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백양로 백암산(白巖山) 백양사는
백제 시대 고찰로 율원, 강원과 3개 선원(천진암, 고불 및 운문 선원)을 갖춘 고불총림이다.
운문암 운문 선원은
북쪽에서는 금강산 마하연(摩訶衍)만 한 곳이 없고,
남쪽에서는 백암산 운문암(雲門庵)이 가장 좋다고 여김서
한국불교의 양대 선원으로 자리매김 되는 뛰어난 수행처다.
한편,
대둔산 태고사, 변산반도 월명암과 함께 한국불교 3대 수행처로 스님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 일제 강점기 때의 운문암(고려시대의 사찰이었으나 한국전쟁 와중에 국군에 의해 소실되고 그 후에 복원됨 -
백암산 운문암(雲門庵)
그들은 이 눈바람 몰아치는 산중에서 무슨 화두, 무슨 공안(公案)을 붙잡고 있을까?
도대체 어떤 번뇌와 씨름중일까?
우주 삼라만상의 진리? 아니면 무(無)? 공(空)?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면벽 참선중일까?
면벽참구하는 이런 공부가 과연 각자(覺者)로 가는 제대로 된 길인지?
또 100일 후면 견성(見性)하고 이 팍팍한 산길을 내려올 수 있을련지?
정녕 발걸음이 가벼운 납자들이라면 짊어지고 내려올 그 바랑엔 어떤 진리와 깨달음이 들어있을까?
평범한, 얼치기 우바새들이야 도무지 알 수 없는 의문들이다.
지금 납자들은 공부가 한철이다.
아마도 네 철 중에 가장 공부하기가 좋은 계절이 아닐까.
꽃 피고 새 울어 평온한 가슴 뛰게 만드는 봄도 그렇고,
땀 철철 흐르는 선방보단 신록 우거진 그늘이 훨씬 그리울 여름도 그렇고,
달디 단 가을 바람에 만산홍엽이 유혹하는 가을도 그렇고 모두 용맹정진을 방해하는 계절들인데 반해
이 겨울은 공부에 제철이 아닐까 싶다.
밖은 엄동설한 나다니기엔 적절치 못한 계절이고 가부좌 틀고 앉아 공부하라고 마련해 준 조용한 터가 있으니
그 아니 좋은 계절인가.
하지만 아무리 공부하기 좋은 계절이라도 결제에 든 납자들의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을 터.
어디 견성이 한철 공부로 되기만 한다면야….
그 많은 선객들이 모두 큰 스님 되었을 것 아닌가.
그게 안되니 철따라 깊은 산중에 들어 끊임없는 고행속에 나를 내던지고 있는 것이다.
산천은 눈에 덮이고 창문을 스치고 지나가는 마른 바람소리와 먼 골짜기에서 설해목 넘어지는 소리만이 들릴
적막한 겨울산.
그곳에서 눈가리고 귀닫고 입막고 저마다 의심하는 화두 하나에 전신을 던져 낮과 밤을 보내는 그들 선객들.
그래서 어느 소설가는 그들을 이렇게도 표현했다.
`시작도 끝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형기를,
그 깜깜한 밤바다 위를, 그러나 날개도 없이 날아가는 새들….
스스로의 부리로 스스로의 살점을 물어뜯으며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윤회를 되풀이하는 새들'이라고.
선방에서 마음 다잡고 정진중인 그들의 복잡한 마음을 잘 표현한 책이 하나 있다.
'지허'스님이 오대산 상원사에서 동안거 기간동안 결제에서 해제에 이르는 과정에 겪은 일과 생각들을 정리한 책
`선방일기'를 한번 들여다 보자.
치열한 선승(禪僧)의 수행
“잘 따지고 보면 납자는 철저하게 욕망의 포로가 되어 전전긍긍한다.
세속인들이야 감히 엄두도 못내겠지만, 생사 문제까지 놓아버리고 배회하면서 면벽불이 되어
스스로가 정신과 육체에서 고혈을 착취하는 고행을 자행하는 것이다.
무욕(無慾)은 대욕(大慾)이기 때문일까. 선객은, 인간은 끝내 견성하지 않으면 안될 고집(苦集)의 존재임을 자각하고
스스로 고(苦)의 땅 위에 고의 집을 짓고, 고로써 울타리를 치고, 고의 옷을 입고, 고를 먹고, 고의 멍에를 쓰고,
고에 포용된 채 고의 조임을 받아가면서도 고를 넘어서려는 의지만을 붙들고 살아간다”
옛 백양사 고불총림 방장 서옹(西翁)스님도
“선승의 수행이란 껍질만 보면 흡사 신선같아 보이지만 내부는 치열하고 용맹해야 망상이 근접할 수 없다.
주관과 객관이 없으며 모든 것이 불덩이 속에서 타버리는 듯한 용맹심으로 임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열반(涅槃), 극락(極樂), 피안(彼岸), 적멸(寂滅)을 동경하고
거기에 미치기(及) 위해 견성하려고 몸부림치는 그들의 모습이 눈에 훤하다.
온갖 욕망과 고통, 부족함을 참고 이겨내는 그들의 수행생활.
선객들은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할 `3부족(三不足)'이라는게 있다고 한다.
바로 식부족(食不足), 의부족(衣不足), 수부족(睡不足).
그런 것들을 이겨내며 자기자신에게 철저하게 비정해야 견성의 길,
깨달음의 길에 이른다는 것이니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수행자들이라면 그 삶이 어떠하겠는가.
그래서 누군가는 그들의 생태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비정 속에 비정을 씹으면서도 끝내 비정을 낳지 않으려는 몸부림,
생명을 걸고 생명을 찾으려는 비정한 영혼의 편력이 바로 선객들의 생태'라고.
철저한 자신과의 싸움. 견성이라는 목표를 위해서는 처음도 자아요 마지막도 자아, 수단도 목적도 모두 자아,
즉 모든 것이 나에서 시작해 나에서 끝나는 나와의 싸움이라는 이야기인데….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웠다는 지난 12월 백암산 운문암을 향했다.
포장이 잘 돼 평탄했지만 여간 가파르지 않은 길을 걸어 오르면서 이런 저런 생각들이 머리 속에 가득했다.
수도자의 삶이란 과연 어떤 것인지, 범부들의 삶에 그들은 어떤 의미와 존재인지,
그들은 과연 이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애초, 운문암의 선원장 스님으로부터 방문 허락을 얻지는 못했다.
이곳은 공부하는 선원이므로 방해되니 오지 말아달라는 이야기다.
수 차례 전화를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하지만 몰래라도 꼭 보고싶다는 못된 오기가 발동했다.
왜냐하면, 백암산과 백양사를 이야기하면서,
그리고 암자를 이야기하면서 운문암을 빼고 갈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운문암이 어떤 곳인가?
고려시대 창건됐다니 족히 천년의 법력을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이유는 이곳이 우리 불교사를 논할 때 꼭 거론해야 할 만큼
아주 중요한 선방이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멋스런 옛 건물 하나 없고 막 지은 평범한 암자처럼 보이지만 그 내력은 화려하다.
구름 암자 운문암은 원래 우리나라 3대 선원 가운데 하나로 금강산 마하연과 어깨를 겨룰 정도였다고 한다.
고승대덕치고 이곳을 거치지 않은 이들이 없을 정도다.
멀리 가지 않고 근래만 봐도 그렇다.
암울한 일제 시대 민족불교의 중흥을 꾀했던 석덕(碩德) 금타(金陀)스님, 만암(曼庵)대종사와
그로부터 배우고 제5대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서옹 스님, 서옹의 제자 학능(學能) 스님 등 화려하기만 하다.
- 운문암에서의 조망_우측 살며시 보이는 무등과 호남정맥라인(2019년 2월 6일 컷)
만고 생불 진묵 화상의 설화
재미있는 설화도 전한다.
만고 생불로 통하는 진묵(震默) 화상의 얘기다.
임진왜란 직후 백양사에는 내로라하는 여러 석덕들이 있었으나 조실로 모실 만한 큰 스님은 없었다고 한다.
대중들이 고심하고 있던 차 하룻밤은 모두에게 똑같은 대선(大仙)의 현몽이 있었다.
`운문암의 차끓이는 중을 조실로 모시라'.
진묵은 그때까지만 해도 하찮은 일개 차끓이는 중으로 존재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미승이었기 때문에
절 안이 온통 술렁댔다.
더욱이 진묵은 공부는 커녕 술고래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엄한 꿈인지라 어른으로 받들었다.
결국 진묵 화상은 장경에 매몰되어 가던 당시 풍속에 침묵과 마음의 바람을 크게 일으켰다고 한다.
그러나 진묵은 어느날 홀연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흙으로 조그만 불상을 하나 빚어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금물을 입히지 말라”고 당부하고 사라졌다.
그러나 그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아마 머나먼 기다림의 서원, 영원한 미륵의 꿈을 심어놓고 떠나지 않았을까.
운문암을 백양(白羊) 가풍의 산실로 부르는 데는 이런 이야기들과의 상관관계도 있을 것 같다.
백암골 가장 깊은 곳 상왕봉 아래 자리한 운문암은 현재 이 집의 큰 어른이자 백양사 고불총림 방장으로 있는
서옹 큰 스님의 발원으로 지난 85년 복원됐다.
아마 한국전때 불타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을 서옹스님이 발원, 4년여 공덕 끝에 모양새를 갖추었다.
서옹은 과거 화려했던 선풍을 자랑하던 이곳 운문암의 스러짐을 안타까이 여기던 끝에
제모습을 찾아 복원했고 뜻대로 지금은 백양사 선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국내 제일의 선 도량을 꿈꾸고 있다.
서옹 스님이 조실을 맡고 있지만 스님이 방장으로 있다보니 백양사에 내려가 있다.
이러하니 그곳을 어찌 그냥 지나치리요.
기어이 구름문턱이라도 들여다볼 요량으로 백암골을 찾은 것이다.
끝까지 포장 또는 벽돌을 깔아만든 길이 이어진 걸 보면 이곳도 세상과 그리 멀리 있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며
암자 입구에 다다르니 시뻘건 글씨가 위협한다.
`이곳은 공부하는 선원이니 등산객이나 관광객은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다.
그렇다면 이 객은 등산이나 관광의 목적이 아니잖은가.
그냥 웃으며 올랐다.
숨을 고르고 보니 운문암은 상당히 넓은 터다.
법당을 중심으로 좌우측으로 건물이 들어서 있고 아래엔 창고 용도로나 쓰일 법한 작은 건물들도 눈에 띈다.
여러 불사를 했음인지 흔적이 역력하다.
현대식으로 깔끔하게 마무리한 길이나 돌담, 목욕탕 등으로 쓰이는 건물들에서 산사의 그윽한 맛은 느낄 수 없다.
현재 이곳은 20여 선객들이 화두를 붙잡고 수행중이다.
그러다 보니 많은 수행자들을 수용할 공간이 필요했음인지 부속시설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옛 건물로는 소림굴이 유일하다.
이곳은 누가 뭐래도 선처(禪處)로 제격이다.
높고 깊어 안성맞춤이다.
암자 마당에 서니 만봉이 발아래다.
좌로는 백학봉과 도집봉이, 우로는 사자봉과 가인봉이 도열하고 겹주름 산곡들을 건너다보면 산의 바다다.
맑으면 무등산 자락들도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이날은 말 그대로 구름의 문이 제모습을 보이는지 산구름이 드리웠다.
- 장쾌한 서옹 스님의 현판 글씨 -
운문이라는 이름은 중국의 고대 대덕 운문(雲門)에게서 따온 듯하다.
`동산이 물위로 간다(東山水上行)이라는 유명한 선어(禪語)를 남긴 고승이다.
10세기 중엽 운문종(雲門宗)의 조사였던 운문은 “부처는 어디서 납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그렇게 일갈했다고 한다.
난감하지만 낭만적인 멋과 맛도 느껴지는 듯하고….
하여간 투첩납자들이라면 누구나 깨뜨리고 넘어보려하는 말매듭이라는 유명한 공안이란다.
그러고 보니 서옹 큰 스님의 선 이야기를 담은 책 `물따라 흐르는 꽃잎을 본다'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누군가 서옹에게 묻는다.
“최고의 진리에 이르는 길은 어떤 것입니까?”
서옹의 대답. “구구는 팔십일.” 알 수 없도다.
운문은 이렇다하게 자랑할만한 물건들은 갖지 못했다.
다만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글씨를 구경할 수 있는 맛은 있다.
바로 운문암 현판. 대단한 필재를 자랑하는 서옹의 솜씨다.
높은 근기로 백양의 선맥을 일으켜 세운 서옹은 글쓰는 재주 또한 비범하다.
흘림체로 원만하게 썼지만 장쾌한 맛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탈속의 멋이랄까? 구
름 운과 문 문자에선 정말 넘실대는 구름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연구와 참선에 글재주까지 뛰어난 서옹의 글씨는 백양사 곳곳에 몇점 더 있다.
조용한 암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댓돌위에 겨울용 털신만 몇개 보인다.
아무런 방해받지 않고 혼자 글씨를 보고 감탄하던 차에 드디어 한 젊은 스님이 방문을 열고 나온다.
보자마자 놀라는 눈치다. 어떻게 올라왔냐는 듯. 합장을 했더니 다짜고짜다. 잘못 오셨으니 내려 가란다.
아무리 공부방이라곤 하지만 방문객도 조용조용 구경하는 예는 갖추었는데 보자마자 내쫓는 기세가 역력하다.
“아, 아니, 그게 아니고…” 하지만 말도 못꺼내게 하고 아예 내칠 태세다.
그렇다면 어찌할 수는 없는일.
이도 `침입'이라면 침입이니 잘못한 것도 있고 돌아섰다.
발길을 돌려 내려오는데, 다시 아까의 의문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과연 저 수행자들은 어떤 깨달음을 얻어 이 길을 내려올 것인지.”
아무튼 그곳에서 수행중인 선객들이 견성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아울러 운문암이 당대 제일의, 이 땅에서는 따를 곳 없는 참선 도량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한국 최대의 선방이 되어 선풍을 일으키고 나아가 종풍을 일신하는 기운이 피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맑고 밝은 불은을 널리 널리 베풀어 중생들을 구제하는 각자들이 많이 나기를 원한다.
모두들 부디 성불하기를….
- 학바위에서 바라본 상왕봉, 운문암, 사자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