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역본에서는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있다. 이는 다윗이 하느님으로부터 왔다고 생각하는 계명들을 사랑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설명한다. 사람들이 바른 원칙들을 무시하고 파괴할수록, 다윗은 그 분위기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원칙을 더욱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왜냐하면 법과 원칙을 파괴하는 것은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이익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은 그의 삶을 통하여 원칙에 고착할수록 내적으로 더 강해지며, 더 원대한 미래가 보였기 때문이다. 현재 살아가야 미래도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지극히 당연하지만, 참을 수 있는 한, 미래가 보장되는 쪽으로 우리의 삶을 틀잡아야 한다. 쉬운 예를 들어 현재의 번영을 위하여 무분별한 산업과 생태계를 파괴하는 일을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후손들에게 나쁜 환경을 만드는 것이고 미래를 어둡게 한다. 그것은, 우리의 후손들을 번영하게 하는 것이 후손 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래를 현재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미래를 불확실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을 견디어 나가는 것이 내일 훨씬 더 큰 명예와 번영을 가져올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오늘 견딜 수 있는 한 견딜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다윗이 포나인 골드보다 원칙을 더 사랑했다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미래를 확신한다면 우리보다 후손들이 잘 될 수 있도록 공동체를 이끌고 나갈 것이다. 이러한 기조가 세대에서 세대로 되물림 될수록 지구의 환경은 인간이 살기 좋은 상태로 유지될 것이며, 미래는 투명한 번영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의 생각을 조금 비약시킨다면 후손들이 생명 공학을 매우 발전시켜 우리를 다시 살리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이를 수 있다. 우리의 생명이 다하여 비록 현재 상태에서 존재하지 않게 될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우리의 생체 정보는 시공간에 영원히 저장되며,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 성서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놀라운 약속이며, 그 성취는 자연의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후손의 번영을 위하는 삶이 직접적으로도 우리를 잘 되게 하는 방법인 것이다.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저 도덕적 차원에서만 후손들이 번영해야 한다는 소극적 생각에 머무는 것이다. 우리가 어려움을 겪더라도 우리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굳은 신념을 가짐으로써, 우리의 후손과 미래는 물론 우리 자신들도 행복한 삶을 만들 수 있는 근거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