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딜리아니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이탈리아어: Amedeo Modigliani, 1884년 7월 12일 ~ 1920년 1월 24일)는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1884년 이태리 토스카나 주 리보르노에 있는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에우제니아는 철학자 스피노자의 혈통을 이어받은 마르세유의 명문가 출신으로 높은 지성과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1] 부친의 사업이 어려워지자 직접 단눈치오의 시를 번역하거나 서평을 써 생활을 유지할 정도였다.[1]
모딜리아니가 태어났을 당시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은 어려웠지만 에우제니아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대한 재능을 보인 아들을 굴리엘모 미켈리의 아틀리에에 데리고 가기도 했다. 그러나 모딜리아니는 늑막염, 폐결핵, 폐렴 등 병치레가 잦아 평생을 고통받았다. 14세에는 병으로 학교를 그만두었고, 17세에는 결핵에 걸려 이탈리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요양을 해야 했다.[2]
베네치아·피렌체 미술 학교에서 공부한 모딜리아니는 1906년 파리로 나가 몽마르트에 아틀리에를 빌렸고 세잔의 영향을 받았다. 피카소를 딱 한 번 만났으나 그후로는 만나지 않았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때 피카소와 자주 만났던 화가는 앙리 마티스, 브라크, 블라맹코 등이었다. 독립 미술파에 속하며, 파리 화단의 특이한 화가로서 인정되었다.
조각도 하여, 브랑쿠시, 콕토 등과도 사귀었다. 1909년 몽마르뜨에서 몽파르나스로 이사한 모딜리아니는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와 이웃이 되었고, 이를 계기로 몇 년간 조각 작업에 몰두하게 된다. 그가 남긴 서른 점 가량의 석조두상은 단순하고 잡아 늘린 듯 한 길쭉한 형태가 특징적이다. 빈곤함 속에서도 늘 세련된 스타일을 고수하던 모딜리아니는 “흙투성이가 되기 싫다”라고 말하며 흙 반죽 점토로 작업하지 않고 나무와 석재를 선호 했는데,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했던 모딜리아니가 조각할 나무를 구하기 위해 철로 버팀목을 훔치거나 석재를 구하기 위해 한밤중에 보도블럭을 들춰내기도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결국 가난이 장애가 되어 값비싼 재료를 필요로 하는 조각활동은 더 이상 불가능 해졌고, 설상가상으로 작업 중 발생하는 먼지로 인해 건강이 더욱 악화되자 조각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모딜리아니의 조각 작품은 그가 박물관에서 접한 아프리카 미술의 영향과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던 시절 접했던 중세의 조각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모딜리아니가 남긴 원시적인 요소와 종교적인 아우라를 지닌, 특별한 존재감으로 우아함을 발산하는 조각 작품들은 그의 짧은 인생과 가난으로 계속 이어지지 못한 채 실험적으로만 끝난 그의 작품 활동에 대한 아쉬움을 남기게 한다.
그러나 돌조각에서 나오는 먼지로 폐가 나빠지자 조각을 그만두고 그림만 그렸다.
1912년 파리 가을 미술전에 작품을 출품했지만 주목받지 못했고 초상화 한 점 당 10프랑밖에 받지 못했다. 그러나 미남으로 유명했던 모딜리아니에겐 모델을 자청하는 여성들이 많이 있었다.[3] 1917년 몽파르나스의 카페에서 모딜리아니는 러시아 조각가 차나 오를로프(Chana Orloff)의 소개로 14세 연하의 화가 지망생 잔 에뷔테른(Jeanne Ebuterne)을 만났다. 잔은 모딜리아니와 같은 아틀리에를 쓰는 일본인 화가 후지타 쓰구하루의 모델이었다.
보수적인 부르주아 가정이었던 잔의 가족은 가난하고 병약하며 마약을 하는 유대인 모딜리아니와의 교제를 싫어했지만 두 사람은 동거에 들어갔다. 같은 해 모딜리아니는 폴란드 화상 레오폴트 즈보로프스키의 주선으로 개인전을 열었지만 외설적이라는 비판만 받은 채 전시회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듬해인 1918년 모딜리아니는 잔과 니스에서 요양을 했고 딸 지오바나를 얻었다.
1920년 파리로 돌아온 모딜리아니는 자선 병원에서 결핵성 뇌막염으로 36세에 요절하였다.[2] 당시 임신 8개월째였던 잔은 모딜리아니가 죽고 이틀 뒤에 투신 자살했다. 모딜리아니는 파리의 페르 라 셰즈 묘지에 묻혔고, 10년 뒤 잔의 가족들은 잔을 모딜리아니 곁에 묻어주었다.[4]
모딜리아니는 폴 세잔와 툴루즈 로트렉의 영향을 받았다.[2] 그는 항상 인물만을 그렸는데 파리의 뒷거리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 및 여성의 나체 등을 즐겨 그렸다. 그의 인물화는 가늘고 긴 목이나 달걀 모양의 얼굴을 가는 선으로 둘러 독특한 기품과 아름다움을 나타냈다. 모딜리아니는 총 314점의 작품을 남겼는데 주요 작품으로 <꽃 파는 소녀> <문지기의 아들> <벌거벗은 에리부리> <폴 기용의 초상> <잔 에뷔테른의 초상> 등이 있다.
모딜리아니의 후기 작품은 아내 잔을 모델로 한 작품이 많다.
모딜리아니와 쟌느가 처음 만난 것은 1917년 봄이다.
유난히 조숙한 태도와 반항기,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기묘한 눈빛에 매료된 모딜리아니.
쟌느는 모딜리아니의 작업실에서 때로는 모델로, 때로는 연인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행복한 시간 속에서도 겨울에 난로에 장작도 구할 수 없을 만큼 가난은 그들을 지독히 따라다녔다. 하지만, 그런 생활속에서도 모딜리아니는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모딜리아니는 그림을 그리고 있어 춥지 않다고 했고 그런 모딜리아니를 바라보며 모델을 해 주던 쟌느는 옷을 입지 않아도 춥지 않다고 했다. 잠을 잘 때는 추위를 견뎌내기 위해 둘은 꼭 끌어안고 서로 온기에 기대었다.
<에콜 드 파리와 모딜리아니>
20세기 초, 저마다의 이유로 조국을 떠나 파리로 모여든 화가들이 있었다. 당시 전 세계 문화의 중심지였던 파리의 자극에 각자의 민족적 개성을 더한 독자적인 스타일의 예술을 형성한 이들은 에콜 드 파리(École de Paris), 즉 파리(Paris)파 라고 불렸다. 1925년 저널리스트인 앙드레 와르노드에 의해 명칭 된 에콜 드 파리는 특정한 작풍이라기보다는 몽파르나스 지역을 중심으로 한 파리의 다국적 분위기를 설명한 용어이다. 이들은 피카소와 브라크를 위시한 입체파가 주류였던 당시 파리에서 그 흐름에 동참하기 보다는 조국을 떠난 애수와 불안을 내포한 작품을 제작하며 민족적 자질을 훌륭하게 꽃피웠다.
세계 각지에서 명성을 쌓기 위해 파리로 몰려든 화가들. 이들은 대부분 보헤미안의 생활방식을 추구하며 현실의 가난한 삶과 예술의 이상 속에서 고뇌하며 힘겹게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1906년 이탈리아에서 파리로 이주한 아름다운 이탈리아 청년 모딜리아니(1884.7.12-1920.1.24)역시 에콜드 파리의 일원으로, 어떠한 화파와도 연결 지어 지지 않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발전시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