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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 사건에 대한 구속사적 조명
창세기 11장 1-26절
1. 노아 홍수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계획
노아 홍수로 인해 지상의 모든 인류는 멸망을 받고 노아의 여덟 식구만 남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홍수 가운데서 이들을 죽이지 않고 생명을 보전하신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1) 아담과 맺은 언약의 성취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이후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뱀을 가리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들)도 여자의 후손(들)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그)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고 전격적인 선언을 하신 바 있다. 이 선언은 하나님과 인간이 화목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죄 있는 아담과 하와를 용서하셔야 가능하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어떤 방편으로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지 않았다. 때문에 오직 누군가가 그들의 생명을 대속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야만 비로소 하나님은 그들과 화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를 꼬드겨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한 뱀을 '여자의 (그) 후손'이 심판하도록 하겠다고 선언하신 것은 여자의 후손이 죄의 근원을 처음부터 없이 함으로써 아담과 하와가 다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도록 어떤 사역을 하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여자의 후손은 근본적으로 죄를 가져다 준 뱀의 머리(이것은 사탄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를 제압하고 더 이상 죄가 아담과 하와를 억압할 수 없는 상태로 회복할 것이다. 그 과정에 있어 여자의 후손이 할 일은 죄인된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대속의 사역을 완성하는 일이다.
이 말씀을 통해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 처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기 위해서 누군가 자신들의 생명을 대속해야 한다는 원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대속의 원리에 근거하여 사탄의 궤계를 깨뜨리고 죄에서 영원히 자신들을 구속하여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롭게 할 약속의 씨(여자의 후손)를 소망하고 마침내 역사 속에서 필연코 대속의 사건을 완성할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앙했다. 그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아담과 하와는 약속의 씨를 기다렸고 아들을 낳자 그를 '가인'이라고 불렀다.
가인이라는 이름은 '얻음'이라는 뜻으로 아담과 하와가 이 아들을 낳고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창 4:1)고 즐거워했던 것은 구원의 언약이 이 아들을 통해 성취되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아담의 신앙을 이어받은 것은 가인이 아닌 아벨이었다.
아벨은 죄 있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과 화목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 자기의 죄를 대속해야 한다는 속죄의 원리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바탕으로 아벨은 양의 생명과 피를 하나님께 드리고 죄로부터 자유를 얻어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 중보자의 속죄가 필요하다는 신앙을 고백했다.
그러나 가인은 대속의 원리를 무시하고 자신이 임의대로 결정한 방식으로 제사를 드리는 악을 저지르고 말았다. 가인의 이러한 행위는 평소 하나님의 대속 원리에 대한 무관심으로부터 나왔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가인의 제사는 거절되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가인은 아벨을 죽임으로써 인정받지 못한 자기의 불의에 대하여 힘으로 항변하려는 죄를 행하고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항하는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 나가게 되었다(창 4장).
가인은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 나가기 위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지배해야 했다. 이후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고 통치하려는 가인의 사상이 범죄한 인류의 후손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삶의 원칙이 되고 말았다. 한편 여자의 후손들은 아벨의 뒤를 이어 중보자의 대속 원리를 신앙함으로써 영원히 죄로부터 구속받아 하나님과 화목하고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진정한 자유인으로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했다.
여자의 후손들은 점차 가인의 후손들과 교제하고 함께 살아가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통치를 거역하고 가인이 세운 힘의 지배 원칙 아래 빠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 땅은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고 인간들의 폭력이 지배하는 광포한 세상으로 바뀌고 말았다(창 6:1-4).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먹고살기 위해 가능한 모든 폭력을 동원하는 일이었다. 비록 힘의 철학이 지배하는 그 세계가 당대에 있어서는 상당한 문명을 일으킬 정도로 발달했지만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류는 오로지 먹고 살아가기 위한 것만을 삶의 목표에 두었다.
이 땅에 있어야 할 최소한의 공의가 사라지고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자 하나님은 온 세상의 인류와 무릇 호흡이 있는 모든 생물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셨다. 그러나 그중에서 아담에게 약속하신 은혜 언약을 신앙하며 죄로부터 자유를 가져다 줄 약속의 씨를 소망하고 있던 노아는 홍수 심판에서 제외되어 구원을 얻게 되었다.
노아 홍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약속하신 언약(창 3:15)을 깨뜨리지 않고 계속 역사 속에서 성취해 나가시는 여호와이심을 스스로 증명하셨다. 뿐만 아니라 그 언약을 신앙하는 자들에게 진정한 생명을 베풀어주신다는 구원의 증표를 보여주셨다.
2) 천지 창조의 목적 완수
노아가 홍수 심판 가운데에서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 (심어)두시고 그들로 하여금 인간의 이지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세상을 다스리게 함으로써 온 세상에 하나님의 지혜와 영광이 가득히 빛나게 될 것을 바라셨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바람을 저버리고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원수가 된 사탄의 편에 가담하는 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대권(大權)을 스스로 사탄에게 헌납하고 사탄의 종이 되어 버린 인간으로서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에 하나님의 영광을 현시하고 거룩한 문화를 건설해야 할 사명(창 1:26-28)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자의 (그) 후손'으로 오실 중보자이신 성자 예수님의 대속에 근거하여(창 3:15) 죄 있는 아담과 하와를 의롭다 인정하고 사탄의 편에 서 있는 아담과 하와를 본연의 위치로 돌아오게 하셨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종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 들어오게 되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사탄과 원수가 될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주어졌던 시대적인 사명(창 1:26-28)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까지도 회복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사건 이후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고 호칭한 것을 보면 아담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들의 위치가 회복되었음을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함을 입은 아담의 후예들은 이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 인간 본연의 임무를 각성하고 각기 자기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을 충실히 수행해 나가야 했다. 그러나 한번 죄로 인해 정상적인 길에서 이탈한 경험을 가진 인류는 근본적으로 죄의 오염과 죄의 결과가 가져다 준 결핍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하고 점차 세상의 조류와 타협하고 말았다.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문화를 창달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기도 하다. 아담의 후예들은 이 일을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한다. 그러나 가인의 사건 이후 그들은 끝내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수행하지 못함으로써 인류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것은 더 이상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발현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즉 이 땅에 하나님의 의와 사랑으로 통치되는 백성이 없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을 찾아볼 수 없다면 이 세상은 존속의 의미와 가치를 상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류의 존재 의미와 가치가 상실되어 가는 극한적인 위기에서 유일하게 인간 존재의 의의를 부여할 만한 인물이 있었다. 그가 노아였다. 노아는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패역해진 이 세상에 대하여 미련을 갖지 않고 장차 언약의 성취자로 오실 약속의 씨로 말미암아 인류가 죄에서 구속되는 날에는 지금과는 달리 하나님의 의와 사랑으로 통치되는 새로운 세계가 건설될 것을 신앙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에덴동산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쫓겨났으나 노아는 장차 언약의 성취자로 오실 약속의 씨인 여자의 후손이 오시어 근본적으로 죄의 모든 권세를 타파하고 인류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날에는 지금과 같이 광포하거나 패역하지 않은 전혀 새로운 나라가 건설될 것을 소망하고 있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 사건은 에덴동산에 심기어진 인류가 뽑히어 버려짐 당했음을 상징한다. 그리고 노아 홍수 사건은 인류의 죄에 대한 심판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이 세상에서 인류가 추방되었음을 재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노아와 그의 자손들이 그 죽음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주어진 이후에 새로운 인류가 재탄생하였음을 상징한다.
이렇게 새로 탄생한 인류를 약속의 땅에 다시 심으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은 이후 출애굽 사건에서 재확인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약속의 후손들을 다시 가나안에 심으신다는 사상을 출애굽 사건에서 다시 확인하였다(출 15:17).
이러한 시대적인 안목이 있었기 때문에 노아는 자기 시대에서부터 하나님의 의가 이 세상을 정당하게 통치해야 할 것을 각성하게 되었다. 노아는 그 시대가 에녹과 라멕이 예언하고 경고한 것처럼 사람의 악함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할 때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노아는 이 세상을 심판하겠다는 계획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하나님의 의도를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창 6:13-22). 인류 존폐의 위기를 인식한 노아는 자신이 홍수 심판에서 살아남는 것이 아담의 언약을 성취하는 길이며 장차 죄로부터 인류를 자유케 하기 위해 오실 약속의 씨를 보존하는 유일한 방편임을 깨달았다.
노아 홍수 이후 하나님은 노아를 새 인류의 조상으로 삼으시고 아담에게 주셨던 문화적 사명을 재차 수여하신다(창 9:1). 그리고 그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 절대적인 하나님의 보호가 있어야 할 것에 대하여 무지개를 증표로 삼아 언약을 체결하신다(창 9:8-17). 노아와 맺은 이 언약은 노아가 새롭게 역사적인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 생존에 대한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서 제거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었다.
이 약속의 이면에는 노아 시대상의 포악한 인류의 모습을 담고 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이 세상 역시 부패해졌기 때문에 인류가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땀을 흘려야 했고 급기야 생존을 위해 인류는 온갖 포악한 방법을 동원하기에 이르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가인이었고 가인은 힘으로 지배하는 세계를 건설했다. 이후 인류는 힘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 결과 인류는 먹고사는 일에 모든 힘을 쏟아야 했고 그것만이 살아남는 유일한 방편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노아 홍수 이후에 하나님은 생존에 대한 염려를 제거해 주시겠다고 무지개를 통해 약속해 주셨다. 노아는 이 하나님의 약속을 신앙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적극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류가 멸망되는 절대적인 위기에서 천지 창조의 목적을 궁극적으로 완성해 나갈 수 있는 기틀을 새롭게 마련할 수 있었다.
2. 바벨탑 사건과 하나님의 구원 계획
새 인류의 조상이 된 노아와 세 아들(셈, 함, 야벳)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1)는 문화적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했다. 그들은 아담 이후 줄곧 부패해져서 온 세상이 광포하게 되었던 옛 역사를 씻어버리고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이 세상의 통치 이념으로 구현되는 거룩한 나라를 건설해야 했다.
무엇보다 아담의 언약을 성취할 '(그) 약속의 씨'가 출현할 것에 대하여 소망을 가지고 그 약속에 근거하여 장차 죄의 세력이 무너진 새로운 나라가 건설되어야 할 것을 바라보는 신앙을 가져야 했다. 이 신앙은 노아의 후손들을 통해 점차 꽃을 피워 마침내 열매를 맺어야 했다.
그러나 노아 홍수 사건이 있은 후 100여 년이 지날 즈음 노아의 후손들은 이 문화적 사명을 수행하려는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미 아담의 후예들이 죄로 인해 나타난 결핍을 극복하지 못하고 가인이 세운 힘의 지배 아래 있는 세상의 통치 원리 속으로 잠식을 당했던 것처럼 노아의 후손들도 죄의 영향력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과는 정반대로 사람들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것은 바벨탑으로 구체화되었다. 바벨탑을 쌓기 시작함으로써 새 인류의 조상으로서 이 땅에 거룩한 문화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할 시대적 사명을 소홀히 하고 말았다. 새 인류가 바벨탑을 건설한 시기가 언제인가는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창세기 10장 21-25절을 참조해 보면 노아의 5세손이며 셈의 4세손인 벨렉(벨렉은 '나눔'이라는 의미)이 태어날 때였음을 알 수 있다. 이때는 노아가 701세 가량 되었고 셈이 199세 가량 되던 해였다(족보의 성격상 그 연대가 확실한 것은 아니다).
당시 새 인류의 시조인 노아와 그 아들들이 생존해 있었음을 감안할 때 그들은 노아의 목전에서 바벨탑을 건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노아의 후손들이 아담이 건설하지 못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시대적인 사명을 각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인간들의 나라를 건설하고 있음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1) 생존의 보장을 받은 노아의 후손들
노아의 후손들이 자꾸 번창한다는 것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1)고 하신 문화적 사명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여건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셨음을 의미한다. 홍수 사건 이후 생존에 대한 위협에서 보장해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노아의 후손들은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염려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보호 가운데 번창할 수 있었다. 창세기 10장은 이 사실을 자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여기에서 함, 야벳의 후손들이 각기 나라를 만들 정도로 번창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노아 자손들의 족속들이요 그 세계와 나라 대로라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창 10:32).
그들이 이처럼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은 ① 그들의 생존에 대하여 다시는 홍수로 멸절시키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더불어 어떤 이유에서든 살인을 하지 못하도록 금했고, ② 범죄 이후 땅의 소산을 먹기 위해서는 땀을 많이 흘리는 수고를 해야 양식을 얻을 수 있었으나 홍수 이후부터는 동물을 식량으로 섭취할 수 있어서 쉽게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창 9:2-17).
하나님께서 이처럼 그들의 생존에 대하여 특별한 배려를 해 주신 것은 그들이 생존의 염려로 구차하게 살지 않고 충실히 사람의 본분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사람이 마땅히 경영해야 할 인생을 경영하지 못하고 오로지 먹고사는 일을 위해 한평생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은 본래 하나님께서 인류를 이 땅에 내신 의도와는 달랐다.
이미 아담과 하와에게서 보아 알 수 있듯이 그들은 범죄하기 전에는 양식을 위해 조금도 수고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범죄한 이후로는 열심히 땀을 흘리지 않으면 생존에 필요한 식량을 해결할 수 없었다(창 3:17-19). 홍수 이후 새 인류로 태어난 노아의 후손들은 어렵지 않게 얼마든지 식량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함의 3세손인 니므롯은 사냥의 명수였는데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특이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창 10:8-9) 할 정도로 양식을 얻기 위한 사냥이 보편화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손쉽게 양식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생존에 대하여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생존에 대하여 위협이 적다는 것은 그만큼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미 아담과 하와가 생존에 대하여 위협을 받은 것은 그들이 범죄한 대가였던 것처럼 그들이 이처럼 생존에 대한 염려를 덜어버렸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들의 본연의 존재 의미를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자유스런 위치에 있음을 표시해 주고 있다.
그처럼 자유스럽고 자기의 본분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시도한 것은 자기들 나름대로 독자적인 통치 체제를 구축하고자 한 것이었다.
2) 인간의 세계를 구축한 노아의 후손들
새 인류가 바벨탑을 쌓을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정교하고 상당한 기술과 풍부한 노동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만한 기술과 노동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인생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함께 전 인류가 노력했다면 역사 이래로 가장 현저한 하나님의 나라와 문화를 세울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들은 그처럼 좋은 자질과 자본을 인간의 본분을 수행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세워나가기보다는 자기들 나름대로 추구하는 인생의 가치에 투자하고 말았다.
그들이 바벨탑을 쌓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맺은 언약의 성취나 천지 창조의 목적을 추구하는 인생의 본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는 그들의 생각은 하나님의 경영과는 정 반대의 방향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바벨탑을 쌓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고자 한 것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1)고 하신 문화적 사명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정면 대치되는 생각이다. 오히려 그들이 추구할 것은 하나님께서 문화적 사명을 내리신 의도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함께 연구하고 그것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신 하나님의 우주적인 경영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힘과 지혜를 모아야 했다.
그들의 경영은 하나님의 경영과 일치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정면 배치되는 것으로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의 공사를 용납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바벨탑을 쌓는 역사를 중단시키시고 세계 각처로 흩어버리셨다. 바벨은 혼잡, 혼란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담이 한번 범죄한 이후 인류는 정상적인 길로 가지 못하고 계속 하나님의 경영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범죄로 말미암아 한번 왜곡된 역사의 결과는 이처럼 계속해서 인류의 갈 길에 거침돌이 되어 방해를 하고 있다.
그러한 현상을 보면 볼수록, 역사 속에 그러한 현상이 강하게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근본적으로 죄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인류가 참다운 인생의 길을 갈 수 없다는 사실이 더 분명해진다. 따라서 바벨탑 사건을 통해 죄로부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실 약속의 씨를 기다리고 소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류의 역사의 성격을 보게 된다.
3) 새로운 언약 후손 '셈의 가계'
노아와 셈은 그러한 면에 있어서 매우 안타까운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홍수 이후 100여 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인류의 거대한 흐름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는데 있지 않고 자기들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길을 구축하고자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현상이야말로 어쩔 수 없이 죄의 영향력 아래 처해 있는 인간의 우매하고 미련한 짓임을 누구보다도 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진정한 구원, 즉 죄로부터 철저한 자유함을 입는 날은 언약의 후손이 오시어 사탄의 궤휼을 타파하는 날이어야 할 것에 대하여 간절히 소망하게 되었다.
그러한 소망과 믿음의 맥을 이어간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창세기 11장 10절 이하에 나오는 셈의 족보가 그것이다. 바벨탑 사건 이후 인류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한 뒤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창 11:10)고 시작하는 이 기록은 구속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바벨탑 사건 이후 200여 년이 지난 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하신 사건은(창 11:31) 이런 점에서 우리의 시각을 새롭게 해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