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갑작스런 붕괴에 놀랐던 기억을 쉽게 잊는다 |
묵상과 성찰 그림 | 조지 프레더릭 와츠, <희망>, 1886 희망 - 하워드 진 나의 희망은 지금 보이는 세계의 모습 때문에 우리가 너무 좌절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 우리는 보통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이 앞으로도 계속 되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 제도의 갑작스런 붕괴에 놀랐던 기억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사람들의 생각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독재자에 대해 예상치 못했던 큰 저항이 일어나고, 무적의 권력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이 사실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어려울 때 희망을 갖는 것은 어리석은 낭만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가 잔인함의 역사만이 아니라 열정과 희생, 용기와 관용의 역사라는 사실을 믿는 태도입니다. 만약 우리가 언제 어디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잊지 않는다면, 그리고 사람들이 훌륭하게 처신해 온 경우가 아주 많았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행동할 힘을 얻을 것입니다. 희망은 변화를 위한 에너지입니다. 미래는 현재의 무한한 연속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최악의 상황과 싸우면서 인간으로서 올바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놀라운 승리인 것입니다. |
하늘뜻 보아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 지난 일은 기억에서 사라져 생각나지도 아니하리라. 내가 창조하는 것을 영원히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이사야 65:17-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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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 소통 그리운 얼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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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신랑이 오실지 모르니… -김명인 <내부자들>, 어제 매우 잘 봤다. <암살>, <베테랑>에 이어 2015년 한국영화 '응징시리즈'의 명실상부한 완결판이다. 하지만 이 세편의 일련의 응징시리즈를 보면서 이제 한국사회는 이같은 '가상응징'으로밖에는 악을 다스릴 방법이 없는 나라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든다. 이러한 대리만족이란 마치 목마른 선원이 마침내 마시는 바닷물처럼 마시면 마실수록 더 목마른 일종의 '희망고문'과 같은 것이다. 꼭 근대소설은 본질적으로 아이러니라는 루카치적 관점에 의하지 않더라도 이런 영화들의 낙관적 결말(응징의 성공)은 사실은 더 절망적인 것이다. 가능과 불가능의 팽팽한 긴장, 혹은 비록 여행은 끝났지만 길은 시작되고 있음을 아는 데서 오는 반어적 희망 앞에서는 절망은 깃들일 여지가 없지만, 이처럼 현실 속에서는 불가능한 가상의 실현은 그 뒤에 닥쳐올 더 큰 절망감과 목마름 앞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러한 낙관적 결말류들이 지닌 미학적 허점이며, 그 때문에 그런 것들을 통속물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가상응징물들의 반복된 등장이 '일시적 쾌감과 궁극적 허무'의 나쁜 연쇄만을 낳는다고 하고 싶지는 않다. 이러한 통속물들이 지닌 명쾌한 선악구도와 권선징악적 결말의 반복은 결코 그렇지 못한 현실과의 낙차를 끝없이 환기시켜 대중들의 감각을 예각화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중들의 혁명적 의식이 언제 어떻게 상승하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선행연구와 견해들이 있어서, 누구는 하강기에 누구는 상승기에 누구는 상승기의 소하강국면에 가장 첨예하고 혁명적이게 된다고 하곤 하지만, 각 혁명사마다 천양지차라서 일반화하거나 법칙화하기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처럼 '언제 신랑이 오실지 모르니 늘 등불을 켜 놓아야' 하는 것이 답일 것이다. 올해 들어 이렇게 응징물들이 연속해서 등장하는 것 역시 하나의 징후임에는 틀림 없다. 비록 당분간 그것이 희망고문으로만 끝난다고 해도. |
영재를 망치는 사회 -장주원 영재가 특출난 재능이라면 천재는 특출난 업적이다. 예를 들어 남들이 스무 살에 겨우 하는 걸 여덟 살에 해냈다는 건 물론 대단한 일이지만, 개인의 경사일 뿐, 사회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남들이 몇살에도 못하는 걸 몇살에든 해낸 경우에만 천재라 불릴 수 있으며, 일종의 공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런 점에서 송유근은 영재임은 분명하지만 아직 천재로 불릴만한 결과물을 보이지는 못했는데, 이대로는 영영 그러지 못할 가능성도 높아보인다. 본인과 가족의 조급증과 대중의 질시어린 호기심이 결합할 때 대한민국의 수많은 영재들을 범재로 주저앉힌 파멸의 공식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어차피 한명의 천재가 영감을 받아 휘갈긴 이론으로 경천동지가 일어나는 시대가 더 이상 아니기에, 과학자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역할의 한계 또한 명확하다. 낭만화된 천재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단지 남들보다 몇년 빨리 박사가 되었을 뿐인 아이에게 쏟아지는 이 지속적으로 과도한 관심이 한 영특한 아이의 인생을 망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빈다. |
한국 사회 자체가 대량살상무기다 -이대근 ……흑인교회 난사 사건까지 겹친 지난 9월 총기구매 신청이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사회 안전보다 나의 안전이라는 개인적 합리성을 추구하고 이는 다시 더 많은 총기 사고라는 집단적 비합리성을 낳는 사회, 이게 미국이다. 한국인은 이런 미국인을 비웃을 자격이 없다. 한국도 미국만큼 특별한 데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각자도생으로 이미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는데도 “험한 세상을 살려면 독해져야 한다”며 더 강한 이기심과 치열한 경쟁심을 서로 부추기며 모두를 힘든 삶으로 몰아간다. 물론 미국과 다른 점이 있다. 미국인은 남을 죽이지만, 한국인은 자기를 죽인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미국인 총기사망자는 1만2563명, 한국인 자살자는 1만3836명이었다. 한국인에게는 총이 없지만, 한국 사회 자체가 대량살상무기다. [더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