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07(화요설교)‘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사도신경으로 신앙 고백하시겠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성경> 사도행전 17:16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17: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7:18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설교> 할렐루야~! 오늘은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라는 제목의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18절에서는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17절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했다고 합니다. ‘변론’이라는 것은 토론입니다. 토론을 통해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일, 그리고 진리 안에서 더욱 굳세게 서야하는 것, 말씀에 무지한 사람들이 자신을 존재케 하신 하나님께 속히 돌아오도록 복음의 정수를 증언하는 것입니 다. 이것은 이미 가진 절대적 기준을 통해 마땅한 결론으로 이끌어 가는 변증적인 토론입니다. 그냥 이야기 방식이 아닙니다. 이렇게 변증적 토론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며 세우는 방식이 됩니다. 그런데 18절에서 행한 쟁론은 그냥 자신의 생각을 상대에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지식에 사로잡혀서 주장하는 것입니다. 어떤 지식을 종교적 신념으로 신봉하면서 주장하는 것입니다. 사실 부패하고, 불완전하고, 어리석은 인간의 지성을 가지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 결과 관연 이해할 수 있을까요? 답은 no입니다. 아무리 석학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지식을 종교적 신념으로 신봉하며, 자신의 지식에 사로잡혀서, 자신의 생각을 상대에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런 틀 안에 갇혀 있는 한, 그들의 이해력으로는 하나님의 큰 진리의 깊이와 복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바울의 복음을 그저 말쟁이의 말이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 것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호기심으로 새로운 가르침을 달라고 하지만, 그냥 그것은 그것 으로 그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적인 지식의 교만, 오만함을 버려야 합니다. 따라서 일단, 세상적 지식과 학문은 하나님의 계시, 말씀 앞에 서 접어야 합니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 다음 단계로는 이제 자신의 세상적 학문, 경험들을 사용해서, 자신이 세상에서 닦은 지식이나 경험들을 총동원해서 변증적 토론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다 은혜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지식과 세상적 경험, 욕구들이 하나님의 사랑, 은혜를 앞서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모든 것이 은혜가 아니면, 다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서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연결되는 삶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70장] 변찮는 주님의 사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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