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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을 약속하시고 떠나시는 하나님의 영광
겔 11:14-25
1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5 인자야 예루살렘 주민이 네 형제 곧 네 형제와 친척과 온 이스라엘 족속을 향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라 이 땅은 우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신 것이라 하였나니
16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아내어 여러 나라에 흩었으나 그들이 도달한 나라들에서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17 너는 또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만민 가운데에서 모으며 너희를 흩은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모아 내고 이스라엘 땅을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다 하라
18 그들이 그리로 가서 그 가운데의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것을 제거하여 버릴지라
19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20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21 그러나 미운 것과 가증한 것을 마음으로 따르는 자는 내가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갚으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22 그 때에 그룹들이 날개를 드는데 바퀴도 그 곁에 있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도 그 위에 덮였더니
23 여호와의 영광이 성읍 가운데에서부터 올라가 성읍 동쪽 산에 머무르고
24 주의 영이 나를 들어 하나님의 영의 환상 중에 데리고 갈대아에 있는 사로잡힌 자 중에 이르시더니 내가 본 환상이 나를 떠나 올라간지라
25 내가 사로잡힌 자에게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모든 일을 말하니라
겔 11:14-25 / [포로민들에게 주는 위로] 그때 주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15) `너 사람아,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은 포로가 되어 유형지로 끌려간 네 모든 형제와 친척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을 두고 이렇게 큰소리 친다. `그들은 지금 끌려간 곳에, 주님에게서 아주 멀리 떨어진 그곳에 그냥 머물러 있게 될 테니 이제 이 나라나 우리 차지가 되었다' 16) 그러나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선포하여라.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그들을 멀리 떨어진 여러 나라에 데려다 놓고, 또 여러 민족들 속에 흩어 놓은 것이 사실이다. 그들이 그 먼 곳에서 나를 섬긴다고 해도 그것은 보잘 것이 없다. 17) 그러나 나 여호와는 그들을 그들이 흩어져 사는 그 여러 민족들 틈에서 데려다가 이 땅에 모아놓고 이스라엘 땅을 주어 차지하도록 하겠다. 18) 그들은 고향 땅으로 되돌아와 모든 우상숭배를 몰아내고 이 땅을 깨끗하게 할 것이다. 19)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변화된 새 마음을 주고, 또 새 정신을 불어넣어 주겠다. 내가 그들의 가슴속에서 돌처럼 단단해진 마음을 들어내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겠다. 20) 그러면 그들이 내 지시에 따라 살고 내가 준 명령들을 존중하며 지켜 갈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는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21) 그러나 마음이 우상들에게만 쏠려 있고 우상들이 좋아하는 그 더러운 방식에 따라 우상들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그 행위대로 벌을 되돌려줄 것이다. 나 주 여호와가 하는 말이다.' 22) [영광이 예루살렘을 떠나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아직 그룹들 위에서 빛을 환하게 내고 계시는데 그룹들이 날개를 펼치고 땅에서 떠올랐다. 바퀴들도 그들과 함께 떠올랐다. 23) 그러자 주님의 영광이 그 도성을 떠나 예루살렘 동편에 있는 산 쪽으로 사라지셨다. 24) 그때에 하나님의 영이 나를 높이 들어 올려 다시 바벨론으로 데려다 놓으셨다. 내가 바라보았던 환상도 내게서 떠나 높이 올라갔다. 25) 그래서 나는 주께서 내게 보여주신 모든 일을 바벨론에 포로로 함께 끌려온 동족들에게 자세히 보고하였다.
이스라엘의 멸망 중에도 하나님의 자비와 구원이 있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흩어진 백성들을 다시 모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부드러운 마음을 주고 새 영을 주실 겁니다. 이런 환상과 소망의 메시지를 에스겔은 포로 중에 있는 백성들에게 전합니다.
이스라엘 땅을 너희에게 주리라(14-21) 예루살렘 주민들은 북 이스라엘 족속을 향하여 “너희는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라”고 합니다(15). 이 말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동족들을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로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업과 무관한 자들로 규정하고 있습니다(15). 예루살렘 거민들이 그렇게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을 하나님의 기업과 무관한 자들로 규정한 데에는 포로된 동족은 죄인이요 자신들은 의인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결코 멸망하거나 포로로 잡혀가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이방인의 나라로 보낸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여러 나라에 흩었으나 다시 만민 가운데서 모을 것을 말씀하십니다(16-17).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게 될 하나님의 백성들은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것을 제거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에스라서를 보면 포로 귀환한 백성들이 이방 출신의 아내들을 내보내는 결단을 했습니다. 우상 숭배를 하지 않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결단한 백성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새 영을 주십니다. 몸만 본국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과 영이 새로워질 때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본국으로 돌아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속해서 우상 숭배의 삶을 경고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마음속에 여전히 악의 뿌리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다(22-25) 그룹들이 날개를 들자 바퀴들도 그 곁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도 그 위에 덮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읍 가운데서부터 올라가 동쪽 산에 머무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지성소에서 감람산에 머무는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성소의 그룹 위를 떠난 하나님의 영광은 처음에는 성전 문지방에 머물렀습니다. 다시 그곳을 떠나 동문에 머물렀습니다. 그 후 다시 성읍 중에 옮겨갔다가 감람 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예루살렘을 떠나기를 주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주의 영은 에스겔에게 임하여 환상 중에 예루살렘으로 옮기셨습니다(24). 예루살렘에서 행해졌던 온갖 죄악들을 보게 하셨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과 성읍에서 떠나는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에스겔은 자신의 생각에 따라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이 보여주셨던 모든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할 것을 다짐합니다(25).
적용: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함께 나누는 것은 참 중요한 일입니다. 최근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어 보십시오.
주님이 주신 현재로 충분하기에 이미 가진 것에서 감사하면 삶이 변하게 됩니다. 우리가 목표를 향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목표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날마다 싸워야 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은 잘하려고 하는 노력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이미 완성하신 일을 믿고 바라보며 안식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미 예수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복음의 현재성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 설 교 >
내가 잠시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겔 11:14~21 / 김경진 목사
온라인으로 주일 예배를 드리는 첫 번째 날입니다. 가정에서 가족과 함께 예배드리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 시간에 옆에 있는 분들과 인사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따뜻한 느낌일 것이라고 예상하며, 오늘 주시는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지난 월요일부터 우리는 온라인으로 새벽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어색하기도 하고 마음도 아팠습니다. 새벽기도회가 드려지는 시간마다 교회에 오셔서 멀찍이 예배당을 바라보시는 성도님들도 있었습니다.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교역자들을 바라보시는 분들도 보였습니다. 그런 분들을 모시고 예배당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성도님들도 안타까워하셨지만, 함께 기도하며 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새벽기도회 때마다 교회에 오셨다 돌아가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낮에도 교회에 오셨다 돌아가시는 분들이 계셨는데, 예배당 주위를 여러 번 돌며 기도하시는 분들이었습니다. ‘얼마나 교회를 사랑하면 그러실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동안 예배에 나가고 싶지 않을 때도 있지 않았습니까? 몰래 인터넷 예배를 드린 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병상에서 어쩔 수 없이 교회에 나오지 못한 분들도 있었을 것이고, 여행 중이라 예배의 자리에 함께하지 못한 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그동안 주일 성수를 제대로 하지 못한 분들이 꽤 있을 것입니다. 믿음이 약해서, 너무 바빠서,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서 예배드리지 못한 분들도 상당히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처럼 예배당 문이 잠기고 예배당에서 예배드릴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니, 불현듯 ‘주일 성수 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들고, 마치 죄를 짓는 것 같아 ‘어떻게 하나….’라는 생각도 드는 게 사실입니다. 참 묘한 일입니다. 항상 열려 있던 예배당 문이 닫힌 것을 보면서 ‘아, 우리 소망교회 예배당도 닫힐 수 있구나. 주일에 예배드리러 못 올 수도 있구나. 도리어 내가 거부될 수도 있구나.’라는 낯선 경험을 하는 오늘입니다.
오늘 우리 소망교회와 많은 한국의 교회가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 역사에서도 유례없는 기록으로 남겨질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20년 3월 1일, 1919년 3.1절 이후 101년째 되는 주일 이 아침입니다.
<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님도 함께하십니다. >
온라인 예배를 처음 드리면서 저는 ‘우리 성도님들에게 목회적인 관점에서 몇 가지 말씀을 드려야겠다.’라는 생각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조금은 설교의 틀을 벗어날 수 있겠지만, 우리 교우들이 꼭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내용을 나누고자 합니다.
예배당에서 예배드리지 못하게 되면서 어떤 분들은 굉장히 서운해하셨고, 또 어떤 분들은 노하기도 하셨습니다. “어떻게 예배를 중단할 수 있느냐?”, “어떻게 예배를 안 드릴 수 있느냐?”라고 하시며,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한국 교회에 이런 역사가 없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저도 설교하면서 “우리는 전쟁 중에도 예배를 쉰 적이 없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예배를 중단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예배를 중단할 수 있느냐?”라고 반문하시는 분들이 종종 계셨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 여러분과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예배의 중단이 아닙니다. 나아가 “예배가 중단된 적이 없다.”라고 말한 데는 “예배당에서 예배를 중단한 적이 없다.”라는 뜻이 아니라 “주일마다 예배를 드린 일이 중단된 적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조금은 다른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6.25 전쟁 중에도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전쟁 중에 예배당에 들어가 예배드렸던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공식적으로 예배당에서 예배드렸던 교회 역시 몇 교회가 되지 못합니다. 그것도 행운이었을 뿐이지, 대부분의 교회는 그런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의미는 있겠으나 자랑으로 앞세울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배당에서 예배드리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예배당이 폐쇄되거나 예배당 건물이 무너져 예배드릴 처소가 없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예배드렸을까요? 주일이 되면 거리에서 예배했고, 집에서 예배했으며, 피난처에서 예배했습니다. 포탄이 떨어지는 자리에서도 예배드렸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선조들이 “우리는 전쟁 중에도 예배를 쉰 적이 없다.”라고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예배당에 들어가서 드리는 예배를 쉰 적이 없다.”라는 뜻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가 처음 예배를 드렸을 때, 처음부터 예배당에서 예배드렸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가정에서 예배드렸고,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는 카타콤에서 예배드렸습니다. 카타콤에서도 들키지 않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장소를 바꾸며 예배드렸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신학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초대교회 교인들이 가지고 있던 분명한 관점이었습니다. “어디에 예배가 있는가? 누가 예배할 수 있는가?”라는 신학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 3:16)
초대교회 교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자신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주님이 함께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가 예배의 자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모이는 자리마다 예배가 있고, 교회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카타콤에서든 가정에서든 상관없이 예배자의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 3.1절인 오늘, 우리는 신앙공동체로서 나라 사랑과 인류애에 동참합니다. >
참 놀랍게도 오늘은 3.1절 101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101년 전 3월 1일은 무슨 요일이었을까요? 1919년 3월 1일은 토요일이었습니다. 그날 많은 사람이 거리로 나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거리에서 민족의 자결을 외쳤습니다. 우리나라가 독립해야 한다는 사실을 외쳤습니다. 그날이 3월 1일 토요일이었습니다.
그다음 날은 주일이었습니다. 그 주일,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역사는 그 내용을 우리에게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감옥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예배당들도 폐쇄되었습니다. 예배당에서 예배드릴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많은 교우가 잡혀 들어가면서 상황이 복잡해졌습니다. 3월 2일 주일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이런 상황이 전개되었고, 더 많은 예배당이 폐쇄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UCLA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옥성득 교수님이 최근 페이스북에 이와 관련된 자료를 올리셨습니다. 1919년 3월 19일 기독신보에 들어간 광고입니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금번 경성으로부터 각 지방 분요한 이때에 형편에 의하여 다소간 강대가 당분간 빈 곳이 있음이 물론이고 집회 금지 중에 처한 곳도 있을 줄로 생각하여지오니 청컨대 믿음에 굳게 서서 기도와 찬송으로 하나님을 노래하며 주일은 더욱 경건히 지켜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실 줄로 알고 이에 앙고하나이다.” (1919. 3. 19. 기독신보, 옥성득 교수의 한국 기독교 역사)
3월 1일 독립 선언이 있은 후, 긴 기간 한국 교회는 박해를 받습니다. 예배당은 폐쇄되기도 하고 막히기도 했습니다. 많은 목사님이 감옥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강단에서 설교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기독신보는 믿음에 굳게 서서 기도와 찬송으로 하나님을 노래하며, 주일을 더욱 경건히 지켜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기독신보가 전하는 ‘주일을 경건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폐쇄된 예배당 문을 뚫고 들어가 온전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뜻이겠습니까? 목사님을 감옥에서 구출해서라도 온전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뜻이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이 이미 계시는 바로 그곳에서 함께 모여 기도와 찬송을 하며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라는 권면이었을 것입니다. 설교할 목사님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모두 잡혀가 홀로일 수도 있습니다. 예배당에 못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신앙으로, 찬송과 기도로, 신실한 믿음으로 주님께 기도하라는 권면이었을 것입니다.
참 공교롭게도 이번 일이 3.1절 이후의 한국 교회에서 발생했습니다. 101년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101년 후인 오늘 아주 비슷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전염병으로 인해 교회당을 비우고, 예배당에서 예배드릴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하고 말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101년 전과 겹쳐질까?’ 물론 우연으로 볼 수 있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1919년 3.1절과 2020년 3월 1일이 무슨 연관이 있을까? 왜 우리는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할까?’라는 질문 아래 둘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두 사건을 비교하면서 하나의 동일한 관점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민족 사랑, 인류 사랑, 나라 사랑’입니다.
101년 전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침탈에 저항한 운동이었습니다. 3.1절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던 날입니다. 우리 민족의 미래를 스스로 지키겠다고 세계에 천명한 날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며 민족을 자랑하면서 이 나라 독립을 위해 분연히 일어났던 날이 3월 1일, 3.1절 아침입니다.
그리고 101년이 지났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전염병이 창궐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한 가지를 결정했습니다. 사회의 일원으로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우리와 함께하는 사회인과 시민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의 안위를 생각하며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것을 잠시 내려놓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천금과도 같은 주일 예배입니다. 그러나 예배당에 함께 모이는 것을 포기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 안에는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귀히 여겨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3.1운동이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모여 기미독립선언서를 살펴보고 애국가를 부르는 정도의 나라 사랑, 혹은 기억의 의미 정도가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돌입하여 보다 역동적이고 실천적인 나라 사랑, 민족 사랑을 구현해 가는 것입니다. 생각과 정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손과 발로 민족 사랑, 인류 사랑, 인간 사랑을 실천하는 길로 들어서 보는 것입니다. 이 길에 우리 교회가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된 것을 저는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 예배의 본질은 사람을 살리는 데 있습니다. >
물론 온라인 예배가 완전한 예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예배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미래의 희망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것은 일시적이며 상황적인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오래전부터 예배할 수 있는 장소를 찾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예배당을 짓고 함께 모여 일정한 시간에 예배하기를 기뻐했습니다. 때문에 예배당 차원에서의 교회 역시 기독교인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예배의 정체성이자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항상 아름다운 예배당에서, 혹은 멋지게 장식되고 준비된 장소에서 예배드렸던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카타콤에서 예배드리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감옥에서, 또 어떤 사람은 강가에서 예배드렸으며, 광야에서 예배드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오늘 전염병이 창궐하는 현실에서 우리는 온라인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렇게 잠시 예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며,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주님께서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이 첫날, 나아가 앞으로도 몇 주간 계속될 수도 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권면을 드리고자 합니다. 가능하면 홀로 예배드리기보다 가족이 함께 모여, 혹은 한두 가정이 함께 모여 예배드리면 좋겠습니다. 두세 사람이 함께 모이는 곳에 주님께서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생각해 보려는 것은 전염병에 대응하는 기독교인의 자세입니다. 전염병 앞에서 간혹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전염병이 오더라도 예배당에서 예배드려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실 텐데 왜 걱정하느냐고 합니다. 믿음을 가져야 하지 않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전염병 때문에 예배당에 나오지 못하는 것은 믿음 없는 행위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무한하고 우리를 잘 돌보고 계시는데 왜 믿지 못하냐고 야단치는 분들도 있습니다. 최근 보도되는 내용을 보니, 신천지가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큰 피해를 주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얼마 전 우리 교회 협동 목사님이신 박경수 교수님이 제게 작은 글을 하나 보내 주셨습니다. 종교개혁가들이 전염병의 상황 속에서 어떤 신학적인 태도를 취했는지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중세와 종교개혁 시대에도 전염병이 발생했습니다. 특별히 종교개혁가들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흑사병이 발병했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던 그때, 페스트로 많은 사람이 죽어 갔음을 여러 자료가 알려 주고 있습니다.
츠빙글리가 살던 제네바에는 당시 7,000명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페스트로 인해 2,000명이 사망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3분의 1이나 되는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는 보고입니다. 츠빙글리 역시 자녀를 흑사병으로 잃었습니다. 자신도 흑사병으로 두 달이나 고생하다 겨우 살아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 중에는 흑사병이 전파될 때 약을 받으려 하지도 않고, 흑사병에 감염된 사람들이나 장소를 피하지 않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하면서 마치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전염병을 전파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이 도리어 전염병의 숙주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보면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악한 자가 독과 치명적인 병을 퍼뜨렸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께 자비를 베푸셔서 우리를 지켜 달라고 간구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소독하여 공기를 정화할 것이고, 약을 조제하여 먹을 것이다. 나는 내가 꼭 가야 할 장소나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아니라면 피하여 나와 이웃 간의 감염을 예방할 것이다. 혹시라도 나의 무지와 태만으로 이웃이 죽음을 당하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데려가기 원한다면, 나는 당연히 죽게 되겠지만 적어도 내가 내 자신의 죽음이나 이웃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웃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나는 누구든 어떤 곳이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갈 것이다.”
1527년 마틴 루터가 쓴 『치명적 흑사병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가(Whether one may flee from a deadly plague)』라는 소책자에 담긴 글입니다. 브레슬라우의 목사 요한 헤스로부터 ‘치명적인 흑사병이 덮칠 때 그리스도인들이 도망하는 것이 적절한가’라는 질문을 받고 루터가 답한 글입니다.
루터는 이 글에서 “전염병이 발병했을 때 피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전염병이 하나님의 허락하심 가운데 악한 이들로부터 시작된 일이므로 전염병을 퍼뜨리는 일은 마귀의 행동과 같다고 했습니다.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자살을 하는 것과 같다고까지 했습니다. 나아가 루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집에서 불이 났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말하며 집 안에 있는 것이 합당한가? 물속에 빠졌는데 ‘이것이 운명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숨을 쉬지 않고 죽어 가는 것이 마땅한가?”
우리는 전염병의 위기 앞에서 두 가지 계명을 생각하며 판단하고자 합니다. 전염병이 돌면서 예배드릴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많은 분이 생각하는 계명이 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라는 계명입니다. 이 계명을 생각하며, 예배당에 꼭 나와 예배드려야 한다고 고집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계명이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지니라.’라는 계명입니다. 예배를 지키려다가 도리어 살인에 도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전염병의 상황에서 말입니다. 우리는 살인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잃지 않기 위해, 어쩌면 또 다른 의미의 자살이 될 수도 있기에, 내가 다른 이에게 전염병을 옮기지 않기 위해 예배의 방법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정확한 상황이자 대처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살인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안식일을 거룩히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탄식 앞에 새롭게 갱신하며 변화되는 교회가 됩시다. >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만약 루터가 인정하듯이 전염병이 악한 자들로부터 시작되었으나 하나님의 허락 아래 이루어진 일이라면, 또 우리가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이 왜 이 땅에 전염병을 일으키셨으며, 왜 그것을 방조하고 계시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일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합니다. 특별히 어느 한 종파, 혹은 이단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는 다른 무언가에 대한 심판으로 이해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와 같은 상황이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바로 나에게 주시는, 우리에게 주시는, 소망교회에 주시는, 모든 교회에 주시는 경고의 말씀이자 마지막으로 주시는 사랑의 권면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2020년 이 땅에 전염병이 번지는 것을 허용하시면서 하고자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이단인 신천지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셨습니다. 또 무엇이 있습니까? 대형교회를 비롯한 많은 교회가 예배당에서 함께 예배드리지 못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보내시는 하나의 신호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탄식이 오늘 우리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 교회를 보실 때 얼마나 힘드셨을까? 한국 교회를 보시며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한국 교회의 정치적인 상황을 보시면서, 교회의 모습을 보시면서,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목회자의 일탈과 욕심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물질주의로 가득 찬 한국 교회를 보시면서, 성공주의, 기복주의, 자기중심주의, 율법주의로 가득 찬 교회를 보시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세상을 정죄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은 바르게 서지 못하는 바리새주의를 보시면서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자기 생각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독단주의, 그것을 신앙으로 착각하는 착시 현상, 교회 직분자들이 정작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지 못하고 자기 안위와 영달만을 찾는 상황을 보시면서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이사야 1장 말씀이 떠오르는 오늘입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이사야 1:4)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이사야 1:12~13)
자신의 이름이 밝혀지는 것을 그토록 두려워하던 신천지가 교인들의 명단을 세상에 공개할 수밖에 없게 된 이 상황을 보면서, 또 많은 교회가 하나같이 예배의 자리에서 떠나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고 예배당을 비워야 하는 이 현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내가 더는 너희를 예배당에서 볼 수가 없구나. 내가 너희를 더 이상 예배당에서 만날 수가 없구나.”라는 하나님의 마지막 탄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가라고, 이 예배당에서 당장 나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처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은 더 이상 예배드릴 수도 없고, 안식일을 제대로 지킬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 성만을 바라보며 흩어져 있는데, 바로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 말씀해 주십니다.
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비록 내가 그들을 멀리 이방 사람들 가운데로 쫓아 버렸고, 여러 나라에 흩어 놓았어도, 그들이 가 있는 여러 나라에서 내가 잠시 그들의 성소가 되어 주겠다 하여라 (에스겔 11:16, 새번역)
우리가 흩어져 있는 바로 그곳에서 주님이 우리의 성소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일치된 마음을 주고, 새로운 영을 그들 속에 넣어 주겠다. 내가 그들의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 (에스겔 11:19, 새번역)
주님께서 흩어져 있는 우리 모두에게 역사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돌 같이 굳은 마음을 제하여 주시고,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영이 지금 예배드리는 모든 가정마다 넘치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교회가 되어 출발합시다. 새로운 교회가 됩시다. 우리가 다시 만나는 그날, 주님께서 다시 모아주시는 그날, 정결한 신부가 되어 주님 앞으로 나아옵시다.
남은 자의 은혜
겔 11: 14-21 / 김창인 목사
오늘은 에스겔 11장 14절에서 21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남은 자의 은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에스겔 선지자가 예언한 내용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본래 사독이라고 하는 유대나라의 유명한 제사장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세습적으로 제사장이었던 사람입니다. 그의 나이 25살이 되던 해에 바벨론 나라에 의해서 유대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중에 여호야긴이 사로 잡힌지 제5년에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 임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나이 30살에 선지자로 세움을 받았고 연대를 계산해 보면 22년 동안 포로 선지자로 활동을 했습니다. 나이 52살 이후에는 전혀 기록이 없어서 그 이후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 중에서 좋지 못한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는 순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설일 뿐입니다.
포로로 잡혀가서 끝까지 살아 남아 있는 자들 모두가 포로 생활이 끝나고 고국 땅에 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서도 철저하게 믿음의 자리에 남아 있는 사람들만이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일하셨습니다. 그 남은 자들에게 어떤 은혜를 주셨는지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임재의 은혜 (14-16)
요한계시록 21장은 하늘 나라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3절을 보면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 나라에 하나님이 사시는 천막이 있다고 합니다. 하늘 나라에 하나님이 계실 곳이 없어서 천막을 치고 계시겠습니까? 즉 텐트를 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일 뿐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과 철저하게 함께 거하신다는 것을 표현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하심에 대한 역사적인 사건이 있는데 그것이 배경이 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떠나 광야 생활 40년을 하고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부 천막을 둘러메고 진행하다가 진을 칠 때에는 모두 천막을 쳤습니다. 하나님의 성막을 중심에 세워 놓고 동서남북 사방으로 백성들이 천막을 쳤습니다. 그 성막 안에는 하나님의 법궤가 있습니다. 법궤 위에는 두 천사가 날개를 펴고 마주 대하여 섰고 천사가 서 있는 법궤의 뚜껑을 시은소라고 합니다. 그 곳에 하나님께서 좌정하셔서 은혜를 베푸신다는 뜻입니다. 밤에는 불 기둥, 낮에는 구름 기둥이 솟아올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황량한 광야 생활 속에서도 낮에는 구름 기둥을 보면서 '하나님이 저기에 천막을 치시고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 그리고 밤에는 불 기둥을 보면서 '하나님이 저기에 장막을 치시고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신다'라는 사실을 확실히 보고 체험을 했습니다. 물론 이 사건이 온전히 이스라엘과 함께 한 모든 역사의 완성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심은 하늘 나라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광야에서의 임재하셨던 역사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설명한 것이 요한계시록 21장 3절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하나님의 길로 전진하고 있는 자기 백성들과 하나님은 분명히 함께 거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이 사실은 하늘 나라에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코스로 달려갈 때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임재의 사실을 분명히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은혜를 임재의 은혜라고 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4절에서 16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예루살렘 거민이 너의 형제 곧 너의 형제와 친속과 이스라엘 온 족속을 향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라 이 땅은 우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신 것이라 하였나니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고 열방에 흩었으나 그들이 이른 열방에서 내가 잠간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라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즉 유대 나라 백성들이 바벨론에 침략을 받아 망하고 포로로 끌려가고 있을 때 예루살렘 거민이 그들을 조롱하고 저주하였다는 것입니다(14-15). 여기에서 말하는 예루살렘 거민이 누구입니까? 여기에 대한 배경을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바벨론 군대가 유다에서 포로를 잡아 갈 때 유다 백성을 전부 잡아간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살펴서 보고 부려먹고 써먹을 만한 사람들만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리고 데려가 봐야 별로 자신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은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도 살고 농촌에서 농사도 짓게 하였습니다. 그 때 붙잡혀 가지 아니하고 예루살렘에 남게 된 사람들을 예루살렘 거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사람들에게 온갖 조롱과 저주를 다 합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라 예루살렘과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셨다'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라는 말이 저주가 아닙니까? 조롱이 아닙니까? 그리고 이 땅은 우리에게 주셨으니 얼씬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같은 동족이 그런 불행을 당하고 있는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 때 하나님은 예루살렘 거민을 상대로 하지 않으시고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 본문의 16절입니다. 예루살렘 거민은 포로들이 잡혀가서 가나안 땅을 떠나게 되면 전부 하나님을 떠나서 망하게 되는 줄 아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희를 따라가서 너희가 포로 생활하는 중에 내가 잠깐 성소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소는 거룩한 처소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막이라는 뜻입니다. 포로 생활하는 백성들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이 성막을 치고 함께 계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본문이 주는 교훈을 잘 알아야 합니다. 유대 나라가 왜 망했습니까? 왜 그렇게 그 땅에서 쫓겨났습니까? 망할 짓을 해서 망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유대 나라가 망하기 전에 얼마나 선지자를 통해서 경고를 했습니까? 그럴 적마다 선지자를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내 알바가 아니라고 하면서 우상을 섬기고 제멋대로 살았습니다. 더 이상 너희의 꼴을 못 보겠다 하여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하여 멸망을 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망했다 혹은 어떤 큰 위험한 사고를 당했다고 하면 한번쯤 '내가 망할 짓은 하지 않았는가? 내가 하나님 앞에 정말 바로 서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인가?'라고 생각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망할 이유가 있어서 망했고 포로로 잡혀갈 이유가 있어서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멸망을 시켰다 할지라도 택한 백성은 그것으로 끝내지 아니하십니다. 반드시 고난을 통해서 연단을 시키고 바로 잡아 놓으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따라가서 성소가 되어 그 백성들과 70년을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로 된 백성들은 포로 생활의 고난 중에서도 임마누엘 또는 임재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우리가 죽어 죽어 하는 입장이 되고 심지어 내가 망할 짓을 했다고 할지라도 먼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여러분들의 성소가 되시어 임재의 은혜로 역사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주는 교훈입니다.
유대인 소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독일 경찰들이 유대인들을 이잡듯이 수색하여 체포할 때 부모는 벌써 독일 경찰들에게 붙잡혀 갔으나 용하게도 이 소녀 하나는 왈소라고 하는 곳에서 도망을 갔습니다. 갈 곳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산으로 들어갔고 산 속에 굴이 있어서 굴속에 들어갔습니다. 그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전혀 모르지 않겠습니까?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화란의 신학자 요하네스 할켄딕(johannes halkendijk)이라고 하는 신학 교수가 어떻게 입수했는지 이 소녀의 메모지를 공개하였습니다. 그 메모지에는 세 마디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❶ '나는 지금 빛나는 태양을 보지 못하나 밖에는 찬란한 태양이 있음을 믿는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내가 지금 눈으로 보지는 못하나 하나님은 엄연히 살아 계신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지금 독일 경찰들에게 얼마나 억울하게 학살을 당하고 곤욕을 치룹니까? 그래도 하나님은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❷ 이런 험악한 세상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나는 믿는다'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독일에 의하여 끔찍한 만행이 저질러지는 그런 와중에도 여전히 하나님은 선민을 사랑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셋째 '지금 하나님은 말씀하지 않고 계시나 이 굴속에서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심을 믿는다'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상의 기록은 분명히 이 소녀 또는 유대인의 신앙 고백입니다. 평안할 때 신앙을 고백한 것입니까? 자기 부모들은 학살의 현장에 끌려갔고 자신은 겨우 도망쳐 나왔지만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굴속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에 굶어 죽어 가면서 그 신앙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고난을 당할수록 더욱 강해지는 것이 유대인들입니다.
오늘 우리 택한 백성 특별히 교회 성도들은 형통한 중에, 부요한 중에도 이런 신앙을 고백 할 수 있어야 하겠지만 극한상황에 이르렀을 때에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신다'라는 신앙을 분명하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순교적인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실 때 그 이상의 영광이 어디에 있고, 그 이상의 은혜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와 같이 항상 임재의 은혜를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회복의 은혜 (17-18)
남자로서 예수님의 으뜸 가는 제자는 베드로입니다. 여자로서 예수님의 으뜸 가는 제자는 베다니 마리아가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한창 젊었을 때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비참했겠는가를 상상해 보십시오. 옷이나 제대로 입었겠습니까? 동네 아이들이 쫓아다니면서 온갖 조롱을 하고 행패를 부릴 때 그 현장에서는 마리아가 그 꼴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건강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 인간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 자기의 생활을 잃어버린 사람, 가정이 있지만 가정을 잃어버린 사람, 마지막으로 신앙을 잃어버린 사람이었습니다. 신앙이 제대로 된 사람에게 왜 귀신 일곱 마리가 들어가겠습니까?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예수를 판 가롯 유다 마음속에 사탄이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사탄이 다른 제자에게는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막달라 마리아는 온갖 잃을 것을 다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불행의 근원이 되는 일곱 마리의 귀신을 깨끗이 쫓아냈습니다. 그리고는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인간성을 회복했습니다. 생활을 회복하고 가정을 회복했습니다. 믿음을 회복했습니다. 저 예수님을 위해서 나는 평생에 목숨을 다 받쳐도 한이 없겠다 하여 예수님을 따르며 온갖 봉사를 다 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후에 예수 부활하셨다고 온 세상 인류 역사이래 제일 처음으로 증거한 사람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부활하신 후에도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얼마나 사랑했으면 가장 먼저 찾아 가셨겠습니까? 그녀는 얼마나 아름다운 생애를 살았습니까? 예수님에 의해서 잃어버렸던 것을 전부 회복했습니다. 회복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건강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재산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도 하고 때로는 믿음을 잃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모든 것을 회복 시켜 주시는 분은 내 스스로가 아닌 예수님이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반드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7절에서 18절을 보면 '너는 또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만민 가운데서 모으며 너희를 흩은 열방 가운데서 모아 내고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다 하라 그들이 그리고 가서 그 가운데 모든 미운 물건과 가증한 것을 제하여 버릴찌라'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거민이 포로로 잡혀가는 백성들에게 온갖 저주와 조롱을 할 때 하나님께서 포로로 잡혀가는 백성들에게 계속적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바벨론이 쳐들어오거든 절대 반항하거나 도망가지 말라 차라리 항복하고 붙잡혀 가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지자들은 외쳤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포로로 잡혀간 자들에게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희를 흩어 버린 것도 사실이요,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남왕국 유다는 바벨론에 멸망을 당하고 포로로 잡혀가지만 내가 흩어진 가운데서 너희를 반드시 불러모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옛날 조상의 기업을 다시 주어 회복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기업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가서 그 전에 그렇게 만들어 놓았던 온갖 가증하고 미운 물건 즉 우상이란 우상을 전부 타파해 버리고 파괴된 성전을 세우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믿음 회복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포로에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성전재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성전 회복입니다. 그리고 훼파 되었던 예루살렘 성을 다시 쌓으므로 예루살렘이 회복되고 마카비 시대에는 나라가 회복되기도 합니다. 전부 하나님에 의해서 회복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회복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끝까지 믿음의 자리에 남아 있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만 하면 반드시 우리에게 회복의 은혜를 주신다는 교훈입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는 않고 회복만을 요청한다고 해서 회복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죽어도 회복이 되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되는 것입니다. 포로들은 '우리가 무엇을 잘 못 믿었나?'를 되새겨 보도록 하는 훈련을 70년 동안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망할 짓을 하고 망했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그것을 이용하여 70년 동안 훈련시켜 바로 세워주셨습니다. 그리 한 후에야 모든 것을 회복해 주셨습니다. 이 때 유대 포로 중에 '아니요'라고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포로로 남아 있는 사람들 중에 전부가 고국으로 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소수가 돌아왔을 지라도 남은 자의 회복의 은혜였습니다.
제가 부산 대성교회에서 강도사로 시무한 적이 있습니다. 대청동이라고 하는 곳은 아래쪽으로 내려오면 부자들이 살고, 위쪽으로 올라가서 산동네로 가면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그 산동네는 판잣집에 많은 사람들이 사는 곳인데 어느 날 심방을 갔습니다. 대 심방이나 일제 심방은 한번 하므로 끝납니다. 계속해서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심방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유고 가정 즉 교회에 잘 안나오는 가정 또는 병자가 있는 가정에 심방을 갔더니 심방 받는 집 옆에 있는 여집사님이 알고 성경 찬송을 들고 예배에 참석을 했습니다. 찬송을 힘차게 불러 주고 함께 예배를 드리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 여집사님은 심방 대원이 아니기 까닭에 한 집만 심방을 해 주고 자기 집에 돌아갔습니다.
저는 몇 집을 심방하고 돌아오는 중에 저를 찾아왔습니다. 얼마나 불안해했는지 모릅니다. "강도사님! 큰 변이 났습니다" "왜요?" "제 남편은 노동을 하면서 가난하게 살지 않습니까? 예수도 믿지 않구요. 그런데 애써 마련한 양복을 한두 번 입고 곱게 걸어 모셔 놓았는데 옆집에 가서 예배하는 중에 도둑이 와서 들고 가 버렸습니다. 저는 남편이 들어오면 맞아 죽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저는 신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양복 한 벌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군복을 물들여서 입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부산 대성교회에 부임해 갈 때 돈을 꾸어서 신사복 한 벌을 맞추어 입고 갔습니다. 그래서 다달이 빌린 돈을 갚아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그 집사님 남편의 양복을 맞추어 줄 돈이 있겠습니까? 참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 예배합시다"라고 하여 그 집에 들어가서 예배하고 위로하고 돌아왔습니다.
사택에 돌아와서도 얼마나 찜찜했는지 모릅니다. 저녁때가 되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문을 열어 보니 그 여집사였습니다. 여집사가 예쁘게 생긴 것은 아닌데 얼마나 생글생글 웃던지 꼭 천사 같았습니다. 못생긴 여자도 웃으면 천사 같고 아무리 예쁘게 생긴 여자도 독이 오르면 꼭 악마 같습니다. 그래서 "집사님 왜 그렇게 기뻐하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강도사님 기뻐해 주십시오. 도둑이 양복을 두 손에 받쳐들고 찾아왔습니다"라고 합니다. 부산에 가면 범일동 시장이라고 하는 곳이 있습니다. 이 도둑이 그것을 팔기 위하여 여기 저기 기웃거리고 있을 때 마침 순찰을 나왔던 경찰에게 붙들렸습니다. 붙잡혀 파출소에 가서 한참 문초를 받으니 '아무 곳에서 도둑질을 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곳에 직접 가서 확인을 하자 하여 두 손으로 양복을 받쳐들고 찾아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딸이 큰 변을 당하겠으니 그렇게 찾아주셨습니다. 그것도 놀다가 잊어버린 것입니까? 믿음 약한 사람의 집에 가서 함께 기도하고 예배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까? 요즘은 아무것도 아닌 문제이지만 그 때는 또 그 집사의 가정에는 아주 큰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이 그 여집사님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생기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회복의 은혜가 얼마나 귀합니까?
셋째, 새 사람의 은혜 (19-21)
본문으로 돌아가서 19절에서 21절을 보면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그러나 미운 것과 가증한 것을 마음으로 좇는 자는 내가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갚으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포로 된 그 백성들을 전부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새 신 즉 성령을 부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주시면 우리들의 신분의 변화가 일어나 새로워집니다. 둘째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준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마음이 변화되면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바뀌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법을 철저히 지키게 하므로 나는 저희의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관계가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씀을 드리면 성령으로 새로운 신분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시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새 사람을 지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기적 중에 기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그러나 나 자신에게 두고 기적 중에 기적은 죽어 죽어 하던 병에 걸렸다가 살아나는 것입니까? 일년을 살면서도 감기 한번 안 걸리는 것은 기적이 아닙니까? 물론 기적이지만 기적 중에 기적은 아닙니다. 완전히 망했다가 다시 흥하게 된 것입니까? 이것이 기적은 될는지 모르지만 기적 중에 기적은 아닙니다. 기적 중에 기적은 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믿지 않던 내 남편, 술주정을 부리고, 싸움질합니다. 집에 들어오면 살림을 뒤엎습니다. 차리리 없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폐인이 된 인간이 완전히 새 사람이 된다면 세상에 이런 기적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람의 변화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포로 된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완전히 새 사람을 만들어 기적을 일으켜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사람 됨의 은혜입니다. 우리들 자신도 날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들 가정에 믿지 않는 식구들도 하나님이 새롭게 하는 새 사람됨의 은혜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❶ 남은 자의 받은 은혜는 첫째 임재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평안하고 형통할 때만 함께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죄를 짓고 망하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함께 계실 뿐 아니라 우리를 연단 하실 때에도 하나님이 반드시 함께 계시는 임재의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❷ 회복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살다 보면 하나님이 주신 온갖 은사를 우리의 잘못 때문에 잃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보다도 믿음을 바로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할 때 반드시 회복시켜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❸ 새 사람됨의 은혜입니다. 나 자신도 날로 새로워지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가족 중에 믿지 아니하는 식구, 즉 속을 썩이는 식구를 하나님께서 새 사람이 되게 하실 때 그 가정에 변화가
마음을 치료하시는 하나님
에스겔 11:19-20 / 정필도 목사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20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제외가 쪽에 먼 친척되는 자매 한 분이 어려서부터 집안이 몹시 가난하다보니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하고 남의 집에 들어가 허드레 일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시골에서 올라온 건실한 청년과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그 청년은 어려서부터 목수 일을 해왔던 사람이었습니다. 둘이서 열심히 일을 하여 돈을 모아 집도 마련하고 서울의 종로 요지에 목공소도 냈습니다. 이 자매는 키는 컸으나 얼굴이 그다지 예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남편은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건강하고 아들 딸 쑥쑥 잘 낳아주는 마음씨 착한 아내를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내가 친정 동생으로 인해 남편 몰래 빚을 지게 되었고, 종종 사고를 치고 누나를 찾아와 도와달라고 졸라대는 동생이 안쓰러워 나중에는 남에게 돈을 빌려서까지 꿔주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이자에 이자가 붙어, 살고 있는 집을 팔아도 다 갚을 길이 없을 정도로 빚이 엄청나게 불어났습니다.
할 수 없이 부인은 남편에게 사실대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얘기를 듣고 남편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주위에서는 “처음부터 신랑과 의논하고 했어야지. 어째 남편 몰래 그런 짓을 했느냐?”고 야단들이었습니다. 그동안 고생 고생하여 모은 돈으로 집도 사고 가게도 차렸는데 하루아침에 다 날아가게 생겼으니, 주위에서 “한 가정이 깨지게 생겼구나. 이혼하는 건 아닌가?” 가슴조리며 우려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 남편은 “이 세상에 당신같이 착한 여자가 어디 있겠나, 돈이란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생기는 거 아니요. 또 다시 벌면 되지.”라고 하며 마음을 너그럽게 먹고 그 부인을 용서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후 이 부부는 지금까지 별탈 없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을 가장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돈 많은 사람,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 많이 배운 사람,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 인기 많은 사람...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에게 있어서 외적인 조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본 마음입니다. 한마디로 좋은 사람이란 마음이 착하고 마음이 좋은 사람을 말합니다. 다른 것은 다 좋아도 마음이 고약하고 마음이 삐뚤어져 있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과 같이 사는 사람도 불행한 사람이 됩니다.
사람의 외모보다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삼상 16:7).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람의 인물이 잘났는지, 학벌이 좋은지, 직장이 어딘지, 재산이 얼마인지, 기술이 있는지, 앞날에 대한 비전이 있는지... 이런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고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 하나 삐뚤어지면 아무리 다른 것이 다 좋아도 아무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중심 - 그 마음을 보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3:3절에서 예수 믿는 여인들을 향해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고 충고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저울질해 보실 뿐만 아니라 잠언 23:26절에서, 우리의 마음을 달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잠언 23:7절을 보면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이 마음속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평소에 어떤 마음을 가지느냐 하는 것에 따라 사람이 달라집니다. 좋은 마음을 가지고 좋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 되나 나쁜 마음을 품고 나쁜 생각을 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악한 마음을 품고 악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자연히 악한 사람이 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 되며, 교만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 됩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고, 사람을 미워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아주 고약한 사람이 됩니다.
또 경건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경건한 사람이 되고, 더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은 더러운 사람이 됩니다. 진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 되고, 거짓된 마음을 가진 사람은 거짓된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태리의 문인 [빠삐리]는 “오늘날 세계의 문제는 인간의 문제이며, 인간의 문제는 마음의 문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골치 아픈 문제들이 생기는 것은 인간들의 마음이 삐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옛날에 비해 얼마나 잘먹고 잘 입고 좋은 집에서 잘 삽니까? 날이 갈수록 문명의 이기가 발달하여 얼마나 생활이 편리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골치 아픈 문제가 과거보다 더 많이 일어나는 주된 원인은 인간 자신들 때문입니다. 왜 인간이 문제입니까? 한마디로 인간의 마음이 병들어서 그렇습니다.
잠언 18:14절을 보면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사람은 마음먹기에 따라 병이 생기기도 하고 병이 낫기도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의 육신은 마음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기 때문입니다. 죽을병에 걸린 사람도 마음 상태에 따라 다시 살수도 있고 그대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미국의 스티브란 이름의 청년이 생명보험에 가입하기 위해 종합검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검사결과 에이즈 바이러스가 검출되어 보험에 가입할 수 없다는 놀라운 통보를 받았습니다. 평소 건실하게 살아왔던 이 청년은 검사결과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뼈가 바싹 바싹 마르는 심령의 고통을 철저히 경험했습니다. 얼마 후 이 청년은 자신의 가정주치의를 만나 사실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의사는 평소에 그렇게도 건강했던 청년이 며칠 사이에 얼굴이 창백해지고 두 눈이 충혈되었으며, 탈진으로 인해 걸음조차 제대로 걷지 못하는 중환자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너무 놀라 다시 검사할 것을 권유했고, 재 검진 결과 에이즈 음성이라는 판정이 나왔습니다. 예전과 정 반대의 검사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결국 먼저 번 검사는 오진이었습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은 그 청년이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았는데도 그의 면역세포의 숫자는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의 수치보다 더 좋지 않게 나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2주 후 또 다시 검사해본 결과 의외로 면역세포가 정상인보다 훨씬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한 사람의 건강상태가 이처럼 며칠 사이에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왔다갔다 할 수 있을까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검사 결과 나쁜 소식을 들은 이 청년은 극도로 근심하며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면역기능이 아주 나빠진 것입니다. 그러나 며칠 후 예전의 검사결과가 오진으로 판명되었다는 좋은 소식을 접하게 되자, 그 기쁜 소식이 심령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주어서 그의 면역체계를 전보다 더욱 더 강하게 회복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영국의 킹스 병원 연구팀은 조직검사를 통해 유방암으로 판정된 여성들이 향후 암에 대처하는 자세에 따라 수명이 죄우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암이란 진단을 받고 좌절하며 죽음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인 여성의 80%는 5년 내에 죽은데 반해, 암과 싸우려는 의지를 갖고 산 여성의 90%는 5년 이상 생존했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어떤 마음을 갖고 사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수많은 환자들을 치료하실 때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지방 부족 중에 아주 용하다는 무당은 매년 그 해에 죽을 사람을 한두 명씩 지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지목받은 사람은 그 해에 나이가 많든 적든 예외 없이 다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 마을 사람들은 그 무당을 마치 신처럼 받들며 숭배했습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어떤 사람이 어째서 그런 일이 있는지 조사해보았습니다. 조사결과는 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해에 죽을 사람으로 지목된 사람은 그 날로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식음을 전폐하다보니 자연히 굶어죽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현대의 정신병중에 [건강 염려증]이라는 병이 있습니다. 이 병에 걸리면 스스로 중병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 병원 저 병원을 열심히 찾아다니며 온갖 검사를 다 해보지만 처음에는 뚜렷한 병명을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의사는 이런 사람에게 신경성이므로 염려하지 말라고 충고를 합니다. 그러나 이 병에 걸린 사람은 계속 염려하며 삽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걸렸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병이라는 진단을 받게 됩니다. 이 사람은 예전에 자신의 병명을 진단하지 못했던 의사들은 다 엉터리 의사였다고 욕을 하지만, 사실은 아무 병도 없으면서 마치 자신이 병들었다고 생각하고 병자처럼 살다보니 계속적으로 면역기능이 떨어지면서 진짜 환자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생각을 잘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문제 중의 가장 큰 문제는 마음이 병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마음을 잘 가져야 합니다. 육신의 병이 생겨도 문제가 되지만 마음의 병은 육신의 질병보다 더욱 치명적인 문제가 됩니다. 사실 육신의 병은 마음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병들면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고 말씀했습니다(잠 18:14).
사람의 마음이 병들게 되는 것은 생각을 잘못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은 대문이 있고 울타리가 있어서 아무나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는 문도 없고 울타리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통제할 길이 없습니다. 한 순간에도 별별 생각이 다 들어옵니다.
마태복음 15:19절을 보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남을 미워하는 마음, 죽이고 싶은 마음, 음란한 마음, 원망하는 마음... 이런 악한 생각이 사람을 병들게 만듭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악한 생각이 계속되는 이유는?
1. 세상이 점점 악해지기 때문입니다.
신문, 방송, TV, 잡지, 영화... 이런 전파매체와 문화를 통해 전해 듣고 보는 악한 것들이 우리 머리 속에 입력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악한 생각들이 자꾸 떠올라 사람을 악에 물들게 만듭니다.
2. 우리의 마음속에 아직도 타락의 속성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아 17:9절에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3. 마귀가 계속적으로 악한 생각을 집어넣어 주기 때문입니다.
해서는 안 되는 생각까지도 마구 떠올라 우리의 마음이 몹시 더럽혀집니다.
결국 이런 잘못된 생각들이 마음을 병들게 하고 육신도 병들게 만듭니다. 사람이 불행해지는 것은 마음이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악한 마음, 더러운 마음, 미워하는 마음, 거짓된 마음, 불안한 마음, 괴로운 마음, 분노하는 마음으로 가득차게 되면 우리의 마음도 지옥이 됩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잘 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불행한 사람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무엇보다도 마음에 천국을 이루어야 합니다. 늘 마음이 편안하고 기쁘고 즐겁고, 불만이 없고 만족하고 생각하면 감사한 것뿐이고, 찬송이 절로 나오고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는 이런 사람이 마음천국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재산이 얼마냐? 얼마나 높은 자리에 있느냐? 아파트 평수가 크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으로 복을 주고 싶어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복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복을 받으려면 먼저 복 받은 마음부터 가져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룻이란 여인은 불행하게도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홀로 된 시어머니를 위로하며 평생을 같이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하나님께서 보아스라는 청년을 만나게 하시고 그와 혼인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룻은 다윗의 조상이 되는 가문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룻은 마음하나 잘 가짐으로 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그릇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복 받을 마음을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는데, 이 마음을 갖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한 마음이나 병든 마음이 내 힘으로는 치유되지 않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신 즉 성령을 보내주셔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고쳐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실 수 있습니다. 병든 마음을 고쳐주실 수 있습니다. 병든 마음을 고치는 길은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는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기도와 찬양을 통해 은혜를 받을 뿐만 아니라 예배를 통해 말씀을 듣는 가운데 은혜를 받아야 신자구실을 제대로 하게 되고, 은혜를 받아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축복을 받습니다.
성도들이 은혜를 받으려면?
쥱 마음 문을 열어야 합니다.
설교자와의 관계가 좋은 사람은 어떤 설교를 들어도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설교자와의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은혜로운 설교가 강단에서 선포되어도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와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먼저 생각을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남의 말만 듣고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고, 서로 허물을 용서해줄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축복하며 중보기도 할 수 있다면 마음에 쓴 뿌리가 다 없어지고 어느 새 설교자와 좋은 관계가 이루어지게 될 것이며, 은혜를 듬뿍 받게 될 것입니다.
쥲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좋은 것을 주십니다(시 107:9).
쥳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면 은혜를 받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깨닫게 되고, 회개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죄사함을 받은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충성하게 됩니다. 아무쪼록 마음관리를 잘하셔서 언제나 마음 천국을 이루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다 받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축복받는 마음
겔 11:17-20 / 강용규 목사
루마니아 출신 이오네스코 유진이라는 극작가가 ‘코뿔소’라는 책을 썼습니다. 평온한 마을에 코뿔소 한 마리가 갑작스럽게 등장해 사람들을 자꾸 뿔로 받아죽게 하자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이 코뿔소가 된다는 이야기인데, 그 책의 주인공이 “어찌 사람이 코뿔소가 될 수 있느냐” 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욕심으로 인해 사람이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사람이 마치 짐승처럼 여겨지는 현실에서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살아가는 길이 무엇일까를 물으며 그 해답을 찾으려 합니다.
창세기 26장에서 이삭은 자신이 살던 지역에 기근이 심해 그랄 지방으로 이사합니다. 그랄 지방은 이스라엘의 다른 지역에 비해 살기가 꽤 괜찮은 지역입니다. 그런데 나그네로 들어온 이삭에게 그 땅의 사람들은 좋은 땅을 주지 않고 박토 중에 박토를 내주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삭이 그 박토에서 백배의 열매를 맺어 거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다윗에게 기름 부으셨습니다. 이새의 집에서 얼굴이 붉을 정도로 가장 어리고 부족한 다윗을 왕으로 택하셔서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의 생각과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택하실 때에도 당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과 같은 귀족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택하신 것이 아니라, 그저 갈릴리 바다에서 어부로 살아가던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본문 에스겔서 11장에서 하나님은 타락하고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용서하시며 부르십니다. “다 내게로 와서 너희 가운데 가증한 일들, 더러운 일들을 내어버려라. 너희 가운데 선한 마음을 품으면 내가 너희 마음속에 새 신, 성령을 부어주겠다. 그리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축복받는 마음은 정결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나라도 없고 가난하고 노예와 같았던 히브리 백성들과 계약을 맺으시며 그들을 존귀한 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천대받던 이스라엘을 존귀한 백성으로 축복하시기 전에 먼저 “너희 스스로를 정결케 하라, 성결케 하라, 정결한 마음을 품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야곱의 열두 아들들이 세겜 족속들을 할례 받게 한 뒤 급작스레 습격해서 세겜 남자들을 모두 죽입니다. 그러자 주변 나라들이 봉기해서 일어났고 야곱은 위협을 느낍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은 아들들을 데리고 벧엘로 올라갑니다. 벧엘로 올라가기 전 야곱이 자손들에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우리 안의 모든 가증한 물건들, 더러운 물건들을 모두 내어버리라.” 그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정결한 마음으로 벧엘에 올라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으셨습니다. 야곱은 그곳을 ‘엘벧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정결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십니다. 여호수아 6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 성을 점령하기 전에 할례를 행함으로 몸에 있는 모든 더러운 것을 잘라버렸습니다. 그런데 아이성을 점령하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 가운데 범죄가 있었음에도 정결예식을 행하지 않은 채 더러운 마음으로 아이성을 차지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시편 51편 다윗의 기도처럼 “하나님, 먼저 내 마음에 정결한 마음을 주십시오.”하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정결한 마음으로 주님의 마음으로 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고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귀한 아들, 딸로 들어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웃시야 왕은 주전 783년부터 742년까지 유다를 통치한 왕입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며, 농업과 목축 정책을 잘 펴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왕입니다. 역대하 26장 7절에서 “하나님께서 웃시야를 도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웃시야 왕의 성공은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있었습니다. 하나님 의지한다고 할 때 중요한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할 때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모든 일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입니다. 솔로몬 왕이 초기 통치를 잘한 것은 어리고 부족하지만 하나님께 지혜를 간구하였고, 일천번제를 하나님 앞에 드림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내가 주님을 의지하지만 모든 일이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착각은 내 뜻을 마치 하나님의 뜻으로 관철시키는 것입니다. 모세는 요단강을 건너 하나님이 주신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그곳을 보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만 너는 이 땅에서 나에게로 올라와야 된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모세는 자기의 뜻을 접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느보산 꼭대기에서 기도하시다가 하나님나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준비를 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윗에게 있지 않고 솔로몬에게 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의지한다고 할 때 중요한 것은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축복받는 마음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코뿔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들이 악착같이 사니까 나도 악착같아야 되겠다! 남들이 욕심을 가지고 사니까 나도 욕심을 가지고 살아야 되겠다!’ 그러나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를 축복하는 것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성령의 능력을 받아 가는 곳마다 세상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축복과 능력을 받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언약 아래 있는가?
겔 11:16-20 / 문기태 목사
에스겔은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포로로 바벨론으로 끌려가던 시대에 하나님께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 활동하던 선지자입니다. 격변의 시기에 하나님께 말씀을 받아 전하였으므로 볼 꼴, 못 볼 꼴을 아주 많이 보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제대로 대접을 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유대 나라가 망하고 많은 이들이 죽거나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가던 무렵이 배경입니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이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이들에게 말합니다. "이제 이 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셨다. 너희는 죄가 많아 먼 나라로 끌려가니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라." 포로로 끌려가는 동족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위로하지는 못할 망정 '너희는 죄를 많이 짓고 벌을 받아 이방 나라로 끌려가니 하나님에게서 끊어졌다. 하나님의 기업과도 상관이 없다. 남아 있는 우리들만이 하나님의 기업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 사람들 가운데로 쫓아 버렸고 여러 나라에 흩어 놓았어도 그들이 있는 여러 나라에서 잠시 그들의 성소가 되어 주겠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잠시 징계하시려고 여러 나라로 흩어 놓았지만 아주 버린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어느 곳에 가서 살든지 하나님께서 친히 그곳까지 가셔서 그들이 그곳에서 예배하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고 예배를 받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을 징계하시지만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여러 나라에 뿔뿔이 흩어져 살지만 그 백성들을 다시 모아 들이고 이스라엘 땅을 기업으로 다시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그들이 그곳에 가서 하나님의 눈에 보기 싫고 역겨운 우상들을 없애버리면 그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새 마음과 새로운 영을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새로운 영이 무엇일까요? 성령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같은 시대에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던 예레미야 선지자에게도 같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렘31장33절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옛 언약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지키지 못하고 죄 가운데 살면서 하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제 새 언약을 주십니다. 새 언약 백성을 삼으십니다. 새 언약은 옛 언약과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새 언약에는 옛 언약에는 없던 것이 있는 데 그것은 성령에 대한 약속입니다. 19절에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라고 하나님께서 명확하게 약속하십니다. 표준 새 번역은 '내가 새로운 영을 그들 속에 넣어 주겠다.'더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는 것을 실패했기 때문에 성령님을 우리 안에 보내 주셔서 우리가 성령님을 힘입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도와주시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시면 억지로 믿으려고 몸부림치지 않아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쉽게 믿어집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시면 의지가 연약한 사람도 삶의 변화가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면 우둔한 사람도 하나님의 뜻이 깨달아지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쉬워집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 교회 안에는 옛 언약에 머무르려고 하는 백성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새 언약을 주시려고 세상에 오셨으나 여전히 옛 언약 아래 머물며 예수님을 거부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지금도 옛 언약을 붙들고 자기 힘으로 잘 믿어 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을 보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을 모셔 들이지 않고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자신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잘 섬기겠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미 유대인들이 실패한 방법인데도 자신은 성공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옛 언약 아래에서 나와 새 언약 백성이 되기 바랍니다. 옛 언약을 붙들고 씨름하며 시간 낭비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언약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새 언약의 핵심은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을 우리 안에 모셔 들여야 합니다. 성령님을 모셔 들일 뿐 아니라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성령님이 주시는 감동에 민감해야 합니다. 그리고 늘 성령님께 도우심을 구하고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항상 성령님을 인정하고 성령님께서 우리를 주장하시도록 주도권을 내어 드려야 합니다. 성령님께 붙잡혀 살아가는 사람은 새 언약 백성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없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고 자기 방법대로 잘 믿어보려는 사람은 옛 언약 백성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여러분이 새 언약 백성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더 구체적인 증거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1. 새 영이 우리 안에 오시면 굳은 마음을 없애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십니다(19).
하나님께서 새 영을 주시겠다고 하시며 이어지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새 번역 성경은 '내가 그들의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로 번역하였습니다. 돌 같이 굳은 마음이 무엇일까요? 완고한 마음입니다. 즉 고집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속 선지자들을 보내어 우상에서 돌아서고 회개하라고 하셨지만 그들은 고집스럽게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바른 말을 하는 선지자들을 학대하고 죽였습니다. 결국 멸망 당했습니다. 지난 번에 누가복음 15장을 본문으로 '잃어버린 두 아들'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는데 기억하십니까? 아버지가 나와서 불평하는 큰 아들에게 '집 안으로 들어가 나와 함께 잔치를 즐기자' 하지만 큰 아들은 돌같이 굳은 마음으로 고집스럽게 들어가지 않고 누가복음 15장은 끝이 납니다.
돌같이 굳은 마음에는 은혜가 임해도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돌같이 굳은 마음에는 크고 놀라운 사랑이 부어져도 아무 감동도 감격도 감사도 없습니다. 불평과 원망과 불신으로 가득 찬 돌 같은 마음은 불행의 나락으로 우리를 몰고 갑니다.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언제나 자기만 옳다고 주장합니다. 누가 뭐래도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항상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난하며 자신은 합리화합니다. 마음에는 의심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시기심과 욕심으로 가득 차 주위의 사람들에게 상처를 많이 입힙니다.
고집과 아집으로 가득한 굳은 마음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강팍하고 완악한 마음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누리며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사단은 사람들의 마음을 돌같이 단단하게 굳어지게 하여 서로 상처를 주게 합니다. 교만하고 자아로 충만하며 판단하고 비난하며 상처를 주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인간관계에서 서로 상처를 주고 괴롭힐 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굳은 마음으로 은혜를 거절하고 멸망의 길을 고집하며 나아갑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시면 돌같이 굳은 마음을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시면 마음을 바꾸어 주십니다. 굳은 마음을 제하십니다. 새 마음을 주십니다. 그리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십니다. 예배 드리며 눈물이 계속 쏟아지는 것은 굳은 마음이 녹아지는 증거입니다. 유머를 구사해도 웃지 않고 굳은 얼굴로 있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 웃기 시작합니다. 미소 짓다가 소리 내어 웃습니다. 얼굴 표정이 부드러워집니다. 굳은 마음이 녹아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뀌는 과정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새 마음을 주셔서 증오로 가득한 마음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오해를 잘 하며 불친절하고 전투적인 사람이 온유하고 이해심이 넓은 사람으로 바뀝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도 용서하게 되고 사랑하게 됩니다.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뀐 사람은 작은 사건을 통해서도 은혜에 감격하고 늘 감사가 넘치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항상 은혜로운 말로 가득하고 덕스럽게 변합니다. 긍휼히 여기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바뀌어 주위 사람들과 인간관계가 원만하게 됩니다.
불을 받아서 온 몸이 화끈화끈해야 성령님이 오신 줄로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령님이 오신 가장 큰 증거는 굳은 마음이 사라지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한 것입니다. 여러분 안을 들여다 보십시오. 아직도 돌같이 굳어진 마음을 안고 살면 성령님이 여러분 안에 계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부드럽게 변하고 있으면 성령님이 지금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고집과 악한 생각, 교만과 자아로 충만한 여러분의 마음을 만지셔서 온유하고 사랑과 은혜와 감동으로 충만한 부드러운 마음으로 만드시도록 마음을 성령님께 내어드리시기 바랍니다.
2. 새 영이 우리 안에 오시면 기쁨으로 순종하는 백성을 만드십니다(20).
20절 말씀입니다.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그러면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무슨 차이입니까?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비슷한 말 같은데 주어가 다릅니다. 우리 생각에는 우리가 주어가 되어야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새 언약은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20절은 19절과 한 문장입니다. 19절에 '내가' 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내가는 누가 하신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성령님을 넣어 주셔서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고 하나님 말씀대로 행할 수 있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왜 이런 약속을 하십니까? 우리 힘으로, 우리 의지로는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행할 수 없음을 아시기에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우리 안에 보내 주셔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싶은 소원도 품게 하시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능력도 주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것도 내가 하고 싶어서 하면 쉽고 즐겁습니다. 그러나 힘이 별로 들지 않는 것도 내가 하기 싫으면 고역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남자들이 한참 축구를 열심히 할 때 주일 오후 예배까지 마치고 '축구 하러 올림픽 공원으로 모이자.' 하면 축구를 좋아하는 형제님들이 모두 나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니 해가 질 때까지 힘든 줄 모르고 몇 게임을 뛰는 것입니다. '추우니까 오늘은 쉬자.' 또는 '더우니까 쉬자.'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내 안에 소원이 있으면 아무리 어려워도 어려운 줄 모르고 해 냅니다. 그러나 원하는 마음이 없으면 아무리 쉬운 것도 온갖 핑계를 대고 안 합니다. 저는 아내가 쇼핑을 같이 가자고 하면 핑계를 대고 따라가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힘들고 어려워서가 아니라 내게는 재미가 없습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싶은 소원도 주시고 행할 능력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쁨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게 도와 주십니다. 내가 하는 것 같지만 실제는 성령님이 소원을 주시고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께 기쁨으로 순종하는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달게 느껴집니까? 말씀을 들을 때에 은혜가 깨달아지고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집니까?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말씀대로 순종하고 싶어집니까?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즐겁고 행복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성령님이 함께 계신 것입니다. 성령님이 여러분 안에서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고 역사하시는 명확한 증거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하나님이 되셔서 여러분을 책임지십니다.
여러분, 혹시 아직도 옛 언약을 따라 살고 있지 않습니까? 새 언약을 붙잡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며 살고 있습니까? 다시 옛 언약으로 돌아가지 마십시오. 새 언약을 붙잡고 성령님께 붙잡혀 은혜 안에서 살기 바랍니다. 날마다 성령 충만하여 성령님께서 주시는 부드러운 마음을 품고 사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 온전히 붙잡혀 기쁨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기 바랍니다. 의무감에 억지로 끌려가는 신앙이 아니라 성령님을 체험하며 하나님과 더 깊은 사랑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며 즐겁게 살아가는 새 언약 백성이 되시기 바랍니다
새 영을 주소서
겔 11:14-21 / 유관지 목사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한 다음,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에스겔도 끌려갔습니다. 에스겔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그발 강 가에서 환상을 보고 그것을 적은 것이 바로 에스겔서입니다.
그 때 일부 백성은 예루살렘에 남아있었습니다.
남아있던 백성들이 바벨론에 끌려가 있는 사람들을 향해 좋지 않은 소리를 했습니다.
15절 뒷부분에 그들이 한 좋지 않은 소리가 기록되어 있는데 “너희는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라 이 땅은 우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신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이제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 예루살렘 이 땅은 이제 우리 것이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참 고약한 소리입니다. ‘여러분, 먼 외국 땅에서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고 있습니까? 속히 고향 땅으로 돌아오게 되기 바랍니다.’ 해야 할 텐데 그 반대의 소리를 했습니다.
열왕기하 24장을 보면 바벨론 왕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쓸 만한 사람들은 잡아가고 비천한 사람들을 예루살렘에 남겼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이제는 우리 세상이다.’ 하는 마음으로 그런 소리를 한 것 같습니다.
오늘 설교의 흐름에서는 잠깐 벗어나는데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중국동포들이나 구소련지역의 동포들에 대해서 우리가 마찬가지의 태도를 갖고 있는 것을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분들은 일제 때 일본에 의해서 이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후손들입니다.
또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 그곳으로 간 사람들의 후손들입니다.
그 때 나라의 힘이 약해서 그렇게 된 것이지 그들이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지금 그들이 좀 못 산다고 해서 한국이 그들을 너무 무시하고 있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바벨론에 끌려가 있는 사람들이 이 소리를 전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큰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끌려가 있는 사람들을 격려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모으고 이스라엘 땅을 그들에게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17절)
16절 뒷부분을 보세요.
하나님은 “그들이 도달한 나라들에서 내가 잠깐 그들의 성소가 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만 계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에도 계십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면 그곳이 거룩한 곳이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성소를 만드는 것이지 성소가 하나님의 임재를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고약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당을 성소 가운데 성소로 삼으면서, 동시에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이 계신 곳, 거룩한 곳, 성소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일터가 또한 그렇게 되도록 해야 합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을 모시고 있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도록 해서 그 곳이 성소가 되어야 합니다.
19절을 보세요. 하나님은 또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마음, 일치된 마음과 새 영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19절에 있는 “그 속에 새 영을 주고” 이 말씀을 중심으로 은혜와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이 새 영이라는 말이 예전 성경, 「개역성경」에는 “새 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의 원어는 “루하으 하다샤”인데 “새로운 정신”이라는 뜻입니다.
에스겔은 여러 곳에 이 “새 영”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서 18:31에는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라고 말하고 있고 에스겔서 36:26-28까지에서는 오늘 본문과 거의 비슷한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에스겔은 새 영을 강조한 예언자입니다.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새 영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새 영을 받아야합니다.
우리 민족이 새 영을 받아야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에게 새 영을 주시겠다고 하신 주여, 우리에게도 새 영, 새로운 정신을 주옵소서.’ 기도하시어서 새 영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새 영을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첫째, 새 영을 받으면 의욕이 넘칩니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유다인들, 의욕을 갖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아무런 소망이 없다. 이 강대한 바벨론 제국에서 우리가 어떻게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여기에서 포로로 지내다가 끝나는 것이다. 그리고 듣자니 예루살렘 성은 잿더미가 되었다고 하더라. 여기에서 이대로 이 사람들이 섬기는 말둑 신을 섬기며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그렇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들이 새로운 의욕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여기시고 새 영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의욕을 잃어버리는 것은 비극적인 일, 위험한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질병 가운데 근육이 점점 힘을 잃고 굳어져 버리는 근무력증이라는 병이 있습니다.
이 병에 걸리면 몸을 차차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무서운 질병입니다.
그런데 근무력증보다 더 무서운 것이 의욕무력증입니다. 보통 의욕상실증이라고 합니다.
이 의욕상실증에 걸리면 슬럼프에 빠지고 탈진상태가 됩니다.
니체라는 철학자는 이것을 ‘대피로’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엘리야에게 이 의욕상실증이 찾아왔습니다.
엘리야는 로뎀 나무 밑에 앉아서 지금 내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하는 비참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 의욕상실증은 주변에 빠르게 전염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의욕을 잃고 디베랴 호수에 모였습니다.
디베라 호수는 많은 제자들이 제자로 부름 받기 이전에 어부로 일하던 곳입니다.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하였습니다. 나는 이제 사람 낚는 어부의 사명을 포기했다. 먹고 살기 위해 예전에 하던 일로 돌아가겠다.‘ 는 이야기입니다.
그 자리에 도마, 나다나엘, 요한, 야고보, 또 다른 제자 둘이 있었는데 요한복음 21장 3절을 보면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자, 모두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했습니다.
베드로의 의욕상실증이 순식간에 이들에게 전염되어서 집단의욕상실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의욕상실증이 전염되는 것은 조류독감 전염보다 더 빠르고 무섭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의사들이 제일 치료하기 힘든 환자는 낫겠다는 의욕, 또는 살겠다는 의욕을 포기한 환자들입니다.
살겠다는 의욕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환자는 별다른 치료를 하지 않아도 빠른 속도로 건강을 회복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지금 의욕을 잃은 가운데 있습니까? 슬럼프에 빠져 있습니까?
‘하나님, 내게 새 영을 주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새 영, 새 정신을 주어 의욕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전보다 더욱 넘치는 의욕을 가지고 일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흔히 나이가 많아지면 의욕을 잃어버린다고 합니다.
그저 현상유지에 힘쓴다고 합니다. 안전제일주의로 나간다고 합니다.
정년퇴직한 분들이 좀처럼 새 일을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이 안전제일주의가 잘못되면 무사안일주의가 되기 쉽습니다.
이번 분들에게 큰 교훈을 주는 이야기가 둘, 최근에 매스컴을 통해 보도되었습니다.
■ 하나는 최의원이라는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은 구약학자인데 올해 여든한 살입니다.
이 분이 일흔세 살이 되던 해에 ‘구약성경을 순수한 우리말로 번역해야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최의원 목사님은 우선 키가 높은 책상부터 마련했다고 합니다.
‘이 작업을 끝내려면 앞으로 10년쯤 걸릴 텐데 앉아서 이 작업을 하면 근육무력증이 찾아오기 쉽다. 서서 해야 하겠다.’ 이런 이유에서였다고 합니다.
최 목사님은 8년 만에 이 작업을 끝냈습니다. 하나님은 의욕을 갖고 도전하는 사람에게 힘을 주셔서 그가 계획하는 일이 예정했던 것보다 빨리 끝나게 하십니다.
최의원 목사님은 구약성경을 히브리 원어에서 직접 번역하면서 외래어를 쓰지 않고 한문 투의 단어까지도 일절 사용하지 않는 원칙을 지켰다고 합니다.
예전 성경의 창세기 3장에 “화염겸”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불꽃이 튀기는 칼’이라고 했고 버터는 ‘쇠젖기름,’ 치즈는 ‘쇠젖묵’이라는 새 말을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최 목사님은 이렇게 번역한 성경의 제목을 「새 즈믄 우리말 구약정경」이라고 했는데 잘 아시는 대로 ‘즈믄’은 ‘천’의 우리말입니다.
오늘은 한글날인데 세종대왕이 지하에서 매우 기뻐하실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70대 중반에 성경 번역에 도전하는 것, 얼마나 놀라운 의욕입니까?
하나님께서 새 영을 주시면, 새 정신을 주시면 성도 여러분도 그런 의욕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뤄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나에게도 새 영을 주셔서 그런 의욕, 그보다 더 큰 의욕을 가지고 새로운 도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 또 하나의 이야기는 그보다 나이가 더 많은 분에 대한 것입니다.
안동에 최의숙(崔義淑)이라는 할머니가 계십니다.
올해 나이 아흔 살, 안동교회 원로목사님의 사모님입니다.
최의숙 사모님은 지난 25년 동안 한국, 영어, 일어로 네 번씩 필사했다고 합니다.
세 나라 말로 필사했으니까 성경을 열두 번 필사한 것입니다.
세계적인 기록일 것이라고 합니다.
이 분은 그동안 필사한 성경들을 아들 셋과 교회 도서관에 기증했다고 합니다.
최의숙 사모님은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올해 아흔입니다.
그런데 출가한 두 딸에게 줄 성경필사본을 완성하기 위해 지금도 열심히 하루 열 시간씩 성경을 정성껏 옮겨 쓰고 있다고 합니다. 대단한 의욕이지요.
성경을 필사하는 동안에 고혈압도 없어졌고 눈도 밝아져서 돋보기를 안 쓰고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의욕이 있으면 하나님이 건강도 지켜 주십니다.
여기 연세 많은 분들, 새 영을 달라고 간구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새 영을 받아 새로운 의욕, 큰 의욕을 갖고 사시기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새 영을 주셔서 넘치는 의욕을 갖고 가운데 활기 있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새 영을 받으면 큰 힘을 받아,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사기에는 여러 명의 사사들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사사라고 하면 타고난 영웅, 타고난 장사,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아닙니다. 잘 살펴보면 사사 가운데는 약점을 가진 사람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에훗은 왼손잡이였습니다. 당시 왼손잡이는 장애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드보라는 여자였습니다. 구약시대에 여자는 싸움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기드온은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사기에는 기드온의 소심한 행동이 여럿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드온은 또 아내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칠십 명이나 되었습니다.
정식 아내들 말고도 첩이 있었습니다.
여자를 좋아했고 무절제한 사람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입다는 기생의 아들로서 가출한 사람입니다.
잡류들과 어울렸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조폭이었습니다.
이런 사사들이 어떻게 그런 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새 영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첫 사사는 옷니엘입니다.
옷니엘을 비롯해서 삼갈, 입산, 압돈 이런 사사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에 이들을 소사사라고 부릅니다.
첫 사사 옷니엘에 대한 이야기는 여호와의 영이 옷니엘에게 임한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사사기 3장 10절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에게 넘겨 주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라사다임을 이기니라
여호와의 영은 기드온에게도 임합니다.
사사기 6장 34절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
사사기 11장 29절은 입다에게도 여호와의 영이 임했다고 말합니다.
삼손의 이야기에는 여호와의 영이 임했다는 이야기가 유난히 여러 번 나옵니다.
사사기 13장 25절,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
사사기 14장 6절, 삼손이 딤나라는 곳에서 젊은 사자와 맞닥뜨렸을 때의 일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 그가 손에 아무것도 없이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는 것 같이 찢었으나 그는 자기가 행한 일을 부모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더라
여호와의 영이 임했기 때문에 삼손은 아스글론 사람 삼십 명을 죽일 수 있었고,(삿 14: 19)
자기를 결박한 새 밧줄 둘을 불탄 삼과 같이 끊을 수 있었습니다.(삿15: 14)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서 떠났을 때 그는 무기력하게 블레셋 사람들에게 붙잡힙니다.
사도행전은 성령 이야기가 많이 나오기 때문에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부릅니다.
사사기 역시 하나님의 영이 임해서 일한 기록이기 때문에 마찬가지의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인류의 역사에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선포한 예언은 시대와 나라와 개인이 가야할 길을 가리키는 나침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GPS나 네비게이션은 자꾸 새 것이 나옵니다만 예언서는 2,000여 년 전의 것인데도 성능이 변하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예언자들 가운데는 그 출신이 아주 낮고 성격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여러분, 예레미야의 별명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그렇습니다. ‘눈물의 예언자’였습니다. 좋게 말해서 눈물의 예언자인데 알기 쉽게 두 글자로 말하면 무엇입니까?
울보입니다.
에스겔, 다니엘, 포로들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호세아, 가정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모스 양을 치며 뽕나무를 기르던 사람이었습니다.
요나, 다시스로 도망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판단력이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니느웨가 구원 받는 것을 보고 싫어했습니다. 편협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미가, 가난한 농부였습니다.
이런 사람들 입에서 어떻게 그렇게 날카로운 예언이 나올 수 있었을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새 영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영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영감 없는 예언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내게도 새 영을 주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을 받아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에 새 영을 주소서. 그래서 큰 일을 하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기도입니다.
‘하나님, 이 민족에 새 영을 주소서. 그래서 세계를 위해서 큰 일을 하는 민족, 세계를 복음화시키는 민족이 되게 하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새 영을 받으면 생활이 새로워집니다.
새 영에서 새 생활이 나옵니다.
새 영이 없는 새 생활은 껍데기 새 생활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외식(外飾)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사람들을 심하게 꾸짖었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 있는 이야기는 새 영을 받은 사람으로서 에스겔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지금 바벨론에 있는데 주의 영이 그를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스물다섯 명이 동문에 모여 있습니다.
이들은 백성의 고관들인데 불의를 품고 악한 꾀를 꾸미는 사람들입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그들에게 심판을 예언합니다.
예언을 할 때 그 가운데 하나, 블라댜라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에스겔이 보통 사람이었다면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은 참 무섭군요. 어떻게 말씀하시자마자 그대로 됩니까? 그리고 하나님, 참, 잘 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죽어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백성의 고관인데 어떻게 이렇게 불의를 품고 악한 꾀를 꾸밀 수 있습니까? 하나님, 나머지 스물네 사람도 이 블라댜 같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했을 것입니다.
에스겔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13절 뒷부분을 보세요. 에스겔은 엎드려 큰 소리로 “오호라 주 여호와여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다 멸절하고자 하시나이까” 부르짖었습니다.
‘저들을 살려주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미워해야 할 사람들을 위해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합니다.’ 하면 ‘잘 알고 있지만 그렇게 살기가 참 힘이 듭니다.’ 라고 대답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성경을 아는 분들은 성경 말씀을 인용해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라고 대답합니다.
새 영을 받으면 말씀대로 사는 것이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이 더 힘이 듭니다.
20절 앞부분을 보세요.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싶어 합니다.
20절 중간 부분을 보세요.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새 영을 받은 사람들을 그의 백성으로 삼습니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은 새 영을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되십니다.
새 영을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은 멀리 있는 존재입니다.
‘너무나 먼 당신’입니다.
나와는 깊은 관계가 없는 존재입니다.
무섭고 두려운 존재입니다.
관념적인 존재입니다.
어렵고 힘이 들 때만 잠깐 찾고 잊어버리는 존재입니다.
새 영을 받은 사람에게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십니다.
목자가 되십니다.
상담자가 되십니다.
잠시 잠깐의 하나님이 아니라, 스물네 시간의 하나님, 365일의 하나님, 내 평생 함께 하는 하나님이 되십니다.
에스겔서 37장은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환상입니다.
이 환상의 이야기는 37장 1절,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라는 말로, 하나님이 영으로 역사하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지 않았다면 에스겔은 골짜기에 가득한 뼈를 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으면 우리는 뼈가 가득한 골짜기 한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아무런 느낌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을 받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 영을 받으면 우리는 전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됩니다.
에스겔이 대언하니까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고 뼈들이 서로 연결되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이고 생기가 들어가고 극히 큰 군대가 됩니다.
이 환상은 에스겔서 37장 14절의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이 납니다.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성경의 여러 환상들 가운데에서 가장 유명한 환상으로 알려진 이 이야기는 하나님이 영으로 에스겔을 골짜기로 데려가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영을 우리 가운데 두겠다는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영으로 시작해서 영으로 끝납니다.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새 영을 주셔야만 진정으로 살아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말씀은 포로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을 약속하는 말씀인데 회복에는 영적 회복이 선행되어야합니다.
새 영을 받는 회복이 진정한 회복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런 회복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새 영, 새 심령을 주시고 새 언약을 마음 판에 새기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백성에게 순종할 수 있는 동기를 주셔서 회개와 믿음으로 하나님께 응답하며 변화된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가 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며 신실하게 하나님을 따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들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 우리에게도 새 영을 주소서!‘ 하는 기도, 중요한 기도제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새 영에서 여러 가지가 새롭게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새 성전을 주셨는데 우리가 이 새 성전에 합당한 새 영 받은 성도들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성전을 중심으로 새 영의 역사가 크게 일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시편 51편 10절에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간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기도를 드려야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도 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찬양을 할 때도 영으로 찬양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15절에서 그런즉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면서 마칩니다.
‘유다 백성에게 새 영을 주시겠다고 하신 주님, 나에게도, 우리 교회에게도, 우리 민족에게도 새 영을 주소서!’ 힘써 기도하여 새 영을 받아 새로운 의욕을 갖는 성도들, 큰 힘을 받아 큰 일을 하는 성도들, 그리고 우리 교회가 되고, 또 새로운 생활을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
겔 11:19-20 / 박기완 목사
사람은 한 사람이지만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 마음은 가지각색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러운 사람이 있고, 마음이 온유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강퍅한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이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마음이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 있습니다.
경상도의 어떤 아저씨는 하루에 딱 두 마디만 한다고 그럽니다. "밥도!" "고마 자자!" 두 마디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칭찬하시기를 "지상에서 모세보다 온유한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민12:3).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마음이 온유한 자가 복이 있으며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에스겔 선지자는 성도가 어떤 마음을 가져야 되는가에 대해서 즉,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을 소유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마음을 주시길 원하시는가?...
19절에 보면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라고 했습니다.
1. 일치한 마음
그러므로 첫째, 하나님은 택한 자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일치한 마음은 바로 한 마음을 말합니다. 여러 마음이 아니라 하나로 똘똘 뭉쳐진 마음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 믿음의 권속들은 그 마음이 하나가 되고 일치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사실... 마음이 하나가 되고 일치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죠...
한 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깎아서 타인을 맞추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출가한 색시는 그동안 친정에서 살아오면서 몸에 베이고 습관이 된 것들을 접어두고 그 시댁에 맞춥니다.
생활을 맞추고 풍습을 맞춥니다. 친정의 음식 맛이나 예절이나 관습도 뒤로하고 시댁의 음식이나 법도에 맞추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마음이 된다는 것은 이처럼 자기 희생을 통하여 타인에게 맞출 때 비로소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하나님은 그의 종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가 되어야 하나남이 함께 하시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옛 속담에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각자의 의견이 분분하고 주장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가 되고 일치한 마음이 이루어질 때 기적의 역사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연합을 통하여 기적이 일어난 사건을 우리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7:3절 이하에도 보면, 사마리아에 아람나라 군사가 쳐들어와서 성을 완전히 포위했습니다.
오랜 기간이 지나자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제 꼼짝없이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식량이 모두 바닥이 나고 급기야는 자기 자식들을 삶아 먹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성문 어귀에 네 명의 문둥이가 있었습니다. 성안에 사람들이 굶어 죽는 판에... 소외되고 버림받은 문둥이들에게 돌아올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생각하기를 "우리가 성안에 들어갈지라도 성은 주림으로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그렇다고 앉아 있자니 역시 굶어 죽을 것이니... 차라리 아람진영에 가서 항복하자!" 하고 마음을 하나로 모았습니다.
만약 살려주면 다행이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심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소외된 문둥이들이 발에 발을 맞추고 손에 손을 맞추어 아람 진영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네 명의 문둥이들이 아람 진영에 가 보니 아람의 군사들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온 무기며 식량이며 은 금 보화들은 다 그대로 있는데 사람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로 네 명의 문둥이들이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저들의 눈을 멀게 하였고, 병거 소리와 말 발굽소리 큰 군대소리로 들리게 하여서 그들은 연합군이 쳐들어오는 줄 알고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간 것입니다.
네 명의 문둥이들이 마음이 하나가 되어서... 손에 손을 맞잡고 발에 발을 맞추어 나아갔더니 하나님이 그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살리는 기적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 소외된 자, 과부와 고아를 불쌍히 여기시는 자비가 많으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들이 손을 맞잡고 얼마나 하나님께 기도했겠습니까?... "하나님, 이 문둥이들을 불쌍히 여겨 주세요... 여기 있어도 죽고 저기를 가도 희망이 없으니...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켜 주시기 원합니다.." 그러면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저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긍휼히 여기셨으며..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신 줄 믿습니다.
전도서 4:12절에도 보면,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했습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지만 두 사람, 세 사람이면 능히 이길 수 있다" 그랬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삼겹줄은 너와 내가 하나가 되었을 때를 말하는 삼겹줄 입니다.
가정에서도 모든 식구들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담임목사부터 시작하여 모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하나가 되어 튼튼한 삼겹줄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연합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깎아 타인에게 맞추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맞추기를 기다리지 마세요... 내가 먼저 타인에게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가 되는 첫째 비결은 먼저 타인의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일을 먼저 도와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이익을 생각지 말고 그 사람의 이익을 먼저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내 의견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의견도 존중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입니다.
그러므로 아놀드 토인비는 그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민주주의는 성경의 한 조각이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살다보면 본래 하나가 될 수 없고 타협이 되지 않는 상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고양이와 개는 본래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고양이는 화가 나면 꼬리가 올라가지만 개는 겁이 나면 꼬리가 들어가고 좋으면 꼬리가 올라갑니다.
그래서 개가 좋아서 꼬리를 올리면 고양이는 화가 난 줄 알고 공격하는 줄로 알아서... 서로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고양이가 화가 나서 꼬리를 올리면 개는 좋아서 그러는 줄로 알고 다가서지만 역시 큰 코를 다치게 됩니다.
본질상 하나가 될 수 없고 화합할 수 없는 그런 대상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한 가족입니다. 주안에서 한 가족이 된 성도는 서로가 서로를 맞추고 하나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경험이 많은가?... 그 경력을 보시지 않습니다. 얼마나 일을 잘 하는가?... 그 능숙함을 보시지 않으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시는 것이 있다면 일치된 마음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5:23∼24절의 말씀을 보면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네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그랬습니다.
성경 말씀에 "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다" 는 말씀은 바로 하나가 된 마음을 기뻐하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주의 일을 열심히 감당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마음껏 헌신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가 된 가정은 사랑이 넘칩니다. 평안이 있습니다. 힘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가 된 교회는 능력이 있습니다.
회장과 임원들이 하나가 되고, 임원과 회원이 하나가 되고, 각 기관들이 하나가 되고, 교회 전체가 하나가 될 때... 능력을 발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을 하고 힘쓰고 애를 쓴다고 해도... 분열이 있고 미움과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서는 주님이 역사 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일치한 마음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으므로 못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믿음의 권속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 일치한 마음을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새 영(성령)
둘째로, 주님은 새 영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19절에 보면,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새 신은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신 성령님은 우리의 심령에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이 내 안에 오셔서 나를 주관하시고 나를 인도하시고 역사하시는 성령의 충만함을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120명의 사람들은 주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전혀 기도에만 힘쓰고 있었습니다. 글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의 약속은 그 말씀을 믿고 기도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법입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역사하시길 원하십니다.
그 속에 새 신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기 전의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연약한 사람이었지만 성령을 받은 후의 베드로는 주의 말씀을 전하되 담대히 전하였고 그 말씀을 듣던 무리들은 삼천 명씩이나 회심하고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행2:41).
그러므로 성도가 능력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우리의 삶에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성령의 충만함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 간구하여 충만함을 입어야 합니다. 성령충만은 약속된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통해서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성령충만을 통해서 진정한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1:13절에 보면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말씀하시므로... 구하기만 하면 성령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주님께서 구하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주께서 주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못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받지 못하는 이유는 구하지 않기 때문에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성령을 받기 전에 선행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소멸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38절에 보면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말씀하였습니다.
이사야 6:5∼7절 말씀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 왕이 죽어 나라가 위태함을 보고 낙심하여 성전에 들어가 울부짖으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때 이사야는 환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여섯 날개를 가진 스랍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면서 찬양을 하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스랍들의 입술에 비해 이사야는 자신의 입술은 더럽고 추한... 사망에 해당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니 더럽고 추한 죄나 낱낱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마치 빛과 어두움이 함께 존재할 수 없듯이 거룩하신 주 앞에 서게 되니 어두움의 죄는 소멸되는 처참한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외치기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만군의 여호와를 뵈었으니 어찌할꼬..." 그러면서 탄식하였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때 스랍 중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핀 숯불을 가지고 와서 입에 대며 말하기를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 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 그랬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지저분한 마음, 혈기가 가득한 마음, 정욕과 증오심으로 가득찬 것을 태우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미움이 변하여 사랑의 넘치고 다툼과 분열이 있는 곳에 화합과 일치가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령 마태복음 11:12절 이하에서 제자들을 둘씩 둘씩 짝을 지어 전도하러 내보내시면서 "집집마다 복을 빌어주라!"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만나면 하는 인사가 "샬롬!" 하고 인사합니다. "당신과 당신의 가정에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시기를 빕니다" 그런 뜻이죠...
우리나라 사람들은 만나면 하는 인사가 밥 먹었느냐는 인사입니다. 아침에 만나면 "아침 드셨어요?" 점심에 만나면 "점심 드셨어요?" 저녁에 만나면 "저녁 드셨어요?" 그러면서 인사합니다.
옛날에 굶는 사람이 많았던 시절에 하던 인사가 지금까지 내려왔습니다. 우리의 인사도 좀 달라져야 합니다. "샬롬!" "할렐루야!" 그러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복을 빌어 주는 인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믿음의 권속들은 더럽고 추한 죄악의 옷을 벗어버리고 성령으로 지음 받은 새 영을 소유하셔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능력있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부드러운 마음
셋째로,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은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그랬습니다.
본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심령이 부드럽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는 육신의 굳은 마음을 제하여 버려야 합니다.
겨울을 지나 딱딱한 길바닥처럼 굳은 땅에 농사를 짓기 위하여 농부는 그 밭을 갈아야 합니다.
굳은 땅을 갈아엎어서 고랑을 내고 돌맹이는 골라서 밖으로 던져 내고... 굳은 땅, 뭉쳐진 흙은 잘게 잘게 부수어서 부드럽게 갈아냅니다. 거름도 주고 비료도 주고 골고루 갈아서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의 심령도 굳은 것을 제하고 부드럽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병 가운데 가장 큰 병이 있다면 그것은 굳어지는 병입니다. 간 경화증은 굳어지는 병입니다. 굳어지는 병은 큰 병입니다.
인상이 굳어지고 대화가 굳어지고 마음이 굳어진 것들을 다 제하고..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미움으로 굳어진 인상, 찬송치 않아 굳어진 혀, 부정적인 죄악으로 굳어진 입술, 봉사하고 헌신치 않아서 굳어진 손, 전도하지 않아 굳어진 발을 부드럽게 갈아엎어야 합니다.
오늘 여기 계신 모든 권속들은 굳은 것들을 부드럽게 갈아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옥토가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의 일을 하는 자는 인상이 부드럽고 대화가 부드럽고 마음이 부드러워야 합니다.
토라져서 웅크리고 있는 마음, 서로 등을 지고 대화가 단절된 마음, 마음의 문이 닫혀지고 굳은 마음이 되면 안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주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마음은... 우리의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주님이 주시기 때문에 못 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계시록 3:7절에 보면 "주께서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다" 그랬습니다.
능력의 주님, 권능의 주님이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면 막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다고 말씀하시는데 못 받는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이 주시는 마음을 받아... 능력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시고, 새 영... 성령이 충만한 마음을 주시고, 굳은 것은 제하여 버리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까?...
오늘 본문 20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하는 까닭은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여서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라" 그랬습니다.
바로,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나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시고, 새 신으로 채움을 받은 마음,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주님이 주시는 마음들을 소유하여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며...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는 믿음의 권속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