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다를 생각하면,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가 생각나고, 아야세 하루까가 떠올려진다.
나를 몹시도 챙겨주었던 그녀, 구보다.
학교에서 어리둥절해 있던 나를 지극히 보살피면서 잘 가르쳐 주었던 그녀다.
동경대는 연구생 제도가 있었고, 처음 일 년간은 일본인 학생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 일본인 학생 그녀가 구보다이다.
동경에서 한 시간 거리의 가마쿠라가 그녀의 고향이다. 아름다운 바닷마을 가마쿠라는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촬영지가 되었다.
그리고 아야세 하루까를 몹시 닮았던 그녀, 영화의 감독 히로카즈를 좋아했던 것도 나와 같다.
아야세 하루까는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 장녀로 나온다.
히로카즈의 다큐멘터리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동경대 부근의 니시스가모에서 벌어진 이야기다.
나는 스가모 시장에 가기 위해 아이들이 살았던 아파트를 지나곤 했다.
공교롭게도 얼마 후, 나는 결혼을 해서 아내가 한국에서 왔다.
아내에게 니시스가모의 아이들 이야기를 해주자, 아내는 몹시도 슬퍼했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를 방치했던 철 없는 엄마들은 1988년 일본에는 많았다.
아이를 차 안에 가두어 놓고 빠찡꼬를 하다가 아이가 차 안에서 울다가 여름 태양 아래서 죽는 사건은 흔하던 일이었다.
고도의 경제 성장은 시골 출신의 나와 아내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아내가 한국에서 오자, 구보다는 꽃을 들고 방문했었다.
“안따, 시아와세.....”
(당신, 행복......)
그녀의 말투는 아내 앞에서 정중했다.
평소 그녀가 쓰는 말은 절대로 나를 ‘아나따(안따)로 부르지 않았다.
남자 말투인 ’오마에‘가 전부였다.
’아나따‘는 여자가 남자를 높혀 부르는 말이고, ’오마에‘는 아랫사람을 부르는 말이다.
선 머슴 같았던 구보다는 한국을 무척 좋아했었다. 한국의 사물놀이에 대해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
동경대 박사 과정이었던 그녀는, 학업과 알바를 병행했고, 그 사이 사이에 어리숙한 한국 유학생이었던 나를 도와 주었다.
아내가 한국에서 온다는 말을 듣고, 그녀와 가마꾸라를 방문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한국 사람과 비슷했다.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바닷가 식당에서 밥을 먹었는데, 그곳이 나중에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 주로 나오는 촬영지가 되었다.
아내가 오고 일 년후, 그녀는 홋가이도 대학의 조교수로 갔고, 전화가 왔다.
“장상, 잇쇼겐메이 뱅쿄시로요”
(열심히 공부해요)
그것이 그녀와 마지막이었다.