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EYE FOR AN EYE, A TOOTH FOR A TOOTH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출애굽기 21:24-25, 마태복음 5:38)
복수는 인간의 존엄성을 일깨우고 스트레스 해소에 좋다. 복수는 인간의 본능이다. 본능을 억제하려고 하니까 힘들고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AN EYE FOR AN EYE, A TOOTH FOR A TOOTH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아름다운 문구는 성경에서 나온 것이다.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
짐승을 쳐 죽인 자는 짐승으로 짐승을 갚을 것이며
사람이 만일 그 이웃을 상하였으면 그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파상은 파상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손상을 입힌 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
짐승을 죽인 자는 그것을 물어줄 것이요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일지니
외국인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이 할 것은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레위기 24장 17~23>
그 어느 누구도 나를 지켜주지 않았다. 난 알고 있다. 법은 129억 광년의 거리만큼이나 떨어진 별, "에렌델"처럼 멀다. 내 편도 아니다. 가장 현명한 건 원래대로 돌려주는 것이다. 무혐의는 절대 무죄가 아니다. 법의 인플레이션은 상상을 넘어서고 초등학생들도 아는 상식과 공정은 이미 아틀란티스 대륙과 함께 사라졌다. 모든 것은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처럼 작은 운을 쫒다 다 잃어버린 운수사나운 내 몫이다.
아침이 오면 경찰서에 고소를 하러 간다고 밤새 벼르다 벌건눈으로 새벽에 잠이 든다. 수면제 양이 자꾸 늘어나서 통제가 불가능해졌다. 낮에 일어나면 늦어서 다시 내일 가야겠다고 결심한다. 천지간에 흑암이 깔리면 난 지킬에서 하이드로 바뀐다. 모래톱에 앉아 밤을 지새운다. 3년이 넘었다. 마취제 없이 다리를 절단당하는 고통의 밤들은 계속되고 건강도 돈도 다 잃었다. 어둠 속 실타래처럼 엉킨 삶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이다.
암흑과 혼돈의 일상이다. 미국 서부의 사막지대인 '데스밸리(Death Valley)'에서 천년에 한번 오는 역대급 폭풍을 만난 선인장처럼 삶이 실추되었다. 질척이는 삶이 싫다. 날마다 내가 돌파하고 싶었던 어둠의 정체는 무엇이었던가? 너무나 오래 시간을 난파선에 있었다. 술의 지게미까지 들이마셨다. 차라리 독미나리즙이길!
복수법은 고려시대에 실존했던 법으로 말 그대로 복수를 허용하는 법이다. 고려 제5대 왕인 경종이 호족들의 처지를 동정해서 제정했다. 내겐 스승님이나 제자, 친구를 찾는 프로그램처럼 꼭 필요한 그리운 법이다. 광종이 죽고 아들인 경종은 아버지의 업적 때문에 호족들의 불만을 해소시켜주어야 했다. 복수법을 실행했지만 복수의 허용범위가 불분명해서 이유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한국역사상 가장 엉성한 법체제였다. 이유 없이 죽이고 "복수"라고 하면 용서가 되는 시대였다. 안타깝게 1년 만에 폐지되었다.
"함무라비 법"은 복수의 선을 명확하게 그어주는 위대한 척도이다. 가장 큰 용서는 복수해서 가르쳐주는 것이다. 복수는 내가 행복해짐이기도 하지만 상대방이 나만큼 불행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솟아나는 게 진국이다. 내가 당한 거 똑같이 돌려주고 싶다. 복수는 마이너스를 0으로 돌려주는 자연의 경이로운 수학 공식이다. 복수를 공허하다거나 생산적인 행동이 아니라고 반박하는 나의 엄마, 아빠는 반성해야 한다. 나만큼 불행하지도 않았고 살만하니까 할 수 있는 말이다.
용서는 절대로 최고의 복수가 아니다. 복수가 인생의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힘이 없고 약한 자들 뿐이다. 권력의 정점에 서서 용서를 한다고 하면 박수를 쳐주겠지! 함무라비 법전은 복수를 권유하는 게 아니라 점점 더 커지고 강해지는 복수를 제한하려는 것이다. 범위를 제한해서 복수의 굴레를 멈추게 하는 브레이크 역할을 하는 최초의 성문법이다. 지나친 복수는 세상을 망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복수보다 더 악한 것은 솜방망이 처벌이다. 이것은 사회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복수나 화를 원동력으로 바꾼다면 어떨까? 넘치는 힘으로 상대방을 비웃을 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를 꺼내서 거대한 태권브이나 괴물로 만들 수 있다면.. 정의나 신이 개입되지 않는 세상에서 힘을 가져야 한다. 용서를 안 했더니 오만불손의 괴물을 낳고 감사함을 전혀 모르는 악마들로 넘친다.
용서를 한다고 해서 괴물들의 인성이 바뀌는 건 아니다. 용서라는 말은 내가 무너져 내리는 걸 막고 싶은 최후의 보호막일 뿐이다. 복수보다 나은길이 있다면 난 그 길을 갈 것이다. 더 나은 존재로 환원하고 싶다. 복수의 달달함, 인생을 다 태워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은 복수라면 난 영혼이 아니라 피의 육신까지 기꺼이 팔겠다.
은혜는 잊어도 원수는 잊으면 안 된다. 더욱더 강해지는 복수의 칼날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복수는 양날의 검이다. 양쪽 다 필요하다. 복수는 모르핀보다 100배 헤로인보다 50배 이상 강한 펜타닐(영어: fentanyl 또는 fentanil, 오피오이드계의 강력한 마약성 진통제) 보다 효과가 좋다. 명예를 더럽힌 자는 꼭 반성하게 해야 한다. 가장 쉽고도 어려운 길이 용서와 관용 그리고 사과이다. 무의식적인 반감과 열등의식 위선의 사과만을 조장하는 현실의 삶이 서글프다. 가짜 사과를 받고 좋아하는 이는 조롱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백설공주가 먹은 사과는 독일뿐이다. 목에 걸린 사과를 토하자 생명이 돌아왔다. 거짓사과를 진짜 사과로 알면 독이 되는 것이다.
결정과 초월, 난 어느 다리를 건널 것인가? 진정한 복수는 상대를 죽이기보다 지옥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때론 용서는 힘없는 자의 자기 합리화일지도 모른다. 복수를 할 수 있다면 해라. 자책감과 자괴감이 들지 않는 복수는 하늘이 준 경우뿐이었다. 문제는 내복수의 끝을 하늘이 이루어 주더라도 결과는 허망함일 뿐이다.
내 인생이 잘 풀리고 잘살면 잊힐까? 아니더라. 용서는 영원히 안녕! 난 예수도 부처도 아니다. 현실의 법은 언제나 가해자 편이었다. 당한 걸 용서하라는 말은 다시 당하라는 말과 같다. 한 대 맞으면 한 대 때리고 더 이상 못 때리게 해야 한다. 정의는 사라진 고생대 멸종생물이거나 보이지 않는 거짓 손이다.
무조건 적인 용서는 사회악이다. 프랑스혁명도 피에서 피어난 꽃이다. 기억하라! 호구는 그냥 호구이다. 복수의 값은 반드시 받아라. 사회적인 동물임을 버리고 산으로 가던지 아님 확실하게 복수해야 한다. 안 그러면 증오만 키우게 된다. 신도 피를 원한다. 피의 제사가 아님 승낙하지 않는다. 고려시대의 복수법이 부활하기를 심으로 원한다. 재판은 멀고 썩은 판새들이 넘쳐난다.
논리, 주먹, 법 세 가지로 후드려 패야한다. 복수, 살인을 허용해야 죽을 짓 안 하고 착하게 산다. 밝은 세상이 분명히 온다. 몸 사리고 친절한 사람들만이 넘치는 아름다운 사회가 올 것이다. 최대한 비열한 방법으로 보복해야 한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복수는 해야 한다. 용서는 바보나 치매나 힘없는 자의 합리화일 뿐이다. 비열하게 최대한 칼을 잘 갈아야 한다.
전기톱으로 악마를 자를 생각을 하면 짜릿하다. 누군가에게 만만하게 보이는 거보다 난폭하게 보이는 게 낫다. 작금의 거지 같은 사법 체계를 보면 개인적인 복수가 훨씬 더 정당하다. 복수는 본능이다. 소말리아 해적들은 타협하는 자를 건드린다. 죽여버리면 절대로 안 건드리지!
나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용서했다고 만족하는 자아는 방구석에 두고 물 부어 키우는 콩나물이다. 같은 물로 쑥쑥 자라는 악의 싹일 뿐이다. 간디는 말했다. "눈에는 눈을 고집한다면 온 세상의 눈이 멀게 될 것입니다."라고! 그러나 만약 당신의 딸이 소아성애자인 간디에게 끔찍한 희생양이 되었다면 당신은 간디를 용서할 수 있을 것인가? 화합은 없다. 재범만 낳을 뿐이다.
완전범죄를 저지르고 싶다. 마치 신이 한 것처럼 각본에 맞아떨어지는 삼류드라마를 쓰고 싶다. 나도 알고 있다. 복수는 에너지를 필요로 해서 나를 지치고 힘들게 한다. 영웅 알렉산더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복수를 하기 위해 페르시아를 쳐들어간다. 도시를 불태우고 복수의 근원을 원천차단한다. 왕족들을 다 죽여버렸다. 더 이상의 복수는 없었다. 정말봉쇄했다.
용서보다 복수보다 더 중요한 것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곧 치매가 오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겠지! 복수의 달달함은 가장 슬픈 "치매"를 통해 이룩될 것이다. 하루는 길고 긴 지옥에서의 시간이지만 한 해는 항암치료받는 환자의 머리카락처럼 뭉텅뭉텅 빠진다. 이제 마지막 희망을 "알츠하이머"라는 허망한 병, "노망"에 기대 본다.
그리고 스위스행 비행기 일등석을 타고 존엄사를 택하러 가는 길, 삶에서 모든 것을 얻었으나 난 모든 것을 잃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공부가 되는 새벽, 진정한 학문이란 삶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
첫댓글 온이가 쓰는 글은 모두가 새로운 멋을 느끼게 하는 글.
천재의 소질이 넘쳐나는 글. 많은 분들이 읽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