廵四山回路賦一絶
退軒 全克泰
白岳山高勢欲摧
東西環拱國都開
微官不是閑無事
每向松間盡日廻
사산 순시로를 순찰한 부(賦) 일절
퇴헌 전극태
백악산 높은 기세가 무너질 듯하고
동서로 둘러싸인 곳에 서울이 열렸다.
관리(微官)는 일없이 한가한 것이 아니라
매번 솔밭에서 온종일 순회하여야 한다.
[국역] 전과웅
[출처] 퇴헌유고
● 사산 [ 四山 ]
조선 시대 도성(都城)을 에워싸고 있는 동서남북의 산을 합칭한 것. 즉 북쪽의 백악산(白岳山)•남쪽의 목멱산(木覓山)•서쪽의 인왕산(仁王山)•동쪽의 타락산(駝駱山)을 이르는 말로, 태조 4년(1395) 정도전(鄭道傳)이 도성을 쌓기 위해 이 사산에 올라 성기(城基)를 실측한 데서 연유한 말. 문종 원년(1451)에는 사산의 지맥(地脈)을 보전하기 위하여 성 안의 사산뿐만 아니라 성 밖의 산마루까지도 비록 국용(國用)이라 하더라도 벌석(伐石)하는 것을 금하였음.
[네이버 지식백과] 사산 [四山]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사산감역관 [ 四山監役官 ]
조선 시대 한성부(漢城府) 주위에 있는 산의 성첩(城堞)•수목(樹木) 등을 보호하는 일을 담당하던 군직(軍職). 원래 정원이 4인으로 음관(蔭官) 초사직(初仕職)이었으나, 영조 30년(1754)에 사산참군(四山參軍)으로 개칭하고 무관(武官)을 임명하였고, 그 후 훈련도감(訓鍊都監)•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총융청(摠戎廳)에 각각 소속시켰음.
[유사어] 사산재식감역관(四山栽植監役官).
[네이버 지식백과] 사산감역관 [四山監役官]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감역관은 무관직으로 병조(兵曹)에서 글을 읽은 선비 중에서 세 사람의 후보자를 추천하여 임금에게 낙점(落點)을 받아 임명하였다. 비록 음직(蔭職)이었으나, 글을 읽은 선비들이 등용되었기 때문에 이후 "지위가 재신(宰相)의 반열에 오른 자가 많았으며, '남행(南行) 조선 시대 과거를 거치지 않은 문음자제나 은일지사를 관직에 임명하던 제도(蔭職).
청직(淸職) 학식과 문벌이 높은 사람이 맡는 관직.'이라고," 했다는 기록을 통해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자리를 얻기란 대단히 어려웠다. "사산감역은 박강을 건너지 않는다(四山監役 不渡薄江)"는 말까지 있었을 정도며, 특히 감역을 지낸 이는 선조 26년에서 숙종 11년까지 93년 동안 207명이었으나, 영남인은 김염조(金念祖), 1637년 전극념(全克恬), 신영(申穎)과 1685년 전극태(全克泰) 전극태(全克泰)까지 모두 4명에 불과했다.
출처:
[정광순,「朝鮮時代 漢城府 四山監役官의 職務에 관한 硏究」,
제2회 서울역사문화포럼 자료, 2008.]
● 퇴헌 전극태는 옥천 전씨로서 창주 선생과는 같은 항렬이다.
옥천 전씨의 문중에서 창주선생과 전극태 두 분이 감역관으로 임금의 낙점을 받은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필자는 임금이 옥천 전씨 문중에 은전을 베푼 것은 사서의 큰아들 극항, 막내아들 극연 두 아들이 병자호란으로 잃은 데 대한 은전을 베푼 것으로 본다.
출처:
[김상호, 「병자호란의 아픔을 지고 살아간 전극념(全克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