건축한
옛 신전(Pre-Parthenon)이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의 마지막 원정 때 파괴된 후 같은 자리에 더 웅장한 스케일로 다시 세운 것이다.
이 거대 프로젝트는 마라톤 전투에서 승리한 후 아테네의 전성기를 이끈 군인이자 정치가인 페리클레스(Pericles)의 주도로
진행됐다.
이미 두 번의 침략을 받은 그리스 국가들은 페르시아의 재침공에 대비해 결성한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 아테네를 선출했고
아테네는 공동체 전체와 시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을 구심점이 필요했다.
적에게 과시하기 위한 상징도 절실했다. 이런 목적으로
기획된 거대 신전 프로젝트는 피디아스(Phidias)를 비롯한 건축가와 조각가들에 의해 기원전 447년에 시작된 뒤 15년 동안 다듬어졌고
기원전 432년에야 비로소 완공됐다.
기사사진과 설명

파르테논 신전의 과거(왼쪽)와
현재(오른쪽). |
파르테논의 의미
기원전 454년 결정적으로 그리스 공동체의 수호신이 바뀌는 계기가
있었다. 페르시아에 반기를 든 이집트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한 200척의 배를 몽땅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 델로스는 강력한 도시국가였지만 섬이라
기습에 취약하기 때문에 동맹 자금을 안전한 내륙에 보관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게다가 페르시아의 계속된 원정을 물리친 아테네가
새롭게 등장하면서 아테네에 힘이 실리게 됐다. 요컨대 ‘아폴로 거품’이 빠지고 ‘아테나 특수’가 뜬 셈이다.
결국 동맹자금은
파르테논 신전의 후실로 옮겨지게 됐다. 이를 계기로 지중해의 실질적인 패권이 아폴로의 델로스섬에서 아테나의 아테네로 집중되게
됐다.
신화에 따르면 아테나는 한때 포세이돈을 사랑했지만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지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처녀신
아테나’란 의미의 아테나 파르테노스(Parthenos)다. 파르테논은 ‘처녀 아테나가 사는 집’이란 뜻으로 처녀 아테나에게 봉헌된 신전을
의미한다. 신전 내부의 거대 신상도 파르테노스다.
그러나 신전의 운명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그리스를 계승한 로마에서도 처음엔
다신교로 그 명맥이 유지됐으나 4세기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면서 우상 숭배로 간주돼 대중에게서 멀어졌고 6세기엔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됐으며
15세기엔 이슬람 모스크로, 17세기 들어서는 오스만 제국의 화약고로 전락했다.
심지어 베네치아와 전투 중에 포격으로 화약고가
폭발해 지붕이 날아가버렸다. 그런가 하면, 오스만 통치 기간 중에는 영국 외교관 토머스 부르스에 의해 신전에 남은 조각들이 반출돼 1816년부터
대영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으며 그리스엔 건물 뼈대만 남았다. 사진=필자 제공
<윤동일 한국열린사이버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