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부산아동문학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문홍
역사와 현실의 은유를 통한 낙관적 희망
- 허우 샤오시엔의〈비정성시〉와〈동년왕사〉
김 문 홍
상업주의와 예술주의 영화
소수의 영화 메니아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우리 영화 관객들은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할리우드로 대변되는 미국의 상업주의 영화에 길들여져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정공법의 ‘웰 메이드’ 드라마트루기에 입각한 영화의 서사구조와 짧은 쇼트에 의한 박진감 있는 화면 전개, 소박한 권선징악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인간의 보편적 삶에 대한 접근으로서의 소재주의가 여태까지의 영화 문법으로 자리 잡아 왔다.
이러한 할리우드 영화의 형식적 내용적 특성에 이미 중독이 되어 버린 우리 관객들인지라 서구 유럽과 제3세계의 예술적이고 난해한 영화문법에 대해서는 거의 본능적인 기피 현상을 보이고 있다. 가장 민감한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상황 중심의 ‘장시간 화면’(롱 테이크)의 영상 기법과 느슨하고 단순한 줄거리 체계의 서사구조, 그리고 인간의 근원적 탐구라는 난해한 주제의식에 대헤서이다.
그 단적인 예를 국내 제작의 영화에다 국한시켜 보아도 그러한 거부 반응은 확연하게 드러난다. 1990년대 초 중반에 상영된 작품 중에서 10만 명 이상의 관객 동원을 기록한 강우석 감독의〈투캅스〉(1993)와〈마누라 죽이기〉(1994), 여균동의〈세상 밖으로〉(1994), 장선우의〈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 등의 작품이 그러한 관객의 성향 분석의 중요한 텍스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곳’의 우리의 현실을 풍자적이고 냉소적인 시각으로 해부하여 권위주의적이고 억압적인 현실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대리 만족의 카타르시스, 감각적인 대사에 걸맞는 박진감 있는 화면 전개와 여성의 성의 상품화에서 오는 눈요기 감으로서의 에로티시즘 등이 각 텍스트의 관객 동원의 성공 비결일 것이다. 아마 대다수의 관객들은 장선우의〈너에게 나를 보낸다〉에서는 표층구조로서의 에로티시즘만 즐기고 있었지,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장선우의 대사회적 발언으로서의 감추어진 의미 층위는 간과하고 말았을 것이다.
김홍준 감독의〈장밋빛 인생〉(1994)은 아마 인공적인 세트 촬영에서 오는 패쇄적인 느낌과 80년대 정치 사회적 현실의 은유적 반영에서 오는 무거운 주제의식 등이 저조한 관객 동원의 실패 요인으로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배창호의〈황진이〉(1986)와〈꿈〉(1990), 그리고 최근에 개봉한 이명세의〈남자는 괴로워〉(1995) 등이 관객 동원에 실패한 것은 앞의 두 작품에서 보이는 ‘장시간 화면’의 완만한 화면 전개와 이야기보다는 상황 중심의 서사적 구조, 그리고 현실에 그 바탕을 두지 않는 시적이고 환상적인 메시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임권택 감독의 경우만 보아도〈서편제〉(1993)는 그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관객 동원을 이룩했지만, 그 이후의〈태백산맥〉(1994)은 그 궤를 벗어났는데 이는 연대기적인 서사구조로서의 지루함과 무거운 주제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대다수의 우리 영화 관객들은 그동안 할리우드 상업주의 영화 문법에 길들여져 왔기 때문에 유럽의 예술주의 영화와 아시아를 비롯한 제3세계 영화권의 대사회적 발언으로서의 정치적인 영화들에 대핵서는 생래적인 기피 현상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할리우드 영화와 홍콩느와르 영화가 주종을 이루던 우리의 영화 시장도 80년대 후반부터 유럽의 예술주의 영화들에 대해서는 그 문을 넓혀 오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예술주의 영화만을 상영하는 전문 영화관의 증가와 대학의 영화 동아리를 통한 명화들의 대내 상영의 활기찬 기운 조성, 그리고 영화 메니아들을 위한 영화 단체들이 늘어나면서부터 예술주의 영화들이 점점 그 시장을 넓혀가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부산만 해도 카톨릭 센터의《수요 영화 감상회》와 시네마테크 부산의 예술주의와 작가주의 영화제 등의 개최로, 세계영화사 100년 동안 우리들이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었던 화제작과 문제작들이 속속 선을 보이고 있어 헐리웃 상업주의 영화에 잠식되어 가던 우리의 영혼과 문화의식이 회복세를 보이며 제 자리를 잡아가고 있어 우리 영화문화의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가능하게 해 주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를 비롯한 제3세계 영화들은 좀처럼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어 일말의 아쉬움을 던져 주고 있다. 지금 중국과 대만의 영화들은 세계의 주요 영화제에서 입상하여 아시아 영화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불식시킴은 물론 그 영화적 저력을 확인시켜 주고 있어 우리 영화계의 귀감이 되고 있다. 대만 뉴웨이브 영화와 중국 제5세대 영화들은 그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뉴 시네마 영화운동과 허우 샤오시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대만 영화계는 많은 해외유학파 감독들을 중심으로 뉴 시네마 운동을 벌여 나가기 시작했다. 뉴 시네마 작가들은 이념과 정책 선전 영화, 그리고 값싼 센티멘탈리즘 영화에서 탈피하여 그들이 살고 있는 대만의 정체성을 찾아 나가기 시작했다. 가장 시급한 것은 할리우드의 영화구조와 문법을 파기하는 일이었는데, 그들은 헐리웃 특유의 서사구조와 스타 시스템을 거부하고 그들만의 표현 미학을 확립해 나갔는데, 롱 쇼트에 의한 화면의 공간적 깊이와 확대의 장시간 화면, 과감한 생략과 신인 연기자의 기용에 의한 연기의 사실성 등이 뉴 시네마 영화들의 형식적 특성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러한 대만 뉴 시네마 영화운동의 선두 주자가〈비정성시(非情城市)〉라는 작품으로 세계적 영화작가로 인정받은 허우 샤오시엔(候 孝賢)이다. 대만 현대영화의 대표적 작가인 허우 샤오시엔은 1947년 꽝뚱성 매현에서 태어나 1948년 대만으로 이주해 온 외성인으로 영화계 대뷔작은 1980년에 발표한〈귀여운 여인〉이다. 그는 해외 유학파는 아니지만 1969년에 3년제 학교인 국립 예술전문학교의 연극 영화과에서 본격적인 영화공부를 하고 리싱(李行) 감독의 조감독 생활을 하면서 여러 편의 각본을 집필하는 등 현장에서 영화적 감각을 익혔다. 그가 각본을 쓴〈안녕 타이페이(早 安臺北)〉는 리싱 감독의 작품으로 금마장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여 그의 대본 집필 능력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허우 샤오시엔은 1989년의〈비정성시〉까지 10편의 작품을 연출하였는데, 그 중에서 1984년에 낭트영화제에서 대상을 차지한〈펭퀘이에서 온 소년들〉과〈동동의 여름방학(冬冬的假期)〉(1984), 〈사랑할 때와 죽을 때(童年往事)〉(1985), 〈바람 속의 먼지(戀戀風塵)〉(1987) 등의 네 작품은 그의 유년기에서 청년기까지의 만남과 이별, 삶과 죽음 사이에서의 통과제의 같은 자전적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적으로 그의 작가적 역량을 인정받은 작품은〈펭퀘이에서 온 소년들〉외에 베를린영화제에서의 국제영화비평가상 수상의〈사랑할 때와 죽을 때〉, 그리고 1989년 베니스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비정성시〉등으로, 이러한 작품들은 그 자신의 독특한 영화미학과 작가적 역량의 인정뿐만 아니라 대만의 뉴 시네마 영화운동의 국제적 인정과 대만 영화계의 뉴 웨이브 영화운동의 확인이기도 했다.
그의 영화미학의 특성 중의 하나인 롱 쇼트에 의한 장시간 촬영(롱 테이크 long take) 기법의 공간적 영역 확대와 깊이, 그러한 프레임 안에 놓인 인간들 간의 상호관계에서 오는 의미의 신화, 인간과 자연의 합일에서 비롯되는 감정이입, 신인 배우의 기용으로 인한 사실적인 연기 등의 표현미학은〈펭퀘이에서 온 소년들〉을 시발로 하여〈동동의 여름방학〉과〈사랑할 때와 죽을 때〉에서 무르익었다가〈비정성시〉에 이르러서는 완숙의 경지에 도달했다. 이러한 그의 표현미학과 대만의 정체성 추구, 사실적 연기, 대 정치사회적인 현실 발언은 그의 영화미학인 동시에 대만 뉴 시네마의 본질적 명제이기도 하다. 그의 영화 표현미학 특성 중의 하나인 롱 쇼트에 의한 장시간 촬영의 기법은〈사랑할 때와 죽을 때〉에서 본질적으로 드러나는데, 〈사랑할 때와 죽을 때〉는 자전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으로 한 편의 동양화-그 중에서도 담백한 수묵화-를 보는 듯한 시적인 분위기를 풍기면서 이별과 만남, 그리고 삶과 죽음의 잔잔한 일상사를 자연물에 대한 감정이입으로 그려 나가고 있다.〈비정성시〉는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51 년간의 통치에서 해방된 뒤부터 1949년 국민당 정부가 대북에 수도를 정하기까지의 대만의 격동적 현대사를 배경으로 임가라는 한 가족의 붕괴를 그리고 있는 작품으로, 정치사회적인 현실 발언의 메시지가 강한 작품으로 우리의 아픈 현대사를 보는 듯한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그러나 롱 쇼트에 의한 장시간 촬영의 기법과 현실음(자연물과 일상적 현실)과 원경의 풍경 묘사에 의한 장면 전환 등의 표현 미학은 동일선 상에 놓여 있다.
이러한 표현 미학은 세계 제2차 대전 후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신사실주의(네오 리얼리즘)의 화면 설정과 무척 닮아 있다. 짧은 쇼트의 연결에서 오는 이미지의 단절보다는 한 프레임 속에 여러 대상을 기하학적인 원근감으로 배치하여 놓고, 각 대상들 상호간의 관계 속에서 영상 이미지의 의미 공간을 확대해 나가는 네오리얼리즘의 기법처럼, 그 역시 한 프레임을 장시간 설정해 놓고 각 인물들이 그 프레임 안팎을 드나드는 연기를 해 보이고 있으며, 인물들이 화면에서 사라진 뒤에도 동일 화면을 지속시킴으로써 그, 장면의 여운을 통한 의미와 이미지의 연상 작용에 따른 감정의 농축, 그리고 그 장면과 다음 장면과의 자연스러운 연결을 통한 이미지의 지속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가족사의 浮沈을 통한 역사적 은유 :〈비정성시〉
〈비정성시〉는 1989년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한 작품으로 대만 영화의 저력을 확인시켜 주고, 아울러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적 역량을 널린 알린 바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45년 일제의 통치에서 해방되어 1949년 국민당 정부가 대북에 수도를 정하기까지의 격동적인 대만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임가라는 한 가족의 굴절과 부침을 그린 영화이다. 임가의 네 아들 중 장남인 문웅과 넷째인 문청을 중심으로 외성인(45년부터 49년 사이에 본토에서 대만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과 본성인(45년 이전에 이주해 온 사람들)의 갈등, 국민당 정부와 반정부 세력 간의 갈등과 투쟁, 고향(본토)에 대한 원초적 향수, 대륙인과 일본인에게 핍박받는 대만인의 비분과 슬픔, 대륙인과 대만인 간의 싸움인 2 8 사건, 사회의 혼란과 격변 속에서의 조국에 대한 사랑 등을 작가의 개입이 없는 객관적 카메라의 시각으로 롱 쇼트에 의한 장시간 화면의 독특한 표현 기법으로 그려 나가고 있는 것이 이 작품의 특징이다.
임가 가족의 인물 설정부터 다분히 상징적이다. 아버지는 일제의 통치 시기에 폭력이라는 힘의 수단으로 저항하지만 같은 민족인 이웃 사람들에게는 너그럽게 대해 온 인물이다. 그의 지금의 생활신조는 부정에 대한 거의 본능적인 혐오와 의리를 중시하는 것이다. 가족사의 부침에도 의연하게 버티어 나가며 가족이라는 혈연 공동체를 이끌어 나가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아버지는 역사의 격랑 속에서도 의연하게 삶을 지탱해 온 대륙인의 기질을 상징하고 있다. 그의 장남인 문웅 역시 혈연에 대한 끈끈한 애정으로 가족 공동체의 신산스런 삶을 아우르며 부정에 대한 혐오와 의리를 행동의 가치 척도로 여기고 있는데, 본토에서 이주해 온 외성인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상징하고 있는 인물이다.
행방물명이 된 둘째와 광인(狂人)의 삶을 살고 있는 셋째, 그리고 말을 하지도 듣지도 못한 채 사진관을 경영하고 있는 넷째 문청(양조위 분)의 인물 설정은 대만의 격동적 현대사를 상징하는 인물들로 상징되어 있다. 의사의 본분도 포기한 채 행방불명이 되어 버린 둘째로 상징되는 정치적 미궁 속에 갇혀 있는 대만인의 정체성, 광기의 삶을 살고 있는 셋째 문량으로 대변되는 역사와 정치의 폭력성과 그 속에서의 민중의 신산스러운 삶의 고뇌, 그리고 벙어리인 넷째 문청으로 상징되는 역사 앞에서의 침묵의 강요라는 정치 권력의 폭력성과 그러한 폭력 앞에서도 온전한 발언을 행사하지 못하는 민중의 핍박받는 삶이라는 이중적 의미 층위를 상징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문청의 직업은 사진사이다. 사진의 기본적 속성은 기록이다. 문청은 그러한 핍박의 삶을 살면서도 역사와 정치사회적인 격동의 모습을 진실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심층적 의미를 지닌다.
이 작품의 기록으로서의 연대기적 성격은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액자의 틀처럼 규정해 주고 있다. 타이틀백이 나오기 전의 화면은 어둠이다. 이 어둠은 일제의 통치를 의미한다. 어둠 속에서 일본 천황의 떨리는 음성의 항복 방송이 나온다. 항복 방송이 어둠에 완전히 스며들 무렵 임가의 장남인 문웅이 촛불을 켠다. 희미한 촛불의 실루엣 속에서 천황의 목소리와 문웅 아내의 출산의 고통에서 오는 비명소리가 함께 들려오기 시작하는데, 역사의 현장에서 퇴진하는 쇠잔한 지배자와 출산으로 대변되는 해방의 환희와 함께 약동하는 생명력으로서의 대만인들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어 전기가 들어오고 아기의 힘찬 울음소리가 화면을 압도하기 시작한다. 51년 간의 일본 통치가 끝나고 해방되었다는 자막이 나오고, 이어 원경의 풍경으로 전환되면서 타이틀백이 화면을 채우기 시작한다. 마지막 장면 역시 첫 장면과 마찬가지로 임문웅의 집이다. 롱 쇼트의 장시간 화면 속에 배치된 인물의 배치가 다분히 일상적인 풍경을 나타내고 있다. 편지를 읽고 있는 아설, 서로 모여 앉아 도박(마작)을 하고 있는 자식들과 이를 꾸짖고 있는 문웅의 어머니, 아버지와 침묵 속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문량, 화면의 오른쪽 위에서는 켜놓은 전등의 불빛이 명멸하고 있다. 이 명멸하는 불빛은 격랑의 역사 속에서 부침하는 가족사를 상징하고 있다. 화면에는 ‘1949년 12월, 대륙은 공산화되고, 국민당 정부는 대만으로 철수하고 임시 수도를 대북으로 정했다.’라는 자막이 떠오르며 엔딩 크레딧이 떠오른다. 이 작품은 158분이라는 현실의 시간(러닝 타임)으로 5년 간이라는 격동의 대만 현대사의 연대기적 시간을 아우르고 있다.
이 작품의 몇 가지 특징적인 표현 기법을 살펴보면 허우 샤오시엔의 인간에 대한 관점이 발견되는데, 그 첫 번째가 롱 쇼트에 의한 장시간 화면의 촬영 기법이다. 2시간 38분이라는 적지 않은 분량의 러닝 타임(상영시간)인데도 거기에 소요되는 쇼트 수는 대략 30여 개뿐이다. 할리우드 영화의 문법에 비추어 본다면 무척 지리할 듯 느껴지지만, 한 가족사의 5년 간에 걸친 역사 속에서의 부침이라는 서사 구조는 전혀 그러한 느낌을 주지 않은 채 전개되고 있다. 장시간 화면인데도 지리한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 이유는 하나의 프레임 속에 배치된 각 인물들의 사실적인 연기에서 오는 일상성과 인물들의 상호관계에서 비쳐지는 의미 층위의 지속적인 연상 작용, 그리고 장면 전환의 사이마다 끼어드는 롱 쇼트로 잡은 풍경들이라는 연결고리의 기능 때문일 것이다.
롱 쇼트에 의한 장시간 화면의 예를 든다면 감방에 갇혀 있는 문청의 장면으로, 풀려 나가는 문청이 감방 복도를 걸어가는 대목에서는 그의 모습이 화면에서 사라지고도 텅 빈 복도의 그 화면은 한동안 지속된다. 관객들은 이러한 감방 복도의 장시간 화면을 통해 문청의 그 동안의 구속적인 삶에 대한 반추와 그러한 반추를 통한 연민의 감정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하다. 장시간 화면의 밖에서는 다음 장면의 공간과 상황을 예고하기라도 하듯 문웅을 위시한 가족들의 일상적인 소리가 화면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그 단적인 예는 감방 장면 바로 앞 장면의 쇼트로서 장면 전환의 여백 채우기와 연결고리의 이중적 기능을 담당하는 교도소 밖의 원경이다. 교도소 밖의 전등불 화면이 한동안 지속되다가 갑자기 화면 밖에서 육중한 구두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할리우드적인 영화문법에 따른다면 이곳에서 쇼트가 바뀌게 되지만 허우 샤오시엔은 이러한 상업주의적이고 즉물적인 관점을 거부하고 동양 산수화의 여백과 같은 의미 공간을 설정하고 있다. 화면 밖에서 들려오는 구두 발자국 소리를 통해 관객들은 다음 장면의 상황에 대한 예측과 기대감을 가지게 되고, 또한 그러한 예측과 연상을 통해 장면 전환을 지연스럽게 처리하고 있다.
롱 쇼트에 의한 장시간 화면은 짧은 쇼트의 전환에 따른 이미지의 단절보다는 화면이라는 공간에 깊이를 부여하여 의미의 확대를 시도한다. 고정된 프레임 속으로 드나드는 인물들의 움직임을 통해 우리는 그 인물의 행동 연장선상에서 다음 상황을 예측하고, 화면 속으로 들어오는 인물의 움직임을 통해 역시 그 이전의 인물의 행동과 상황을 예측하는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의 두 번째 특징은 자막 사용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의 극대화와 이를 통한 인간 내면에 대한 관찰이다. 자막 사용은 문청과 그의 연인인 관미와의 상호 관계 속에서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호 의사소통은 말을 듣거나 하지 못하는 문청의 신체 조건의 기능 회복이라는 물리적인 의미와 문청의 내면을 관찰한다는 심리적인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대표적인 예가 문청의 집에서의 관미의 오빠인 관영과 그의 친구들이 슬판을 벌이는 장면이다. 그들은 정부의 정책과 사회 문제를 비판한다. 뇌물을 받고 마약의 밀반입을 묵인해 주는 부패 관리, 쌀의 부족, 지식인들의 실업 문제, 진의의 잘못된 정치를 질타한다. 그들의 옆에서 관미와 문청은 독일 민요인 ‘로렐라이’를 들으며 앉아 있다. 관미가 문청에게 그 민요에 얽힌 전설을 들려주는 대목에서 자막이 사용된다.
문청이 관미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을 들려주는 대목에서도 역시 자막이 사용되는데, 자막이 끝나고 나면 플래시백으로 경극의 장면과 그 장면을 흉내내는 교실의 어린이들의 모습이 보여진다. 돌아온 문청과 관미의 대화 부분에서 관미가 오빠 관영의 소식 두절을 염려하는 대화 장면, 플래시백이 된 상태에서의 관영과 함께 조국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문청의 간절한 요구와 관미와 문청의 결혼을 요구하는 관영의 대화 등에서 자막이 사용되고 있다.
대화 장면 이외에도 자막이 더러 사용되고 있다. 병원에서 관미와 일본인 정자(스즈꼬)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자막이 사용되는데 두 사람의 플래시백 장면이 바로 그것으로, 붓으로 시를 쓰는 정자의 오빠와 그 곁에서 먹을 가는 관영의 대목에서 자막으로 시의 내용이 소개되는 장면, 감방 동료의 형에게 등생이 죽으면서 들려준 이야기를 전하는 플래시백 화면에서 ‘태어나며 조국을 이별했고 죽어서 조국에 돌아갑니다.’라는 유서 내용이 자막의 사용으로 소개되고 있는 경우이다. 관미와 문청의 상호 관계의 경우에 문청의 대화 내용을 통해 우리는 문청의 심리 상태와 심리 변화의 추이를 확연하게 발견하게 된다. 이처럼 이 영화에서의 자막은 하나의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게 되는데, 이 지막을 통해 우리는 사건이 진전되고 있다는 느낌과 관미와 문청이라는 두 인물의 심리 변화의 추이를 알게 된다. 우리는 숨어 있는 여러 의미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의 또 하나의 특징은 의미 공간 확대의 기능을 담당하는 장면 전환의 기법에 있다. 보통 장면 전환의 표현 기법은 페이드 인과 페이드 아웃, 오버랩과 와이프 등이 있는데, 허우 샤오시엔은 그러한 할리우드의 상업적인 장면 전환의 기법을 거부하고 있다. 그는 장면과 장면 사이에 롱 쇼트에 의한 자연 풍경을 장시간 화면의 기법으로 삽입함으로써 앞 장면에서의 하나의 상황에서 비롯되는 여운의 지속과 다음 장면의 상황을 예고하는 이중적 의미 구조의 틀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예는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타이틀백 다음의 롱 쇼트로 잡은 원경의 자연 풍경, 해방 축하연 장면이 끝나고 나서의 롱 쇼트로 잡은 도시의 야경, 구정 민속놀이의 하나인 폭죽을 터뜨리는 장면, 문웅의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도박하러 가면서 자신을 전봇대에 묶었다는 꿈 이야기 다음의 롱 쇼트의 미명의 픙경 쇼트, 원경의 풍경 쇼트에서 대북에서의 대륙인과 대만인의 싸움인 2 8 사건에 대한 라디오 방송의 자막 장면, 오빠의 소식을 문청으로부터 듣고 훌쩍이는 관미의 다음 장면에서의 일몰의 항구 풍경 쇼트, 홍콩인들에게 칼을 맞고 죽음을 당하는 문웅의 다음 장면에서의 안개가 자욱한 산의 롱 쇼트, 임문웅의 장례식 다음의 멀리 바라보이는 항구 풍경 등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이러한 장면 전환의 롱 쇼트에 의한 장시간 화면에는 인위적인 것을 배제한 현실음이 꼭 끼어들고 있는데, 이것은 그러한 현실음을 통해 다음 장면의 상황에 대한 예고와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효과를 부여하고 있다. 롱 쇼트의 도시 야경과 ‘유망상부곡’의 노래소리 뒤에 멀리서 들리는 천둥소리가 삽입되고 있는데, 이는 발광하여 가족에 의해 병원에 강제 입원되는 문량의 병원 장면에 대한 불안한 상황을 예고하기 위한 의도일 것이다. 자지러지게 우는 문웅의 아기, 미명의 풍경 속으로 스며드는 급박한 타악기 소리에 의한 대북의 2 8 사건의 예고, 교도소 밖의 전등 불빛 쇼트에서의 화면 밖에서 들려오는 아기의 울음소리 등이 바로 그러한 것들로, 이러한 현실음의 삽입으로 다음 장면의 상황에 대한 예고와 기대감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표현 기법은 장면 전환에서 생기는 이미지의 단절을 예방하고, 장면과 장면 사이의 시간적 공백을 완충시키기 위한 의도에서 사용되는 표현적 특성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롱 쇼트에 의한 장시간 화면의 깊이에서 생기는 의미 공간의 확대, 서사 구조 속에서의 다음 장면의 상황 예고와 이미지의 지속을 꾀한 자연스러운 장면 전환의 기법 등의 표현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표현적 특성들은 인간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라는 감독의 인본주의적 비전을 표출하기 위한 주제의식의 근거에서 비롯되고 있다. 허우 샤오시엔은 격동의 대만 현대사 속에서 부침하는 가족사를 통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삶의 의연함을 잃지 않는 대만인들의 역사적 정체성을 탐구하고, 아울러 그 격동의 역사 저 너머에 있는 삶에 대한 낙관적 전망,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바탕으로 한 인본주의를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이 우리에게 공감을 주는 것은 그들의 현대사 속에서의 삶의 질곡과 정치사회적인 상황이 우리의 아픈 현대사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오는 연민의 감정 때문일지도 모른다.
삶과 죽음의 통과제의로서의 일상적 풍경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영화의 영어 재목이〈사랑할 때와 죽을 때(The Time To Love The Time To Die)〉인〈童年往事〉는 허우 샤오시엔의 1985년도 작품으로, 이 영화는 베를린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상을 수상하여 대만의 뉴 시네마 영화 운동의 저력과 그의 영화작가로서의 국제적 명성을 안겨준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펭퀘이에서 온 소년들〉,〈동동의 여름방학〉과 함께 그의 자전적 3부작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주인공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의 삶의 통과제의로서의 성장 과정을 롱 쇼트에 의한 장시간 화면의 독특한 표현 기법으로 그리고 있다. 그의 독특한 표현 기법인 롱 쇼트에 의한 장시간 화면의 형식적 특성은 이 작품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비정성시〉가 역사 속에서의 한 가족사의 부침을 통한 삶의 의연한 자세와 인간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담고 있다면, 이 작품은 한 가족의 잔잔한 일상사 속에서의 가족 관계에서 비롯되는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의 통과제의를 통해서 한 인간이 성숙되어 가는 과정을 시적인 영상으로 담담하게 그려가고 있는 작품으로 대만의 현대 영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아하’라는 인물이다. 전직 교사 출신인 아버지와 어머니, 두고 온 고향(대륙)에 대한 원초적 향수로 인해 몽유병자처럼 일상의 공간을 떠도는 할머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와 함께 가족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장녀 훼이린, 그리고 장남 아쫑을 비롯한 세 동생인 아하오, 아하, 아미 등의 인물들이 허우 샤오시엔이 설정한 롱 쇼트에 의한 장시간 화면의 프레임 속에서 만남과 이별, 사랑과 죽음이라는 삶의 드라마를 펼쳐가는 가족의 이야기이다.
작가 허우 샤오시엔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아하를 중심으로 삶의 드라마가 연대기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전개되어 나가고 있는 이 작품은 1940년대 후반 대만의 산죽 지방의 이하의 집과 마을, 그리고 학교를 배경으로 시적인 일상의 풍경이 흐르는 물처럼 유연하게 펼쳐진다. 헐리웃 영화의 인과율에 의한 서사 구조를 따르기보다는 주인공 아하의 성장 과정을 따라 단편적인 일상의 풍경들이 우리 앞에 제시되는 것이 이 작품의 시 공간적 특성이다.
아하의 아버지는 전직 교사 출신으로 지금은 집에만 칩거하면서 늘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있다. 나중이 아버지가 죽고 나서 유품 중에서 비망록이 발견되는데, 아버지는 폐결핵에 걸린 사실을 가족에게 숨긴 채 재채기도 함부로 못 하고, 식기도 따로 쓰면서 가족의 접근을 꺼려했다는 숨은 의도가 바로 그 비망록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 자식들의 접근을 꺼려하며 냉담한 반응을 보인 것은 사실은 그러한 일 때문이었다고 이를 동생들에게 알려주며 오열하는 장녀 훼이린의 모습은 일종의 비장미를 느끼게 하고 있다. 할머니의 이상한 행동은 원초적 향수의 은유적 표현이다. 할머니는 은박지로 저승에서 쓸 돈을 만들기도 하고, 어느 때는 아하와 함께 대륙으로 가자고 조르기도 하고, 말년에는 인력거를 타고 집을 떠나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아하와 함께 석류 열매를 가지고 공기받기를 하는 등 두고 온 고향에 대한 진한 그리움을 은유적 현실로 드러내고 있다.
어머니와 장녀 훼이린의 끈질긴 생명력은 대만 여인들의 가족에 대한 진한 연대감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집안의 생계를 떠맡는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하는 매사에 반항적이고 거칠다. 비오는 창가에서 거칠게 사랑 노래를 부르고 있는 아하의 곁에서 어머니는 장녀 훼이린에게 구차했던 과거의 삶을 이야기하는 장면은 퍽 인상적이다. 어머니의 돌연한 죽음은 아하의 정신적 성숙의 중요한 계기가 된다.
어머니의 장례식 장면은 삶과 죽음의 윤회관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장례식에 장송곡으로 쓰여지는 곡은 어이없게도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가인 ‘고요한 밤’이다.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현실적인 슬픔과 탄생이라는 미래에의 낙관적 전망이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충돌시킴으로써, 허우 샤오시엔은 죽음과 삶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라는 중국적 전통의 윤회적인 생사관을 제시하고 있다. 어머니의 죽음은 장녀 훼이린과 아하에게 정신적 성숙을 가져다주는데, 훼이린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대북으로 떠나고 아버지의 죽음 이후 비행을 일삼던 아하는 한층 성숙된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부권의 상실을 의미한다. 아하는 부권의 상실로 인해 삶의 중심에서 벗어나 마을과 학교에서 비행을 일삼게 되지만,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는 다시 삶의 중심으로 돌아오게 된다. 예씨 집에 빚을 받으러 갔다가 그 집의 구차한 살림을 보고 포기한 채 그냥 돌아오는 경우, 여자 친구 우 수메이의 권유로 사관학교를 포기하고 대학 진학을 결심하는 장면 등이 이를 잘 예시하고 있다.
가족 구성원의 죽음은 아하에게는 하나의 통과의례로 작용하고 있는데, 죽음에 따라 아하의 현실을 보는 시각과 행동 패턴이 달라지게 된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의 가족들의 그 죽음에 대한 태도는 사뭇 다르게 나타난다. 아버지의 영정 앞에서 카메라는 수평이동하는데, 연륜에 따라서 슬픔의 농도가 큰 편차를 보이게 되어 그 감정의 굴곡이 아주 미세하게 표현되고 있다. 할머니의 죽음 앞에서의 네 아들의 속수무책과 삶에 대한 방관의 철없음은 가히 충격적이다. 할머니의 시신이 썩는 줄도 모르고 방치해 두었던 네 형제의 철없는 무관심을 질책하는 장의사 직원들의 무언의 표정은 분노보다는 진한 연민을 자아내게 한다. 할머니의 시신 앞에 우뚝 서 있는 네 형제의 막막한 표정의 막막한 표정의 라스트 신은 가히 충격적이다. 그 속에 장녀 훼이린이 끼어있지 않은 까닭은, 앞으로의 집안의 생계 책임에 대한 누나의 역할 거부를 상징하는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네 형제의 어깨 너머 저편에 존재하는 누나의 역할에 대한 상징성은, 인간의 삶에 대한 허우 샤오시엔의 낙관적 전망으로 이 영화의 역동적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영화의 표현 미학은〈비정성시〉보다는 훨씬 더 시적이고 환상적이다. 그 첫째 요소가 롱 쇼트에 의한 장시간 화면의 기법이다. 이 기법은 여러 대상을 동시에 한 화면 속에 보여줌으로써 그 대상들 간의 상호 관계를 파악하게 해주며, 아울러 인물이 화면 밖으로 사라지고 나서도 같은 쇼트를 지속시켜서 그 상황의 의미를 관객의 심상 속에 오래 간직하게 해주는 의미 공간 확대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짧은 쇼트의 연결에서 오는 이미지의 단절을 피하기 위한 기법으로 허우 새오시엔의 독특한 영상 미학이기도 하다. 그는 같은 쇼트 내에서도 공간의 이동이 필요한 경우에도 쇼트끼리의 연결보다는 카메라의 수평이동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의미 공간과 감정의 지속을 그대로 유지시켜 주고 있다. 특이한 점은 인물들의 움직임의 속도에 따라서 카메라의 수평이동 역시 완급의 리듬으로 보조를 맞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좌우로의 공간 이동의 경우에는 수평이동의 기법을 쓰고 상하로의 공간 이동 역시 쇼트의 연결을 피해 틸트 업과 틸트 다운의 기법을 시용함으로써 장시간 화면을 그대로 유지시키고 있다. 아버지의 영정 앞에서 죽음에 대한 감정 표현을 제각기 다르게 나타내는 가족들의 묘사에서 사용되는 수평이동의 기법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영화의 표현 미학 중 두 번째 특징은 삶의 페이소스를 나타내는 음악과 현실음의 사용이다. 이 작품에서의 음악과 음향은 중요한 의미 기능을 지니는데, 인과율에 의한 서사 구조가 아닌 단편적인 일상의 풍경과 그 속에서의 정적인 삶의 움직임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사용되는 음악과 음향은 중요한 오브제의 기능을 지니게 된다. 지극히 절제된 애수를 띤 단조음의 피아노 음악, 빗소리, 흔들리는 나뭇잎, 자동차와 자전거 소리,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 등의 자연음과 일상적인 현실음은 주인공 아하의 성장에 따른 삶의 변화라는 추이 과정을 은유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 나뭇잎이 바람결에 흔들리는 소리, 석류나무 이파리들의 격렬한 움직임,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 등은 주인공 아하의 성장 과정에 따른 좌절과 불안, 그리고 고뇌의 심리 상태를 적절하게 드러내 주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부권의 상실로 인한 청소년기의 아하의 여러 가지 비행 등에서 일상의 현실음이 많이 사용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까닭에서이다. 또한, 이 작품은 화면 밖에서 들려오는 여러 가지 음향을 통해 다음 장면의 상황을 미리 예고해 주는 기법도 자주 사용하고 있다.
허우 샤오시엔은 이 영화에서 ‘비서술 인서트’를 두드러지게 사용하고 있다. 이 표현 기법은 극적 공간이나 사건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텅 빈 거리나 나무들을 보여주는 쇼트로서, 인과율에 의한 서사 구조의 사건 진전에는 직접 관여하지는 않으나 장면 전환의 여백을 채우는 쇼트의 기능을 가지게 된다. 이 영화에서는 장면 전환의 시간적 여백 처리의 기능도 담당하고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앞 장면의 이미지를 관객의 심상에 지속적으로 남아있게 하면서 다음 장면의 상황을 에고하는 의미 공간 확대의 기능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낙관적 전망
허우 샤오시엔은〈비정성시〉를 통해 대만의 격동적인 현대사를 통해 한 가족의 부침과 붕괴 과정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냉철하게 묘사하고 있다. 역사와 정치사회적 은유를 통해 혼란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의연한 삶을 살아가는가를 인본주의적인 철학의 기조 위에서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펼쳐 보이고 있다. 또한〈동년왕사〉에서는 일상적 삶의 풍경을 배경으로 한 인간이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을 통해 통과제의로서의 성장을 해 나가는 과정을 시적이고 환상적인 영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격동의 역사이든 아니면 일상적 삶의 풍경으로서의 현실의 은유이든 간에 허우 사오시엔의 궁극적 믿음은 인간에 대한 신뢰와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에 있다고 단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1987년 봄 칸영화제에서 마트 도미니커스와 페사로영화제에서의 피터 델펫과의 인터뷰, 그리고 일본의⟪피아⟫지와의 대담에서 발췌한 내용 중의 일부를 살펴보면 그의 인간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문 : 〈비정성시〉를 ‘천의(天意)’의 자세로 찍었다고 말씀하시는데?
답 : 영화감독으로 생각하는 것은 천의, 즉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사 람은 태어나서 성장하고, 좌절과 사랑을 경험하며 반드시 죽습니다. 이러한 ‘자연의 이치’에 대해 감독으로서 마음 아파하지 않습니다. 이 것은 어디까지나 높은 위치에서 인간 사회를 보는 것이며, 이것이 바 로 ‘천의’입니다.
- 주윤탁 김지석 편집의⟪아시아 영화의 이해⟫
인용문처럼 그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비전은 동양의 자연관과 일치하고 있는데, 자연의 순환과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 사회의 변천을 합일시켜 파악하고 있다.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서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영화에서의 비서술 인서트의 쇼트 사용이 가능해지며, 높은 위치에서 인간과 인간 사회를 보려는 시점 때문에 롱 쇼트에 의한 장시간 화면의 표현 기법 사용이 불가피해지는 것이다. 또한, 인간 심리의 위탁으로서의 감정이입 때문에 비서술 인서트의 쇼트가 사용되는 것이다.〈비정성시〉와〈동년왕사〉는 그의 표현기법으로서의 장시간 화면과 주제로서의 인생과 인간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작품이다.
허우 샤오시엔의 작품의 국내 소개는 전무한 실정이다.〈비정성시〉,〈밀레니엄 맘보〉,〈카페 뤼미에르〉,〈빨간 풍선〉등 몇몇 작품 정도만이 예술영화 전용 극장 상여이나 비디오테이프로 소개되고 있을 뿐이다. 그것도 비디오 숍 진열대의 구석진 곳에서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채로......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몇몇 작품 이외에도 현실인식이 강한〈샌드위치 맨〉, 자전적 3부작인〈펭퀘이에서 온 소년들〉,〈동동의 여름방학〉,〈바람 속의 먼지(연연풍진)〉, 그리고〈나일강의 딸들〉 등을 필히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작품은 대만 현대 영화사에서의 뉴 시네마 운동과 우리의 격동의 현대사를 되짚어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시적이고 환상적인 영상 미학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그의 영화에 대한 총체적 관람은 필수불가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