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응모 (方應謨. 1883.1.3~l950.9.28)
정운현 지음,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에서 발췌, 개마고원, 1999년
일제시대에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오늘날 신문재벌 방씨 일가의 중시조로 일컬어지고 있는 계초 방응모의 행적은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이유는 그가 조선일보의 경영에 참여하기 이전까지는 거의 무명인사였던데다 6. 25 전쟁 때 납북된 이후로는 활동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가 사회 저명인사로 활동한 기간은 1933년 『조선일보』사장에 취임하여 1950년 납북될 때까지 불과 17년 정도다. 그러나 당시 그는 양대 민간지의 하나였던 『조선일보』의 사주이자 손꼽히는 자산가 중의 한 사람이었느니 그가 우리의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다. 따라서 그의 삶은 단순히 개인차원을 넘어 어떤 형태로든 우리 현대사, 특히 언론사에는 기본적인 연구대상이라 하겠다.
계초(啓礎) 방응모(方應謨). 그는 어떤 인물이었는가. 그는 과연 일제하에서 '민족지' 『조선일보』를 중흥시킨 '민족언론'이 공로자인가. 아니면 '민족지'라는 간판 아래 일제와 결탁하여 오늘의 족벌 신문 『조선일보』를 키운 반민족 기업인인가.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이처럼 정반대로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평자들은 그가 잉ㄹ제 당시 행한 친일행각과 그가 사주로 있던 『조선일보』의 친일성을 들어 부정적인 쪽으로 무게를 싣는 것이 보통이다. 그의 이력을 통해 그의 삶을 추적해보자.
방응모는 1883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방계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 해 1월에는 인천항이 개항되었고, 우리 언론사로 보면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가 창간된 해이기도 하다. 가난 때문에 신학문을 배우지 못한 그는 서당을 다녔는데 12세 때 서당훈장이 그를 접장으로 삼아 학생들을 가르치게 했을 정도로 총명했다고 그의 손자 방우영 『조선일보』회장은 『조선일보』 사보에 쓴 바가 있다.
그가 처음으로 사업다운 일을 시작한 것은 40세가 되던 1923년에 『동아일보』정주지국을 인수해 운영하면서부터다. 그러나 워낙 소자본으로 시작한데다 수금사정이 여의치 않아 온갖 고통을 겪었는데, 이때 당한 수모(가산차압)와 시련이 훗날 그가 조선일보를 인수케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한다. 결국 그는 2년 만에 이일을 그만두고 새 사업을 물색하다가 손댄 것이 바로 광산사업이었다. 그는 집문서를 저당잡혀 마련한 돈으로 초창기 덕대(德代)생활부터 시작했다. '덕대'란 남의 광산을 도급맡아 일정한 금액을 내고 채광하는 방식으로 주로 영세업자들이 흔히 광산사업을 시작하던 방식이었다.
그에게 '기적'이 일어난 것은 그로부터 3년 뒤였다. 마침내 금맥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는 '전세살이' 덕대생활을 청산하고 금광을 매입하여 교동광업소라 이름짓고는 본격적으로 사업을 키워나갔다. 한 연구서에 의하면, 사업이 한창 번성하던 1931년 당시 교동광업소는 국내 5대광산 반열에 올라 있었으며 노동자 수가 1천1백 명에 달했던 것으로 나와 있다. 광산재벌 방응모는 이렇게 탄생된 것이다.
『조선일보』인수하여 역사의 전면으로
1932년에 그는 당시 한창 성업중이던 교동광업소를 135만 원을 받고 일본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해버렸다. 그가 이 시점에서 광산을 매각한 이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길이 없다. 광산업을 시작한 지 7년 만에 어째든 그는 적수공권에서 일약 '조선반도 제일의 거부'로 변신해 있었다. 그 해 연말 그는 광산매각 계약금을 받기 위해 상경했다가 당시 『조선일보』 사장 고당 조만식을 만났는데, 이 자리에서 『조선일보』 인수를 권유받았다. 당시 『조선일보』는 경영악화로 타개채을 찾고 있던 중이었는데 고당은 새 물주로 그를 지목했던 것이다. 결국 방응모가 『조선일보』와 인연을 맺은 것은 노다지로 축적한 자본을 바탕으로 고당의 권유를 받은 것이 직접적인 계기였다고 볼 수 있다.
이듬해인 1933년 1월에 그는 자본금 20만 원을 일시금으로 불입하고 '주식회사 조선일보'의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다시 3월에는 정식으로 경영권을 인수하여 그 자신이 부사장에 취임하기에 이른다. 사내 분위기 쇄신을 위해 그는 먼저 이왕직 소유의 태평로 1가 부지 1천4백 평을 12만 원에 사들여 인근 일대에서 가장 고층인 4층 건물이 사옥신축에 착수했다. 이어 4월 26일자로 혁신호 1백만 부를 제작해, 전국에 무료로 배포했는데 당시로선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다. 특히 그는 동아일보의 이광수와 서춘을 부사장과 주필로 영입했는데 이들은 모두 그와 동향인이었다. 이밖에 그는 활자제작과 윤전기 구입 등 시설투자에 50만 원을 들여 회사를 재정비하고는 7월에 사장에 취임함으로써 마침내 '방응모체제'가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광산재벌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하면서 하루 아침에 저명인사로 등장하게 된 과정이 대충 이렇다.
그가 '기업인 방응모'의 면모를 과시하기 시작한 것은 광산매각 대금 중 『조선일보』 인수비용으로 지출되고 남은 돈으로 사업다각화를 시작하면서였다. 그는 조『조선일보』를 인수한 2년 뒤인 1935년에는 경기도 수원에 97만 평 규모의 간척사업을 추진했는데 여기에 소요된 금액은 『조선일보』 인수비용과 동일한 50만 원이었다. 또 이듬해에는 함경남도 영흥 일대에 무려 3천2백만 평 규모의 조림사업을 벌였는데 이는 신문용지 확보가 주목적이었다고 한다. 본지 이외에 자매지로 종합월간지 조광(朝光), 여성지 여성, 소년월간지 소년 등이 창간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재력을 바탕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것은 기업가의 기본적인 생리라고는 하나, 재벌의 언론사 경영은 이미 당시 『조선일보』의 사례에서도 극명히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계초 방응모가 친일행각을 시작한 것은 비단 당시의 시국상황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이 친일은 『조선일보』를 비롯한 각종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총독부와의 '거래'가 불가피했고, 여기에 중일전쟁 이후 일제당국의 압력이 가중되어 증폭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친일은 흔히 '먹고살기 위해서' 친일을 했다는 변명과는 사안이 다르다. 한마디로 그의 친일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당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신문의 사주였던 그의 친일은 그가 소유하고 있던 신문의 논조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여타 친일파들과는 또 다른 면을 가지고 있다. 2차대전 후 드골정부가 나치정권에 협조한 언론인을 숙청하면서 언론사 사주에 대해 가혹한 처단을 내린 것은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 동안 그의 친일행각은 『조선일보』의 '민족지' 간판에 가려 거의 축소 은폐돼왔던 것이 사실이다. 1990년 이후 친일파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더러 공개되긴 했지만 아직도 소상히 조사된 것은 아니다. 1930년대 후반 이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 그의 주요 친일행적을 더듬어보자.
그의 친일행각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중일전쟁 이후 생겨난 각종 친일단체에 참여해 일제통치와 군국주의를 찬양한 대목과, 또 조선일보 폐간 후 자매지 『조광』을 통해 친일논설을 직접 쓰거나 발행을 주도한 점이다. 그의 친일행각은 물론 그 이전부터 있어왔다. 그가 『조선일보』를 인수해, 경영을 시작한 직후 삼천리(1934년 4월호)에 게재된 신문사 사장의 하루-방응모 씨 라는 글이 한 증거다.
저녁이면 사교관계로 명월관, 식도원(食道園)으로 돌아다니며 재벌과 대관(大官)집을 찾기도 하고 …… 천도(川島)군사령관의 저녁초대를 받고 갔다가 돌아와서는 고사포도 기부하고.
이 기사는 특히 이런 대목도 있다.
비록 신문 지면은 일시적으로 화려하게 꾸미지 않아도 좋으니 오직 오래오래 경영하도록 지구방책(持久方策)을 세우는 데 전력한다.
이는 그가 조선일보를 '민족지'로 키우기보다는 순전히 사업의 도구로만 생각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자매지 『조광』으로 이어진 친일 행각
그가 공개적으로 친일활동을 시작한 것은 중일전쟁 개전 이듬해인 1938년 6월에 당시 총독부가 결성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부터다. 이 단체는 조선문예회, 조선방송협회 등 59개 단체와 김활란 김성수 등 개인 57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일제의 황민화 정책과 전시체제 구축을 적극 홍보한 단체다. 9월에는 다시 동아일보 사장 백관수 등과 함께 총독부가 결성한 제2차 전선순회 시국강연방에 동원돼 '조선명사 59인 각 도순회강연'을 다니며 일제의 침략전쟁에 전국민의 동참을 호소했다.
중일전쟁이 장기전으로 돌입하자 일제는 전쟁물자와 병력동원을 위한 전시총력체제 구축에 들어갔다. 1941년에는 친일잡지 『삼천리』의 사장인 김동환의 발기로 전시보국단체인 임전대책협의회가 결성되었는데, 방응모는 이 단체의 위원 35명 중 1인으로 참여하여 종로 화신백화점 앞에서 김동환 이광수 모윤숙 윤치호 등과 함께 전비조달을 위한 채권가두유역에 나서기도 했다. 10월에 들어 친일단체의 총집결장인 조선임전보국단이 결성되자 그는 다시 이 단체의 이사로 참여했다. 이밖에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사재를 털어 고사포를 기증하기도 하고 특히 비행사 신용욱을 중심으로 중추원 참의 고원훈, 경방 사장 김연수 등이 1천만 원을 투자하여 설립한, 당시로서는 조선 내 유일무이한 전쟁조력회사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의 중역으로 피선되기도 했다.
1940년 8월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그는 자매지 『조광』을 본격적인 친일잡지로 개편하고 그 자신이 직접 친일논설을 기고하는 등 친일행각을 멈추지 않았다. 『조광』1940년 10월호 권두언(「조광사 혁신의 사(辭)」)에서 그는 사내 기구혁신을 밝히고는 다음호인 창간 5주년 기념호의 권두언에서 "이와 같은 역사적 대 변전기에 처하여 본지는 그때그때 본지에 허여(許與)된 직책을 다하기에 미력을 다하여 왔다"고 자찬하고는 "안으로는 신체제 확립과 밖으로는 혁신외교정책을 강행하여 동아 신질서 건설을 완성시켜 나가는 데 일단의 노력을 더할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중일전쟁 3주년 기념호(1940년 7월호)에서는 "우리 총후(銃後) 국민은 더욱 노력하여 이 성전(聖戰)의 결과가 완수되기까지 은인자중, 멸사봉공의 희생적 정신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며 총독부를 대신해 전쟁협조를 독려하고 있다. 1940년대 들어 『조광』은 한글잡지임에도 불구하고 일문기사를 게재하는 등 극렬한 친일잡지로 변해 있었다.
권두언 이외에 그가 『조광』에 쓴 친일논설로는 1942년 2월호에 타도 동양의 원구자(怨仇者)라는 글이 있다. 이 글은 태평양전쟁 개전 직후에 쓴 것으로, 그는 "이번 대동아전쟁은 그들(미국)에게서 동아(東亞)를 이탈하여 공영권을 건설하고 세계의 평화를 도모하려는 것은 물론이지만 일편으로 보면 참아오던 원한 폭발이라고도 할 것이다"라며 미국은 원수로, 일본은 평화의 사도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 것을 주장하고 아울러 국민개로(皆勞)운동, 물자절약, 저축강화 등을 촉구하고 있다. 그가 이 글에서 내린 결론은 "어떻든 반도민중은 이때에 심혈총력을 경주, 물력(物力)과 심혈을 총 경주하여 국책에 협력하자"는 것이었다.
일제가 황민화정책을 추진하면서 내건 시책 중의 하나는 국어상용(國語常用)이었다. 여기서 국어는 당연히 일본어를 말한다. 1944년 통계를 보면, 조선내에서 일어해독자는 320만 명 정도로 전체인구의 26%였다. 이와 관련하여 조광은 국어를 상용합시다 라는 권두언(1944년 8월호)을 통해 "영문(營門)을 들어서는 징병자와 내지(內地) 의 노무자들이 국어를 해득치 못하는 데서 오는 곤란은 상상 이상일 것"이라고 지적하고는 대만의 일어해독자 6할에 비하면 이는 훨씬 뒤떨어지는 것이라고 개탄해 마지않았다. 이 같은 주장은 친일어용지 『매일신보』『경성일보』 등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내용이었다. 창간 초기에 문화 예술분야에서 어느 정도 공로가 있었다고는 하나 조선일보 폐간 후 『조광』은 대를 이어 친일보도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일제 식민지시대와 해방정국이 격동기를 살아오면서 우리 현대사의 주역들은 다양한 면모를 가지고 살아왔다. 그들의 삶의 진면목을 보기 위해서는 이 모두를 균형 있게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점에서 본다면 그 동안 대부분의 역사인물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면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다. 계초 방응모 역시 마찬가지다. 일제하 그의 친일행적은 그가 발행한 매체 곳곳에 잘 기록돼 있다. 그러나 1980년 간행된 그의 전기(『계초 방응모』) 서문이 첫 줄은 "암흑기의 민족에게 언론의 횃불을 밝혀 민족의 길을 비추었던 선구자"로 시작하고 있다. 과연 몇 사람이나 이를 수긍할지 의문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