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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서산 아라메길 2구간(해미 국제성지순례길)
여 행 일 : ‘25. 1. 25(토)
소 재 지 : 충남 서산시 덕산면·해미면 일원
여행코스 : 대치2리 입구→우리옹기박물관→한티고개→대곡1리 마을회관→송덕암→산수저수지→해미읍성→해미국제성지(거리/시간 : 11km, 실제는 해미읍성까지 10.71km를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아라메길’은 바다의 고유어인 ‘아라’와 산의 고유어인 ‘메’를 합쳐 만든 명칭으로 ‘서산의 아름다운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을 함께 둘러볼 수 있는 길’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누구나 자유롭게 산책 또는 트래킹 할 수 있도록 서산 관내의 8개 노선을 선정 세상에 내놓았다.
▼ 09 : 22. 들머리인 ‘대치리 2구’ 입구(충남 서산시 덕산면 대치리)
서해안고속도로 해미 IC에서 내려와 45번 국도(예산방면)를 타고 10km쯤 들어오면 대치리 버스정류장(2구 입구)에 이르게 된다.
▼ ‘서산 아라메길’의 2구간인 ‘해미 국제성지순례길’은 조선시대 말 천주교 박해 때 천주교인들을 압송했던 해미순교성지-한티고개 구간(11km)이다. 고통 속에서 끌려가면서도 목숨으로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 했던 옛 순교자들의 신앙심을 되새겨 볼 수 있는 코스로, 해미순교성지가 교황청으로부터 국제성지로 지정된 것을 반영했다.
▼ ‘내포 문화숲길’을 구성하는 ‘천주교순례길’의 네 번째 코스이기도 하다. 충의사(忠義祠, 윤봉길의사 사적지)와 해미순교성지를 잇는데, 3/1쯤에 위치한 ‘한티고개’에서 해미순교성지까지가 ‘서산 아라메길’과 중복된다고 보면 되겠다.
▼ 09 : 24. 윤봉길로(45번 국도, 해미방면)를 따라 50m쯤 걷다가 오른쪽 소로로 들어간다. 일 년 중 가중 춥다는 ‘대한(大寒)’이 5일 전에 지났다. 성급한 일부 기상전문가들은 한랭전선의 이동경로를 제시하며 올 추위는 이미 끝났다고도 했다. 그래서일까? 언제 추웠냐는 듯 날씨가 포근해졌다.
▼ 이정표가 ‘내포 천주교순례길’을 걷고 있음을 알려준다. 1.72km쯤 더 걸어야 ‘해미성지순례길’의 시점인 ‘한티고개’를 만날 수 있단다. 하나 더. 이 길은 고통을 받으며 끌려가면서도 자신을 지키려했던 옛 순교자들의 신앙정신을 되새겨 보며 걷기에 더 없이 좋은 곳이다. 그러니 마음속으로 참회하고 기도하며 걸어볼 일이다.
▼ 이 구간은 ‘삽교’의 용머리마을, 배나드리마을 등지에서 집단으로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을 해미읍성으로 압송하던 길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순교자들이 느꼈을 애틋함과 비장함이 느껴질 것은 당연. ‘순례는 걸어가는 기도다’라고 했다. 맞다. 오늘의 내 화두는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이다.
▼ 초입에서 만난 또 다른 이정표는 화장실 위치까지 담았다. 순례자들을 위한 배려이지 싶다. 참회하고 기도하며 걷다보면 속도는 자꾸 떨어질 것이고, 그러다보면 생리작용을 해소해야 할 곳을 찾게 될 테니까 말이다.
▼ 09 : 25. 마을길(대치1길)을 따라 한티고개로 간다. 한티고개로 올라가는 길은 과거 내포지역에서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이 해미로 압송되어 가던 고통의길 이었다. 그동안 천주교는 믿음이 허락되었고, 확장된 교세를 자랑이라도 하듯 전국 어디서나 성당을 만날 수 있다. 그래서일까? 나지막한 산들에 둘러싸인 아담한 마을길은 지극히 평화로웠다.
▼ 시선을 조금 비틀자 ‘가야산(伽倻山, 678m)’이 성큼 다가온다. 해인사가 있는 합천의 가야산만큼은 아니어도 충청권에서는 아름답기로 손꼽이는 명산이다. 특히 산자락에 품고 있는 ‘용현리 마애삼존불상(국보 제84로)’은 내가 본 석불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 09 : 32 – 09 : 35. ‘우리 옹기박물관’이란다. 옹기는 숨을 쉬는 그릇이다. 옹기토에 있는 모래 알갱이가 굽는 과정에서 미세한 숨구멍을 만들어 내는데, 이 숨구멍들이 옹기의 안·밖으로 공기를 통하게 함으로써 발효 작용을 돕는다. 아무튼 문이 열려있기에 들어가 봤지만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눈요기만 하고 나왔다.
▼ 옹기만 모아놓았을 뿐 직접 만들지는 않는 모양이다. 옹기 제작의 필수 요소라 할 수 있는 흙과 불(땔나무), 가마 중 어느 하나도 눈에 띄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옹기는 흙·물·불·바람이라는 사총사가 가마 속에서 만나면서 만들어진다. 인체에 무해, 무독한 그릇으로 자연으로의 환원성이 좋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 ‘역사 민속자료관’도 꾸며져 있었다. 옛 사람들의 생활용품을 전시하는 모양인데 이 역시 구경할 수는 없었다.
▼ 이정표에 적혀있던 ‘화장실’인 모양이다. 참! 오는 도중에도 간이화장실을 만날 수 있었다. 비록 문이 잠겨 있었지만.
▼ 09 : 42. ‘순례길’답게 곳곳에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key map을 단 이정표는 한티고개까지 0.85km쯤 남았음을 알려준다. 반대방향은 삽교성당(17.55km), 여사울성지(31.7km)로 연결된단다.
▼ CCTV가 지켜보고 있으니 농작물에 손대지 마란다. 길을 걷는 여행자에겐 반드시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둘레길은 지역 주민의 생활 터전을 지나기 때문에 농작물을 따거나 논밭에 함부로 들어가는 일을 삼가야 한다. 주인 있는 임산물 채취도 마찬가지다. 지역 주민에게 농작물이나 임산물은 소중한 재산이자 자식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 09 : 45. 마지막 민가. 깔끔하게 포장되었던 길은 이곳에서 비포장으로 바뀐다.
▼ 이후부터는 산길을 올라간다. 길은 고운 편이다. 폭신폭신한 흙길에다 경사까지 완만해서 순례삼아 나들이 나온 노약자들도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다.
▼ 09 : 52. 첫 번째 조형물. 이곳은 ‘천주교 순례길’, 그러니 저 조형물은 십자가의 길 제1처인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 받으심’이어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훑어봐도 그런 형상이 그려지지 않으니 문제다. 이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며 묵상 및 기도를 드려보겠다는 내 결심이 흐트러져 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 2처(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를 연상시키는 조형물은 세 번째에서야 만날 수 있었다.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는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의 여정이다.
▼ 네 번째 조형물도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파악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 다섯 번째 조형물. 5처였다면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졌어야 한다. 다행이라고나 할까? 여섯 번째는 6처(베로니카,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림)를 연상할 수 있었다.
▼ 기력이 떨어지신 예수님이 넘어지는 장면은 3처와 7처, 그리고 9처에 해당된다. 이곳도 일곱 번째와 아홉 번째는 이를 연상시키는 조형물을 세워놓았다.
▼ 10처(예수님께서 옷 벗김 당하심)와 11처(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 12처(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는 순서는 물론이고 전하고자 하는 이미지까지 제대로 되어 있었다.
▼ 13처(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림)는 로마의 ‘성 베드로성당’과 멕시코시티의 ‘소우미술관’에서 만났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Pieta)’를 쏙 빼다 닮았다. 피에타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맞은 성모 마리아의 슬픔을 뜻하며, 기독교 예술을 대표하는 주제 중 하나다. 주로 성모 마리아가 부활하기 전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안고 비통에 잠긴 모습을 묘사한 예술 작품으로 나타난다.
▼ 14처(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도 해당 장면을 연상하는데 별 문제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전반부의 몇 개만 문제가 있었던 셈이다. 그 때문에 나는 제대로 된 ‘십자가의 길’ 대신 간단한 기도로 끝내는 우를 범해버렸고.
▼ 10 : 08. 한티고개에 올라선다. ‘한티’는 큰 고개라는 의미다. 해미면(서산시)과 덕산면(예산군)의 경계를 이루는 고갯마루(해발 297m)로, 옛날에는 이곳에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널따란 터로만 남아있던 것을 ‘성지순례길’을 조성하면서 그에 걸맞는 조형물과 이를 설명하는 안내판들로 채워 넣었다. 정자에 파고라, 화장실을 배치해 쉼터를 겸하도록 했음은 물론이다.
▼ 기념 조형물. 포승줄에 묶인 채 압송되고 있는 천주교인들을 형상화 했다.
▼ 천주교 박해 때, 이곳에는 우물과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신자들을 잡아들이고 호송하던 포졸이나 육신의 고통을 견뎌야 했던 신자들 모두에게 이곳은 고통과 희망이 함께 하는 공간이었다. 포졸들에게는 해미읍성이 멀지 않았고, 신자들에게는 천국이 멀지 않은 곳이었다.
▼ 안내판은 이곳 한티고개가 천주교순례길이 지나가는 한 지점이자, 아라메순례길의 출발지임을 알려준다.
▼ 이곳은 해미성지순례길. 참된 순례자가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여정을 떠나는 마음가짐으로 먼저 고해성사부터 보란다. 일상에서의 잘못을 반성하는 참회와 회개의 태도를 갖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나는 빵점짜리 순례자다. 고해성사를 드리지 못한 채 길을 나섰으니 말이다.
▼ 고갯마루에서의 조망. 가야산과 덕숭산 사이로 ‘덕산시가지’가 고개를 내민다. 그 뒤로는 내포지역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 가야산은 바위가 많은 산이다. 채석장으로 보이는 저 암장이 그 증거다. 하나 더. 이곳은 금북정맥(錦北正脈)의 한 지점이기도 하다. 한남금북정맥의 칠장산(492m, 경기 안성)에서 분기, 칠현산·오서산·가야산·팔봉산·백화산 등을 일구면서 남·서진하다 태안반도의 안흥진(安興鎭)에서 그 숨을 다하는 길이 295km의 산줄기다.
▼ 10 : 14. 하산 길, 아니 ‘해미 성지순례길’은 올라왔던 반대(서쪽) 방향으로 열린다. 그 초입에 ‘십자가의 길’ 제1처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받침돌에 주문(예수님께서 사형 선고 받으심을 묵상합시다)을 적고, 그 위에다 이미지를 판화 형식으로 새긴 반구(半球)를 올려놓았다.
▼ 아까 올라올 때 놓쳤던 ‘십자가의 길’ 기도를 드리기로 했다. 초기 그리스도교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을 방문, 빌라도의 관저라고 추측되는 곳부터 갈바리아에 이르기까지 각 장면의 사건이 일어난 곳들을 따라 걸으며 묵상했던 것처럼 말이다. 참고로 ‘십자가의 길(Stations of the Cross)’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고 무덤에 묻히기까지 그리스도 수난의 마지막 사건들을 묘사한 14장면의 연속 그림 또는 조각을 말한다. 이 연속 장면들은 대체로 성당이나 경당 안벽에 배치해두지만 공동묘지, 병원 복도, 종교단체 건물, 산기슭 같은 곳에 두기도 한다.
▼ 시작부터 길이 둘로 나뉘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 길이 나뉘기라도 할라치면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워놓았다.
▼ ‘서산아라메길(2코스인 해미성지순례길)’로 옷을 갈아입은 이정표는 이제 ‘해미읍성’과 해미순교성지를 가리킨다.
▼ 이정표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곳곳에서 가이드 리본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 오늘 아침. 새벽 3시에 눈을 뜬 나는 컴퓨터로 달려가 예루살렘의 성지순례 동영상을 찾아봤고, 쏟아지는 눈물을 한참이나 멈출 수 없었다. 피정을 위해 매년 수도원을 찾던 젊은 시절, 통곡 기도를 드리던 때 이후로는 첫 경험이었다. 그런 감동의 여운으로 2처를 맞는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을 묵상하면서 기도를 드린다.
▼ ‘십자가의 길’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묵상하는 신심행위이다. 가톨릭교회에서는 부활절 전 사순 시기의 금요일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행한다. 올해는 4월20일이 부활절이니 조금 앞당겨서 한다고 여기면 되지 않겠는가.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 이어서 5처의 주문인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짐’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차례로 드린다.
▼ 10 : 41. 14처(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을 묵상합니다)를 마지막으로 ‘십자가의 길’은 끝난다. 한티고개에서 이곳까지는 500m, 기도를 드리면서 내려오다 보니 27분이나 걸렸다.
▼ 10 : 45. 산속에서 만난 민가. 가축을 키우는지 악취가 진동을 한다. 천국에서 노닐다가 세속으로 되돌아왔다는 증거라고나 할까?
▼ 10 : 53. 해미폐차장. 널따란 공터에는 분해된 차량들로 가득했다. 차량 부속을 추출해 재활용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폐차된 차량을 통째로 압축시켜 고철로 만들던 영화 장면이 전부인 그동안의 앎이 얕아도 너무 얕다는 것을 오늘 알았다.
▼ 10 : 55. ‘대왕석재’를 스치듯 지나 2차선 도로인 ‘큰골로’로 내려섰다. 이정표(해미읍성 6.9km/ 한티고개 정상 1.3km)가 도로를 가로지르라며 건너편을 가리킨다.
▼ 이후부터는 마을길(한티2길)을 따라간다. 길 양옆으로 듬성듬성 민가가 들어서 있다. 예스런 풍치를 물씬 풍기는 돌담들이 눈길을 끄는 구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유럽, 그것도 동유럽에서나 볼 법한 고성(古城)을 닮은 저 건물의 정체는 대체 뭘까?
▼ 11 : 05. 대곡1리 경로당. 대곡마을 구간은 순교자들이 두 번이나 지나갔다고 한다. 포승줄에 묶인 채 해미읍성으로 끌려갔고, 유골이 되어 다시 한 번 머물다 갔단다. 1935년 4월1일, 여숫골에서 순교자들의 유해 중 일부가 수습됐고, 그날 이 마을에 있던 ‘대곡리 공소’에서 하룻밤을 자고 갔다는 것이다.
▼ 이를 기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마을 앞에 순례자들을 위한 작은 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파고라에 벤치는 기본, 음수대와 화장실까지 갖췄다. 덕분에 걷기 행자들에게 최고의 쉼터가 되어준다.
▼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보고 싶어 ‘대곡리 공소’를 찾아보려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안내판만으로는 위치를 추적할 수 없었고, 길을 물어볼만한 주민들도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 11 : 10. 길은 이제 ‘대곡1길’을 따라간다. 대도시 근교의 부잣집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잘 지어진 전원주택들이 즐비한 구간이다. 굵고 잘 생긴 소나무들이 즐비한 주변 산자락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했다.
▼ 11 : 20. 송덕암교차로. 이정표(해미읍성← 5.5km/ 한티고개 정상↓ 2.7km)는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한티로(45번 국도)’를 건너란다.
▼ 하지만 우리부부는 ‘큰골로’를 따라갔다. 한티로의 오른쪽에 붙어서 가는 2차선 도로인데, 그 끝에 ‘송덕암’이 있었기 때문이다. 명색이 전통사찰(제48호)인데 뭔가 볼거리가 있지 않겠는가.
▼ 11 : 25. 송덕암(松德庵)은 들어앉은 터를 가야산(伽倻山)이 아닌 상왕산(象王山, 가야산의 옛 이름)으로 적었다. 문지기인 ‘금강역사’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사찰은 그 자체로 세계와 연결되어 있지만 동시에 세계로부터 독립된 공간이기도 하다. 때문에 금강역사나 사천왕이 그 경계를 지키는데, 송덕암은 금강역사가 그 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 한국불교태고종 소속인 송덕암은 무척 아담한 절집이었다. 금당인 약사보전(藥師寶殿)과 종각. 두어 채의 요사(佛思滿堂)가 전부다. 아니 계곡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산신각도 나온다고는 했다. 절은 1785년(정조 9) 승지 임하(任夏)가 말을 타고 가다 미륵여래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지었다고 알려진다. 부처님의 덕을 칭송한다는 의미로 ‘송덕암’이라 했단다.
▼ 11 : 32. 송덕암 근처 ‘원터교차로’에서 횡단보도를 건넌다. 4차선 도로라서인지 오가는 차량들이 무섭도록 빨리 달린다. 신호등이 설치되어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 건너편에서 ‘순례길’과 다시 만나 ‘원터교(이정표 : 해미읍성 5.0km)’를 건넌다. 다리 건너는 원룸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인근에 한서대학교(서산캠퍼스)가 들어서면서 한적하던 산골이 요란스런 도시적 풍경으로 바뀌었다.
▼ 11 : 34. 이후부터는 ‘해미천’의 둑길을 따라간다. 말이 천(川)이지 개울 수준이다. 덕분에 앙증맞은 철다리나 능수버들의 휘휘 늘어진 가지로 눈요기를 할 수 있었지만.
▼ 11 : 41. 목교로 ‘해미천’을 건넌다. 예전에는 그 뒤로 보이는 민가를 지나 해미천을 건넜다고 한다.
▼ 남의 집 마당을 무단으로 지나다니는 게 미안했다는 후기가 많이 눈에 띄었는데, 그게 서산시 관계자의 귀에 들어갔던 모양이다.
▼ 탐방로는 이제 해미천의 오른쪽 둑길을 탄다.
▼ 오른쪽, 가야산 자락에는 항공관련 학과로 특화된 ‘한서대학교(서산캠퍼스)’가 들어섰다. 그 앞에는 웬만한 소읍 수준의 ‘학사촌’도 형성되어 있었다.
▼ 11 : 49. 탐방로는 산수저수지의 호안을 따라 새로 조성해놓은 ‘숲길’로 연결된다. 저수지 바로 위 해미천에 다리를 놓았는데, 물고기 모양의 조형물을 씌워 저수지와 함께하는 구간임을 은연 중 알려준다.
▼ 내포 문화숲길(천주교순례길 4코스)과 서산 아라메길(해미성지순례길)이 공동으로 쓰는 구간임을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듯, 각각의 이정표를 세워놓았다.
▼ 소나무숲길을 따라 걸을 수 있는 이 구간은 ‘성지순례길’의 백미로 꼽힌다. 호숫가를 따라 이어지는 1.5km 길이의 숲길 중간 중간에 쉼터와 조형물, 이야기 안내판 등을 설치해 걷고 있는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도록 했다.
▼ 11 : 57 – 12 : 07. 첫 번째 쉼터. 전망데크에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쌍으로 온 순례자들을 위해 흔들의자까지 배치하는 센스도 발휘했다. 덕분에 우리부부도 준비해간 간식을 먹으며 푹 쉬다 갈 수 있었다.
▼ 안내판은 천주교 탑압 당시의 압송로가 ‘산수저수지’에 잠겨있음을 알려준다. 전해주는 얘기는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놓았다. 천주교인들이 묶인 채로 한티고개를 내려오던 장면, 서문 밖에서 자행된 학살 장면 등을 당시 이곳에서 살던 주민들의 입을 통해 전해준다.
▼ 안내판과 대조해가며 호수를 살펴본다. 그리고는 굴비 엮듯 포박당해 끌려가던 순교자들을 떠올려본다. 내포의 각지에서 체포된 신자들이 해미로 압송돼 가기 위해서는 가야산을 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삽교천 인근에서 체포된 교인들은 덕산을 거쳐 처형장소인 해미읍성으로 가야했다. 그러니 순교자들에게 있어서 저곳은 순교를 위해 떠나는 생의 마지막 ‘순례길’이었던 셈이다.
▼ 길은 호숫가를 따라간다.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지는데, 가끔은 제법 가파르게 변하기도 한다.
▼ 가끔은 물가로 내려서기도 한다. 물속에 나무들이 잠겨 있는 것이 주왕산 근처에 있는 주산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비록 왜소하기는 하지만 여름철에 찾으면 제법 볼만한 풍경을 만날 수도 있겠다.
▼ 12 : 12. 두 번째 쉼터. 파고라에 벤치는 물론이고, 운동기구 몇 점까지 배치했다. 걷기 여행자와 주민들이 함께 쓰는 공간을 만들려고 했던 모양이다.
▼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는 천주교인들을 형상화한 조형물도 설치했다. 해설판도 눈에 띈다. 끌려가는 천주교인들은 주민들이 보기에는 죄인이었고, 그들 앞에 놓인 것은 죽음이었다. 하지만 정작 천주교 신자들은 누구보다 당당했단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게 천국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맞다. 어떤 이는 보는 것을 믿고, 다른 어떤 이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
▼ 길은 울창한 소나무 숲을 헤집으며 간다. 굵고 휜 것이 전형적인 우리나라 소나무이다.
▼ 12 : 30. 셋째, 넷째에 이은 다섯 번째 전망대는 아예 공중에 걸려있다. 하지만 잡목에 둘러싸여 썩 좋은 조망은 보여주지 못한다.
▼ 12 : 34. 제방에 가까워지자 ‘취수탑’이 고개를 내민다. 산수저수지의 제당 형식은 균일형 필댐(fill dam)이며 취수 형식은 취수탑형이란다.
▼ 취수탑은 그 자체를 ‘♡’로 표현했다. ‘오늘도 예쁘구나. 산수’라는 문구에서 빼어난 경관에 대한 자신감이 느껴진다.
▼ 산수저수지는 높이 23m의 제방을 295m 길이로 쌓아 만든 저수지다. 그 둑에 말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서산과 말이 어떤 특별한 인연이 있는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 산수저수지(山水貯水池), 가야산에서 발원한 해미천의 상류 지역에 입지한 비교적 오랜 역사를 가진 농업 관개용 저수지다. 1953년 3월 3일 착공하여 1962년 12월 31일 준공되었다. 총 344만 5,370톤의 물을 모아 723㏊의 농경지에 대준단다.
▼ 둑 아래에는 ‘지성정(枳城亭)’이라는 국궁장이 들어서 있었다.
▼ 12 : 40. 둑을 내려온 탐방로는 ‘서해안고속도로’의 교각 아래를 지나간다. 시나브로 길이 나뉘는 구간이나 곳곳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어 길을 찾아가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 12 : 46. 해미천의 오른쪽 둑길을 따라간다.
▼ 건너편 암벽에 뻥 뚫린 굴이 두엇 눈에 들어온다. 그중 하나는 철책으로 출입을 막고 있었다. 경쟁력이 다해 문을 닫은 광산의 갱구이지 싶다.
▼ 12 : 54. 다리 건너 ‘해미 예수재림교회’쪽으로 간다. 오늘은 토요일.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은 오늘이 안식일이다. 설 명절을 앞두어선지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신자들의 손에 선물보따리가 하나씩 들려있었다.
▼ 이번에는 해미천을 오른쪽에 끼고 간다. 벚나무로 치장된 멋진 구간이다. 봄이면 저 길에 꽃비가 내린다고 했다. 얼마나 많이 내리는지 수북하게 쌓일 정도란다. 그게 호사가들의 눈에는 ‘흰 눈’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봄 눈’이라는 애칭으로 둔갑시켜 시심을 부추기고 있었다.
▼ 아름다움은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벚나무 꽃길을 따라 들어선 저런 ‘Cafe & Gallery’들이 그 증거다.
▼ 13 : 07. 잠시지만 해미천의 둔치를 따라가기도 한다. 길은 어른의 허리통보다도 더 굵은 벚나무 아래를 지나간다. 그러다 무지개다리로 해미천을 건넌다. 보행자 전용 다리다.
▼ 다리 오른편은 ‘황락천’이 해미천으로 흡수되는 두물머리이다. 황락리에서 발원 남서쪽으로 흐르다 읍내리에서 해미천과 합쳐지는 2.7km 길이의 지방하천이다.
▼ 다리에서 본 ‘해미천’. 한마디로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양쪽 둔치에 생태탐방로 및 자전거도로를 설치하는 등 주민들을 위한 친수(親水) 및 생활체육 공간으로 만들어놓았다.
▼ 13 : 12. 이번에는 해미천의 오른쪽 둑길을 따라간다. 벚나무 그늘 아래로 데크길을 내놓았다. 그러다 ‘해미교’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해미읍성’으로 간다.
▼ 13 : 18. 해미읍성에 이른다. 10.71km를 3시간 50분을 걸어 도착했다. 종점인 해미순교성지까지는 아직도 1.8km쯤 더 가야 한다. 하지만 어제 토사곽란으로 몸살을 앓았던 집사람의 체력으로는 무리였던 모양이다. 더 이상 못 걷겠다며 이쯤에서 산악회버스가 있는 운산면소재지로 가잔다. 하긴 병원에서 응급조치까지 받고 겨우 길을 나섰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참고로 산악회에서 진행한 ‘서해랑길 64-3코스’의 종점은 운산면소재지에 있는 ‘운산교’이다. 우리부부는 개심사, 보원사지, 용현리 마애삼존불상 등 이 구간에 있는 명소들을 4개월 전에 이미 둘러봤기에 서해랑길 대신 ‘천주교성지순례길’을 걸었다.
▼ 나머지 구간의 풍경들은 2주 전 64-2코스 때 찍어두었던 사진을 올려본다. 읍내 한복판에 자리한 해미읍성(사적 제116호)은 낙안·고창 읍성과 함께 조선시대 모습을 간직한 3대 읍성에 꼽힌다. 서해안지역은 왜구의 침략이 잦았다. 이를 막기 위해 태종 17년(1417년)부터 세종 3년(1421년)까지 석성으로 쌓았다.
▼ 해미읍성은 문화재이다. 하지만 천주교인들에게는 순교성지로서의 위치가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읍성 한가운데 ‘호야나무’로 불리는 회화나무 한 그루가 박해의 증인처럼 서 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을 매달아 고문했다는 나무이다.
▼ 바로 옆에는 1790년부터 100여 년간 내포 일대의 천주교인을 잡아 가두었던 옥사를 복원해 놓았다. 한국 최초의 신부이자 순교자이며, 성인이신 김대건 신부님의 증조부 복자 ‘김진후 비오’님이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 수령이 240년이나 된다는 느티나무 뒤에는 ‘호서좌영(湖西左營)’ 관아(官衙)가 있다. 조선 초기 병마절도사가 주둔하던 곳으로, 무관 영장이 현감을 겸해(이를 겸영장이라 함) 지역을 통치했다. 당시 내포지방 13개 군현을 담당하던 해미읍성 겸영장은 군권과 관권을 한 손에 쥐고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던 까닭에 조정에 보고하지도 않고 해당 지역 교도들을 잡아들여 처형했단다. 그 숫자가 무려 1,000여명에 달했다나?
▼ 서문(지성루)으로 빠져나가 ‘진둠벙교’로 해미천을 건너면 ‘해미순교자국제성지’가 맞는다. 천주교 박해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하는 곳이다. 1800년대의 천주교 박해 때, 기록되지 않은 천주교 신자 1천여 명이 사약·몰매·교수형·참수형·동사 등 다양한 방식으로 처형됐고 심지어 산 채로 땅에 묻는 생매장과 물에 빠뜨리는 수장형까지 자행됐다. 그렇다고 유명한 성인이 있거나 특별한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저 이름이나 세례명을 남기고 순교한 132명의 천주교 신자가 기록으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교황청은 2021년 국제순교성지로 지정했다. 국내에서 첫 번째이며,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다. 세계적으로도 역사적 장소인 이스라엘 예루살렘과 이탈리아 로마, 스페인 산티아고 등 3곳, 성모 발현지인 멕시코 과달루페와 포르투갈 파티마 등 20곳, 성인 관련 순례지 6곳 등이 있을 따름이다. 이름도 남기지 못한 순교자들의 신앙을 모범으로 인정하고 이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 무덤을 형상화 했다는 ‘순교자성지 기념관’. 순교자들의 희생과 역사를 전해주는 곳으로, 순교 당시의 모습을 담은 조각과 판화, 성지에서 발굴된 순교자 유해가 안치돼 있다.
▼ 안으로 들면 이곳을 방문했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진이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라서 우리가 신앙의 증거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라는 축복과 함께 게시되어 있다. 2014년 8월16일,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광화문에서 조선 순교자 124위 시복식을 거행했다. 해미에서 순교한 인언민(마르티노), 김진후(비오), 이보현(프란치스코) 등 3위도 함께 시복됐다. 교황은 이튿날 해미순교성지에 들러 순교자 3위의 기념비 제막식에도 참석했다.
▼ 기념관에는 여숫골에서 발견된 유골이 모셔져 있었다. 그밖에도 당시의 유물과 조각·그림·사진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천주교의 역사와 발굴과정 등 다양한 정보를 전해준다. 하나 더. 동구 밖 ‘숲정이’라 부르던 곳은 신자들이 생매장 당한 곳이다. 당시 순교자들은 죽으면서도 하늘을 향해 ‘예수, 마리아’를 외쳤다고 한다. 주민들에게는 그게 ‘여수머리’로 들렸던 모양이다. ‘여우에 홀린 머리채로 죽어갔다’며 '여숫골'이라 불렀단다.
▼ 신자들의 가슴과 머리를 으스러뜨리던 ‘자리개돌’. 신자들을 처형하는 방법은 잔혹했다. 군졸들은 이들이 사용하던 성물을 밟게 하고 돌다리에 눕힌 뒤 커다란 돌로 내리쳐 돌다리를 도마로 삼았다고 한다. 당시 신자들이 흘린 피가 해미천을 붉게 물들이며 ‘거머리바위’까지 흘러갔다고 한다.
▼ 진둠벙. 천주교인들을 빠뜨려 죽게 한 아픔이 깃든 곳으로, 자그마한 연못에 한복을 입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두 여성(한 분은 성모인 듯)의 석상이 물에 반쯤 잠겨 있다. 당시 100년 가까이 사형장으로 이용되던 서문 밖 냇가는 민가와 가까웠다. 그래서 조금 떨어진 벌판에다 수십 명씩 생매장하기 시작했단다. 군졸들은 생매장터로 가기 전 개울과 연결된 ‘둠벙’(웅덩이의 충청도 사투리)에 오랏줄에 묶인 신자들을 산 채로 수장시키기도 했단다. 훗날 이 둠벙은 '죄인들이 떨어져 죽었다'하여 '죄인둠벙'으로 불리다 말이 줄어 '진둠벙'으로 바뀌었다. 그래선지 순교자들의 유해가 수직으로 서있는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 맨 뒤에는 ‘해미순교탑’이 들어섰다. 무덤을 형상화 한 둥근 봉우리 위에 16m 높이의 흰색 탑이 세워져 있다.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3개의 날개 형상이 십자가를 떠받치는 모양새이다. 그 앞에는 ‘무명 생매장 순교자들의 묘’가 있었다. 둥근 모양의 분묘는 아랫부분을 화강암으로 둘렀다. 앞쪽 양옆으로 한 쌍의 문관석이 세워져 있다.
▼ 2014년 8월 16일 시복된 3위의 복자 상. 해미의 첫 순교자는 1797년 정사박해의 여파로 1800년 1월9일에 순교한 ‘인언민 마르티노’와 ‘이보현 프란치스코’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도 10년간의 옥고 끝에 1814년 10월20일 해미옥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시복된 이분들 말고도 해미에는 132명의 순교자가 더 있다. 그리고 그보다도 훨씬 더 많은 무명의 신자들이 순교한 것으로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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