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YTN / 이장욱
빗방울이 구름을
그리워할까요?
부러진 가지가 나무를?
해변에 밀려온 파도가
수평선을?
내가
당신을……
안에서 닫힌 것들이 세상에는 많아서
골목 저편에는 어둠이
로커 안에는 의심스러운 가방이
교회에는 하느님이
그러므로 당신 마음에는
누가 있는가?
나는 영영 비밀번호를 잊었는데
어쩌면 처음부터 몰랐는지도 모르지.
나무에게는 잃어버린 가지가 없고
구름은 다른 하늘을 떠가고
해변의 파도는 처음부터
수평선의 일부
나는 나무에
구름에
십자가에
열쇠를 넣고 돌려보았다.
또는 0에서 9까지 무작위로 눌러서
전 세계를 열어 보려고……
그곳에는 구멍이 없고
번호가 없고
마침내
내부가 없어서
나는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고양이를 쓰다듬고
조금 운 뒤에
뉴스를 시청하였다.
완전히 동일한 두 개의 잎사귀 / 이장욱
완전히 동일한
두 개의 잎사귀를 찾아오세요.
그러면 우리는 신이 되는 것인가?
그렇대.
그렇다.
영원회귀는 영원하고
오늘도 또 야근이구나.
우리는 죽을 때까지 태양의 주위를 돌 뿐이니까
당장 떠나요. 제주로.
지중해로.
거길 꼭 가야 해?
우리에게는 해변으로 난 창문이 없는데
창문은 사실 필요가 없는데
우리 각자가 이미
바다이기 때문에.
엔트로피의 원리에 따르면
당신의 사망 소식은 온 우주에 퍼져서 어느덧
다른 소식과 구분되지 않을 것이다.
평평해질 것이다.
그 위로 낙엽은 떨어지고
떨어졌다는 사실조차
사라지고
그걸 옛날에는 고엽이라고 불렀대.
아, 이브 몽땅 말인가요?
베트남전 말입니다만······
마른 잎 죽은 잎이 정말 살아날까.
겨울은 어디서 오는 걸까.
영원히 회귀하는 인과의 사슬이다.
질량 불변의 법칙이야.
죽고 죽이는 자연의 무심한 반복이죠.
글로벌 자본주의 ······
우리는 무한히 변하는 존재이니
서로에게 외계인이면서 동시에
동일인이잖아요.
약을 먹고 약을 먹고 약을 먹고
우리는 어째서 서로를 닮아가는가?
계급이 다른데 그게 되겠어?
하지만 봄날은 가고 다시 오네.
당신 머리 위에 새잎이 돋았어요.
아아, 완전히 동일한 두 개의 잎사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면 제가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곡목은
김민기의 상록수
더 멀고 외로운 리타 / 이장욱
만나러 와주어요.
여기가 북극이라서 여행이라도 하듯이
여기가 적도라서 탐험이라도 하듯이
매일 장례식이 열려요. 국가정책에 대한 토론회가 개최되었대. 우울증이 있음. 이어폰을 귓속 깊숙이 밀어 넣고
집에 갔다.
집을 나왔다.
집에 갔다.
조금 더 먼 곳에는 북극의 펭귄과
날지 않는 새들
내 귓속에 내리는 겨울비
혈관을 타고 흐르는 음악과
바이러스
하지만 이봐요,
펭귄은 북극이 아니라 남극에 산다고.
바이러스는 혈관이 아니라……
당신의 가까운 생물이 사라졌어요.
당신의 먼 사람이 앓고 있어요.
어제는 외로웠던 누군가가
내일은 지상에 없고
집을 나오지 않았다.
집을 나오지 않았다.
집을 나오지 않았다.
사라진 리타가 시를 읽네, 북극에서
수유리에서
내 귓속에서
여행자가 실종되었다는군. 열대야가 다가오고 있어요. 빙하기가 시작되었다. 코인이 급등했대. 다 집어치워!
만나러 와주어요. 여기가 불가능한 곳이라도
만나러 와주어요. 나의 먼 꿈속으로
북극에 내리는 뜨거운 비
열대우림에 쏟아지는 폭설
이곳에서 새들은 헤엄치고
펭귄은 날아다니죠.
좀 조용히 해줄래?
음악이 안 들려.
내 귓속에서 자꾸 중얼거리는 리타 때문에
저기 저 빗속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는
더 멀고 외로운 리타 때문에
깊은 어둠 속에서 휴대전화 보기 / 이장욱
깊은 어둠 속에는 무언가가 모자란다.
혹등고래 같은 것이
베네수엘라의 외로움 같은 것이
나도 모르게 세포분열을 하거나
결승에서 자책골을 기록하는 것이다.
그것이 침울한 영혼에 가깝다고
삶에 가장 가까운 어둠이란
엑스트라 배우가 카메라 조명을 벗어나 무심히
뒤를 돌아보는 순간
진단을 받고 치료를 포기하고 혼자 깨어나
천장을 바라보는 새벽
어둠이란 지도 위의 한 점이 아니다.
수평선이 아니다.
죽은 뒤도 아니다.
단지 한 사람이 사라진 세계에 가까운
우리는 결국 시제가 없는 편지를 쓰는 것이다.
여행자란 결국 돌아오는 사람인가?
나는 당신의 조금 더 먼 곳에 도착함
이제 돌아가지 못함
과 같은 문체로
베네수엘라에 가보지 못했는데도
새벽의 어둠 속에는 여행자들이 떠돌고 있다.
혹등고래가 배를 보인 채 떠오르는 순간에
외로운 심판은 종료 휘슬을 길게 울리고
나는 어둠을 끄고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문득 멈추어 서서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후보 선수처럼
―시집 『음악집』 2024.3
왼손에 돌멩이 / 이장욱
마술을 보여줄까?
골라보렴,
오른쪽 주먹과 왼쪽 주먹 중에서
이 상자와 저 상자 가운데서
오른쪽 주먹을 펼치면 꽃들이 피어오른다.
일생을 화사하게 덮어버리지.
하지만 왼손에는 차가운 돌멩이
외로움조차 사라진 마음
빗소리 수많은 각자의 시간들이 떨어지는
빗소리
나는 검고 커다란 망토를 휙!
펼쳐서 너를 가리네. 너를 덮어버리네.
밤의 망토 속에서 너는 문득 생명을 얻고
점점 더 생생해지고 마침내
생활을
나는 경쾌한 리듬에 맞춰 무대 앞으로
전 세계의 관람객들 앞에서 탭댄스를
데이비드 카퍼필드의 우아한 포즈로 만주 벌판의 역사를 바꾸고
십 년 전의 빗소리를 바꾸고 마침내
어젯밤의 굳은 결심을 바꾸었네.
아아, 하지만 모든 것은 망토 속에 있었다.
빨간 구두가 혼자 춤을 추는 아홉 살
먼 나라의 수평선을 표류하는 열아홉 살
스물아홉에서 쉰아홉의 변치 않는 사람까지
오늘은 마법에 가까운
아흔둘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망토를 휙!
걷어내자,
우리의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허공
누구든 처음부터 알고 있던 바로 그것
하지만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처럼 비명을 지르자,
네가 사라졌다!!!
여러분, 이것은 마술이 아니다.
망토 속에는 허공이 아니라
빗소리
수많은 각자의 시간들이 떨어지는 빗소리
그리고 나의 아름다운
왼손에 돌멩이
극적인 삶 / 이장욱
막이 내려올 때는 조용한 마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후의 해변이나
노인의 뒷모습 또는
혼자 깨어난 새벽에 가까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여전히 말의 눈을 찌르는 소년이었다.
요한의 목을 원하는 살로메였고
숲을 헤매는 빨치산이었다.
세일즈맨이 되어 핀 조명이 떨어지는 무대에서
독백을
여러분, 인생에는 기승전결이 없다.
코가 큰 시라노는 여전히 편지를 쓰고
빨간 모자를 쓴 늑대는 밤마다 문을 두드리고
맥베스는 예언에 따라 죽어가는 것
추억에 잠겨 혁명을 회고하는 자들은 이미
혁명의 적이 된 자들이지.
겨울 다음에는 가을이 오고 가을 다음에는
영구 미제 살인 사건이 시작된다.
우리는 결국 바냐 아저씨처럼 쓸쓸할 거예요.
고도를 기다리며 영원히
벌판을 떠돌겠지요.
자책하는 햄릿과 함께
드라마틱한 삶이란 출장 일과 두 시간짜리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인데
카라마조프는 검은 피와 택하신 자들이라는 뜻인데
인형의 집에서는 드디어 노라가 뛰쳐나오고
에쿠우스의 주인공은 자신의 눈을 찌르며 외친다.
머리가 열 개인 말들이여, 눈이 백 개인 말들이여, 반인반마의 신들이여!
붉은 막이 등 뒤로 내려오자
나는 배꼽에 두 손을 모으고 깊이 몸을 숙여
인사를 했다.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객석의 어둠 속에서 모자를 깊이 눌러쓴 살인자가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히치콕의 밀도 / 이장욱
창밖에 히치콕의 밀도가 높았다.
이면도로에는 폴 토머스 앤더슨의 밀도가 높았고
골목을 지날 때는
홍상수의 밀도가
새벽마다 불안이 영혼을 잠식해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는 중독자의 이름인데
그이는 중독자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는
결국
당신이 범인인가.
범인은 늘 범죄를 저지른 자리에 돌아오지. 가만히
생각해보아요. 당신은 쫓기는 자인가
쫓는 자인가.
추리하는 자인가
추리되는 자인가.
에드워드 양, 에드워드 양,
저도 양 씨인데요.
제게는 식물의 귀가 있어요. 식물인간이 되어서
문병 온 사람들의 고백을 듣는 게 제 장래희망이죠.
나는 관람당하면서 동시에
관람하는 거예요.
그들은 무엇이든 털어놓는답니다.
휴대폰을 켜두고 이제 막 라이브를 시작하는 사람이 있고
그걸 시청하는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있고
션 베이커의 인물이 ‘창녀’라는 욕을 남발할 때 좋았다.
그 인물 자신이 ‘창녀’였기 때문에.
피살자는 말이 없어요.
그래서 나는 너에게만 나타난다.
늦은 밤 혼자 있는 방에서 천천히
천천히
뒤를 돌아보렴.
거기 서 있는
낯익은 얼굴을
오즈 야스지로처럼 늙고 싶지만
인생을 이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카메라를 낮은 곳에 두면 돼.
다다미에 두고 계단 아래 두고
지하실에
무의식
밑바닥에
결국 호스피스 병동의 밤에 깨어나는 것이죠.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이 침대로 다가와 인생을 고백할 거예요.
고백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인생을.
그를 따라갈까요.
사랑을 할까요.
첨밀밀만 보면서 인생을 보내고 싶어.
죽을 때는 내 곁에 그대가 없겠지만 등려군의 노래는 흐르리. 뉴욕의 전파사 앞에서
우리는 만나자.
근데 나이 좀 먹었다고 반말하지 말아요.
다리오 아르젠토라면 아무렇게나 찍어도
네 목을 날려버릴 거야.
가짜 같은 피가
정말로 솟구치겠지.
나는 골목을 걸어갔을 뿐인데
어디서 카메라가
나를 비추고 있었다.
이창이었다.
내가 저질렀는데도 알지 못한 실수들 / 이장욱
오늘은 종일 방에서 지냈는데도
실수를 저질렀네.
나는 혼자였고 어디다 전화를 하지도 않았고 SNS도 안 하는데 그러고도
실수를
인생은 이불 속에서…… 습관 속에서…… 소문 속에서…… 시위도 안 하고…… 지나가는데 매일
실수를
실수에 대해 생각을
가령 내가 당신에게 인사를 안 했다.
소주를 퍼마시고 무례한 말을 했다.
남의 남이 퍼뜨린 소문을 믿고 너만
알고 있어, 이건 확실한 얘긴데 말야……라고 말을 꺼냈다.
사실 나는 인사를 잘하는 사람이고
술은 입에도 못 대고
입에서 입으로 건너다니는 이야기는 다
아니 땐 굴뚝의 연기라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인데
제가 무슨 실수를 한 거죠?
제가 왜 경찰서에 있죠?
내 존재 자체가 실수라는 뜻이야?
내일은 출근을 못하겠다고 전화를 했다.
해가 지다가 멈춘 하늘을 바라보았다.
거기서 깊은 위로를 받았다.
왜냐하면 만물이
나와 같은 실수를 하는 것 같아서
나는 전화를 걸어 당신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제가 실수를 저지른 것 같군요.
저는 하루 종일 혼자였고
친구도 없고
침묵을 지켰고
심지어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기울기가 사라진 뒤에 / 이장욱
나뭇잎이 허공을 구성하는 각도
새벽의 꿈에서 깨어나자 스며드는 생시의 각도
추락하는 사람에 대한
사후의 각도
막 떨어지는
바라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기울기가 있어?
영원에는 기울어진 것이 없습니다.
수평과 수직이 사라진 뒤에
비스듬한 사람이 걸어가고 있을 뿐
저기 전화를 하는 저 사람이 자기 그림자를 갸우뚱히 바라보는 이유는
그림자 안에 해가 지고 있어서
조용한 말이 그이의 귓가에 스며들어서
그건 그렇게 갸우뚱한 상태로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
나뭇잎 하나가 떨어진 뒤에 나무가 스르르 기울었다.
거리의 행인들과 지금 듣는 음악의 각도가 바뀌었다.
수평선과 쏟아지는 빗줄기의 기울기가
오늘의 초침이 분침에서 멀어지려고 미친 듯이
당신이 고개를 기울이자 나뭇잎이 다른 곳으로 떨어졌네.
당신이 생시에서 사라지자 내가 깨어납니다.
그림자가 일어나 혼자 걸어가는 세계에서
분침과 시침이 겹치는 순간
날카로운 알람이 거리에 울려 퍼졌다.
누군가 나의 아주 가까운 곳으로 추락하고 있다.
내 생물 공부의 역사 / 이장욱
궁금해. 내 축축한 배를 가르면 뭐가 나올까.
어린 시절에는 개구리 해부를 했는데 그때마다 그런 생각을.
면도칼을 손에 든 채 소년은, 양서류와 포유류 사이에서 생각에 잠긴 소년은
교회에 갔다.
하느님은 어디에 속해요? 저는 계문강목과속종의 맨 끄트머리에 매달린 생물입니다만
악몽에 시달리는 미물입니다만
희로애락이 많은 단세포동물입니다만
혜화동에 전시관이 있잖아, 거기서
인체의신비전을 본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사랑,
새빨간 혈관과 근섬유와 신경세포와 텅 빈 두개골
그 한가운데 뻥 뚫린 두 개의 눈구멍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던 내 사랑,
그대는 오늘도 퇴근을 한다.
척추동물문 포유강 영장목으로서 그대는
버스를 타고 태그를 하고 외로운 밤의 거리를 바라보다가 전화를 하는 그대는
어젯밤 꿈속에 아마존 악어들이 나왔어. 브라질의 룰라는 좌파인데 아마존 개발을 밀어붙였지. 미친……
홍대입구에서는 또 내 영혼이 맑다고
영혼이 맑으니까 신을 믿으라는 사람에게 나는 말했네.
이봐요, 나는 창세기가 아니라 요한계시록을 믿는답니다. 사실은
고릴라처럼 손을 내밀어 초콜릿을 요구하죠. 게다가
단세포동물답게 폭력적이지.
나는 내 슬픈 생물학 책을 덮었다.
배가 갈라진 개구리의 자세로 관 속에 누워 있었다.
새빨간 혈관과 근섬유와 신경세포와 두개골 한가운데 뻥 뚫린 두 개의 눈구멍으로 나는
별들이 빛나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주 작은 것으로는 거대한 것을 볼 수 없고 아주 거대한 것으로는 작은 것을 볼 수 없나니…… 아주 작은 시간으로는 거대한 시간을 느낄 수 없고 아주 거대한 시간으로는 작은 시간을 느낄 수 없나니……
시간이 개울처럼 흘러가는 동안에도 나는
졸졸 흘러서 이윽고 망망대해에 닿는 동안에도 나는
내 부드러운 배를 갈라 자꾸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컴컴하고 축축한 그곳을 향해 간절하게
간절하게 손을 뻗었다. 마치 그곳에
깊고 무서운 사랑이 갇혀 있다는 듯이
*괴테의 「내 식물 공부의 역사」 변용
무지의 학교 / 이장욱
김은 나를 잘 모르는데 내가 이러저러한 운명의 사람이라고 말했다.
나는 김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술을 마셨다.
김은 예언자의 피를 지녔지만 게임을 좋아했고 예언자가 뭘 하는 인간인지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그런데 네 말이 맞아, 이를 어쩌지. 이를 어째. 중얼거렸고
기묘한 실망과 쾌감에 휩싸인 채 김에게
사랑을 느꼈다.
생각해보면 에펠탑에서도 종로에서도 몽골의 사막에서도 나는
그런 기분에 잠겨 있었지. 당신이 한 말이 거의 우주에 가깝다는
우주가 당신의 말로 이루어져 있다는
그런 기분에
김은 모든 것을 예언할 수 있다면 거기가 바로 지옥이라고 말했는데
지옥은 의외로 안락한 곳이라고
악마가 없다고
그럼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곳은 천국인가? 하고 내가 물었지만 그렇게 묻는 순간
지금 이곳이 천국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아, 천국에는 천사도 없고 베아트리체도 없고
교실과 운동장만이
한때 나를 사랑했던 박은 도쿄에서 술을 마시다가 브루클린에서 산책을 하다가 치앙마이에서 연애를 하다가 국제전화를 걸어왔는데
왜인지 네가 했던 말이 자꾸 생각난다고
처음에는 심드렁했는데 그 말이 점점 커져서
거의 우주에 가깝게 느껴진다고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이다.
이봐요, 나는 천국에서 살아가요. 천사와 악마가 구분되지 않는
구분할 필요가 없는
거의 지옥에 가까운
이곳은 아름다운 곳이고 선생님은 없어요.
개 이전에 짖음 / 이장욱
이 산책로는 와본 적이 없는데 이상해. 다정한 편백나무들, 그림자들, 박쥐들
가지 않은 길에서 길을 잃어본 적이 있어요?
이런 길에서는 만난 적이 없는 사람과도 헤어지는 법이죠.
어제는 죽은 사람과 함께 걸어갔다. 아직 죽지 않은 사람처럼 그이가 나의 팔짱을 끼었는데
내 팔이 스르르
녹아갔는데
기억하나요? 여기서 우리는 보자기를 바닥에 깔고 앉아 점심식사를 했었잖아요. 보자기라니 우스워. 식빵에 잼을 발라 먹었죠. 오래 전에 죽은 강아지 이야기를 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는데
대낮이고 사방이 캄캄하고 별도 없이 친근한 길이었다. 길을 잃는 것이 익숙한 길이었다. 누구나 이미 죽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가
왈왈,
짖고 싶은 기분이었다가
아마도 나는 미래의 당신의 오후의 조용한 기억 속에 담긴
잼 같은 것인가 봐요.
끈적끈적 흘러내리나요.
달콤한가요.
강아지 한 마리가 왈왈,
짖으며 따라왔다.
저것은 개이기 이전에 짖음 같구나.
우리는 검고 맑은 하늘을 향해 일제히 입을 벌렸다.
우리는 편백나무들 사이에서 식사를 마치고 다 녹아버린 한쪽 팔을 흔들며 안녕,
하고 인사를
당신은 곧 나와는 다른 기억을 가져요. 그것이 위대하게 느껴집니다. 산책이기 이전에 걸음, 새벽이기 이전에 불안이니까요.
잘 구워진 빵에 빨간 잼을 발라서 꼭꼭 씹어 먹어요. 맛이 있지 않나요? 맛이? 정말 맛이 있어서
그게 슬퍼서
당신의 얼굴이 다 녹아버렸어요.
나의 생각은 지금 너무 뜨거워.
빨갛고 달콤한 잼이 된 것 같아요.
끈적끈적 흘러내리고 있어요.
우리 동네 / 이장욱
여러분 우리 동네에는 미친, 미친, 미친
사람이 있다. 완전히 미치지는 않아서
사람들을 보면 멀쩡한 척 인사를
마트에도 가고 이발소에도 가고 백반집 오락실 수영장에도 가고 우연히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하지만 저것은 거짓이다 여러분!
저 사람은 지금 우리 모두의 공동생활에 치명적인 위해를
저이는 곧 바늘을 찾아서 바늘을 품고
식칼을 찾아서 식칼을 들고
망치라든가 휘발유라든가 권총 같은 것을 품에 숨기고 저이는
저이는 골방을 나와서 골목을 나와서 광장을 나와서 망상을 집착을 미로를 전망을 회고를 전염병처럼
저이는 버스정류장에 멍하니 서 있고 지하철을 환승하고 야구장에 도착하고 뜨겁게 응원을 하고 영화관 같은 데서는 두 시간 내내 침묵을 하는 저이는
마트에서는 결국 가격표를 꼼꼼히 확인하고 이발소에 앉아 머리를 맡긴 채 드디어 눈을 감고 실내수영장에서는 마침내 마침내
잠수를
배영을 할 수 있다면 천장만 보여서 좋을 텐데.
물을 좍좍 가르며 외롭게 인생을 흘러갈 수 있을 텐데.
백반은 오늘따라 맛이 좋았네.
꼬마들은 왜 귀여워.
학교 정문을 지나 마트에도 가고 문구점에도 가고 이발소와 편의점에 들렀을 뿐인데
누가 지나가면서 반갑게 인사를 했다. 나는 식칼이 없고
권총은 더더구나 없는데
실은 진실이나 거짓도
미친, 미친, 미친
이라고 중얼거리며 누가 내게서
천천히 멀어져갔다.
두 번째 강물 / 이장욱
나는 같은 강물에 두 번 손을 담글 수 있네.
그 강물이 왕십리에도 흘러 다니고
목포에도
오늘 신문을 보았는데 내일 신문이었어.
아침에는 거울을 빤히 보았지. 어제의 내가
사람이었는지
이미 죽었는지 알아보려고
나는 매일 물을 건너 다른 세계로 출근을.
익사체가 둥둥 떠 있는 강변에서 일을 하고
잠시 쉬고 또
일을 하고 당신을 만나기 위해 퇴근을.
카페 탁자 위에 물 글씨를 썼는데
사랑해. 라고 썼는데
손가락이 물속 깊이 들어갔는데
바닥에 닿지 않았다. 그곳에서 오래
살아온 것처럼.
숨을 쉬기 어렵다. 라고 내가 말하자
창밖이 움직이는구나. 라고 네가 말했다.
아마도 바다 가까운 곳으로
저편 강물에 손을 담그고 있는 사람이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았는데
어디서 본 듯한
나의 두 번째 얼굴
⸻시집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2016년)
동물사전 / 이장욱
움직이는 것들에 대해서라면 거기 있다가
거기 있지 않은 것
하지만 거기서 여전히
거기까지인 것
이동하는 것들에게 있는 것은 아흔아홉 개의 촉수라든가
내 것이 아닌 의지
그리고 적절한 분포
너와 헤어진 후 나는 움직이지 않았지. 거기서
태양의 주위를 어지럽게 돌고 있었을 뿐.
360도로 고개가 빙 돌아가는
인형처럼
아침에는 네 발로 점심에는 두 발로 그리고
여기 있지만 여기에 없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끝내
먼 곳까지인 것은?
그럴 때마다 내가 속한 종을 이해한다는 것
거대한 성기를 가진 물소들의 이동에 포함된다는 것
나도 모르게 무수한 동족들을 낳고
나를 기준으로
무한한 동서남북을 만든다는 것
그것이 보시기에
좋았지만
아무래도 나는 분포되지 않았다.
내가 있는 이곳에서
네가 있는 그곳까지.
여전히 거기 있다가 문득
네가 거기
있지 않을 때까지.
⸺시집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2016년)
샌드 페인팅 / 이장욱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저녁에는.
소년은 날카로운 쇠못으로 자동차의 표면을 긁으며 걸어가고
가늘고 긴 선이 대안으로 건너가 교각을 이루고
교각이 무너지자 보고 싶은 얼굴이 자라고
얼굴이 무너져 황혼의 지평선으로
모든 것이 점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사막이라고 부른다.
밤거리에 혼자 서 있는 사람이
모든 것에 동의하는 중이다.
어디 안 보이는 곳에서 모래가 집요하게
나를 생각하고 있다.
⸻시집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2016년)
변절자의 밤/ 이장욱
아침에 새로운 마음으로 깨어났는데
그것이 밤이었어요
그것도 아주 옛날 밤
옛날 밤 짧다.
너무 짧아서 잠들 수 없다.
마치 마치…… 하면서 조금씩 다가오는 이야기
설마 설마…… 하면서 점점 무서워지는 이야기
병든 노인들만이 알고 있는 마음으로
엄습하는 것이 있더군요
마침내 당신을 잊고 당신의 먼 곳에서 새롭게 깨어났는데
다시 옛날 밤
밀레니엄이 추억이고 4.19가 전생이고 꿈속의 해방을 거쳐 식민지의 새벽 두 시까지
나는 잤다.
옛날 밤에 잤다.
자신이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술을 마시고 술이 깨고 술을 마시고 술이 깨고
관 뚜껑을 열고 일어나 아침을
나는 새로운 마음으로 백조와 창조와 폐허를 창간했다.
카프와 신간회에 가입하고
독립운동을 했다.
이봐요, 경성에서는 무서운 살인사건이……
당신과 함께 적진에 침투했는데
내가 변절자였어.
나는 왜 자꾸 적의 마음을 이해하는가.
나는 왜 나도 모르게 지혜로워지는가.
옛날 밤 짧다.
너무 짧아서 잠들 수 없다.
나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칼을 빼어 들었다.
이제 그만 그만…… 하면서 다가오는 결정의 시간에
모든 것이 바로 지금인 이야기
새벽 두 시에 깨어났는데 마침내
새로운 마음이었어요
그것은 당신에게 한 번도 얘기해보지 못한
무서운 감정
신경 정신과에서 살아남기/ 이장욱
날씨는 화창하고 신경정신과에는 고객이 많지만 나는 무언가가 나의 잘못인 것 같았다.
창밖은 저렇게 완고한데 나는 여기 앉아 책이나 읽어도 되나.
고개를 들어 구름이나 멀거니 바라봐도 되나.
저기 저 무책임한 알라딘 램프를
나는 나를 죄인의 위치에 놓는 버릇이 있어요. 모든 죄인은 스스로를 구름으로 만들어요. 피아노가 되었다가 낙타가 되었다가 사자가 되어 먼 곳으로 흘러가요. 이곳에서 나가고 싶습니다만
나는 모든 것을 역사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나의 불면과 나의 환각과 나의 약물치료조차도 유신시대를 기준으로
식민지 시대의 산물로서
드디어
위화도 회군까지
한 마리의 토끼는 어떻게 역사적인가. 낙타의 영혼은 어디까지 구성되는가. 알라딘 램프에서는 또 무엇이 튀어나오나. 무슨 소원을 어떻게 빌어야 당신에게 닿나.
저는 매일 기도를 합니다만, 사랑과 증오의 끝에는 늘 선생님이 있잖아요. 언제나 고객이 많은 선생님,
달나라에서 오신 선생님,
토끼 같은 선생님,
귀여워서 뼈를 토막 내고 싶은,
낙타가 낙타를 용서할 수 없고
사자가 사자를 구원할 수 없고
창밖의 구름은 피아노를 치면서 폭풍이 되어갔네.
리듬은 알레그로
거기서 바라보니까 좋아? 책상 너머에서
천국에서
이 문장 바깥에서?
곧 램프의 정령이 튀어나와 우아한 미소를 지을 것이다.
램프의 정령은 마법사였다가
회계사였다가
압록강에 홀로 남은 고려의 병사였다가
나는 스툴에 앉은 채 정면을 노려보았다.
나는 고백을 하지도 않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지도 않았다.
창밖에서 수류탄이 터지고 유리창이 박살나고 드디어 낙타와 사자와 독립군들이 난입하고
우리의 피가 사방으로 튈 때까지
우리는 여러 세계에서 / 이장욱
서로 다른 사랑을 하고
서로 다른 가을을 보내고
서로 다른 아프리카를 생각했다
우리는 여러 세계에서
드디어 외로운 노후를 맞고
드디어 이유 없이 가난해지고
드디어 사소한 운명을 수긍했다
우리는 여러 세계에서 모여들었다
그가 결연히 뒤돌아서자
그녀는 우연히 같은 리듬으로 춤을
그리고 당신은 생각나지 않는 음악을 찾아 바다로
우리는 마침내 서로 다른 황혼이 되어
서로 다른 계절에 돌아왔다
무엇이든 생각하지 않으면 물이 돼버려
그는 영하(零下)의 자세로 정지하고
그녀는 간절히 기도를 시작하고
당신은 그저 뒤를 돌아보겠지만
성탄절에는 뜨거운 여름이 끝날 거야
우리는 여러 세계에서 모여들어
여전히 사랑을 했다
외롭고 달콤하고 또 긴 사랑을
⸺시집 『정오의 희망곡』 (2006)
아이누 / 이장욱
이상한 소문이 돌았어. 내가 이미 죽었다고 한다. 볕 좋은 곳에 묻혔는데도 뭐가 그리워서
무덤을 나와 홀로 산책을 하고 전화를 하고 스쿠터를 타고 질주하는 걸 보았다는 사람들이
이상한 소문이 돌았어. 내가 아이누인이었다고 한다. 나는 북해도의 수평선을 바라보다가 잠시 이 도시에 들렀을 뿐이라고
주식은 바다 연어
전생은 코뿔소
하지만 지금은 서울시민으로서
이상한 소문이 돌았어. 내가 노숙자가 되고 신앙을 설파하고 모르는 아이들을 마구 낳고 하하하 웃으며 놀이공원을 뛰어 다니다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는
당신과 눈이 마주쳤다는
맞아요. 사실 나는 아이누 사람인데 스쿠터를 탈 줄 안다. 나는 바다 위를 달릴 수도 있고 코뿔소처럼 포효할 수 있다.
나는 북해도의 해변에서 아내와 소박한 삶을 살아갔을 뿐인데
나는 어째서 이곳에서 장례식도 다 끝나고
볕 좋은 오후에
잘 묻혀 있었다.
우리 모두의 초능력 / 이장욱
오래전에 우리는 순서대로 태어났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뒷모습을 볼 수 있고
흘러간 시간을 정확하게 헤아릴 수 있다.
수많은 사건들을 창조하자 스르르 얼굴이 변하고
누구나 문득
살인자의 밤을 맞을 수 있다.
우리는 서로의 먼 곳에서 잠든 채
새로운 과거를 생산했다.
어제보다 나쁜 자화상을 발명한 뒤에는
지난해의 잡담을 반복하고
희미한 손바닥으로
새벽에 내리는 눈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느낄 때에는
아침 뉴스의 화면을 향해 드디어
짐승의 욕을 내뱉을 때에도
우리는 매일 그림자를 창조할 수 있고
조용히 그림자와 손바닥을 마주할 수 있고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비명을 지를 수 있고
—《현대문학》2009년 5월호
삼미 슈퍼스타즈 구장에서 / 이장욱
그때 야구장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나는 내리는 비를,
내리는 비를,
내리는 비를,
혼자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한 삶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무기여 잘 있거라/ 이장욱
내가 당신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고백이 놀라운 무기여서 벌판을 피로 물들인다면
대체 왜 고백을
긴 창 들고 적진을 향해 진군하기도 전에
크라이스트처치의 회전교차로에서는 교통사고가 일어나고 서울의 창밖으로
눈 온다.
우리는 매일 창과 방패를 든 채
고백하고 설득하고 참회하는 벌판으로 나아갔습니다.
갑옷을 입은 채 온몸이 박살나고 뼈와 살이 튀어오르는 그곳으로
출근을
부서진 자동차에서 죽은 사람이 걸어 나왔는데
아무도 그것을 부활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내리는 눈이 허공에서 정지했는데
그것이 기적이 아니었다.
꿈이 괴로워서 꿈속에서 계속 자살을 한다면
대체 왜 꿈을
가련한 자여, 죽음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것이
발생입니다.
어느 아침에 문득 깨어났는데
수많은 전투를 치른 몸이 마침내 쓰러져 있었다.
이렇게 혼자 버려질 거라면
대체 왜 부활을
늙은 사람이 다가와서 그것을
평화라고 불렀다.
창을 버리고 자동차를 버리고 눈보라 속에서
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손톱 발톱 끝에서 핏방울이 흘러나왔다.
부활한 사람들이 거리를 걸어 다녔다.
누구에게든 고백을 하고 싶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이것은 기적적인 세계였다.
의상 / 이장욱
한 벌의 옷을 사고도 인생을 산 것 같았다.
내가 지금 토끼 가죽을 입은 것인지
다른 사람을 구입한 것인지
아니면 새로 짠 관에 누운 것인지
그것을 입고 외출을 했다.
버스를 타고 꾸벅꾸벅 졸다가
간을 꺼내 바위에 널어 말리고 다시
해변으로
옷은 흔한 비유지만 그것이 겉과 속은 아니다.
현실과 꿈이 아니다. 현상과 본질도 아니다.
제발 진심과 가면이
온몸이 다 삭아지고 녹아지고 지워질 때까지
그것이 되어가는 것이다.
택시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바다에 뛰어드는 것이다.
용왕을 만나는 것이다.
아, 넌 유행을 몰라.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현실과 현상과 가면을
지나갔다. 혜화역이라든가
산호초 곁을
심해의 승강장에 서 있는데
너무 오래 살아온 자라 한 마리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에게는 임무가 있다고 했다.
의상에 손을 대고
깊고 깊은 두근거림을 느꼈다.
20세기 소년 / 이장욱
네거리에서 우연히 오래 알던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이미 죽은 사람인 것도 같았는데
이봐요, 나는 당신의 장례식에도 갔었습니다. 대체 당신은…
나는 외면을 받았다.
나는 주판알처럼 조용히 지내다가 외출을 하였다. 거리에는 또 죽은 사람들이 흘러 다니고
나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빗방울들이 하늘로 떠오르고 있었다.
미래를 알 수 없는 기분이 그리웠다.
누구든 개가 바라보는 세계, 구름 너머의 세계, 대기권 너머 휘어진 시간의 세계보다는
지금 이곳에 가깝다.
나는 나를 처음으로 자각하게 되었을 때를 떠올렸다. 그건 확실히 부정적인 기분이었지. 이미 다 망가진 뒤의 느낌에 가까운
미래의 세계에는 탄생과 몰락이 없었다.
인간이 사용되지 않았다.
나는 주판알처럼 조용히 지내다가
모든 이들의 최후에서 돌아왔다.
개들이 짖지 않았다.
빗방울들이 스르르 떠올라 구름이 되었다가 개의 모습으로 어슬렁거리다가 무수한 생물의 전생이 되었다.
아무도 주판알을 튕기지 않았다.
그런 존재가 없었다.
네거리에서 우연히 당신을 만났는데
당신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당신의 장례식에서 나는…”이라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생활세계에서 춘천 가기/ 이장욱
생활세계에서 춘천을 갔네.
진리와 형이상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생활세계에서 춘천을 갔네.
초중등학교 때는 우주의 신비와 시를 배웠지.
공부도 열심히 했고 연애도 했는데
또 독재자를 뽑았구나.
춘천에는 호수가 있고 산이 있고 깨끗한 길이 있지.
여자와 남자와 개들과 소풍이 있고
할머니도.
인사를 하고 밥도 먹었네.
나는 춘천에 들렀다가 그리스와 신라시대를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저는 종교적인 인간이라 매일 기도를 합니다만
고백성사를 한 뒤에 영성체를 모셔야 합니다만
아아, 유물론이 옳았다.
춘천에서 나는 죽어가는 시절의 고독을 떠올리고
사후의 무심을 떠올리고
길거리의 개들과 눈을 맞추었네.
생활세계에서 춘천을 가는 일
그것은 할인마트에 내리는 석양처럼 신비로운 일
낮잠에서 깨어난 오후처럼
비변증법적인 일
열차가 북한강의 긴 교량을 건널 때 옆자리의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어대자
바로 그 순간 온몸에 스며드는
정확한 일
우편 / 이장욱
모든 것은 이미 배달되었다.
그것이 늙은 우편배달부들의 결론,
당신이 입을 벌려 말하기 전에 내가
모든 말을 들었던 것과 같이
같은 계절이 된 식물들
외로운 지폐를 세는 은행원들
먼 고백에 중독된 연인들
그 순간
누가 구름의 초인종을 눌렀다.
뜨거운 손과 발을 배달하고 있다.
우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있는
바로 그 계절로
단 하나의 답장이 도착할 것이다.
조금 더 잔인한 방식으로
—시집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중력의 소모/ 이장욱
드디어 중력이 다 소모되어서 둥둥
떠오르는 사람들
상계동에서도 베이징에서도 스무 살에서도
주소가 사라지는 사람들
허공이 집이라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만
구름은 침대가 아니다.
누워서 악몽을 꿀 수도 없고
밖에 나가 배드민턴을 칠 수도 없고
네거리에 멈춰 서서 신호등을 기다릴 수도
창세기와 요한계시록 사이에서 유영을 했다.
상공에서 당신과 간신히 손끝을 맞대었다.
자이아파트와 국회의사당과 동해물과 백두산이
둥둥
흘러가고 있군요.
식사는 했나?
아아, 지각이야, 지각.
당신에게로 가는 길과 당신에게서 돌아오는 길이
무한해집니다.
깊이와 너비를 한꺼번에 잃어버리고
무인칭이 되고
의혹과 함께
당신을 사랑했던 나날은?
셔틀콕이 뭉게구름을 뚫고 나를 향해 날아왔다.
폭탄처럼
나는 저것을 칠 수 있다.
나는 힘껏 도약한다.
소음들 / 이장욱(1968~ )
오전 열한 시에 나는 소리들을 흡수하였다.
오전 열한 시에 나는 가능한 한 시끄러웠다.
창문을 열고 수많은 목소리가 되었다.
나는 음속으로 변형되었다.
네 안에 들어가서
삼십 초 동안의 기억이 되었다.
비 내리는 어머니의
썩어 가는 몸을 흘러갔다.
나는 소문이 흩어지는
무한한 형태가 되었다.
침묵하는
허무주의자들을 혐오하였다.
육식동물의
더러운 식욕이 되었다.
혈관 속을 지나가는 피와 피의
현란한 각도,
아이들이 자라는 소리,
우유가 상해가는 소리,
나는 무성영화 속의 주인공이
가장 크게 벌린 입이 되었다.
오전 열한 시에 귀를 막았다.
오전 열한 시에 눈을 닫았다.
나는 완벽하게 침묵하였다.
옮긴이의 말 / 이장욱
나는 옮긴이로서 말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원본과 다름없음을.
밤의 불 꺼진 방을 옮긴 것이 당신의 마음임을.
지금 응급실의 공기를 옮긴 것이 어제와 그제와 또
지난 시간임을.
옮긴이로서 나는 확신할 수 있다.
원본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것이 당신의 갈 봄 여름 없는 계절이며
그 계절이 나의 먼 후일이며
먼 후일의 겨울이 지금 당신의 뜨거운 여름임을
절정임을
하지만 옮긴이로서 나는 자주 당신이 누구냐고
대체 누군데 그렇게 말하느냐고 묻는 사람을 마주쳤으며
주소지와 계좌번호와 석양과 강변의 개들을 옮겨 적느라 인생을 소모했으며
결정적으로 이게 어느 나라의 문자냐
어느 시대의 사상이냐
네 애비가 누구냐
추궁을
옮긴이로서 말할 수 있다. 나는
잘생기지도 않았고 잘난 체를 하지도 않았고 언제나 처음 가는 길을 다녔는데 나는
언제 어느 곳에서나 정확한 이정표를 보았고
그것이 쓸쓸하지 않았고
서서히 죽어가면서 내내
다른 언어로 태어났다.
나는 당신에게 전화를 걸어서
잘 지냈느냐고 오랜만이라고 취했노라고. 그런데 이 씨발놈아 나는 너를 사랑했다. 너는 나의 먼 곳에서 어떤 원본이 되어가고 있느냐. 내가 도달할 수 없는
실은 이미 도달한
부재중 신호의 저편에서
옮긴이로서 나는 몇 페이지에서 몇 페이지까지 슬픈가.
에이 비 씨에서 기역 니은 디귿까지
강변의 개가 북극의 곰이 될 때까지
응급실의
마지막 신호에 이를 때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