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문신. 《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하고, 이조좌랑 · 응교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 곽재우 · 김덕령 등 명장을 발탁했다. 문집에《약포문집》저서에《용만문견록》이 있다.
본관 청주(淸州). 자 자정(子精). 호 약포(藥圃) ·백곡(佰谷). 시호 정간(貞簡).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에게서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1552년(명종 7)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58년 식년문과(式年文科) 병과에 급제한 뒤 정언(正言) ·헌납(獻納)을 거쳐 1568년(선조 1) 교리 겸 춘추관기주관(校理兼春秋館記注官)이 되어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고, 이조좌랑 ·응교(應敎) 등을 지냈다.
1581년 대사헌 때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과의 불화로 이조참판에 전직되었다. 그 해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재차 대사헌이 되고, 1589년 우찬성 때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592년 임진왜란 때 좌찬성으로 왕을 호종(扈從)하여 의주(義州)로 피란하였다. 이듬해 영위사(迎慰使)로 명나라 송응창(宋應昌)을 영접하고, 1594년 우의정이 되고 1597년 정유재란 때 노령으로 전장에 나가 독려하려는 것을 왕이 말렸다.
1599년 사퇴했다가 이듬해 좌의정이 되고,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를 거쳐 1603년(선조 36)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가 되고, 이듬해 호종공신(扈從功臣) 3등으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지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 ·곽재우(郭再祐) ·김덕령(金德齡) 등 명장을 발탁하였다. 1597년 이순신이 전장에 나아가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한산도에서 한양으로 압송되어 목숨이 경각에 처했을 때 선조에게 이순신을 변호하는 1298자의 신구차(伸救箚) 상소문을 올렸다. 이 일로 이순신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예천(醴泉)의 도정서원(道正書院)에 배향(配享)되었으며, 문집에 《약포문집》 저서에 《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